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equaled Scholar RAW novel - Chapter 10
1권 10화
四
“미안해, 소혜야! 언니가 먼저 챙겼어야 했는데…….”
일을 끝마치고 집에 돌아온 운혜는 빚쟁이들이 몰려왔다는 말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수중에 모아 놓은 돈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일거리도 많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백이건의 약값에 음식값까지 예상치 못한 지출이 많았던 것이다.
“아, 아니야. 언니는 열심히 일을 하는데, 나는 집에서 놀기만 하는걸.”
“그렇지 않아, 소혜야! 일은 언니 혼자서도 충분해! 이다음에 돈을 많이 벌면 너를 서원에 보내서 꼭 공부도 시킬 거야.”
소혜는 공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매달 빚쟁이들에게 시달리지 않고 마음 편하게 살아 봤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운혜와 소혜, 두 자매의 정은 유난히 각별했다. 세상에 믿고 의지할 사람은 그들 두 명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돈은 걱정하지 마. 빨래방 언니에게 사정을 설명하면 가불해 주실 거야.”
“그럼 다행이지만……. 헌데 언니! 가불을 받으면 다음 달에는 어떡해?”
“더 열심히 일하면 되지. 돈 문제는 언니가 알아서 할 테니까, 우리 소혜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있으렴.”
운혜는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소혜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평소보다 더 쾌활하게 말했지만, 과연 빨래방에서 가불을 해 줄지 의문이었다.
설령 운이 좋아 가불을 해 준다 해도 다음 달이 걱정이었다. 요즘 들어 일거리가 많지 않아서 노는 날도 많은 상황에서 가불까지 받는다면 다음 달은 빚을 갚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는 희망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일거리가 생기면 힘든 막노동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백이건을 구하기 위해 들어간 약값과 음식값 등은 전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니!’
소혜는 자신의 나이가 어려서 운혜를 도와주지 못하는 것이 늘 미안했다.
자신이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다면 운혜가 조금은 더 편하게 지낼 수 있고, 그렇게 해 보려고 일자리도 알아보았지만 이제 겨우 일곱 살인 그녀에게 일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한 운혜와 소혜.
두 자매의 삶에 불쑥 어린아이로 변한 백이건이 나타난 것이다.
과연 백이건으로 인해 생활비가 늘어나 더 고생을 하게 될지, 아니면 개똥도 약에 쓸 곳이 있다고 백이건이 도움이 될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었다.
한편, 백이건은 빚쟁이들이 찾아왔을 때부터 본의 아니게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운혜의 형편이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빚까지 있을 줄이야.
그는 지금까지 먹었던 음식이며 약들이 목구멍에 걸리는 기분이었다.
당장 쫓겨나도 할 말이 없는 상황에, 지금까지 운혜에게 고맙다는 말은커녕 신경질을 내거나 짜증만 부렸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운혜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생판 남인 자신을 얼마나 헌신적으로 도와주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에게도 양심이라는 게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안하고 고마운 감정이 들지 않으면 그건 사람도 아닌 것이다.
‘그래, 지난 며칠 동안은 마음씨 좋은 운혜를 만나 먹고사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는데, 이제부터는 달라…….’
당장에 먹고사는 일이 현실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다.
그는 이곳에서 쫓겨나면 정말 오갈 곳 없는 처량한 신세다. 몸은 작아졌고,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서 막막하단 생각마저 들었다.
‘우라질! 난 왜 이렇게 무능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간일까?’
백이건은 자괴감마저 들었다.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기왕이면 부잣집에 발견되었으면 오죽 좋았을까? 그랬다면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지 않고 편하게 지냈을지도 몰랐다.
‘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그는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구제 불능이었다. 이건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을 도와준 운혜에게도 몹쓸 짓이었다.
하지만 답답한 건 답답한 것이었다. 당장 운혜가 먹으라고 내미는 죽이나 밥을 냉큼 받아먹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하물며 이제는 언제 빚쟁이들이 나타나 집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지도 걱정이었다.
백이건은 아직 바깥바람을 쐬는 건 몸에 좋지 않았지만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상처가 터져도 상관없었고, 감기가 걸리거나 몸이 악화되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인생 막장이었다.
이런 몸으로 사느니 그냥 여기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되었다.
문득 그의 눈에 한쪽 구석에 혼자 틀어박혀 있는 소혜가 보였다.
운혜는 낮엔 일을 하러 나가고, 집에는 소혜 혼자 있는다. 평소라면 혼자서 소꿉놀이를 하거나 친구들과 놀러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빚쟁이들이 찾아온 이후로는 부쩍 말이 없어지고 우울한 표정으로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빚쟁이들이 다시 찾아오는 건 두려웠던 것이다.
“쯧쯧, 어린애가 매일 그게 뭐냐? 친구들과 놀거나, 아니면 밖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와라.”
백이건은 자신의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터져 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신세도 한심하지만, 겁에 잔뜩 질려 있는 소혜의 모습은 불쌍하다 못해 연민이 느껴질 정도였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소혜는 백이건을 원망하고 있었다. 백이건만 아니었다면 이번 달 빚을 갚았을 것이었고, 그랬다면 가불을 받는 일도, 다음 달에 운혜가 일을 더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소혜의 기색을 못 읽을 백이건이 아니다.
여자의 눈치라면 도사급의 실력을 가진 그다. 입맛이 썼다.
“우라질! 그래, 모두 내 탓이다! 내가 죽일 놈이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한심한 인간이다.”
백이건의 입에서 자조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이보다 더 현재 자신의 신세를 대변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소혜는 순간 미안한 마음에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백이건을 원망하고는 있었지만, 어린아이의 원망이 그렇듯 마음속 깊이 모질게 미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언니가 어린애는 욕하는 거 아니라고 했어.”
“얼씨구, 사고로 몸이 작아지지만 않았어도 너 같은 딸이 있을 나이다!”
“쳇! 거짓말하는 것도 나쁘다고 했어.”
“에효, 그만하자. 내가 지금 어린애하고 무슨 짓이냐.”
백이건이 밖으로 나왔다.
순간 소혜가 따라 나오며 말했다.
“너, 어디 가려고? 언니가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단 말이야.”
“내가 없어져 줘야 너희들이 더 편하지. 그걸 원하는 게 아니었어?”
“그, 그건…….”
소혜는 이제 겨우 일곱 살.
그녀는 어른들처럼 속내를 감추는 법을 몰랐다. 또한 곁에 있는 사람이 잘못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너 정말 집으로 안 돌아갈 거야? 아직 몸이 다 낫지도 않았잖아?”
소혜가 따라오며 계속 말을 걸어왔지만, 백이건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문득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불어왔다.
백이건은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아 으스스 추웠지만, 답답했던 속이 조금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을은 작았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대부분 집이 엉성하게 나무를 잇대어 만든 판잣집이었다.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동호가 있었는데, 운혜가 그를 구한 곳이다.
동호가 있으니 마을 사람들 중에는 어부들이 많았다.
‘여기가 진촌 마을이었군.’
청죽헌과는 십 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결국 그는 동호에 빠진 채로 십 리가량 떠내려왔다는 뜻이었다.
운혜가 살고 있는 곳은 진촌 마을의 북쪽 지역이었다. 이곳은 주로 가난한 백성들이 모여 살고 있어서 난민촌 마을이라고도 했다.
백이건은 왜 사람들이 이곳을 난민촌 마을이라고들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응?’
한쪽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사람들 속에 운혜도 섞여 있었다.
“언니!”
소혜가 반가운 표정으로 운혜에게 달려갔다.
운혜는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녀는 반갑게 소혜를 안아 주려다 백이건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얘, 몸도 안 좋은데 바깥바람을 쐬면 어떡하니?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 나니까 어서 돌아가자.”
소혜는 혹시라도 백이건이 자신 때문에 집을 나가는 중이라고 이야기할까 봐 두려워 계속 그의 눈치를 보았다.
백이건은 그녀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계속 누워 있으려니까 속이 답답해서…… 요.”
그놈의 존댓말은 며칠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휴!’
소혜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차! 내가 그 생각을 못했구나! 그럼 옷을 좀 더 입고 나오지.”
운혜는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서 백이건에게 덮어 주었다. 운혜에게는 몸에 딱 맞는 옷이었지만, 백이건에게는 발목까지 내려가는 장포였다.
“바람을 오래 쐬면 안 좋아. 오늘 우리 세 식구, 고기 먹는 거 어때?”
“언니도 참, 우리가 고기 살 돈이 어디 있다고.”
“짠!”
운혜가 뒤에서 보자기를 꺼내 보였다.
“천무각의 각주님께서 고생한다고 고기를 주셨지 뭐니?”
“진짜?”
소혜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녀들 형편으로는 일 년에 한 번 고기를 먹을까 말까였다. 생각만 해도 벌써 침이 고이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조숙해도 이제 겨우 일곱 살 어린아이다. 힘들고 슬퍼하다가도 좋은 일이 생기면 금방 웃을 수 있었다.
한편, 백이건은 다른 것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시, 식구라고?’
백이건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말이었다. 아니, 그는 운혜가 자신을 쫓아내기 전에 자기 발로 걸어 나갈 생각까지 했었다.
허나 운혜는 아무리 힘들어도 백이건을 쫓아낼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오갈 곳 없는 백이건이 혹시라도 마음이 불편할까 싶어 더욱 신경 써서 식구처럼 대해 주고 있었다.
백이건은 운혜의 얼굴을 보았다.
“…….”
여태껏 어린아이라고만 생각했던 얼굴이 부쩍 성숙해 보였다.
운혜의 겉옷에서는 부모님의 향기가 느껴졌다.
부모님의 사후, 자신을 이렇게 걱정해 주는 사람이 또 있었던가? 그녀에게 짜증 내고 신경질 부렸던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유일하게 운혜의 마음만이 그를 위로해 주고 있었다.
“근데 언니, 오늘은 일찍 끝났네?”
“천무각이 야외 훈련을 떠났거든. 오늘 한가한 대신 내일은 정신없이 바쁠 거야.”
“그럼 언니는 집에 가서 푹 자. 이제부터 내가 얘하고 놀아 줄 테니까.”
소혜가 다부진 표정으로 백이건을 쳐다보며 말했다.
‘얼씨구!’
백이건은 운혜에게 느끼던 감동이 어이없음에 싹 가시는 기분이었지만, 운혜는 그런 소혜가 기특한 모양이었다. 입가에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호호! 그러지 않아도 되네요.”
“잉! 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야. 나도 밥하고 빨래할 수 있다구.”
소혜는 토라진 얼굴로 씩씩거렸다. 그게 그렇게 귀엽고 예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언니, 뭘 그렇게 보고 있었어?”
“청죽헌에서 방문을 내걸고 사람을 찾고 있나 봐.”
운혜가 소혜에게 대답을 해 주었다.
청죽헌은 해마다 어려운 백성들을 위해 쌀과 돈을 내놓으며 구제에 앞장서고 있었고, 인근 마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했다.
며칠 전에는 그곳에서 열리는 후기지수들의 모임으로 인해 십 리나 떨어진 진촌 마을까지 들썩거릴 정도였다.
한데 그곳에서 사람을 찾고 있다니.
방을 붙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오직 관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청죽헌의 영향력은 관아를 뛰어넘었다.
마을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모여들었지만, 가난한 사람들만 모여 살다 보니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해서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만 알 뿐, 자세한 사항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백이건은 무심코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방문을 읽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 나잖아?’
그랬다.
청죽헌에서 찾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백이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