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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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아아….”
리엘라는 신음 소리를 내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큰일을 치른 탓일까. 돌아와 씻었더니 몸에 긴장이 풀려 문어처럼 흐느적거리는 느낌이었다. 햇살과 허브의 향기가 나는 시트에 얼굴을 묻고 있자 뒤따라온 네아가 놀라 소리쳤다.
“아가씨, 죽으면 안 돼요!”
“…안 죽었어요.”
네아는 재빨리 침대 옆에 앉더니 뻗어 있는 리엘라의 몸을 주물렀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지치시는 것도 당연하죠. 오늘은 푹 주무세요. 그런데 정말 제가 그 자리에 있지 못해서 아쉽네요. 제가 하운 대신에 그 자리에 있었으면….”
“있었으면?”
갑자기 음산해진 목소리로 네아가 중얼거렸다.
“…찢었어요.”
진심이다. 이거 분명 진심이야.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리엘라는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피곤하긴 한데 잠이 오진 않았다. 침대에서 내려와 테이블 위에 놔둔 가방을 열고 안에서 나온 종이봉투를 열자 작은 증명서가 툭 떨어졌다.
“그게 뭔가요?”
네아가 궁금하다는 듯 다가오자 리엘라는 자랑스럽게 그것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왕립 원예 협회 명예 회원증이에요. 오늘 받아 낸 거죠.”
회원이 되려면 협회 회원 두 명의 보증이 필요하다. 리엘라는 밑에 있는 서명을 보았다. 하나는 모리스 경, 하나는 클로에 베넷의 서명이었다. 리엘라는 회원증을 꼭 끌어안았다. 가보가 생겼어! 대대로 물려줘야지!
“그러고 보니 내일도 일찍 왕궁으로 가시나요?”
“아니에요. 이제 왕궁에는 일주일에 한 번만 갈 거예요.”
“모리스 경의 제자가 되기로 하신 것 아니었어요?”
“클로에 양이 있는데 저까지는 필요 없죠.”
사실 알고 있었다. 모리스 경과 클로에가 화해를 하면 제가 남아 있기 애매하다는 사실을. 어차피 다시 하나의 팀이 될 것이고 손이 모자랄 일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내 가게가 있는걸.’
왕실의 정원을 관리하고 꽃을 다루는 일은 엄청난 영광이다. 가게를 하면서 계속 꿈꿨던 일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서 일을 해 보니 알게 되었다. 왕궁도 좋지만 역시 제 가게가 더 좋다는 사실을.
‘축제 끝나면 바로 돌아가야지.’
얼마 남지 않은 꽃 축제가 지나고 그사이 다른 보석의 방이 열리면 제가 돌아갈 때쯤에는 다시 사람들도 조용해졌을 것이다. 게다가 브릭스 거리의 친구들도 그리웠다. 아마 돌아가면 리나가 제일 먼저 달려와 왜 연락도 잘 안 했냐면서 등짝을 두들길 것이 분명하다.
회원증을 서랍에 넣어 두고 자리에 눕자 네아는 멜다 부인에게 내일 식사를 푸짐하게 차려 달라 부탁드리겠다며 잘 자라 말하고 방을 나갔다.
“…….”
눈을 감았으니 잠이 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정신은 더욱 말똥말똥해졌다.
한참이나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던 리엘라는 결국 옷걸이에 걸려 있던 겉옷을 걸쳐 입고 방을 나섰다. 슬슬 더운 계절에 들어가기 때문인지 밤공기에 남아 있던 서늘한 기운이 사라졌다. 리엘라는 다음부터는 굳이 겉옷을 입지 않아도 되겠다 생각하며 후원으로 향했다.
엘피안 꽃과 모리스 경에게 얻어 낸 장미들이 잘 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 다시 방으로 돌아가던 리엘라는 보석의 방의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빛을 보았다.
‘아직 저기에 계신가?’
리엘라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보석의 방으로 향했다. 저기에 하운이 있을 테니까.
***
하운은 오늘도 두 번째 문 앞에 앉아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호슨 공작이 말 한 기간은 6개월이다. 문 세 개를 여는데 결코 긴 시간이라 할 수 없었다. 첫 번째 문을 여는데 두 달 반 넘게 시간이 흘렀으니 더욱 문을 여는데 몰두해야 했는데, 그 귀한 시간을 왕궁에서 날려 버렸다. 그것도 장미네 작약이네 해바라기네 하는 일로.
낮에 정원 관리부의 소동이 조금 가라앉고 나서 곧바로 투명의 다이아몬드를 반납하러 돌아갔다. 그가 갑자기 리엘라의 뒤에서 나타난 탓에 정원 관리부의 직원들이 놀라 수군거렸으니 아마도 제가 그 보석을 썼다는 것을 레티시아는 금세 알아차릴 것이 분명했다.
역시나, 그가 왕실 보석의 방에 도착했을 때 레티시아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경계의 눈으로 하운에게 물었다.
“이 보석을 어떤 용도로 사용했습니까, 하운 대공.”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레티시아가 다시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투명의 다이아몬드가 에르첼라 컬렉션은 아니지만 주로 전쟁 중에 사용되는 주요 보석인 것을 그대도 알고 있었을 텐데요. 왕궁 안에 어디 전쟁이라도 났었습니까?”
나긴 났었다. 장미와 다른 꽃들의 전쟁이.
결국 하운은 입을 꾹 다문 채 레티시아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나중에 그녀가 이것을 무슨 목적으로 썼는지 알면 뭐라 할지 궁금했다.
“하아….”
하운은 의자에서 일어나 두 번째 문으로 다가갔다. 문이라고 하지만 손잡이가 없는 문이었다. 열리지 않는 문이라서 이렇게 만든 것인지. 혹시 그사이에 뭔가 변한 것이 있을까 기대하면서 손에 힘을 주었지만 문은 여전히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젠장.”
그사이 완전히 놀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문에 있는 힘의 흔적을 기록해 왕실 보석술사들에게 건네 최대한 비슷한 힘의 파동을 가진 보석을 찾아 달라 부탁했다. 그들은 흔치 않은 하운의 부탁에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단지 호슨 공작의 보석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운 대공님, 제가 생각하기에는 문의 나무뿐만이 아니라 안쪽의 보석들도 이미 발동이 되어서….”
“대공님. 이 보석과 비슷하긴 하지만 좀 더 복잡한 것을 보니 다중 구조로 배치를 해서….”
그들은 하운을 보기만 하면 뼈다귀를 발견한 개처럼 미친 듯이 달려와 말을 시작했다. 물론 쓸데없는 말은 아니었다. 전부 보석의 방에 관련된 것들이었으니까. 그래서 하운은 계속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듣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제 의견을 말하고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며 새로운 가설을 세워 보았다. 그러다 잠시 지치면 보석의 방이 아닌 다른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하운은 달라진 점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계속해서 말을 거는 그들이 거북하고 대하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어느새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레이안이 했던 말이 생각났었다. 사람을 좀 더 만나라고 했었던가.
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걸어오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군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보석의 방을 연 다음 하운은 첫 번째 문에 자신과 리엘라 외에 들어올 수 없도록 보석의 힘을 사용했다.
잠시 후 램프를 든 리엘라가 안으로 들어왔다.
“안 주무세요?”
“그건 내가 할 말이군. 오늘 힘들었을 텐데 빨리 쉬는 게 낫지 않겠나?”
“잠이 잘 안 와서요. 너무 긴장했었나 봐요.”
리엘라는 쓴웃음을 짓더니 하운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래도 돌아가서 눈을 붙이라고 말할까 하던 하운은 조용히 다시 의자에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운은 손가락으로 뺨을 두드리며 옆에 앉은 리엘라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는 오늘 리엘라의 모습이 신기했다. 리엘라는 돌아와 크리스털에 기록된 영상을 보더니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었다. 그러더니 모리스 경과 클로에 베넷을 부딪히게 만들 생각이니 도와 달라고.
리엘라는 먼저 루시안에게 부탁했다. 루시안은 그녀의 부탁대로 마틴이 가져간 디자인대로 장식을 만들고 난 다음 적당한 핑계를 대어 모리스 경을 그것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모리스 경의 눈이 뒤집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다음 하운에게는 아마 마틴은 제가 한 일이 발각되려 하면 잔영의 크리스털을 빼앗으려 할 것이니 그때 혹시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막아 달라 부탁했다. 혹시나 하는 상황에 일부러 다른 크리스털까지 들고.
그리고 마틴은 정말로 리엘라에게 달려들었다. 주변에 그렇게 사람이 많고 제가 한 일이 거의 다 밝혀졌는데도 크리스털 하나 빼앗으면 달라질 거라 생각하다니.
“어떻게 알았지?”
“뭘요?”
“마틴이 너에게 달려들 것. 보통 그런 상황이면 포기하고 얌전히 수긍할 거라 생각했는데.”
“크리스털 영상 보고 알았어요.”
“영상?”
영상이라면 리엘라가 없을 때 마틴이 했던 행동들이다. 그 영상에 뭔가 특별한 점이 있었던가?
“마틴은 저 말고 다른 직원들에게는 나름대로 잘 대하는 편이었거든요. 그런데 보니까 유난히 절 낮게 보더라고요. 그때 알았죠. 이 사람에게 나는 이미 아랫사람이구나, 그래서 무슨 일 있으면 분명 나에게 책임 돌리고 분노도 폭력으로 풀려 하겠구나, 하고요.”
리엘라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하운이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자 리엘라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람들 만나다 보면 알잖아요. 아, 이 사람 이렇겠구나, 저렇겠구나 하는 거. 모리스 경과 클로에 양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싫으면 아예 무반응이거나 했을 텐데 만났을 때도 대화는 없지만 서로를 계속 노려보던 데다가 상대의 이야기가 나오면 화를 냈죠. 그걸 보고 조금은 가능성이 있겠다 싶었어요. 상대 이야기를 하면서 웃었으면 아예 이런 시도를 할 생각도 안 했을 거예요. 그건 진짜 서로를 포기한 상태니까.”
리엘라의 말을 들으면서도 하운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걸 짐작하는 게 신기하다는 건데.’
보석의 힘으로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 만나다 보면 알게 된다니. 아직도 자신은 잘 모르겠는데. 다시금 레이안의 말이 생각났다. 사람들 좀 만나라고.
하운이 혼자 생각에 잠기자 리엘라는 일어나 문 앞으로 다가갔다.
“두 번째 문 만져 봐도 되나요?”
“한 번도 안 만져 봤던가?”
“네. 어떤 보석의 힘이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니 위험하다고 다들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하셨잖아요. 지금까지 이 문 만져 본 사람 대공님뿐인 거 아세요? 생각해 보니 내가 주인인데 만지지도 못했네.”
투덜거리던 리엘라는 창세 시대의 신화가 조각되어 있는 문의 장식을 만지다 그에게 질문했다.
“이거 손잡이가 어디예요?”
“손잡이가 없어. 그래서 그냥 아무 곳이나 밀어 보고 있었지.”
“설마 옆으로 미는 문이라거나 위로 올리는 문이라거나 하는 건 아닐까요?”
“…내가 그 정도도 안 해 봤을 멍청이라고 생각하나?”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 뿐이예요.”
음, 사실은 조금 의심을 하긴 했는데. 손잡이를 찾다 포기한 리엘라는 문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하운이 말했다.
“소용없어. 내가 아무리 힘을 주어 봤지만 꿈쩍도…!”
말을 하던 하운은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제가 밀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던 문이 리엘라가 미는 순간 끼익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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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두 번째 문
“이럴 리가….”
리엘라가 밀 때마다 조금씩 덜컹거리는 문의 모습에 하운은 제 눈을 의심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너무 문을 열고 싶었던 나머지 헛것이 보이나? 하지만 아무리 눈을 비비고 끔뻑거려 보아도 분명 문은 흔들리고 있었다.
하운이 넋이 나가 있는 것도 모른 채 리엘라는 몇 번 더 문을 흔들어 보다 몸을 떼었다.
“첫 번째 문하고 다르네요. 안에서 잠겨 있는 건가요? …대공님?”
“다시! 다시 밀어 봐!”
“네?”
“어서!”
다급한 하운의 목소리에 리엘라는 놀라 문 위에 손을 올린 다음 힘을 주었다.
“이렇게요?”
그녀가 손에 힘을 주자 문은 또다시 살짝 덜컹거렸다. 그것을 본 하운이 미친 듯이 달려와 문을 몸으로 밀었다. 제가 밀어서 이 정도인데 하운이 밀면 완전히 열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 리엘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러다 문이 안쪽으로 갑자기 열리기라도 하면….
“…어?”
문이 흔들리는 모습을 본 리엘라는 이상함을 발견했다. 분명 하운이 끙끙거리며 힘을 쓰고 있는데 조금 전 제가 흔들었을 때랑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럴 리가?’
놀란 리엘라는 문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어어?”
그러자 문에 변화가 생겼다. 조금 전까지 흔들거리던 움직임이 사라지고 마치 돌로 된 것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리엘라는 고개를 들었다. 문 앞에는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온 힘을 다해 문을 밀고 있는 하운이 있었다.
자신이 밀 때는 흔들리던 문이 하운이 밀 때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니. 끙끙거리며 문을 밀던 하운도 곧 이상함을 눈치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건 제가 물어보려고 했던 건데요.”
둘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동시에 외쳤다.
“다시 밀어 봐!”
“다시 밀어 봐요!”
둘이 붙어서 밀자 문이 다시 흔들렸다.
“손 떼 봐!”
하운이 외치자 리엘라는 냉큼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 순간 거짓말처럼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리엘라가 혼자 밀 때는 덜컹덜컹. 하운이 밀 때는 조용. 몇 번을 더 한 끝에 두 사람은 확실하게 알았다.
“제가 밀 때는 흔들리네요?”
“내가 밀 때는 안 흔들리고!”
하운은 짜증을 담아 문을 손바닥으로 한 번 내려친 다음 외쳤다.
“망할 호슨 공작!”
그때 밖에서 보석의 방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하운! 야! 문 열어! 아가씨 거기 계시지!”
“네아!”
네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리엘라가 재빠르게 뛰어가 문을 열었다. 구르듯 들어온 네아는 리엘라를 보자마자 은 식기의 흠집을 체크하는 듯이 이리저리 샅샅이 살폈다. 리엘라가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네아는 하운을 향해 소리쳤다.
“이 밤에 왜 아가씨를 여기로 부르고 난리야!”
“부른 게 아니라 혼자서 온 거다. 그것보다, 너. 이리 와.”
“내가 네가 기르는 강아지니?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게.”
그때 리엘라가 말했다.
“네아, 미안한데 잠깐만 문 앞으로 가 줄 수 있어요?”
“물론이죠, 아가씨.”
하운이 어이없다는 시선을 던졌으나 네아는 혀를 내밀며 코웃음을 쳤다.
“네아. 여기 한 번 문 밀어 볼래요? 나처럼 이렇게 손을 대고 힘껏.”
“이렇게요?”
덜컹덜컹.
네아가 밀자 조금 전 리엘라가 밀었을 때처럼 문이 흔들렸다. 리엘라는 그것을 보며 손을 떼었다. 하지만 하운과는 달리 네아가 밀고 있을 때는 여전히 흔들렸다.
“괜찮다면 같이 밀어 보겠나?”
“너는 왜 가만히 있고 아가씨에게 이래라저래라 난리야?”
하운이 말하자 네아가 그를 흘겨보며 짜증을 내었다. 리엘라는 네아를 다독이며 둘이서 함께 문을 밀었다. 그러자.
“…더 흔들거려.”
리엘라가 중얼거린 대로 그녀 혼자서 밀 때보다 문이 조금 더 흔들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하운은 흔들리는 문을 보더니 몸을 돌렸다.
“지금 이 저택에 몇 명이나 깨어 있나?”
***
평소라면 대부분이 잠자리에 들고 몇몇의 하인들만이 깨어 돌아다니는 시각, 공작저는 시끄러웠다.
갑자기 달려온 네아가 부엌, 세탁실, 거실, 정원 등등을 돌아다니며 아직 깨어 있는 모든 하인들에게 지금 당장 보석의 방으로 가 달라 말한 것이다. 첫 번째 방이 열린 이후로 보석의 방 앞의 복도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혹시 깨질까 봐 떼어 두었던 창이 다시 붙었고 창고로 갔던 조각상과 그림들이 돌아와 다시 제자리에 놓였다. 하인들은 오랜 시간 보았던 복도를 지나 문이 열린 보석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저희가 들어가도 되나요?”
“그러게요. 혹시 보석들이 아직 돌아다닌다거나 하지는 않나요?”
겁에 질린 하인들의 앞에서 네아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말아요. 이미 다 치워 두었으니까요. 남아 있는 보석은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네아의 귀에는 환시의 사파이어가 반짝이고 있었다.
저택의 깨어 있는 하인들이 전부 두 번째 문 앞에 모이자 하운은 그들에게 하나씩 명령을 내렸다. 혼자 밀어 봐라, 같이 밀어 봐라, 한 명은 뒤로 빠져 봐라 등등.
한참 동안 하인들과 네아, 리엘라는 하운이 말하는 대로 문을 밀어 보았다. 그리고 몇 시간 후 하운은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문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다는 거군.”
즉, 문은 오직 하운만을 완전히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슨 공자아아아아아악!”
분노에 찬 하운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울렸다.
***
“흐아암….”
리엘라는 입을 가리며 식탁에 앉았다. 결국 어제 너무 늦게 자 버렸다. 하늘 끝이 밝아 오는 것을 보고 잠이 들고 말았으니 말이다.
‘오늘은 아무 데도 안 가도 돼서 다행이다.’
만약 어제처럼 일찍 왕궁에 가야 하는 날이었다면 지금쯤 마차 안에서 기절한 것처럼 잠들어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연신 나오는 하품을 손으로 가리고 있을 때 네아가 멜다 부인과 함께 아침을 들고 들어왔다.
저보다 늦게 잠들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네아의 얼굴에는 조금의 피곤함도 보이지 않았다.
“네아가 말하길 늦게 주무셨다 하시길래 속이 좀 불편하실 것 같아 수프는 좀 가벼운 걸로 준비했어요. 아침 간단히 드시고 좀 있다가 늦은 점심 드시게요. 혹시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오랜만에 리엘라가 저택에 있게 되어 좋은지 멜다 부인은 즐거운 얼굴로 테이블 위에 음식을 놓았다. 그동안 아침은 급하게 먹고 나머지 식사는 도시락을 싸 들고 다녔었는데 오랜만에 제대로 차린 아침을 먹자 입이 행복했다.
먹는 사이에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자 리엘라는 네아에게 물어보았다.
“그사이에 혹시 대공님께서 좀 더 알아낸 사실 있나요?”
“네. 일단 아가씨도 보셨다시피 하운 대공이 밀 때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아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밀 때는 그 정도가 다르긴 하지만 조금씩 흔들리지요. 그리고 한 명보다 두 명, 두 명보다 세 명이 더 흔들려요. 확실한 건 사람이 늘수록 더 많이 흔들린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런다고 절대 열리는 건 아니고요.”
“흐음….”
“일단은 오늘 점심 이후에 저택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한꺼번에 달라붙어 밀어 보기로 했어요. 아가씨도 오실 건가요?”
“물론이죠.”
리엘라는 버터와 잼을 바른 토스트를 크게 한입 물며 어제 하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분노에 가득 차서 호슨 공작 가만 안 둘 거라며 이를 갈았다. 그 모습을 보니 처음 하운을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정말 무서웠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하운은 여전히 크고 화가 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무섭나?
‘아니, 전혀.’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마틴이 덤벼드는 것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몸이 움찔거렸다. 성인 남성이 악의를 갖고 덤벼드는데 무섭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런 식으로 마틴을 자극할 수 있었던 것은 제 뒤에 하운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자신이 다치기 전, 그가 마틴을 막아 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두려워하지 않고 마틴을 자극해 원하는 반응을 얻어 낼 수 있었다.
게다가 밤에는 보석의 방에 하운이 혼자 있다는 것을 안 순간에 머뭇거리지도 않고 곧바로 그곳을 향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처음에는 낯설고 두렵고 무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네아와 함께 그를 놀리고 찾아가며 옆에 앉게 되었다.
‘친구… 는 된 건가?’
이런 말을 하면 하운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할 것이다. 그 모습을 생각하던 리엘라는 피식 웃고 말았다.
‘분명 아직도 보석의 방에 매달려 계실 텐데….’
식사가 끝나면 간식이라도 들고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오늘은 아무런 일정도 없으니 하루 종일 그곳에 앉아 호슨 공작님을 원망하는 그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괜찮으리라.
***
빠가각! 이상한 소리를 내며 하운의 손에 들려 있던 펜의 펜촉이 우그러들었다. 두 번째 문을 노려보며 하운은 서랍에서 새로운 펜을 꺼냈다. 오늘만 망가트린 펜이 벌써 일곱 개째다. 네아가 이 사실을 알면 꼴 좋다고 깔깔 비웃은 다음에 공작저의 물건 함부로 쓰지 마라며 주먹을 흔들겠지. 물론 그가 알 바는 아니다.
이제 공작저의 하인들은 전부 다 물러간 상태였다. 다시 두 번째 문 앞에 혼자 남은 하운은 제가 정리한 종이를 보았다. 몇 번이나 분노를 참지 못해 펜촉이 우그러진 탓에 종이는 엉망이 되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제 리엘라와 네아가 한 말이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러니까… 대공님만 빼고 모두에게 어느 정도는 허락하는 문이다, 이거군요.”
“넌 그것도 모른 채 혼자만 두 번째 문을 만진 탓에 아직까지 그 사실을 몰랐던 거고. 공작님 최고다 진짜.”
웃던 네아의 모습을 생각하니 여덟 번째 펜을 우그러트릴 뻔했다. 호슨 공작은 분명 이것까지 생각해서 저 문에 보석의 힘을 걸어 뒀을 것이다. 망할 노인네. 죽고 나서도 사람을 이렇게 갖고 놀아?
거칠어지는 숨을 필사적으로 누르며 하운은 종이를 들었다.
지난밤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면서 하운은 몇 가지 알아낸 사실이 있었다.
저 문은 자신을 제외한 사람들이 밀면 조금씩 움직인다. 하지만 무조건 사람의 수가 많다고 더 크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문을 더 크게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조건을 충족한 사람의 수가 늘었을 때인가.’
왕실 보석술사들과 이야기를 하고 알아냈던 것은 저 문에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보석의 힘이 걸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힘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 걸려 있나 싶었더니….
‘문을 미는 사람들의 조건을 위한 힘이었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