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Heaven Sword RAW novel - chapter 21
당시만 해도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이토록 처참한 기분에 빠지
게 할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죽
은 시신은 자주 보았기에, 자신도 가볍게 일을 끝날 줄 알았
다. 그런데 가슴이 꽉 막힌 듯 착잡해지는 기분은 무엇이란 말
인가.
“약속대로 비건이 제 일급 관찰 대상자로 선정된다면 관찰자
로 유매를 밀어주겠어. 그리고……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울리
지 않는 말이지만…… 유매는 비건을 잊지 못했어. 잊은 척 할
뿐이었지. 비건을 만난 다음부터 겉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
어. 알아? 알고 있겠지. 말하고 싶지는 않을 테고. 혹시 비건
과 싸울 일이 생긴다면 그냥 물러서. 검을 뽑는다면…… 비극
이지. 유매가 아니라 내게. 그런 일은…… 휴우! 내가 할게.”
말을 마친 범위는 나무둥지에 걸려있는 안개를 실실이 흩트
리며 떠나갔다.
그는 끝내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유소청도 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전에는 부담스럽지 않았는데……
그것이 모두 적엽명을 아직 잊지 못하기 때문이란 말인가.
그를 만난 그 날 새벽부터 불면(不眠)에 시달리는 것이 모두?
야속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결국 죽고 말 것이라는 냉
정한 생각과 그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모두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란 말인가? 팔 년이나 지났는데? 방심(芳心)이 저지른
풋사랑에 불과했을 뿐인데?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
그가 제일급 관찰대상자로 선정되었을 경우, 관찰자가 되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피냄새가 역겹게 코를 찌른다.
* * *
“뇌주반도에서 좀처럼 들어오지 않던 황함사귀가 들어왔습니
다. 백석산의 황유귀, 만천강의 수귀, 감은성의 호귀도 움직였
습니다.”
가물함 수좌 하파의 음성은 무척 나직하고 단조로워 듣기에
따라서는 권태롭게까지 들렸다.
“사귀? 하하하! 그럴 줄 알았어. 놈이 기댈 곳이라고는 그
쓰레기들 밖에 없겠지. 불쌍하군. 알아봤나?”
“알아봤습니다. 적엽명은 해남도를 벗어난 직후 적수노인(赤
手老人)이라는 흑도 거물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적수노인?”
“살인청부의 대가입니다. 일 년에 한 건만 청부를 맡는 것으
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죽인 인물도 대단하겠군.”
“죽인 인물들보다는 아직까지 활동한다는 사실이 대단합니
다. 살수계(殺手界)는 무림과 달라서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
하지 않습니다. 그럴 경우 설혹 목숨을 보존했다 할지라도 무
림을 떠나는 것이 그들의 법입니다.”
“아직까지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았다?”
“오십 년 동안입니다.”
“오십 명이 죽었겠군.”
“적엽명은 최근에까지 적수노인의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남만
(南蠻)으로 갔습니다.”
“남만?”
“그 후로는 행적이 묘연합니다.”
“후후! 하파가 알지 못하는 정보가 있던가?”
하파는 한광의 비웃음을 귓가에 흘려버리며 담담히 말을 이
었다.
“적엽명의 행방이 묘연해짐과 동시에 명부객이란 자가 세상
에 등장했습니다.”
돌연 한광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들은 적이 있다.
남만(南蠻) 최고의 살수(殺手).
묘족(苗族)들에게는 죽음의 신으로 군림하는 자.
그는 묘족이 아니다. 한인이다. 그것도 젊은 사람.
한인이 왜 묘족 땅을 밟았고, 살수업을 하는지, 그를 움직이
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은형술(隱形術)이 신기(神技)
에 달했다는 말만은 거짓이 아닌 것 같다.
하파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것으로 하파의 의사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그러니까 적엽명이 명부객이라는 살수?”
하파는 적엽명에 대해서는 할 말을 다했다는 듯 대답도 하지
않고 정성스럽게 묶은 두루마리 서신을 내놓았다.
“뭐야?”
“연서(連書)입니다.”
“연서?”
“배에 승선했던 사람들에게 연서를 받았습니다.”
한광은 하파의 입술이 열렸다 닫히는 모습을 관찰했다.
종알종알 잘도 말한다.
늙은이의 입술이라 거무죽죽하고, 메말랐지만 거침없이 종알
대는 입술이 탐났다. 여자가 저렇게 종알댔다면 당장 베어냈을
텐데.
“우화는 명부객을 불렀습니다. 흑월이란 명부객을 지칭하는
말……”
사라진 적엽명, 새롭게 등장한 명부객.
우화가 명부객을 불렀는데 적엽명이 해남도에 나타났다.
“우하하하핫!”
한광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대소를 터트렸다.
적엽명의 기도가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더니 겨우 살수의 기
도란 말인가.
살인 대상자가 허점을 드러낼 때까지 처마 밑에 쭈그려서,
쥐들이 바글대는 대청바닥에 드러누워서, 냄새맡기도 역겨운
뒷간 오물을 뒤집어쓰고 눈만 반짝이고 있는 살수.
적엽명과 살수의 일반적인 모습을 연상하자 터져나오는 웃음
을 참을 수 없었다.
하파는 한광의 돌발적인 행동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
이 할 말을 담담하게 흘려냈다.
“소공께서 우화대원을 징계하려 하실 때, 적엽명이 ‘흑월이
란 말은 죽음을 뜻하는 여족인의 흑호’라고 두둔했고, 그들을
비가에 데리고 갔습니다. 흑월, 우화와 연관이 있으니 관찰대
상자로 선정하는 것은 문제없습니다. 바다에 투신한 여족인이
‘흑월이 유살검 한광의 목을 벨 것이다.’라고 떠들고 다녔더군
요. 소공께서는 이해 당사자이시니 직접 나설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한광은 웃음을 멈추고 호기심 깃든 얼굴로 하파를 바라보았
다.
전자의 말은 사실이지만 후자는 하파가 조작해 낸 말이다.
하지만 연서에는 그런 사실이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으리라.
놀라운 일이다.
여족인은 앉으라면 앉고, 누우라면 눕고, 죽으라면 죽는시늉
까지 하는 족속들이지만 동족을 아끼는 마음은 잣대로 잴 수가
없다.
우화에 대한 충성심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에게 우화는 하늘이다. 우화는 땅이고, 식량이다. 우화
는 그들의 전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했기에, 어떤 방법을 사용하
였기에.
혈연으로 맺어진 것도 아니고,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아니, 얼굴 한 번 본적도 없으면서, 겉으로는 바보같이 헤헤거
리며 순종하면서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는 인간들에게 그들의
하늘을 배신하게 만든 재주는 무엇일까.
그들이…… 우화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인간들이 우화가 고용
한 살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어? 우화가 파견한 우화대원들이 무
슨 말을, 무슨 행동을 했는지 연서에 적어?
하파는 보름만에 모든 일을 끝냈다.
연서는 보지 않아도 된다. 연서를 아버지에게 들이밀면 적엽
명은 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 하파가 하는 일은 언제나 완벽
하니까.
“지금까지는 죽음의 길입니다.”
“……?”
“이대로 진행한다면 적엽명을 죽일 수 있습니다. 중양절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당장.”
“여운이 남는 말 같은데.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이대로 하면 적엽명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제일급 관찰대상자로 선정됨과 동시에 죽게 됩니
다.”
“이대로 하면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중양절에 죽이시기를 바란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된다
는 말입니다.”
“으음……! 하파…… 알아내지 못했구나.”
한광은 신음을 터트렸다.
하파는 쓸데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뒷말을 아
리송하게 했을 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게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적엽명에 대해서 알아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비파를 동원했는데…… 적엽명의 종적은 중원
천지 어디에도 없습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적엽명
이 명부객일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
“……”
한광은 하파를 주시했다.
쭈글쭈글하니 광택을 잃은 피부, 혼탁한 눈, 앞니가 빠져 말
을 할 때마다 보기 싫게 드러나는 잇몸. 번지르한 의복이 아니
다면 다리 밑에서 동냥 밥을 얻어먹어도 하등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인물.
저 늙은이의 머릿속에는 얼마나 많은 계책이 숨어있을까.
하파의 얄팍한 입술이 다시 움직거렸다.
“흑월이 등장해야 합니다. 해남파 무인들 중 한 명 정도는
죽어야겠죠. 그렇게 되면 적엽명이 흑월이라 할지라도 쉽게 움
직이지 못할 겁니다. 중양절까지는 살릴 수 있는 방책이지요.
제 일급 관찰대상자로 선정된다 하더라도.”
“놈이 파랑검을 얻었다고 들었는데? 그런데도 중양절까지 기
다려야 하는 이유는?”
“기다리면 두 가지 이득이 있습니다.”
“……”
한광은 흥미가 생긴 듯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적엽명촌경. 적엽명은 비가를 밝혀 줄 횃불입니다.”
“같잖은 소리!”
하파는 거친 말에도 전혀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제가 적엽명이라면 우선 비가를 일으키겠습니다. 그래야 해
남십이가로 인정됩니다. 해남파에 들어설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되고, 중양절에 소공과 겨룰 수 있습니다.”
“무슨 힘으로.”
“말입니다.”
“말?”
“적엽명이 뚫고 나갈 길은 말밖에 없습니다. 황담색마. 적엽
명은 황담색마를 찾을 겁니다.”
“후후! 어폐(語弊)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황담색마라면
더욱 길이 없지. 비가가 몰락한 뒤로 황담색마는 강성오가에서
가지고 있는 몇 필 밖에 없어. 우리가 움켜쥐고 있는 한 종자
를 얻을 수 없는데 무슨 수로……”
“있습니다.”
“……?”
“관부에 종모마 세 필이 있습니다. 뇌주반도에 팔려나간 황
담색마를 되살 수도 있습니다. 우화도 황담색마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뜻밖에도 황담색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래서?”
한광은 호기심이 치미는지 상체를 앞으로 바싹 기울였다.
“황함사귀는 수전노(守錢奴)라고 소문나있는 인간입니다. 그
는 분명 황담색마를 살만한 돈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또 호귀
도 있습니다. 노노가 창기(娼妓)들이 벌어들이는 돈은 동전 몇
닢에 불과하지만 호귀라는 인간에게 모였을 때는 큰돈이 됩니
다. 그들이 적엽명에게 모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황담색마를
팔려는 사람만 나타나면 비가는 옛날의 성세를 일으킬 수 있습
니다. 그리고 적엽명이 상귀(商鬼)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됩
니다.”
적엽명의 몸 속에 흐르는 피 중에 절반은 여족인의 피다. 많
이 생각해 줬을 때 그렇다. 육삭둥이이니 아버지가 누군지 모
르고, 아버지 또한 여족인이라면- 거의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
고 있지만- 적엽명은 분명 여족인이다.
해남파 무인들은 여족의 관습에 비유하여 적엽명에게 귀(鬼)
를 붙여서 불렀다. 상귀라고.
“비가가 몰락한 후, 황담색마의 맥은 끊어졌습니다.”
“종부술(種付術)을 모르기 때문 아닌가?”
“이제는 알게 됩니다. 적엽명이 왔으니까요. 비가보에 말에
미친 인간을 심어놨습니다. 그 자라면 종부술을 파악해 낼 겁
니다. 소공께서 황담색마와 종부술을 가지고 계신다면 그것이
바로 일가(一家). 십이대 해남오지 건곤검 한혁님께서 백 년
만에 태어난 귀재라 하더라도, 해남오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수굴일지라 해도 비가를 얻으면 장문인직은 소공님 차지. 적엽
명은 차후에 죽여도 늦지 않습니다.”
하파는 죽이라는 말을 할 때도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후후! 꿩 먹고 알 먹으란 말이군.”
한광은 옷을 툭툭 털었다. 첫눈처럼 새하얀 무복에 먼지라도
앉은 냥. 습관이었다.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한가에서 비가의 종부술까지 얻으면 강중약으로 대변되는
해남십이가의 균형이 무너집니다. 한가가 최정상으로 올라서게
되고 차후로…… 해남파 장문인직을 두고 해남오지들간에 다툼
이 벌어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재미가 없어진다는 말이군.”
“때문에…… 한가에서 종부술을 얻었다는 소식은 가장 늦게
알려져야 합니다. 완벽하게 종부술을 얻은 다음. 그리고 자칫
발목을 잡고 늘어질 수도 있는 비가 일족을 완전히 몰아낸 후
에 말입니다.”
“비가가 재건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지금 흑월로 몰아
붙여도 안됩니다. 숨통만 간신히 붙어있는 상태로.”
“세 가지 안배를 동시에 펼칩니다. 먼저 장문인을 움직입니
다.”
“후후후! 많이 건방져졌군.”
“죄송합니다. 장문인께서 움직여 주셔야 합니다. 두 번째는
각 세가마다 적엽명에게 혈채(血債)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비가를 집적거릴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 일들은 누가 하나?”
“제가 합니다.”
“간단하군.”
“적엽명과 동조한 네 귀신은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비록 외면 받는 인간들이지만 그래도 귀자가 붙은 인간들. 막
상 그들을 죽이면 여족인들은 빠른 속도로 우화에 흡수됩니
다.”
‘마음에 안 들어.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마음껏 청소할 수
없다니.’
한광은 마음속에 있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언젠가 해남파 장문인으로 등극하는 날, 실행으로 옮기면 된
다.
“해남도에서 축출하는 선에서 마무리.”
‘머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 똑같겠지? 지혜가 뛰어난 인간
이라도 죽으면 똑같아. 역시 육체의 아름다움이야.’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사내가 문제입니다. 무인인 것 같은
데 정확한 신분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두 놈……”
“비파가 이미 장문인께 보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하파, 네 정보는 나보다 빠르구나.”
한광은 하얗게 웃었다.
하지만 하파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점이 기분 나빴
다. 하파는 언제든지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신경질 나게 목숨처럼 값없는 것이 없다는 투로.
“적엽명을 제 일급 관찰 대상자로 선정하시되, 관찰자는 오
진검 범공자님에게 양도하시고 소공께서는 무예 수련에 전념하
시기를. 명부객은 한 번도 꺾이지 않은 무적의 무인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나도 무적이야.’라고 말하고 싶지만 실제로
한 번의 패배가 있지 않은가. 빌어먹을 놈의 패배.
한광은 기분이 무척 나빠져서 의자에 눕다시피 몸을 기댔다.
기분이 한 번 나빠지면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피를 보면 좋을 텐데…… 그렇다! 소예를 가졌던 두 번째 사
내, 단대인! 그 자를 잊었다. 소예는 죽었다. 선장 추형도 죽
었다. 단대인이 죽지 않는다면 죽은 영혼만 불쌍하다.
한광은 하파와 말을 더 나누기 싫었다.
그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힘줄은 불끈 치솟았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백짓장처럼 창백했던 나신(裸身), 움직임이 시간 너머로 사
라진 아름다움, 황홀……
“기회가 좋습니다. 마지막 검을 시험할 상대로 적엽명……
이만하면 마지막 검을 수련하실 생각이 치밀지 않습니까?”
하파는 하얗게 웃었다.
단대인은 약이가 중 단가주의 둘째형이다.
단가는 해남도 색염(色染)을 거머쥐었지만 수요가 많지 않아
가세가 부유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단가 역시 한족이다.
초기, 해남도에 들어온 선조들은 가세가 모두 그만그만했고,
이족(異族)으로부터 목숨과 재산을 지켜야 하는 이유도 같아
쉽게 뭉칠 수 있었다.
단가는 염색을 하며 익힌 손놀림을 무공에 접목시켜 쌍검법
을 창안했다.
용봉쌍검(龍鳳雙劍).
수많은 접전을 통해 일 대 일로 싸우는 것보다는 이 대 일로
싸우는 것이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인합격술(二人合擊術)
을 한 몸에 지닐 수 없을까 고심하던 끝에 창안해낸 검법이다.
창 과 창이라면 창대가 길수록 유리하다. 검 대 검이라면 검
하나보다는 두 개가 좋다.
생각은 간단했다. 하지만 검 두 개를 한 몸에 지니기 위해서
는 수많은 시행착오(施行錯誤)를 거듭해야 했다. 어설픈 검법
때문에 죽어간 사람이 얼마인지.
다행스럽게도 단가 식솔들이 주업(主業)으로 택한 염색은 막
대기 두 개를 필요로 한다. 염료에 천을 담고 휘저을 때도, 건
져낼 때도, 천을 쫙 펴서 말릴 때도.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용봉쌍검은 해남파 절기 중 하나
가 되었다. 비록 비가의 일장검법, 강가의 잔월검법과 함께 약
삼가로 분류된 검법이기는 하지만 세상 이치는 만류귀종(萬流
歸終)이라, 숙련도에 따라서는 상대하기가 극히 난해한 검법이
었다.
단가주 단적(段積)은 용봉쌍검을 극성으로 익혀 역대 가주
중 제일이라는 칭송을 받는다. 단가주의 둘째형인 단성(段星)
도 과거 해남오지에 강력하게 도전했던 인물이다.
단성은 실종된 지 이틀만에 단가보 뒷 야산에서 발견되었다.
피살(被殺)이었다.
흉수는 극히 깨끗하고 정교한 무공을 지닌 듯 수리도(手裡
刀) 한 자루를 정확히 심장에 틀어박았다.
고양이 두 마리도 죽었다.
단성은 고양이 두 마리를 친자식 마냥 애지중지 했다. 백설
처럼 하얀 털을 가진 암컷과 흑오석(黑烏石)처럼 까만 털에 윤
기가 자르르 흐르던 수컷.
두 마리의 고양이는 주인을 따라 심장에 각기 하나씩의 수리
도를 박고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사인(死因)이 너무 깨끗하고 단순해서 무공의 종류 및 정도
를 알아낼 수 없었다. 단서라고는 오직 하나, 흉수가 자신이라
고 알리기라도 하듯이 시신 곁에 떨어져 있던 마분지(馬糞紙)
한 장이 고작이었다.
마분지에는 숯으로 그린 검은 달 하나가 둥그렇게 그려져 있
었다.
흑월.
흑월의 존재는 적엽명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들불 번지듯 퍼
졌으며, 해남 십일가는 각기 나름대로 대비책을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들은 무공을 오성(五成)도 채 못 익힌
무인들. 그들은 살수 대상으로 가장 적합했다.
몰랐다. 흑월이 단성을 죽일 만큼 고절한 무공을 지녔을 줄
은.
3
늑대는 영리하며 호기심 많은 동물이다.
인간들처럼 공동체(共同體)를 형성하고 살며, 가족들간의 유
대도 유별나게 끈끈하다.
새끼가 많이 늘어 대가족이 형성되더라도 무리를 이탈하거나
독립된 생활을 하는 놈은 없다. 먹이를 잡으면 가족 전부가 나
눠 먹고, 새끼를 나면 가족 전부가 나서서 돌보아준다.
늑대는 송아지나 염소 한 마리를 앉은자리에서 먹어치우는
대식가(大食家)다. 적지 않은 양이다. 어떤 때는 몇 날 며칠동
안 사냥감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하지만 잔뜩 굶어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은 경우라도 사냥을 하면, 아무리 적은
고기일망정 가족 전부와 나눠먹는다.
계급질서는 엄격하다.
계급은 무리들의 대장이 정해주기 때문에 수시로 변동되지만
어느 놈도 대장의 명령을 어기지 않고 받아들인다.
가장 밑의 계급으로 밀려난 놈은 구박덩어리로 전락한다.
이 놈이 와서 깨물고, 저 놈이 와서 으르렁거리고……
먹이를 먹을 때도 마찬가지다. 구박덩어리는 순서를 기다려
가장 나중에 먹어야 한다. 만약 순서를 어기게 되면 동료들의
공격을 받는다. 하지만 상처를 입는 경우는 거의 없다.
늑대는 동료의 머리를 단번에 으스러트릴 만한 턱뼈를 가지
고 있지만 가족들에게는 그저 장난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구방덩어리는 말 그대로 구박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보호의
대상인 것이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에서 늑대만큼 약자가 보호받는
경우도 드물다.
그런데 이 놈은 어쩌다가 동족들에게 공격을 받았을까?
적엽명은 염왕의 갈기를 어루만져 주었다.
늑대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세간에서 알고 있는 말들-
인간이 늑대에게 물려죽었다는-은 모두 잘못된 생각에서 나온
꾸며진 말이다.
늑대는 생긴 것 같지 않게 영리하고 온화한 성격을 지녔다.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며칠 간만 친근하게 대해주면 늑대는
먼저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다. 친구라도 되는 냥 장난도 친다.
입을 맞추기도 하고 앞발을 내밀기도 한다.
“앞으로는 네 놈도 할 일이 많을 거다. 말들을 놀라게 해서
는 안 돼. 알았지?”
우우우우우……!
염왕은 고개를 쳐들고 구성지게 울부짖었다.
“여기 꼼짝 말고 있어. 내게 장난치면 안 돼.”
우우우우……!
염왕은 섭섭한 듯 울부짖었지만 말귀는 알아들은 듯 했다.
적엽명은 파랑검을 들고 일어섰다.
보검(寶劍)을 제련(制鍊)할 때는 혼(魂)을 바쳐야 한다.
장인이라면 한 번쯤은 보검을 제련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
련이고, 보검제련을 시도해 보지만 성공한 장인은 극히 드물
다.
너무 힘들고 고된 길이기 때문이다.
보검을 제련하려면 제일 먼저 길일(吉日)을 잡아야 한다.
자년(子年) 신월(申月) 계도일(癸道日).
길일을 택했으면 칠 일간 목욕재계(沐浴齋戒)하여 몸과 마음
을 정갈히 한다.
칠 일간의 목욕재계가 끝나면, 삼 일동안 주야(晝夜)로 염주
(念呪)한다.
눈을 붙이면 안 된다. 수면을 취해서도 안 된다. 망상(妄想)
에 사로잡혀서도 안 된다. 오로지 염주에 몸과 마음을 흠뻑 쏟
아야 한다.
해남도의 보검은 모두 오지산 철재(鐵材)를 사용한다.
무게 세 근의 묵철(墨鐵).
염주가 끝나면 신묘(神廟)에 제(祭)를 올린 후, 일기(一氣)
로 검을 쳐낸다.
길이는 두 자 네 치.
검은 제련만 했다고 해서 모두 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양이 아무리 좋고, 날카롭기가 머리털을 베어낼 정
도라 해도 보검이라 부르지 않는다.
일기로 쳐낸 검은 사십구 타신(打神)을 하기 위해서 명찰(名
刹) 정내(鼎內)에 집어넣는다.
사십구 일간 매일 하루 마흔 아홉 번씩 염주를 올리고, 염주
가 끝날 때마다 검을 꺼내 타검(打劍)한다.
사십구 타신까지 마친 검을 완검(完劍)이라 한다.
완검은 금으로 된 상자에 넣고 옥인(玉印)으로 수결(手結)한
후, 다시 신묘로 모신다.
이 때 주의할 점은 검을 새워두어야 한다는 것.
사십구 일간 신묘에 모시고 염주를 올린다.
사십구주(四十九呪)가 끝나면 즉시 검을 들고 산 속에 들어
가 검을 영기(靈氣)를 시험한다.
검과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야 한다.
검과 몸이 한 몸이 되었다는 느낌이 진하게 전달되어야 한
다.
영기를 시험하는 장인이나 무인의 기(氣)가 어지럽다면 검은
응답하지 않는다. 초식을 전개할 때 뻑뻑한 느낌이 들고, 손에
찰싹 달라붙지 않는다.
이럴 때는 다시 사십구주를 올린 후, 재시용(再試用)한다.
재시용을 할 때도 영기가 통하지 않으면 검을 분지른 후 매
장한다.
영기가 통한 검은 즉시 신묘로 돌아와 손잡이에 수결을 친
다.
까다롭기 이를 데 없다.
중오가(中五家) 중 일가인 조가(趙家)는 해남도에서 소용되
는 모든 병장기 및 농기구를 만들어 낸다.
당연히 조가에서는 이름난 장인을 많이 배출했다.
그들이 남해삼십육검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