Trotsky and our Joseon Royals RAW novel - chapter 278
“전하, 손님들이 기다리십니다.”
그는 집 안에 찾아온 손님들을 영접하러 떠났다.
그들을 만나기 전에 조상들을 찾아뵙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가져온 제안의 무게가 양어깨를 짓눌렀다.
아니나 다를까, 손님들은 그가 방 안에 들어서자 본론으로 들어간다.
“명국의 보위가 비어 있으니 이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소련과 몽골 양국이 이웃의 불행에 힘을 합하여 여기까지 왔으니 두뇌를 잃은 중원의 고통 역시 여기서 끝이 날 것입니다.”
“카간 폐하께서는 뜻을 굳히셨고, 그는 소련의 수뇌부 역시 마찬가지요. 두 대국(大國)의 의지가 한곳으로 향했으니 더는 그 뜻이 바뀌지 않을 것이오.”
몽골에서 파견한 대사와 소련 정보총국 강서성(江西省) 지부 국장이 그가 다스리는 남창(南昌)까지 직접 왕림한 상황.
“작게 보아도 일신의 광명이요, 크게 보면 가문의 복권이고 평천하(平天下)의 대업입니다. 다시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십시오.”
허나 주근균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지불해야 할 대가가 너무 크구려.”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요. 천자의 자리보다 더 값진 것이 대명천지 어디에 더 있다는 말씀이시오?”
“전하의 선조들께서도 바라 마지않던 바가 아닙니까?”
천자의 자리.
황위.
정난의 변 이후 고조부께서 영락제 주체(周棣)에게 배반당하신 지 어언 80여 년이다.
천하를 반씩 나누어 다스리자며 고조부를 꼬드겼던 영락제는 집권 이후 자신을 도운 고조부를 이 낙후한 남창(南昌)으로 추방하였다.
그 이후, 80여 년 동안 4대가 꾸어 온 꿈이 지금 손에 잡힐락 말락 한다.
그러나….
“고조부께서도 달콤한 제안에 응하셨고, 결국 이 땅에 버림받으셨소. 소련과 몽골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리라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지 않소이까?”
주근균은 두 사절이 가져온 서찰을 다시 펼쳐 보며 한 줄 한 줄을 짚어 간다.
“보시오. ‘명국의 황제가 즉위할 때는 항상 대원 황제의 축하를 받아야 한다.’ 이는 실상 책봉의 예요, 형제간의 예가 아니라 군신 간의 예가 아니오?”
“그렇게 보기는 어렵겠습니다.”
이번에 답하는 건 소련 정보총국의 지부장이다.
“단지 형님의 나라가 아우의 나라에 축하를 건넬 뿐인데 그를 거부한다니 명과 예케 몽골 울루스 사이의 우애가 약해질까 저어하게 되는군요.”
“말씨만 공손할 뿐 도적의 협박이나 다름이 없군.”
주근균은 서찰을 탁자 아래로 내친 뒤 눈을 부라린다.
“내 땅에서 나가시오. 나 대신 다른 꼭두각시를 세우든 말든 하시오. 허나 나와 다른 번왕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
“아니.”
이번에 입을 연 것은 몽골의 대사였다.
“가만히 있게 될 것이외다.”
그 말에 주근균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다. 뭐지? 저 말은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의구심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주근균에게 몽골의 대사는 바닥에 떨어진 서찰을 직접 주워 다시 읽어 준다.
그리고 주근균이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부분까지 세밀히 설명을 보탠다. 그 설명이 읊어질 때마다 주근균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졌다가, 다시 푸르게 식어 간다.
몽골 대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잠시 멍하게 있던 주근균은 이내 그 의미를 깨닫고 시선이 흔들린다.
“그, 그건….”
“아시겠습니까? 전하께 선택할 권리는 없습니다.”
협상은 없다. 조건을 받아들여라. 제관을 네게 줄 터이니 대신 족쇄를 채우겠다.
주근균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ㄴ안이나 고민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 그 눈에는 패배감이 어려 있었다.
“…알겠소. 대명이 대원, 대조선과 우애로운 형제로서 함께할 수 있다면 천자로서 그쯤은 감당하겠소. 선조들의 비원을 이루어 드리겠소.”
“훌륭한 판단입니다.”
주근균의 질문에 몽골 대사의 표정이 누그러지고 조선인 지부장은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주근균은 그러거나 말거나 몽골과 소련이 건네온 서찰의 한 구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명국을 ‘합중국(合衆國)’으로 재편하여 각 번국들로 하여금 자유와 자치를 누리게 하여….”
맙소사.
* * *
―“진왕(晉王), 제왕(齊王), 대왕(代王), 노왕(魯王), 초왕(楚王)….”
지난 중원의 분열과 그 이후에 주견심에게 새로 분봉받거나 권리를 확대받은 주요한 왕들의 목록.
그 수를 헤아리던 신숙주가 노안에 눈을 꿈뻑이다 트로츠키에게 말한다.
“지금 명국에는 37명의 주요한 친왕들이 있습니다. 그 외의 왕들은 영지가 없거나 명목상의 지위일 뿐입니다.”
“그렇다 하는군. 어찌 생각하시오?”
신숙주의 보고를 들은 트로츠키가 묻자 아락투무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37명이라면 적당합니다.”
중원을 구성하기에는.
두 사람이 그리는 지도 위로는 ‘대명합중국 개혁안(大明合衆國 改革案)’이라는 여덟 글자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그중 옛 북조의 많은 영역은 북경의 총재 정부의 대의에 동참하였소. 그런 곳들은 총재 정부의 자치권 아래 두면 좋겠지.”
트로츠키가 북경과 그 일대에 큼지막한 영역을 색칠한다. 다른 번왕들의 영지를 꽤나 침범하지만, 그들에게는 다른 땅을 보상으로 안겨 줄 테니 괜찮다.
“어차피 녕왕을 황제로 세운다 하더라도 그 역시 정통성이 부족한 번왕 중의 한 사람일 뿐. 우리가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을 천명하지 않는다면 다른 번왕들이 그를 가만 놔둘 리가 없소.”
소련과 몽골을 설득하려 하거나, 아니면 양국이 개입하기 이전에 주근균을 죽여 버리고 새 황제가 되려 할 게 뻔하다.
“그 사태를 막으려면 황제가 될 녕왕 주근균 역시 각지의 왕들에게 크나큰 양보를 해야 할 터, 게다가 북경의 총재 정부를….”
“인민 위원장 동지, 얼마 전에 급성장한 자본가들이 정부를 전복했습니다. 이제 북경 공화 정부입니다.”
“…그렇군. 아무튼 북경을 포섭하려 해도 주근균은 통 큰 합의를 해야 할 터이니.”
트로츠키는 손뼉을 치며 말을 정리한다.
“우리가 대신 그 양보와 합의를 ‘도와주는’ 것일 뿐이오.”
황제는 남경과 그 일대를 직접 다스리고 연방의 군권과 외교권 등등을 담당한다.
나머지 지역은 별도의 정치 제도하에서 거대한 자치권을 누리며 황제로부터 이런저런 불가침의 영역들을 보장받을 것이다.
‘명국을 남북 전쟁 이전의 미국처럼 만들어 놓겠다.’
이번 개혁안의 모토였다.
중원은 광활하니만큼, 이렇게 각 지역이 독립국 같은 자치권을 누리며 발전하는 것이 훨씬 중국인들에게 이로울 것이다.
암, 암. 절대로 소련이랑 몽골이 주도권을 다툼하기 좋도록 중원을 이리저리 찢어 놓는 게 아니란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트로츠키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먼 미래에, 극동의 인민들은 이걸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 * *
“인민의 황제, 홍치제 폐하 만만세!!!”
“경태제 폐하 만만세!!!”
두 황제의 초상을 든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몇 달 전까지는 누구도 이런 일이 가능하리라 생각지 못했다.
북조의 황제들은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반역이었고, 지난 시절의 기억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불경이라던 3년의 세월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천, 아니 수만의 백성들이 그 지독한 세월이 영영 끝났음을 축하하며 행진을 시작한다.
지방에서 웬 친왕들의 군대가 몰려와 북경의 도성을 무너뜨릴 일은 없다. 광분한 병사들이 북경의 온 사방을 약탈하고 불태울 일도 없으리라.
옛 성화제 주견심이 그러하였듯이 어느 자칭 황제가 북경을 점령하고 ‘역적들’을 색출해 낼 일도 없을 것이다.
경태제 주기옥과 홍치제 주첨선, 북조의 두 황제는 예전과 같이 복권되어 남경으로 이관될 태묘에 당당히 선황으로 모셔질 것이다.
북경의 시민들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과 같이, 앞으로도 계속 일상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생각으로 거리에 나와 이웃들과 웃고 떠들고들 있다.
그러나 몇몇 이들은 여유를 즐길 시간이 아님을 알았다.
그런 이들은 자금성에 모여 들었다.
한때 옥좌와 신하들의 자리가 있던 곳에는 기다란 장의자와 북경 각계각층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이리저리 앉아 있었다.
무능한 총재 정부가 서너 번 정도 엎어진 뒤에 처음으로 장기 집권을 이룩한 이들.
…물론, 장기 집권이라 해야 세 달이지만 혼란스럽던 북경에서는 이 정도도 나름 위업이었다.
“소련의 지원은 확실한 거요?”
누군가 속삭이듯 말하자, 다른 이들 역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오. 얼마 뒤면 조선에서 혹시나 있을지 모를 습격으로부터 비호해 줄 주둔군도 보낸다고 하더군.”
“좋소. 새 황제 폐하와의 협상도 괜찮게 진행될 듯하지 않소?”
새로 제위에 오르게 된 주균근은 북조의 황제들에 대한 복권을 공인했을 뿐 아니라, 북경의 새 정부에게는 주첨선의 정책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폭넓은 자치권을 허용했다.
그 말인즉슨, 다시 상공업자들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뜻이었다.
북경 도성 바깥에는 벌써 공장들이 재건되고 있다. 지금은 기껏해야 헛간을 개조하는 수준이지만, 앞으로 조선에서 이런저런 설비들을 지원받아 주첨선이 바랐던 번영의 일부분이라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이제 곧 실시될 선거를 통해 제대로 된 의회가 세워지면?
단지 이전처럼 ‘자애로운 황제 폐하’의 뜻에 따라 이뤄지는 개혁과 발전을 넘어, 정말로 저 소련인들의 책에서 나왔듯 ‘부르주아지의 영웅적 시대’가 열릴 것이 자명하다!
자금성에 차려진 이 임시 의회의 의원들은 활기차게 토론에 참여한다.
몇몇 소련 유학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헌법’이니, ‘제헌 의회’니, 하는 말들을 미숙하게나마 주워섬기면서도 자신들의 새로운 정부를 꾸린다는 흥분감이 장내에 가득하다.
“이제, 우리들의 시대요!”
누군가의 선언과 함께, 이곳이 황제의 어전이었을 때는 들릴 리 없던 박수와 함성이 이어진다.
그 흥분, 자신감, 앞으로 이어질 희망찬 나날에 대한 확신은 그야말로 장밋빛으로 빛났다.
…장밋빛, 장밋빛이라 하면 언급해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기는 하다.
“동지들, 지난 봉기 이후로 민병대 장악은 순조로이 진행되고 있습니까?”
장밋빛과 같은 붉은 깃발을 휘감은 작은 공간. 이전의 난리 속에서 어느새 잊힌 비밀스러운 지하실들은 이제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
“아시다시피 군중들 대부분이 그저 홧김에 봉기한 것이다 보니 지속적으로 치안 유지 병력을 자청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포섭은 성공적입니다.”
“좋소. 지금 우리 휘하의 병력이 1할 정도라니, 매우 고무적이요!”
박수 소리가 나올 만한 시점이건만, 혹시라도 소리가 새 나갈까 이들은 호흡조차 조용히 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니.
침묵 속에서 미묘한 열기가 자라날 뿐이다.
“이 깃발! 우리의 이 붉은 깃발, 그 의미를 아는 이들은 아직 소수에 불과하나 이제 북경에서 또한 자본가들의 성장과 함께 우리의 세력이 점차 강대해질 것이오!
포섭되는 민병대의 비율이 언젠가 6할을 넘는다면.”
넘는다면. 그 뒤의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다들 알 수 있었다.
혁명이다.
언젠가 자금성에 노농적기(勞農赤旗)가 휘날릴 때까지.
“투쟁!”
“투쟁!!!”
속삭임 속에서 불온함이 자라나니.
이 북경의 신생 공화국에게 예비된 미래란….
그야말로 ‘장밋빛’이리라.
* * *
그렇게 북경에서, 중원 전체에서 다양한 야망들이 들끓어 오르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 모든 야망들에 장작을 땐 원산은 정작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불 꺼진 갑판,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경비원들이 어슬렁거린다. 기름 랜턴의 주황색 빛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멀리서 떨어지는 유성과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그 외의 다른 광원은 거의 없다. 심야에 근방의 정부 청사들은 불이 꺼지고, 저 멀리 도심지의 카페와 술집들이 올빼미 같은 손님들을 위해 흐릿한 조명을 켜 놓을 뿐이다.
그러나 이 늦은 밤에도 경비원들은 졸음에 휩싸일지언정 경계를 늦추지는 않는다.
이곳은 그 자체로 원산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역사이자 심장부인, 켈틱 1호의 상층 갑판이기에.
멀리 검은 물감을 여러 번 덧칠하듯, 밤바다가 파도로 몸을 뒤채는 꼴을 잠시 트로츠키는 내다보다가 담뱃불을 비벼 끈다. 창문을 열자 매캐한 연기가 흩어져 나가고 폐로 들어오는 공기가 맑아지는 게 느껴진다.
켈틱 1호의 휴게실에서 트로츠키는 전날에 두었던 대국을 조금씩 복기하고 있다.
아락투무르는 이미 3주간의 협상을 끝내고 원산을 떠났건만, 트로츠키는 여전히 그와 두었던 대국들을 돌아보며 한 수 한 수를 되짚었다.
…그때의 판단들이 옳았나?
정말로 중국을 연방화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나?
그 덕에 몽골과는 큰 충돌 없이 이번 갈등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지만… 몽골의 영향권 아래에 놓인 번국들과 소련의 영향권 하의 번국들이 말끔히 갈라지며 몽골과 중국을 분할할 수는 있었지만… 어쩌면 더 나은 답이 있었을지도….
그런 고민 속에서 기물들을 종으로 횡으로 이동시키다 보니, 어느새 그것이 재현하는 대국은 아락투무르와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체스판 위에 그려진 것은 트로츠키가 오랫동안 무의식적으로만 기억하던 옛적의 어느 한판 승부였다.
“트로츠키 동지.”
의외의 목소리에 트로츠키는 눈을 크게 뜨고 몸을 일으킨다. 손님은 손짓으로 그를 다시 앉힌 뒤 트로츠키의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트로츠키가 한참 동안 매만지던 체스판 너머로, 익선관을 쓴 남성이 그를 내다보았다.
“폐하.”
“아락투무르가 떠났다기에 한번 방문해 보았소. 원산에 짐이 직접 온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오.”
이홍위는 트로츠키가 이리저리 움직이던 기물들을 쓱 훑어보더니 답했다.
“백이 성급했군. 섣부르게 승리에 도취되어 대국을 망칠 듯하오.”
“그 말이 정확히 옳습니다.”
“그대가 백이었군. 상대는 누구였소?”
“…레닌.”
“오….”
이홍위가 가만히 탄성을 터뜨리자 트로츠키는 빙그레 웃었다.
“제 옷도 제대로 빨아 입지 못하던 양반이, 옷과 구두를 바꿔 가며 입고 신을 줄 모르던 단벌 신사가 열중하던 것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가 혁명이고 다른 하나가 체스였죠.”
“기묘하구려.”
“뭐가 말입니까?”
이홍위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 말한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신기하오.
적백내전의 주역이었던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라는 혁명가는 지금도 내 앞에 살아 숨 쉬고 움직이는데. 마찬가지로 혁명의 지도자였던 레닌은 까마득한 미래에만 존재하는 책 속의 인물이라니….”
이홍위의 말에 잠시 트로츠키의 입꼬리가 떨린다.
기묘하다, 라.
학문이란 것이 다종다양하다고는 하나, 소련에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한 가지 기묘한 학문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미래역사학’.
1452년에 세 척의 증기선이 조선 땅에 닿기 이전의 역사, 1936년에서 시간을 건너뛰어 온 이들의 역사를 탐구한다.
당연히 미래의 일이니 유적이란 게 남아 있을 수도 없고, 사서라고는 미래인 1만 5천 명이 들고 온 이런저런 서적들뿐이다.
결국, 조선인들이 미래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의용병들이 가져온 담뱃갑에 적힌 글씨부터, 속옷의 브랜드명까지 샅샅이 뒤져 가면서 자료를 모아야 했고 지금은 노인이 된 이들의 가물가물한 기억을 인터뷰로 끄집어내야 했다.
1480년에, 1920년대 소련과 독일의 농업 상황을 연구하려면 그런 수밖에 없었다.
트로츠키에게도 몇 번이나 인터뷰 요청이 있었고, 거기에 응할 때면 이런 기분이었다.
내가 두고 온 세계가 영원히 허공 속으로 흩어져 버렸구나.
레닌도, 마르크스도, 엥겔스도, 스탈린 개새끼도 모두 조선인들에게는 혈액 대신 잉크 속에서 숨 쉬는 인간일 뿐이다.
그 감각이 싫었다.
“레닌은…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고집이 세고, 말을 잘 바꾸는 인간이었죠.”
그래서 트로츠키는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 이홍위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도 트로츠키는 말을 이어 갔다.
그 이상한 헤어스타일이나 탈모, 더러운 성질머리(본인이 할 말은 아니지만)와 환상적인 언변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