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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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같은 말을 해 버린 두 사람은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먼저 하세요!”
“먼저 해!”
그리고 또다시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
“아니, 하운 님 먼저 하라니까요!”
“그대가 먼저 해.”
네가 먼저다. 아니다, 네가 먼저다. 다툼 아닌 다툼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결국 리엘라는 이런 일에서는 제가 하운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아마 네아가 여기 있었다면 “새끼, 또 눈치 없이 굴지.”라고 중얼거렸겠지만, 정곡을 찌르는 조언을 해 줄 네아는 이곳에 없었다.
“음… 그러니까… 저기….”
제게 빛나는 꽃을 만들어 낼 능력이 있다는 걸 말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리엘라가 말하지 못하고 계속 망설이자 하운은 잠시 생각하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먼저 열었다.
“혹시 피곤해? 플라워 컷으로 돌아갈까?”
“아니, 그게 아니라….”
하운은 아무래도 리엘라가 피곤한데도 차마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못 꺼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예전 같으면 이렇게 물어보지도 않고 “돌아간다.”라고 말한 다음 성큼성큼 가 버렸을 텐데. 언젠가 네아가 하운에게 그래도 그놈 요즘 사람 되긴 했다고 했던 말이 리엘라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네아에게도 이야기해야 하는데….’
리엘라가 복잡해지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누르자 하운은 더욱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안 되겠어. 당장 플라워 컷에 의사 준비시켜 놓으라고 연락하고….”
“아,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설명을 시작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던 리엘라는 생각나는 대로 툭 내뱉고 말았다.
“제가 맛있는 것 같아요!”
“…뭐?”
당장이라도 리엘라를 안고 다시 밑으로 내려가려던 하운이 그녀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하운의 표정을 본 리엘라는 제가 너무 앞뒤를 잘라 버리고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머리를 굴렸다.
그사이 하운은 정말로 멍한 상태로 서 있었다.
사실 리엘라와 함께 아이디얼 컷을 나올 때부터 미안했다. 네아를 떼어 두기 위함이라고 하나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부탁했으니까. 몇 번이고 네아에게 미안해서 어쩌냐며 자책하는 리엘라를 볼 때마다 제 가슴이 콕콕 찔렸다. 물론 네아에게는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알 게 뭐람.
그런 미안한 마음도 있고, 그동안 벼르고 별렀던 놀겠다는 마음도 있어서 하운은 리엘라와 함께 소르디아를 계속 걸어 다녔다. 그러다 지금 여기 옥상에 올라온 다음 벤치에 앉아 작게 한숨을 내쉬는 리엘라를 보니 저 혼자만 신나서 그녀를 무리하게 끌고 다닌 게 아닌가 싶은 걱정이 덜컥 든 것이다.
계속 걸어 다녔으니 발도 아프고 피곤하겠지. 그럼 업고 돌아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리엘라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가 정말로 상상하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맛있는 거 같다니? 그 말을 들은 순간 하운의 마음속에 바로 떠오른 의문이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아는데?’
맛있다는 것을 알려면 누군가 먹어 봐야 한다.
갑자기 예전에 그가 쓰러져 있을 때, 그의 손을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어 대었던 하르메아가 생각났다. 손이 축축해질 정도로 침을 발라 놓고 맛있겠다며 입맛을 다시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하운의 머릿속에 불쾌한 상상이 지나갔다. 리엘라가 스스로 그녀의 손을 입에 물었을 리는 없다. 분명 타인이 그랬겠지. 그런데 손을 물었을까? 혹시 손이 아니라 리엘라의 다른 신체 부위를 물거나 핥았….
그의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하운은 제 머릿속에서 뭔가 뚝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떤 자식이야?”
“네?”
“어떤 놈이 그딴 개소리를 했어?”
“네에?”
“누가 그대를 핥으려 들었냐고.”
어떻게 다시 설명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던 리엘라는 뜬금없는 하운의 질문에 눈이 커졌다. 지금 이 사람이 뭐라고 하는 거야? 누가 뭘 핥아요?
잠시 후, 리엘라는 그가 어떤 상상을 했는지 깨닫고는 펄쩍 뛰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물었어?”
“아니라니까욧!”
하운의 표정이 점점 더 험악해지는 것을 보고 리엘라는 제 실수를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누군지도 모르는 자를 토막 낼 것 같은 흉흉한 기세의 하운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 제 피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소리예요.”
“뭐? 피? 위해를 가했어?”
하운은 이제 가상의 누군가를 토막 내는 정도가 아니라 태운 다음에 갈아 곱게 가루로 만들 것 같은 기세가 되었다. 리엘라는 다시 급하게 소리쳤다.
“아니, 사람이 아니라 꽃이! 꽃이요!”
***
“…그래서 사실 그 빛나는 꽃은 발견한 게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도 단시간에?”
“네….”
리엘라는 벤치에 앉은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던 하운을 진정시키며 이번에 제가 겪은 일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시든 꽃을 들고 왔던 것, 이네나를 만났을 때 손을 다친 것, 그래서 분수대에 갔다가 갑자기 시들었던 꽃이 빛나는 꽃으로 변했던 것, 플라워 컷으로 돌아와 혼자서 몇 번이고 피를 내어 실험을 해 본 것까지.
리엘라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하운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오랜만에 보는 무서운 얼굴에 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화… 내려나?’
그런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일부러 지금까지 말 안 하고 있었으니까. 리엘라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하운의 말을 기다렸다.
왜 말 안 했냐고 화를 낼까? 당장 저택으로 돌아가자고 하려나?
하운은 벌떡 일어서서 그녀의 앞에 섰다. 그러더니 리엘라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저택인가!’
불꽃놀이고 뭐고 오붓하게 앉아서 보기는 틀렸다고 생각한 리엘라가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하운이 입을 열었다.
“다친 데는?”
“네?”
“실험해 보기 위해서 일부러 상처를 벌렸다고 했잖아. 어느 쪽 손이야?”
“어? 그거 여기….”
네아나 누얀에게 보일 수 없어서 감추고 있던 상처를 리엘라는 슬쩍 내보였다. 하운은 그 상처를 보더니 한숨을 푹 쉬며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더 다친 데는 없어?”
“없긴 한데….”
“다행이네.”
하운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대신 리엘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행동은 조용한데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실망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어쩐지 안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한참 후 하운이 말했다.
“나에게 제일 먼저 말한 거지?”
“네.”
“네아는?”
“네아도 아직 몰라요.”
그러자 하운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그럼 됐어.”
“뭐가요?”
“네아를 이겼으면 다 이긴 거라서.”
“…….”
하운은 네이판타를 쓰러트렸을 때보다 더 큰 만족감을 느꼈다. 최강의 적을 쓰러트린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일까.
리엘라는 웃고 있는 하운을 보고 저도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네아보다 이 사실을 먼저 알았다는 게 저렇게 기분 좋은 일인가 싶어 신기했다. 하운을 바라보던 리엘라는 그 역시 저에게 뭔가 할 말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전 말했으니 이번에는 하운 님 차례예요. 하려던 말이 뭐예요?”
“아….”
리엘라가 묻자 하운이 갑자기 어쩔 줄 몰라 했다. 일어났다 다시 앉았다가, 리엘라의 손을 잡았다가 놨다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러다 하운은 결심한 듯이 리엘라의 앞에 섰다.
평소와 다른, 잔뜩 긴장한 그의 모습에 리엘라는 한 손에 들고 있던 뽑기 원석을 꼭 쥐었다. 하운의 태도에 덩달아 자신이 긴장되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것인지.
“저기, 음… 카르디아에 돌아가면…. 그러니까… 공작저를 나가려고 해.”
“네? 왜요!”
하운의 말에 리엘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이제 호슨 공작이 남겼던 보석의 방도 다 열었고….”
“그거 핑계였잖아요! 저랑 함께 있고 싶어서 계속 공작저에 머물렀으면서!”
“그, 그렇긴 하지만…!”
“그럼 뭐예요? 이제는 나가고 싶은 거예요? 저와 같이 있는 게 싫어요?”
리엘라가 울상이 되어 물어보자 하운은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자, 잠깐만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 줘!”
그의 말에 리엘라는 입을 다물었다. 하운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여기서 조금이라도 말실수하면 그땐 정말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크게 숨을 마신 다음 제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계속 생각했던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파르멜 영지에 있던 내 저택 기억나? 폭우의 하우윈이 폭주하는 바람에 우리가 비를 피했던 곳.”
“…….”
리엘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디아로 돌아가면 그곳을 다시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정리하려고 해. 저택 안은 물론이고 정원도… 그래서 괜찮으면 그곳의 정원을 당신이 맡아 줄 수 있을까?”
“…….”
기쁜 제안이었다. 예전에 하운의 저택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제가 먼저 신나서 예상도까지 그려 가면서 이렇게 가꾸면 좋겠다고 상상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리엘라는 지금 하운의 제안에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카르디아로 돌아가면 공작저를 나가겠다니.
리엘라는 가끔 하운이 궁으로 들어갔을 때의 일들이 생각났다. 네아는 밥벌레가 사라졌다며 속 시원하단 얼굴을 했지만 리엘라는 하루 종일 허전한 느낌이었다. 이제 돌아가면 매일 그 허전함을 느껴야 하는 걸까?
어쩐지 눈물이 핑 돌았다.
자신은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좋았는데, 하운에게는 그게 부담이었던 모양이다.
리엘라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려는 순간 하운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거기 머물러 줄 수 있을까?”
“…네?”
리엘라는 놀라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표정으로 리엘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그곳에 있어 달라는 것은 아니야. 그곳은 그대의 집도 아니고, 그대가 공작저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어.”
하운은 고개를 숙여 제 얼굴을 리엘라의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렇지만… 파르멜 영지의 그 저택도… 괜찮다면 그대의 것으로 생각하고 머물러 줬으면 좋겠어.”
하운의 말을 듣던 리엘라는 그에게 되물었다.
“…왜 갑자기 그곳에서 다시 살려고 하는 건가요?”
지금까지 머무는 곳을 정하지 않은 채 돌아다니던 하운이었다. 수도로 돌아오면 왕궁에 신세를 지는 것이 보통이었고, 그나마 오래 머문 곳이라고는 보석의 방 때문에 머문 공작저가 전부였다. 집은 물론이고 제 소유의 물건조차 거의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제 살 곳을 마련하는 것일까.
하운은 그 질문에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이제 한곳에 머무르고 싶어졌거든. 그리고….”
하운의 손이 리엘라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올려다본 리엘라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대와 함께하고 싶은 것이 많아져서.”
“…공작저에서는 할 수 없어요? 뭘 하려는 건데요?”
그 순간 하늘 멀리서 빛줄기 하나가 작은 소리를 내며 솟아올랐다. 하운은 웃으며 제 얼굴을 내렸다. 아직도 서운함이 사라지지 않아 조금 튀어나와 있는 입술에 그의 입술이 겹쳐졌다. 그때 큰 소리와 함께 밤하늘에 거대한 불꽃이 터졌다.
그는 닿은 입술을 떼어 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는 듯, 더욱 힘을 주며 눌러 왔다. 불꽃이 사라지고 하운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대로 놀라 굳어 버린 것 같은 리엘라에게 말했다.
“이런 것.”
하운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리엘라는 물러서지 않고 그를 기다렸다. 다시금 따뜻한 입술이 닿았다.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 매달릴 정도의 따뜻함이었다. 하운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문지르고 눌렀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숨이 섞였다. 그 숨이 너무 뜨거워 리엘라는 살짝 몸을 떨고 말았다. 그러자 하운이 잠시 제 얼굴을 뒤로 물렸다.
그는 자신을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리엘라의 뺨을 쓸어내리면서 속삭였다.
“아주 많이 하고 싶어서.”
하운의 손이 리엘라의 머리 뒤를 부드럽게 감쌌다. 다시 하늘로 빛줄기가 올라갔다. 조금 전보다 다급하게 다가간 입술이 격렬하게 닿았다. 꽃에만 닿았던 리엘라의 입술이 하운의 입술 아래에서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펑! 퍼벙!
소르디아의 하늘에 큰 폭음과 함께 거대한 빛이 터졌다. 불꽃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하운은 리엘라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생각했다.
탐욕은 보석술사의 미덕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는 불꽃놀이가 끝날 때까지 제 탐욕을 가득 채우기로 마음먹었다. 긴 시간 동안, 만족할 만큼. 아주 가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