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Age RAW novel - Chapter (249)
구하느라 너무 바빴다. 머릿속에 여자 대신 얼굴도 모르는 천기부터 떠올랐다. 확실히 어릴 적에는 전생에 여자 손도 제대로 잡아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들을 꿈꿨는데, 이제는 그런 것도 없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이 소음문에서는 검보다 소리를 조심해야 한다. “기다렸나.” 음신, 소류금. 그 혹은 그녀의 미성(美聲)이 가슴에 파고 들었다.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기분 좋은 목소리지만 홀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소류금은 기녀. 아니 소음문도를 대동하고 방 안으로 들어와 상석에 앉았다. 손짓 하나하나에 기품이 흐르는 소음문도는 호화스러운 상을 차려 준 뒤 인사하고 나갔다. “정체가 무엇이냐.” “궁귀검수요.”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다.” 소류금이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봤다. “현경의 고수.” 심상구현은 운으로만 가능한 게 아니다. 천운도 필요하나 천부적인 재능이나 주변 환경이 필요하다. “강호에 기인들이 모래알처럼 많다고 하지만, 절대고수는 없다. 은둔하거나 봉문한 문파의 고수들 중에서도 과연 한 명이라도 있을까 싶은 의문이 드는 게 현경이다.” 소류금도 궁귀검수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 되는 고수는 아니었다. “사문반란. 그때는 본신의 무위를 숨기고 나타났나? 아니, 그보다 어째서 하오문을 사칭했지?” 궁귀검수에 관한 소문 중 확실한 것이 몇 있다. 그중 하나가 반란에 참전하기 전 신분이었다. “수상쩍군.” 걸리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너무 많은 걸 물으시는군.” 주서천이 살짝 웃어 줬다. ‘그야 그때는 현경이 아니었으니까.’ 큰 착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정체가 사문을 뜻하는 것이라면, 답해 드릴 수 있소. 나는 궁신(弓神)의 전인이오.” 거짓말은 안 했다. “……!” 궁신의 이름이 나오자 음신이 눈을 크게 떴다. “일월신궁?” “그렇소.” 궁신은 고금에서도 손꼽히는 전설의 무인이다. 방금 전 청백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역사도 무공도 그 수준을 달리한다. 놀라는 게 당연했다. “과연. 그 실력은 이해가 가는군.” 소류금이 수긍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무슨 일로 날 만나러 온 건가? 아니, 어이하여 하오문을 사칭했지?” “수지 타산에 맞지 않은 질문이오. 음신의 질문에 답하였으니, 이제 나의 질문에도 답해 주지 않겠소?” “지금 누굴 앞에 둔지 알고는 하는 말이냐?” 파르르. 상 위의 그릇들이 제멋대로 떨기 시작했다. 그릇이 떠는 ‘소리’ 자체가 위협이었다. “그렇소.” 소리가 멈췄다. 그릇들의 떨림도 나지 않았다. 허공섭물은 소류금만의 재주가 아니다. “……흥, 좋다.” 만약 그가 절대고수가 아니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소류금은 궁귀검수를 대등하게 대해 줬다. 현경끼리는 상성은 있어도 순위는 없다. 각자 지닌 심상이 다르다는 것에 중점을 뒀다. “옥문관.” 술병으로 향하는 소류금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감숙성 도지휘사.”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소류금은 술병을 잡아 잔에 따랐다. 고사리처럼 가느다란 손이나, 바라보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매혹적인 눈에 동요 같은 건 없었다. 자연스럽게 술병을 잡고, 따른다. 남이 보면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러나 주서천의 눈에는 달리 보였다. “얼마 전, 도지휘사가 낙마 사고를 당했소. 그 말을 조사해 보니 갑자기 광분하며 날뛰었다더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무언가 중독된 것도 아니고, 암기에 당한 것도 아니었소. 마구간지기가 한둘도 아니고 여럿이서 확인까지 하고 내보냈소. 도지휘사가 무슨 일을 당하면 목숨이 위험할 터인데 그냥 보낼 리는 없지.” “……” “그 말과 관련된 이들은 전부 참수 당해 정보를 수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그럭저럭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소이다. 음공에 당한 것이 아닐까 하고.” 독공은 그래도 수요라도 있다. 그러나 음공은 아니다. 거의 사장된 비주류의 무공이었다. 그래도 음신이 있어서 나름대로 알려지기라도 했지, 아니었더라면 전문 무공이 있나 싶었을 거다. “음신, 소류금.” 주서천의 입가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감숙성 도지휘사를 살해했냐?” “아니.” 탁. 드르륵. 문이란 문과 창까지 전부 닫혔다. “엄밀히 따지자면 살해한 건 내가 아니라……” 챙! 채채채채챙! 파르르르! 덜그럭덜그럭! 그릇들이 다시 마구 흔들렸다. 그 외에도 방 내에 자리한 도자기 등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 움직였다. “말이 아닌가?” 상 위에 올라온 산해진미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대답을 했으니 이제는 다시 내가 질문할 차례다.” 소류금이 손바닥으로 바닥을 후려쳤다. 콰앙! 바닥이 부서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땅에서 솟은 것처럼 악기가 하나 나타났다. 칠현금인 줄 알았는데, 특이하게도 현이 두 줄밖에 없었다. ‘문무현금(文武鉉琴)……!’ 하나는 문현이요, 또 하나는 무현이다. 이 두 줄이 있는 걸 문무현이라 불렀다. 그리고 문무현금은 현 무림에서도 오직 하나 밖에 없는 보물로서, 소음문의 신물이기도 했다. 문무현은 명주실이 아닌 천잠사를 꼬아 만들어 금으로 환산하면 천금이 나온다. “어째서 사도의 영웅이란 자가 관료의 죽음을 캐내고 다니는지 알고 싶구나. 혹, 실은 관의 인물인가?” “그럴 리가 있겠소?” “반문이 아닌 대답을 해라.” “난 그저 누가 옥문관을 열어 주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외다.” “……!” 소류금의 눈빛이 험해졌다. “누구냐.” “그러니까, 궁귀검수요.” “헛소리. 그걸 아는 자는 극소수다.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천하제일 자객방, 유령곡의 탈주령들도 고생해서 얻어 낸 정보다.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건 사실이다. ‘니야말로 누구냐?’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소류금에게도 무언가 있었다. 소음문은 생각지도 못했다. 낙마사고의 음공도 의심 가는 곳이 여기밖에 없어서 일단 온 것뿐이었다. 그러나 음신과 대화를 나눠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소음문, 아니 음신은 옥문관과 관련이 있다.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죽을 것이다.” “규칙을 어기지 마라, 음신. 질문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다.” 주서천의 분위기도 살벌해졌다. 말투도 변했다. “혈교냐?” 하단전에서부터 끊이지 않는 진기가 흘러나온다. “아니면……” 주서천이 소류금을 마주 봤다. “암천회냐?” “……하.” 소류금이 머리를 숙이고 웃었다. 허리까지 늘어지는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하하하하!” 소류금이 소리 높여 웃었다. 고개를 들고 상쾌하게 웃었다. 소리가 들린다. 청각을 자극한다. 고막을 두드렸다. “궁귀검수.” 소류금이 돌연 웃음을 뚝 그치며이름을 불렀다. “궁신의 전인이 어째서 활을 들고 다니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 말이 진실이라면, 네놈 역시 알고 있을 거다. 궁공이나 음공처럼 비주류의 무공들이 차별을 받는 걸 말이다.” “정파와 사파가 나뉜 이유를 알고 있느냐?” 소류금은 술잔을 기울이며 입 안에 털었다. 주서천은 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올바른 길과 올바르지 않은 길의 시작이다.” 소류금은 자문자답했다. “정파의 무공은 인내와 체력, 정순한 마음을 요구한다. 특징을 나열하자면 수련 속도가 좋지 않아 축기가 늦지만 그 대신 주화입마나 내공상실의 위험이 적으며 경지의 벽을 비교적 쉽게 넘을 수 있다.” 만약 이 자리에 무림인들이 있었더라면 하나같이 목숨 걸고 귀를 기울이며 들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상천칠좌의 가르침이다. 말 하나하나에 고수로 향하는 단서가 숨겨져 있다. “그러나 사람이란 동물은 자고로 요행을 바라는 법. 누구는 그 요구되는 사항을 참을 수 없어서 그만두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수련의 속도를 높일 수 없을까 하는 고심에서 그 방법을 고안하게 되고, 무공의 또 다른 방향성을 발견한다. 그것이 사파의 무공이다.” 요컨대 정파는 정석적인 것이고, 사파는 그러지 아니한 것이었다. 사파의 무공은 대신 경지의 벽을 허무는 것이 정파보다 좀 늦고, 기반도 불안정해 주화입마가 심했다. 정파에 고수가 많지만 인원수가 적고, 사파가 인원수는 많으나 고수가 적은 것의 이유였다. “사람이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조차 잘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알고 있는 것과 조금 다르다고 ‘그건 올바르지 않다.’ 라고 비난한다. 그게 정사가 대립하게 된 이유이다.” 정말 별거 아닌 이유였다. 그저 각자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고 사람을 죽였다. 시간을 거치며 여러 이유로 대립하게 됐다. 정파(正派)는 규율과 윤리를 중시했다. 사파(邪派)는 그 과한 규율과 윤리가 사람의 자유를 억압한다면서 비난하고, 허례허식이라며 욕했다. 무공의 성향은 곧 이념으로 번졌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정파와 사파를 구분 짓기 시작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질문이다. 음공은 어디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느냐?” 소류금의 눈이 서슬 퍼런 빛을 내뿜었다. “답은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으드득! 소류금이 이를 악물었다. “무림 역사에서 음공은 제대로 된 무공으로조차 취급받지 못했다. 그 잘난 정파의 놈들은 그저 기예에 불과하다며 배척하였고, 결국 사파에 분류됐다. 그런데 여기서 더 웃긴게 무엇인지 아느냐?” 무림을 향한 분노가 느껴졌다. “사파에서조차 잘못된 것, 기예에 불과하다며 조롱을 받고 차별받았다! 비주류라는 이유만으로!” 주서천은 소류금을 보고 제갈승계를 떠올렸다. 음공은 기관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힘이 약해 그런 취급을 받는 줄 알았다!” 소림사의 사자후 정도가 아니라면 쓰이지 않았다. “강호 무림도 결국 힘의 세계니까!” 소리에 내공을 실어서 성량을 높이거나 사방으로 퍼뜨리게 하는 응용은 있으나 그건 무공이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인정받으려 노력했다! 많은 걸 바란 것도 아니다! 그저, 그저 보통의 무공처럼 인정받고 싶어서! 음공에 대한 차별을 없애려고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무인의 정점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이제는 좀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뀌는 건 없었다. 음공은 여전히 비주류의 무공이라며 천대받았다. 사도팔문 중에서도 문도의 숫자가 제일 낮았다. 음신은 무서워해도 소음문은 무서워하지 않았다. 언제는 사도천에 잔치가 열린 적이 있었다. 당시 소류금은 소음문도를 대신 보냈다. 그리고 다녀온 소음문도가 이리 말했다. “문주님! 사도천의 한 장로가 절 보고 소음문도니 재주나 부려 보라했습니다. 잔치의 흥을 돋우기 위해 운율을 뽑고, 춤을 추라 했습니다! 언제까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합니까!” 문도의 눈물을 본 소류금은 진노했다. “무림은…… 썩었다.” 무림은 썩었다. 인식을 바꾸려 노력했지만 바뀌지 않았다. 이상(理想)이 아니라 이상(異相)이었다. 소류금은 거친 숨을 내쉬면서 문무현금의 줄을 꽉 쥐었다. 손이 떨렸지만 현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이 썩어 빠지고, 남을 인정하기를 죽었다 깨어나도 싫어하는 무림을 바꿔 보기로 마음먹었다.” 소류금이 입술을 혀로 적셨다. “그 순간, 그들이 나타나더군.” 주서천이 처음으로 반응했다. “암천회.” “무림의 뒷면. 시커먼 하늘. 보이지 않는 세력. 재미있지 않느냐. 정도나 사도, 마도도 아니라니 말이다. 마음에 들었고, 그만큼 힘도 있었다. 그래서 흔쾌히 그들의 손을 붙잡고, 무림을 전복하기로 마음먹었다.” 정복이 아닌 전복. 소음문주, 음신 소류금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생각이 좀 달라졌다.” 소류금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회의 대계를 망가뜨린 장본인이고 천권을 죽인 놈이니 호기심이 생겨 이야기 좀 나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