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Heaven Sword RAW novel - chapter 43
허나 전부 목이 잘렸다. 모두들 목만을 잘라냈다. 몸통을
자를 생각은 왜 하지 않았을까.
일기(一氣) 때문이다.
목을 일기로 쳐낼 수 있다면 몸통 또한 일기로 쳐낼 수 있
다.
그런데 전방은 물소를 베어내지 못했다.
그는 물소를 물소로 보지 않고 적엽명으로 보았다. 물소가
눈을 찔끔거리는 순간, 그는 적엽명의 반격을 보았고, 검이
흐트러졌다.
‘졌어.’
전방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안 돼…… 너무 강해……’
전방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숨죽여 흐느꼈다. 적엽명
이 괴물처럼 보였다. 완전히 양단되지 않은 물소가 적엽명의
끈질긴 생명처럼 보였다.
“베지 못했구나.”
문득, 전방의 등뒤에서 힘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가주!”
전방은 벌떡 일어섰다.
“혈이가 돌아오면 경거망동(輕擧妄動) 하지 말라고 일러
라.”
“가주님……?”
“여섯이 죽었다. 피 값을 받아내야지.”
“그럼 제가.”
전팽은 무서운 눈으로 전방을 쳐다보았다.
“죽은 놈이 어딜 나서겠다고! 꼭 육신이 죽어야만 죽는 것
이라더냐!”
전팽의 일갈은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봤을 것이다. 비가의 비참한 모습을. 너하고 전혈이 무너
진다면 전가는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만다. 여족 놈들이 벌떼
처럼 들고일어날 것이고 검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는 놈들은
눈앞에 떨어진 콩고물을 주워 먹느라고 정신 없을 게다. 내
신변에 불상사가 생긴다면, 우선 자중해라. 적엽명…… 그 놈
은 우리를 일깨워 주었다. 너무 오만했어. 우물안 개구리였
어. 아무리 놈이 전검을 익혔다지만……”
전팽은 허탈하게 웃었다.
전가팔웅은 절대 약하지 않다. 전남은 단신으로 칠살귀(七
殺鬼)라는 사파의 거두 일곱 명을 죽이고 남해삼십육검이 되
었다. 전동은 뇌주반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사수패마(四瘦覇
魔)를 죽였다. 전비, 전용, 전용, 전명…… 그들도 결코 남
못지 않은 무공을 뽐냈다.
적엽명이 너무 강하다. 그가 강한 것인가, 전검이 강한 것
인가.
전가에는 팔웅 외에도 본가(本家)를 지키는 십삼효(十三梟)
가 있고, 각 농장을 관리하는 사십팔두(四十八頭)가 있다. 또
한 사십팔두 밑에는 검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자가 십여
명씩은 있다.
모두 오백여 명에 이르는 무인들.
중원에 나가면 일각을 휘어잡을 검가(劍家)이거늘.
“잘 봐라.”
전팽은 유언이라도 하듯이 비장하게 말한 다음 검을 뽑아들
고 물소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쉬익!
검이 나는 것도 보지 못했다.
어느 새 검집을 빠져 나온 검은 물소의 한 가운데를 양분해
버렸다.
“우어헝!”
물소를 몸이 잘린 다음에야 울음을 토해냈다.
“이것이 쇄각대팔검 중에서 모든 허(虛)를 제거하고 실(實)
만 뽑아낸 쾌(快)다. 전검은 감각의 검, 완벽한 환검이나 완
벽한 쾌검으로 상대해야 한다.”
전방은 멍하니 물소를 바라보았다.
가주나 자신이나 같은 삼십육검이다. 그러나 절대 초강자
반열에 올라선 사람과 자신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절감
했다. 만약 가주와 검을 들고 마주섰다면…… 검은 비정하다.
실낱같은 차이만 있어도 명확히 선을 그어버린다.
모든 허를 제거하고 실만 뽑아낸 쾌.
가주는 쇄각대팔검에 내포된 변화를 단 일 검에 펼쳐낼 수
있다.
그것은 수련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신과 기와 몸과
검이 혼연일체가 되어야만 가능하다.
‘반본환원(返本還源)…… 그래, 반본환원의 검이다. 나는
아직 인검구망(人劍俱忘)도 완성하지 못한 상태……’
“나는 혈이가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은거했다는 소리를 들었
을 때 기뻤다. 수굴일지나 탐내서 해남오지로 머물렀다가는
대검(大劍)을 얻지 못해.”
‘내가 그랬지. 야속합니다. 이제야 그런 말씀을 해주시다
니. 정말 야속합니다.’
“물소의 뼈를 잘 추려놔라. 그리고 혈이가 돌아오면 보여줘
라. 내가 살아오면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죽더라도…… 가문
을 보존하라 일러라.”
“가주님!”
전방은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전팽의 말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비장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검은 탈혼검. 하지만 탈혼검을 능가
하는 검이 있으니 전검이라. 하하하! 헛된 말이다. 마음을 어
둡게 하는 미혹(迷惑)이야. 검의 궁극에 오르면 탈혼검도 전
검도 없는 법이거늘. 적엽명은 팔 년 만에 전검을 얻었다. 너
희도 확신을 가지고 부지런히 노력해라. 전검을 익히라는 말
이 아니다. 시간이 다소 오래 걸리더라도 쇄각대팔검을 참오
하고 또 참오해라. 그 속에 입전수수(入廛壽手:검기(劍氣)를
말끔히 씻어내고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단계. 검의 끝.)가 있
으니.”
전팽의 결심은 너무 확고해서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
지금 시점은 이미 쏘아진 화살이나 진배없다. 전가팔웅 중
여섯 명이 죽었는데 물러설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적엽명을
베지 않는다면 무슨 낯으로 해남도를 돌아다닐 수 있겠는가.
전팽은 떠나갔다.
전방은 가주가 떠나가는 모습을 일부러 보지 않았다. 볼 수
가 없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뒷모습. 전방은 싸늘하고
당당한 가주의 모습만 기억하고 싶었다.
* * *
“장군! 마수광의가 죽은 지 석 달이 다 되어 갑니다.”
젊은 부장은 화가 치민 듯 했다.
이해할 수 있다.
해남도에서 죽은 신승(辛昇)은 바로 앞에 앉아있는 부장이
천거했다. 뛰어난 용맹(勇猛), 빈틈없는 지략(智略). 무엇 하
나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건만 물에 퉁퉁 부은 시신이 되어
떠올랐다.
가규(賈奎)도 부장이 천거했다.
성격이 잔인, 포악하여 적들로 하여금 붉은 투구만 보아도
바지에 오줌을 지리게 만든다는 맹장(猛將).
무공은 강하지만 성격이 너무 과격하여 이번 일에는 적합하
지 않다는 중론(衆論)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는 파견되
었다. 우선 광동(廣東) 출신이어서 광동어(廣東語)에 능통했
고, 뇌주반도나 해남도에 대한 지리도 잘 알았다. 그는 해남
도에서는 관부의 존재가치가 극히 미미하다는 것도 잘 알았
고, 해남파의 전횡(專橫)도, 우화대간의 알력도 익히 알았다.
어떤 면에서는 가장 적임자이기도 했다.
결과는 허탈했다.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자진(自盡)했다. 여모봉에서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 목을 멘 시체로 발견되었다. 몸에는 아무 상처
도 없었다. 독살(毒殺) 당한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경주지
부에서는 자진으로 판명했고, 그는 그렇게 묻혔다.
월도(月刀)에 맞아 투구가 찌그러져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던 맹장이 자진이라? 그는 정말 자진했을까? 진실은 오직
그가 목을 메었던 느티나무만이 알 것이다.
신승과 가규가 죽음으로써 소장(少將)은 내세울만한 부하장
수가 없다. 다른 장수들도 거느리고 있지만 혁혁한 공을 세우
던 두 장수가 빠진 자리는 너무 컸다.
“마수광의는 일부로 해남파를 건드렸다고 했네. 강임을 죽
이고 잔월검보를 탈취했다고. 맞나?”
“맞습니다.”
“그런 일이 또 있어서는 안되겠지. 연락방법은 개선했는
가?”
“……”
소장은 할 말을 잊었다.
노장군과 해남도를 연결하는 끈은 경주자사가 쥐고 있다.
경주자사는 노장군의 뜻을 알고 있으며, 해남도에 파견된
맹장들이 정보를 거둬들이면 즉시 노장군에게 전달하는 역할
을 맡았다.
그 선이 차단되었다.
노장군이 파견한 맹장들은 밀서를 경주자사의 손에 넘겨주
지도 못했다.
어찌된 일인지 군부에서는 내놓으라 하는 사람들이 해남도
에만 들어가면 물에 빠진 모래알처럼 흔적이 사라져 버렸다.
시신만은 정확히 돌아왔다.
경주자사는 여러 경로를 통해 시신을 입수했고, 감쪽같이
해남도에서 빼돌렸다. 그 때는 방해가 없었다. 경주자사가 기
울인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길을 막아서는 노파 한 명 없
었다.
노장군이 파견한 밀사(密使)도 아무 탈이 없다.
밀사는 아무런 탈 없이 경주자사를 만났고, 회답도 쉽게 받
아왔다.
일련의 사태로 미루어 볼 때,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경주자사가 맹장들을 죽인 원흉이다.
가장 가능성이 농후하다. 경주자사는 맹장들이 수집한 정보
를 받았지만 노장군에게 전달하지 않았을 게다. 그리고 정보
를 전하는 순간, 죽음을 내렸겠지. 그 전에 죽였을 수도 있
다. 노장군이 누구를 파견하는지는 경주자사만이 알고 있고,
맹장들이 해남도에 도착하는 그 날 죽음을 내렸을 지도 모른
다.
해남파가 맹장들은 죽인 원흉이다. 그럴 수 있다. 해남파가
모든 일의 원흉이라면 가공할 무위(武威), 절대적인 인맥(人
脈)을 고려할 때, 경주자사의 이목을 가리는 것쯤은 누워서
떡 먹는 것보다 쉽다.
우화도 빼놓을 수 없다.
우화야말로 가장 위험한 인물이다.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다. 하기야 해남파를 휘어잡
고 있는 해남파에서도 종적을 잡지 못한 인물인데, 경주지부
에서 사람 몇 명 나선 것으로는 그림자도 잡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정체를 모른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그는 흉수로 가장 유력하
다.
우화대는 인간에게 대항하는 개미와도 같다. 극히 미미해서
눈에 띄지도 않는다. 대항한답시고 어설프게 기어올랐다가는
밟혀죽기밖에 더하겠는가.
우화는 개미들을 끌어 모아 인간과 엇비슷한 크기로 만들려
고 한다. 그러자니 돈도 많이 들 게다. 무공도 긁어모을 수
있는 데로 긁어모아 전수해야 하고, 무공을 익힐 사람도 구해
야 한다. 인맥이 있으면 더욱 좋다. 중앙(中央) 관직(官職)에
있는 사람이 알아두면 그 보다 더 큰 힘은 쉽게 찾을 수 없
다.
누가 감히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일까. 그들
이 저지르고 있는 일은 무엇일까.
“아직 연락방법을 못 찾은 게로구먼.”
“죄송합니다.”
소장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연락방법에 관한 말만 나오면 대답이 궁색했다.
소장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밤을 새워가며 참장(參
將)들과 숙의를 거듭했고, 실행에 옮겨보기도 했다.
전서구(傳書鳩)를 이용하는 방법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전서구라면 경주자사를 거치지 않고 파견한 맹장과 노장군
사이의 끈을 연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실행에 옮겨 보았다.
병사 중에서 몸이 날랜 병사를 뽑아 해남도에 들여보냈다.
그가 받은 임무는 단지 전서구를 띄우는 것뿐. 허나 그는 전
서구를 띄워보지도 못한 채 싸늘한 시신이 되어버렸다.
병사가 해남도에 들어간 것은 경주자사도 모른다. 노장군도
모른다. 오직 소장만 아는 비밀이다. 그런데 죽었다.
배다. 배를 타고 들어가는 사람들은 관원으로부터 신분을
확인 받아야 한다. 해남파도 있다. 해남도로 들어가는 배의
대부분은 해남파에서 소유하고 있고, 그들은 낯선 자를 무척
경계한다.
또 한 가지 방법을 실행에 옮겼다.
관선(官船)을 밀선(密船)으로 개조하여 몰래 침투시키는 방
법이다.
그 역시 실패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조롱에서 전서구
를 꺼내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해남도 같은 외진 섬에 해남파라는 거대 문파가 존재하게
된 배경은 해적이었다. 살기 위해서는 해적들과 싸워야 했고,
그들을 이기기 위해서 무공을 연마했다.
경계가 삼엄한 것은 필연이다.
현재는 해적들도 해남도 근처에는 가지 않지만, 아니 경주
해협 부근에서 아예 자취를 감춰버렸지만 옛날부터 습관화되
어 온 경계망은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해남도에서 사람을 죽인 자는 뼈를 묻어야 한다.
해남파가 정한 해남 율법이다.
현재까지 해남율법이 깨지지 않고 존속하는데는 사면 바다
를 거대한 그물망으로 뒤집어 씌워놓은 듯한 경계망이 큰 몫
을 하고 있다.
먼저 사건에서는 경주자사와 해남파가 모두 연관되었고, 나
중 사건에서는 해남파만 연관되었다. 우화는 양쪽 모두 빠졌
다. 그렇다고 해남파가 일을 벌이고 있는 장본인이라고 단정
할 수도 없다.
그들은 도대체 언제 죽이는 것일까?
해남도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사람은 마수광의다. 정보를
캐내는 것이 주업(主業)이고, 잠복기간이 길었다는 점을 감안
하더라도 그는 오래 살아남았다.
바다가 사면을 에워싸고 있는 섬.
하늘로도, 바다로도 소식을 전하지 못한다면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음! 방법이 없는데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홍암장군을 파견해 주십시오.”
“홍암이라면 될 것 같은가?”
“홍암장군은 스물 한 번을 싸워서 열 아홉 번을 이겼습니
다. 홍암장군이야 말로 승리의 화신. 홍암장군이라면 해남도
에서 벌어지는 일을 파악해 올 겁니다.”
“똑 같은 소리를 또 듣는군. 신승장군 때도, 가규장군 때도
자네는 그 말을 했어.”
“……”
“그렇다고 이렇게 앉아서……”
“홍암을 잃고 싶지 않네.”
소장은 불끈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홍암장군은 여섯 배나 되는 대군에 포위를 당하고도 오히려
대승을 거뒀다. 진계성(辰溪城) 전투는 너무 유명해서 코흘리
개까지 알고 있지 않은가. 축평(逐平) 전투에서는 적장(敵將)
의 수급을 아홉이나 베었다.
명(明)이 건국되고 난 다음에도 국경 부근에서는 적지 않은
싸움이 벌어졌고, 명이 건국되고 십 년이나 지났지만 적엽명
이 공을 세울 기회는 많았다. 그리고 그는 전신(戰神)처럼 싸
웠다.
홍암장군이라면 될 것 같은데.
소장은 야속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장군! 장군께서는 변했습니다. 세상이 치세(治世)에 접어
들면서 정치를 너무 의식하고 계십니다. 홍암장군도 그렇습니
다. 그만큼 사람을 보냈으면 회답이라도 보내 올 것이지, 달
랑 말 한 마디만……”
노장군의 허락을 득하지 않고는 운남도사에서 움직일 수 없
다.
홍암장군은 요령으로 움직일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런 점을 노장군도 잘 알기에 소장이 마음대로 밀사를 보
낼 때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소장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해남도에 관한 조사를 시작한 사람은 노장군인데 자신이 더
안달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을 연구해 보게.”
노장군은 지도 한 장을 내밀었다.
지도를 받아든 소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노장군이 지도
를 어디서 입수했는지는 몰라도 군에서 사용하고 있는 지도보
다도 훨씬 세밀했다.
“해변의 상태나 암석 위치 등이 정확할 거야. 그 지도를 연
구해보면 침투할 방도가 서겠지. 역지사지(易地思之). 우리가
해남도를 지킨다면 어디다 군졸을 배치할까? 그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해남파 무인들이 지키고 있는 곳도 파악하기 쉬울 게
야.”
“장군! 저는 이런 줄도 모르고……”
“연락방법이든 침투방법이든 빨리 찾게. 나도 늦어지는 것
은 원치 않아.”
“알겠습니다. 밤을 세워서라도……”
“아니. 잠은 충분히 자게. 머리를 푹 쉬게 해서 맑은 정신
으로 연구하게. 한 점이라도 실수가 있어서는 안될 것이야.”
노장군의 음성은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그럴 것이다. 노장군은 덕장(德將)이다. 부하를 친자식 이
상으로 사랑한다. 병사의 농(膿)을 입으로 빨았다는 위(魏)나
라 오기(吳起) 장군에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애장(愛將)이
다.
노장군은 부하의 희생을 바라지 않을 게다.
앞으로 단 한 번의 파견과 결과만으로 해남도 사건을 마무
리짓고 싶으실 게다.
소장은 지도를 움켜쥐고 군막을 나섰다.
3
전가팔웅 중 여섯 명이 죽었다는 소식은 날개가 달린 듯 해
남도 전역에 퍼졌다.
“전가팔웅 중 여섯 명이 죽었데.”
“모두 목이 잘렸다던데?”
“아냐. 모두 두 동강났데.”
“이 사람들, 어디서 헛소문을 듣고 온 거야? 죽지는 않고
크게 다쳤다던데?”
바다에서도 땅에서도 산에서도……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
김없이 전가팔웅과 적엽명과의 싸움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
랐다.
소문은 점점 불어나 종래에는 단신으로 전가에 쳐들어가 모
조리 도륙 했다는 소문으로까지 커졌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서 소문은 윤곽을 잡았다.
만개 고갯마루 싸움.
적엽명과 유소청, 그리고 적엽명의 종자(從者)인 듯한 사람
과 전가팔웅 중 다섯 명의 싸움.
사실과는 조금 다른 소문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해남도 주민
들이 놀라기에는 충분했다.
“적엽명이 강하기는 강한가봐?”
“전귀(戰鬼)라던데?”
“그럼 이제 사귀가 아니라 오귀가 된 거야?”
이 부분에서 여족인과 한인의 바램이 달라졌다.
“오귀든 육귀든 겁 없이 날뛰는 놈은 깡그리 죽여버려야지.
이거야 원, 무법천지도 아니고……”
“사귀는 저 잘났다고 거들먹거리기만 했지 뭐 하나 해 놓은
것 있어? 적엽명이 전가팔웅을 베었다니 속이 다 시원하다.
그만큼 죽였으면 됐으니 이제 그만 도망쳐야 되는데……”
적엽명을 여족인이라고 생각하는 해남도 사람들은 각기 다
른 바램을 말로 토해냈다.
곤란해진 곳은 해남파와 다른 무가들이었다.
적엽명에 대한 소문이 기승을 부리면 부릴수록 그들은 자신
이 직접 모욕을 받는 기분이었다.
“바보같이……! 사생아 자식에게 베일 정도라면 차라리 검
을 꺾어버릴 것이지.”
“육삭둥이 놈! 천생은 어쩔 수 없다고 태어난 대로 노는구
먼.”
그들의 분노는 밖으로도 표출되었다.
길을 가다가도 적엽명에 대한 말이 귀에 들릴라치면 걸음을
멈추고 노려보았다. 그래도 눈치를 못 채고 계속 이야기를 주
고받는 사람이 있으면 곁으로 다가가 한마디했다.
“사생아에 대한 말을 나누고 있는 모양인데 처음 듣는 소리
니까 자세히 말해보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을 다물게 마련이다. 언제 무슨 말을
했냐는 듯 눈치를 살금살금 살피며 꼬리를 감추고 만다. 그러
면 등뒤에 대고 한 마디 더 한다.
“우리 덕분에 밥술이나 떠먹는 인간들이! 어느 놈이든 헛소
리를 내뱉고 다니는 놈이 있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실제로 해남도 동남 여문(礪 )에서는 소문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건도 발생했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적엽명을 죽여보라는 소리에 발끈한 무
인이 검을 뽑아 휘둘러 버린 것이다.
검을 맞은 여족인은 즉사했다.
정도인(正道人)으로써는 있어서 안될 일.
사건은 발끈한 무인을 폐관(閉關) 조치하고 죽은 자의 가족
들에게 적당히 보상을 해주는 선에서 일단락 되었지만, 해남
파 무인들의 신경이 얼마나 날카롭게 곤두섰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실례였다.
그래도 소문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들불처럼 번져갔다.
해남파 본문 장문인의 집무청(執務廳).
해남구가의 가주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강성오가중 일가인 유가는 여식이 살인을 했다는 이유로 참
석하지 않았다. 이유는 그랬지만 적엽명과 유소청이 힘을 합
쳐 전가팔웅을 상대했다는 소문에 초연할 수 없었으리라.
전가주도 참석하지 않았다.
임시가주직을 맡고 있는 전방이 보내온 서신에 의하면 적엽
명을 척결하겠다고 나섰다는데, 그 후로 전가주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가주뿐만 아니라 적엽명 일행을 본 사람도 없다.
전가팔웅 중 여섯 명이 길가의 고혼이 된지 칠 일째.
설마 하는 마음은 있지만 은근히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었
다. 적엽명은 전검을 익히고 있다지 않은가.
말로만 듣던 무적의 검, 전검.
전검 앞에서 누가 승리를 확신하랴.
십이대 해남오지와 십삼대 해남오지는 관례에 따라 장문인
의 옆에 늘어서 있었다.
해남오지도 해남삼지가 되어버린 상황.
유가의 십이대 해남오지 유광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자진
해서 물러갔다. 유소청은 적엽명과 호흡을 맞춰 전가에 검을
들이댔다고 하지만, 표면으로는 장문인의 명을 받들어 일급관
찰대상자를 감시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녀도 참석하지
못했고……
전가는 참석할 형편이 더 못된다. 전혈은 중양절 취임 전에
검을 버렸으니 해남오지 자격을 박탈당한 것이나 진배없고,
전방 역시 참석할 형편이 아니다.
이미 검에 대해서 인정을 받은 여섯 사람의 얼굴을 납이라
도 씌워놓은 듯 굳어있었다.
“이젠 자존심 싸움이 되어버렸어요. 적엽명 그 놈을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체면이 안 서요.”
조가의 가주인 조후.
그는 볼멘 소리로 불평부터 터트렸다.
사실 강성오가의 가주를 제외한 여섯 가문의 가주들은 심기
가 불편했다.
그들은 강성오가보다 무력(武力)이 약하다지만, 그들에게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
황담색마를 종부하는데 강성오가에서만 목부를 파견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섭섭하지 않았다면 위선일 게다.
중사가는 강육가로 뛰어오를 수 있는 발판이다. 약이가는
중오가로 발돋움 할 수 있다. 실제로 약삼가 중 하나였던 비
가가 황담색마를 키우면서부터 급작스럽게 중오가로 부각되지
않았던가.
해남파라는 공동문파로 결속되어 있지만 자신의 가문을 생
각하는데 양보란 있을 수 없다.
중사가, 약이가의 가주들은 적엽명 문제보다도 황담색마의
종부에 관심이 더 많았다.
“요즘은 하루종일 귀가 간지러워서 못 살겠어요. 송사리 한
마리 때문에 이거 체면이……”
하가(夏家)의 가주인 하금(夏錦).
하가는 석수(石手)들을 거느리고 있다. 해남도에서 벌어지
는 모든 공사에는 하가 사람들이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해남십이가의 장원을 비롯하여 다리, 성벽 등 하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수들을 다루기는 쉽지 않다. 석수들이란 힘께나 쓰는 사
람들이거나 정교한 조각솜씨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서 채찍과 당근을 겸용해야 할 경우가 다반사다.
하가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고루 겸비하고 있어서 무공도
강할 뿐 아니라 머리를 쓰는데도 보통 비상한 것이 아니다.
전체 회합이 있을 때는 언제나 묵묵히 말만 듣고 가던 육가
가주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선 것도 하금이 뒤에서 조정한
것이 틀림없다.
석가주 석중과 범가주 범장은 침묵을 지켰다. 장문인 한민
도 묵묵히 듣기만 했다.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 사람들은
육가의 가주들뿐이었다.
“자자, 조용히들 합시다. 그러잖아도 그 문제 때문에 여러
분을 모셨으니까.”
한민이 탁자 위에 손을 얹어 놓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