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Heaven Sword RAW novel - chapter 44
육가주는 일시 조용해졌다.
“본문에서는 적엽명을 일찍부터 관찰해 왔어요.”
“어련히 알아서 하셨겠지요.”
하금이 비웃음 섞인 말로 응대했다.
순간, 한민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단지 눈빛만 변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집무청 공기는 소름
이 쭉 끼치도록 차디차게 동결되었다.
“하가주, 좋은 복안이 있습니까?”
“……”
하금은 대답하지 못했다.
중사가, 약이가의 가주들은 장문인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
할 처지였다. 그들은 이미 패배한 적이 있지 않은가. 십일대
해남오지를 뽑을 때, 그들도 참여했고, 강성오가의 현임가주
들에게 패배의 쓴잔을 마셔야만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해남오지가 된 여세를 몰아쳐 이미 강오가의 반열에 올라서
있으리라.
자신들뿐이 아니다.
십이대 해남오지를 뽑는 비무대회에서도 그들 가문에서는
단 한 명도 해남오지가 되지 못했고, 작년에 치러진 십삼대
해남오지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재력을 비교해도 큰 차이가 난다.
강성오가는 해남도를 다섯으로 나눠버린 듯 하고, 자신들은
그 밑에 빌붙어 살고 있는 형편이 아닌가. 대장간은 뭐고, 염
색은 뭐며, 석수는 또 뭔가. 해남도이기에 망정이지 중원에
들어서면 당장 천민(賤民)으로 낙인찍힐 가업이 아닌가.
하금이 침묵을 지키자 한민이 부드럽게 낯빛을 풀며 입을
열었다.
“내가 계속 이야기하는 게 좋겠죠?”
한민은 잠시 말을 끊고 좌중을 돌아보았다.
“본문에서 실수를 했어요. 인정할 건 인정합니다. 우화는
흑월이란 살수를 고용했고, 우린 적엽명이 흑월인 줄 알았어
요. 이번에 범가주께서 의문점을 제기하지 않았다면 계속 실
수하고 있을 거예요.”
장문인의 버릇은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이야기한다는 것이
다.
부드러운 안색이고, 정겨운 듯한 눈빛이지만 깊이 침잠한
기운이 눈을 통해 쏟아지는 기분이 들어서 마주보고 이야기하
기가 껄끄럽다.
육가주는 장문인이 자신만 쳐다보며 이야기한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본문에 들어서기 전, 다루에서 만나 밀담(密談)
을 나눈 사실을 들켜버린 것 같았다.
“누구든 좋습니다. 해남율법에 따라 적엽명을 칠 수 있는
분은 말씀해 보세요.”
육가주는 놀란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뜻밖이다. 지금 장문인은 적엽명을 두둔하고 있지 않은가.
해남율법을 들먹인다면 적엽명을 칠 수 있는 명분이 없다. 외
관영 영주인 석두를 죽인 것과 전가팔웅을 죽인 것은 살인이
라고 할 수 없다. 무인 대 무인의 비무. 그것을 두고 무슨 말
을 할까. 그렇게 말하자면 오히려 지탄받을 대상은 전가다.
소문대로 적엽명과 유소청, 그리고 적엽명의 종자가 합심을
했다해도 그 쪽은 세 명, 전가 무인은 다섯 명. 수치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장문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
전에는 한 점의 실수도 없다는 비파무인을 동원하여 적엽명
을 명부객이라고 몰아세웠다. 그리고 종부비법만 캐내면 남은
일을 마무리하자고 했다. 그것으로 적엽명의 운명은 결정 난
게다.
헌데 지금은…… 분명히 무엇인가가 있다.
석가주와 범가주는 태연한 표정이지 않은가.
“세간의 말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해요. 해남파
도 엄연히 무림문파입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이 존재한다는
말이겠죠? 전가 형제들도 강한 자와 마주섰다는 기쁨이 있었
을 거예요. 그렇게 믿습니다. 본문의 입장이 이렇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싶었어요.”
육가주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을 잊었다.
육가에도 무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가팔웅과 비
견될만한 고수를 꼽으라면 망설여진다. 만약 적엽명이 비무신
청을 해온다면? 자신들이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다. 그것도
확신하지 못한다. 적엽명은 전검을 익혔으니까. 두고 보는 수
밖에 없다. 전가주가 적엽명의 뒤를 쫓고 있다고 했으니.
“아! 그리고 또 하나…… 황담색마의 종부에 관한 건인데.”
갑자기 육가주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생기는 곧 암
울한 어둠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이번에 오가에서 비가에 목부를 파견한 것은 도움을 받고
자 해서예요. 아시다시피 오가에는 황담색마가 있어요. 그런
데 이 년이 지나도록 새끼를 낳지 못하니…… 이해하시리라
믿어요. 비가에서 황담색마의 종부를 한다니 한 수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어요?”
육가주는 소태를 씹은 얼굴이었다.
“여러분은 좋은 성취가 있었겠지요?”
한민은 느긋하게 찻잔을 들어올렸다.
“허허! 장문인은 좋을 결과가 있었습니까?”
“웬걸요. 종부비법이라고 몇 장 보내왔는데 영 시원치 않아
요.”
한민, 석중, 범장.
세 거인은 서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은 채 공허한 빈말만
주고받았다.
계절이 칠 월을 지나 팔 월로 접어들었다.
발정기가 끝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결과뿐. 그러나 결
과를 기다리기가 너무 지루하다. 말은 수태기간이 일 년이나
되지 않던가. 비가보에 파견한 목부들에게는 계속 지켜보라는
명을 내렸다. 비가에서 어떻게 관리를 하고 있는지 세심히 살
펴보라는 명과 함께.
“석가주께서는 어떻게 하실 의향이신 지?”
장남 석두의 복수를 묻는 게다.
“전가주의 결과를 봐야겠지요.”
석중은 한 발을 슬쩍 뺐다.
세 사람이 앉아 있으되 주로 말을 주고받는 사람은 장문인
과 석가주뿐이었다.
범장은 비파가 가져올 소식을 기다렸다.
가업에 매달리다 보면 본문에 들어오기도 쉽지 않은 일. 회
합에 참여한 김에 명부객에 대하여 비파에서 수집한 자료를
요청한 것이다.
명부객의 지난 행적에 대한 자료는 필요 없다. 그가 지금
어디 있으며, 누구냐 하는 점이 중요하다.
장문인 한민은 회합이 있다는 것을 알려오면서 명부객에 대
한 중요한 단서를 수집했으니 회합에 참여할 때쯤이면 기쁜
소식을 전해 줄 수 있을 거라는 전갈도 함께 보내왔었다.
“전검은 어찌 보면 마구잡이로 보일 겝니다. 그게 아이들에
게는 혼란스러웠겠죠.”
“우리는 해남무공에만 익숙해져 있어요. 병기도 오직 검에
만 집착하고 있고…… 이것이 약점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
다.”
장문인과 석가주가 나누는 대화내용은 적엽명에게 집중되었
다.
그 때, 예의 큰 갓에 검은 피풍(皮風)을 두른 비파원이 들
어섰다.
그는 장문인에게 예를 올린 후, 곱게 접힌 서신을 전했다.
한민은 서신을 펼쳐본 다음 범장에게 내밀었다.
“보세요. 명부객에 대한 단서예요.”
범장은 서신을 펼쳤다.
“으음……!”
범장의 입에서는 낮은 신음이 터져나왔다.
* * *
세상을 살아가는데 능력이상의 꿈을 갖는 것은 좋지 않다.
그보다 더 안 좋은 것은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 지 모른
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야망만 불태우다가 종래에는 좌절의 나락(奈
落)으로 떨어지고 만다.
재기하지도 못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실패했는가를 생각하기
보다는 단지 운이 없었다는 말만 하게 된다. 실패와 좌절은
되풀이되고, 그럴 때마다 술의 기운을 빌리거나 자신보다 힘
없는 자들에게 화풀이를 하게 된다.
얼마나 불쌍한 인생인가.
억겁(億劫) 동안 쌓인 죄가 이승에서 드러난 것일 게다.
동정심을 가눌 길이 없다.
그런 사람들은 야망이 불타는 인생의 정점(頂點)에서 생을
마치는 것이 행복이다.
한광은 기대고 있던 나무에서 어깨를 떼어냈다.
“너는 한광 아니냐?”
하가주 하금이 뜻밖인 듯 물어왔다.
한광은 검을 뽑았다.
“……!”
하가주는 한광의 행동을 선뜻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다.
“별로 아프지 않을 겁니다.”
하가주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는 분명하게 한광의 뜻을 알아들었다.
“장문인의 뜻이냐?”
“말에서 내려오시지요.”
“건방진 놈!”
이처럼 불쌍한 인간이 또 있을까? 잠시 후면 목숨이 달아나
는데 아직도 자신을 모르고 있다니.
한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다는 안도의 한숨이다.
하가주는 역시 구제 받아야 할 사람이다. 한광은 잊지 않고
있다. 하가주는 해남파에 들릴 때마다 자신에게 선물을 갖다
주었다. 어린아이였을 적에는 어린아이에게 맞는 것으로, 나
이가 든 다음에는 극히 귀한 보옥으로.
하가주는 잔정이 많은 사람이다. 얼마나 좋은가. 거기에 일
가를 이끌고 있다. 재산이라면 펑펑 쓰고도 남을 만큼 있고,
권세도 있다.
하가주는 세상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사람이다. 능력 밖의
일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세상에 반드시 살아있어야 할 사람이
다.
지금 이승을 떠나는 것이 행복이란 점을 알고 있을까? 아닌
데…… 저러면 안 되는데. 인상을 찡그리면…… 기쁘게 죽음
을 맞이해야 하는데. 모르고 있구나. 짜증스럽게 더운 날씨에
도 불구하고 검무를 추려는 노고(勞苦)를 전혀 모르고 있구
나.
한광은 검을 쳐들었다.
“네 놈이 나를 벨 수 있을 것 같으냐? 한민이 노망난 모양
이군. 너 같은 풋내기를 보내다니.”
하가주는 천천히 말에서 내려왔다.
그는 안장을 정돈하기까지 했다. 말도 놀라서 도망가지 못
하도록 고삐를 나무둥지에 비끄러맸다.
그런 모습이 한광에게는 좋게 보였다.
역시 무인은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이 다르다. 마지막 순간,
눈동자는 어떻게 변할까? 그동안 구원해준 사람들과는 분명히
다르리라. 무인이니…… 기쁘게 웃으며 한 마디 하리라. 고맙
다고.
“적노검법을 익혔다고 들었다. 진천각과 함께 펼치는 적노
검법은 일절(一絶)이라지? 후후후! 펼쳐봐라.”
한광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어찌 보면 먼저 공격해 들어오라는 소리처럼 보였고, 어찌
보면 적노검법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듯이도 보였다.
“건방진 자식! 보자보자 하니까!”
차앙!
하가주가 신경질적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아무리 생사를 목전에 둔 상황이라도 무인의 예의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헌데, 해남오지까지 올랐다는 놈이 존장을 막대
하다니. 하기는 살검(殺劍)을 뽑아든 놈이 무슨 행동인들 못
할까.
하금은 한광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본문에서 웃고 있을 한민에게 머물렀고, 장문
인을 향한 분노에 몸을 떨었다.
십이가주들 간에 숨막히는 암투가 오고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선조들이 해남도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암투는
이미 시작되었다. 해적과 여족이라는 공동의 적이 없었다면
해남십이가의 공존(共存)은 벌써 무너졌을 게다.
하지만 이런 일은 없었다. 일가의 가주를 척살 하려고 한
적은 해남도 역사이래 단 한 번도 없었다.
징계하리라. 애송이의 목을 베어들고, 전 가주들이 모인 자
리에서 장문인의 잘못을 따지리라.
자칫하면 해남십이가가 분열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장문인…… 당신은 잘못 시작했어.’
하금은 검을 들었다.
그의 마음은 급했다. 한시바삐 한광의 목을 베어 해남파로
달려가고 싶었다. 아니다. 하가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이 놈
의 목을 장대에 매달아…… 아!
하금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광은 백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검은 눈동자가 사라
지고 흰자위만 남아 희번덕거린다.
펄쩍펄쩍 뛰기 시작한다.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몸 동
작…… 진기의 흐름을 유도해내는 예비식과는 전혀 다른 검
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옴! 사팜 아사 드비티아라 릉라마가
바아라 도비야 훔!”
“타, 탈혼검!”
하금은 머릿속이 텅 비는 듯 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광의 눈길을 접한 순간, 그는
장님에 귀머거리가 된 듯 철저한 암흑의 공간에 내동댕이쳐졌
다.
슈각!
본능적으로 휘두른 검이다.
하가에는 두 개의 비전검법이 전해내려 온다.
이십사로음린검법(二十四路陰燐劍法)과 투천환일(偸天換日)
이란 일 초식.
하가의 검법은 원형검법(圓形劍法)이다. 몸의 회전력을 이
용하는 검법이다. 이십사로음린검법을 펼치면 상중하(上中下)
천지가 검기(劍氣)로 뒤덮이고, 투천환일을 펼치면 방어할 엄
두가 나지 않는다.
하가의 검도 독특하다.
원나라 시절, 원의 무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도(刀)에서 착
안하여 반월처럼 둥그렇게 휘어진 반월검(半月劍)을 만들어냈
다.
하금이 십삼대 해남오지 비무에 각별한 관심을 보인 것은
반월검과 이십사로음린검법이 이루는 조화를 믿었기 때문이
다.
반월검을 만들어 낸 당사자 하금이 직접 펼친 투천환일.
신형이 팽이처럼 순식간에 네 번을 회전하면서 머리, 몸,
다리를 가격하고 마지막으로 정수리를 쪼개오는 회전검법.
피윳!
실낱같은 소리가 맹렬히 회전하는 반월검 사이를 파고들었
다.
“커억!”
신음소리는 답답했지만 짧았다.
“안 돼. 안 돼……”
한광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죽음으로 뒤덮인 하가주의 눈동자에 공포가 일렁거린다. 무
공을 익힌 사람이 이래서야 되는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
과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하지 않은가.
하금은 눈을 부릅뜬 채 죽었다.
자신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죽음은 고통스럽지만 아주 짧은 순간에 끝나죠. 이제는 편
안할 겁니다. 하하! 아주 기뻐요. 가주님을 제 손으로 보내드
리게 돼서.”
한광은 하늘을 날을 듯이 기뻤다.
불쌍한 영혼을 편한 길로 인도하고 나면 언제나 기분이 좋
다. 이래서 선한 공덕을 쌓으면서 살라고 하지 않던가.
시신을 길가에 내버려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세상에는 진정한 공덕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
하는 인간들이 득실거리니까.
조만간 편한 세상이 오겠지.
한광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리를 떴다.
하금의 몸에서는 피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목에 가느다란 혈선이 비칠 뿐.
##第十五章 대남(大男).
1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감자(甘蔗:사탕수수) 뿐인 드넓은 벌
판이 이어졌다.
황함사귀와 한백은 어린아이처럼 연신 감자줄기를 씹어먹었
다.
호평(弧坪) 평야(平野).
벌판의 생김새가 시위를 잔뜩 당긴 활의 형상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족들은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궁바[公]의 안식처.
호평평야는 조상들의 안식처다. 여족인들은 가족이 죽으면
거리가 아무리 멀어도 시신을 둘러메고 호평평야로 모여들었
다. 그러나 호평평야에 발길을 들여놓지는 못했다. 벌판이 드
넓게 펼쳐지는 입구에서 가족들은 시신을 노인에게 넘겨주었
다.
노인은 특별히 선택받은 여족청년 두 명에게 시신을 운구
(運柩)하게 하고 호평평야로 들어선다.
그 때부터 시신은 완전히 썩을 때까지 호평평야에 방치된
다.
가족들에게 유골을 수습해가라고 말해주는 사람도 노인이
다. 그러나 그 때도 가족들은 호평평야에 들어서지 못한다.
한 달에 한 번씩 호평평야를 둘러본 노인이 청년 두 명과
함께 유골을 수습해오면 가족들은 시신을 넘겨줬던 그 자리에
서 유골함을 받아든다.
호평평야는 여족인들이 발길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금지
(禁地)였다. 전가무인들이 호평평야를 점거하고 농장을 개간
하기 전까지는
여족은 궁바의 안식처를 빼앗긴 다음부터 장사지낼 곳을 잃
어버렸다. 대안(代案)으로 떠오른 곳이 여모봉이지만, 성산
(聖山)을 더럽힐 수는 없는 일. 결국 그 때부터 여족들은 아
무 곳에나 조상을 모셨다. 여모봉 한 자락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모봉을 이용했고, 그도 저도 안 되는 사람들은 뒷
산에 모시기도 했다.
조상의 노여움을 산 것일까?
사자(死者)를 호평평야에 모시지 않은 다음부터 많은 여족
인들이 죽어갔다. 한족도 덩달아서 많이 죽었다. 원인 모를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의원이 손쓸 사이도 없이 시름시름 앓
다가 죽은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죽었다.
여족인들은 궁바의 분노를 샀다면서 겁에 질렸다.
해남도에 이주한 한족들은 곧 원인을 파악해 냈다.
시체는 부패하면서 많은 독성(毒性)을 뿜어낸다. 그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질병이다. 그렇지 않아도 질병이 유난히 많은
해남도이지 않은가. 질병이 만연할 때마다 많은 사람이 죽었
고, 그들의 시신을 묻지 않고 풍장(風葬)을 지냄으로써 질병
은 더욱 확산된다.
중원에도 풍장의 유래가 있기는 하다.
질병에 걸려 죽은 사람은 풍장을 시킨다.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을 바로 매장하면 신의 노여움을 사 더 많은 질병이 발생
할 것이라는 속설(俗說)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원의 풍장은 해남도와 많이 다르다.
시신을 아무도 볼 수 없게끔 인적이 닿지 않는 곳에 놓아둔
다.
시신이 부패하면서 일으키는 독성과 아직 육신에서 제거되
지 않은 질병이 옮길 틈을 주지 않는다.
사방이 바다로 고립된 해남도는 돌고 돌아야 제 자리다.
호평평야…… 여족인이 풍장 풍습을 이어가려면 호평평야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한족들은 매장 풍습을 강요했다.
그러나 그것만은 무력을 사용해도, 밥을 굶겨도, 죽음을 내
려도 고칠 수 없었다.
호평평야는 더 이상 궁바의 안식처가 아니다.
여족인들도 궁바의 안식처라고 부르고 있기는 하지만 진정
한 의미를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옛날에는, 아주 먼 옛날
에는 궁바의 안식처 때문에 거세게 반란을 일으켰고 많은 여
족인이 죽었지만, 지금은 그저 맛 좋은 감자 농장이 있을 뿐
이다.
“이거 무척 단데? 히히! 하나 씹어봐요.”
황함사귀가 감자 줄기를 꺾어 유소청에게 내밀었다.
감자는 줄기의 부분에 따라 단 맛이 다르다. 중간 부분이
가장 달고, 위와 아랫부분은 그렇게 달지 않다.
한백은 그것도 모르고 윗부분부터 차근차근히 씹고 있지만
황함사귀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가르쳐 주지 않는다.
유소청은 감자 줄기의 위와 아랫부분을 뚝 끊어 버리고 중
간 부분을 씹었다.
“무척 다네요.”
“히히! 그렇습죠?”
한백이 그제야 뭔가 알아차린 듯 감자 줄기의 가운데 부분
을 씹어본다. 그리고 고리눈을 뜨고 황함사귀를 노려보았다.
그라거나 말거나 황함사귀는 감자줄기를 베고 편하게 누워 연
신 단물을 빨아먹는다.
구름 한 점 없는 땡볕더위가 일행들 머리위로 쏟아졌다.
바람도 숨을 죽였다.
어른 키를 훌쩍 넘겨버린 감자줄기는 없는 바람까지 막았
고, 후텁지근한 냄새마저 풍겨내 더욱 덥게 만든다.
그래도 일행은 감자밭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이구!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황함사귀가 옷 속으로 파고든 개미를 집어내며 중얼거렸다.
덥기는 모두들 마찬가지였다.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유소
청과 한백은 특히 더 더운지 땀을 비 오듯 흘려냈다. 그러나
아무도 덥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적엽명은 운공조식(運功調息)에 몰두했다.
그는 짬이 날 때마다 운공조식을 파고들었다. 길을 걷다 잠
시라도 쉬게 되면 틀림없이 운공조식을 취했다.
‘천강십이검은 본능을 극대화시킨 검이다. 미미한 바람이
스쳐도 발작적으로 반응하는 검. 그렇기에 순간적으로 허점을
파악하게 되고, 검을 밀어 넣을 수 있다. 밀어 넣는다? 그렇
다. 천강십이검은 세검(細劍)이다. 동검(動劍)아 아니라 정검
(靜劍)이다. 능동적으로 공격하는 검이 아니라 공격을 맞받아
치는 수검(守劍)이다. 그런데 변했다. 일장검법을 익힌 다음
부터…… 어디가 잘못되었단 말인가.’
적엽명은 해답을 운공조식에서 찾으려고 했다.
검은 검일 뿐이라고 전임 조가주가 말해주었다.
검은 검일 뿐이다. 예기(銳氣)는 다르지만 혼을 깃들여 만
든 파랑검이나 동전 몇 푼에 살 수 있는 청강장검(靑鋼長劍)
이나 사람을 벤다는 점에서는 똑 같다.
초식이 달라졌을 리도 없다.
초식은 몸의 움직임이다.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몸의 움직
임. 초식을 능숙하게 수련하면 신법이 빨라지고, 검로(劍路)
가 명확해지며 부드러워 진다는 장점이 있다. 허나 단점도 형
성된다. 초식을 숙련하면서 형성된 고벽(痼癖). 찌르기에 맛
을 들린 무인은 베기를 못한다. 베는 초식을 몰라서가 아니라
실전과 같이 급박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면 무의식중에 찌르는
초식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실전을 수련과 같이 부드럽게 치르기 위해서 심법(心法)을
되뇐다.
부동심(不動心), 평상심(平常心)……
싸움을 여유 있게 하는 자는 몸의 움직임이 부드럽다. 부동
심, 평상심을 유지한 자는 이기기 힘들다. 자신이 익힌 모든
초식을 정확히 전개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에.
그러나 초식을 수련하면서 각인(刻印)되어버린 고벽이 사라
진 것은 아니다. 검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즐겨 사용하는 초
식이 따로 있기 마련이다.
천강십이검에는 애용하는 초식이 있을 수 없다. 천강십이검
은 감각의 검이기 때문에 순간적인 판단으로 공격하는 부위도
공격하는 초식도 달라진다. 매 순간, 매 초식이 다른 검법이
라고 말해도 좋을 게다.
천강십이검은 그 중에서도 유독 검로가 뚜렷했던 검법을 모
아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전검…… 그렇다. 천강십이검은 전검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게다. 해남도에 들어와서야 자신의 검이 전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사실 전검이란 말을 들었을 때
틀림없이 그럴 것이라고 확신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일장검법을 수련한 다음 변화가 생긴 부분은 진기
의 흐름일 수밖에 없다.
진기의 흐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한
다. 일정기간 이상 내공(內功)을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인 무
인들은 진기의 흐름을 볼 수 있다. 내관법(內觀法)이 이를 가
능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