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Heaven Sword RAW novel - chapter 50
“들어줄 수 있으면.”
“먼저 약속해 줘. 그렇지 않으면 말하지 않을래.”
“그래. 약속할게. 뭔데 그래?”
“내일 비무 할 때 있잖아…… 내 검을 사용해 줘.”
“뭐?”
“약속했으니까 지켜야 돼?”
적엽명은 유소청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여자…… 어쩌자고 이토록 부담을 준단 말인가.
취옥검이나 이름 없는 묵검이나 모두 조가의 조곡노인이 만
든 검이다. 날카로움이나 재질은 단단함은 우열을 논할 수 없
으리라.
그런데도 유소청은 자신의 검을 사용해 달라고 말한다.
햇빛 때문이다.
비무 시간은 한 낮인 정오. 태양이 중천에 떠 있을 때다.
묵검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광택이 나지 않는다. 혼탁한
묵빛이다. 그런 검으로는 햇빛을 반사시킬 수 없으리라. 취옥
검은 다르다. 검신 중앙을 가로지르는 옥빛 문양(紋樣)이 있
다. 거기서 현묘한 비취빛 광채가 발산되어 무공을 모르는 여
인이라도 탐을 낼만한 검이 취옥검이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 햇빛을 반사시켜 상대의 눈을 피
곤하게 만드는 데는 범위가 지닌 오진검과 더불어 해남도 제
일검을 다툰다.
“그럴 필요……”
“이미 약속했어. 자, 받아.”
유소청은 취옥검을 내밀었다.
그녀의 눈에는 또 눈물이 그렁거린다.
그녀는 오늘 하루 종일 내일 있을 결전을 생각했음이 틀림
없다.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에서 서서 결전에
임할 수 있는 지를 생각하느라고.
적엽명은 손을 내밀었다. 검을 잡아간 것이 아니다.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와락 끌어당겼다.
유소청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품에 안겨들었다.
“안 운다고 약속했지?”
“응.”
“그럼 울지 마.”
그래도 유소청의 어깨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 *
그 시간, 전가주 전팽도 잠을 못 이뤘다.
그는 애검 비룡(飛龍)을 앞에 놓고 묵상에 잠겼다.
촛불은 켜지 않았지만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방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이번 싸움은 그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이기면 체면치레를 하는 것이고, 지면 강성오가에서 추락할
지도 모를 위험이 내재되어 있다.
그런 점을 알면서도 공개적으로 비무장을 보낸 것은 일종의
배수진(背水陣)이라 할 것이다.
적엽명과의 비무는 무공의 우열을 겨루는 게 아니다. 목숨
을 빼앗지 않으면 빼앗겨야 하는 결전이다. 더군다나 전가팔
웅 중 여섯 명이 유명을 달리한 지금에는.
전팽은 주사위를 던졌다.
극과 극의 결과를 가져오는 주사위.
전가팔웅 중 여섯 명이 죽는 시점에서 전가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다고 봐야 한다. 전가의 후계자이자 해남오지의 일원인
자식이 검을 놓고 사라졌다는 것도 대외적인 면으로는 불명예
에 속한다.
이름을 더럽힌 무인도 존재할 가치가 있을까?
강성오가의 위치를 고수하기 위해서 전팽이 선택할 길이 달
리 없었다. 오직 적엽명을 죽이는 것뿐.
그렇다면 공개하는 것이 좋으리라.
만인이 주시하는 자리에서 징계하는 것이 좋으리라.
전팽은 방안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를 음미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냄새다.
그는 열 다섯 살이 되던 해, 검 한 자루를 품에 안고 가문
을 떠났다. 그로부터 십 년 간 돌아가지 않았다. 하늘을 지붕
삼아 떠돌아 다녔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을 전전하며
쇄각대팔검의 오묘한 이치를 깨우쳤다.
초식의 변화를 습득한 검인은 방랑을 해봐야 한다.
몸에 동전 한 닢 지니지 않고 방랑을 할 때에만 비로소 자
연과 하나가 됨을 알게 된다. 자연은 돈을 원하지 않는다. 알
몸으로 들어온 자에게는 식량을 주고, 학문을 주고, 살아있는
지혜를 준다.
그래서 전팽은 하나뿐인 자식이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행방
을 감췄을 때도 당황하지 않았다. 돌아올 때는 좀 더 큰 사람
이 되어 돌아올 테니까.
전팽이 방랑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검의 끝이었다.
초식의 끝이라고 할까? 세상의 모든 검들이 시작과 중간변
화는 다르지만 끝은 똑같다는 사실을 알았다.
방어.
세상의 모든 검법은 모두 방어로 종결을 짓고 있다.
검을 거둬들이는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적을 베었든 베지 못했든 일검을 전개한 다음에는 반드시
거둬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며, 그 과정동안 육신은 가장 취약
한 상태에 놓인다.
전팽은 초식의 마무리를 집중적으로 수련했다.
앳된 소년에서 청년이 되어 가문으로 돌아갔을 때, 전팽이
검은 가장 완벽한 쇄각대팔검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철벽으로 둘러싸인 검법.
그 누구도 검기를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
당시 조가의 조곡 가주조차 ‘가장 완벽한 수검(守劍)’이라
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애검 비룡을 받은 다음부터 전팽의 검은 더욱 완벽해졌다.
검을 든 무인이라면 한 번쯤은 검에 맞아보았을 텐데, 하다
못 해 스치기라도 했을 텐데, 전팽은 그런 적도 없다.
그는 사람들이 예측한대로 해남오지가 되었다.
수굴일지는 다투지 않았다.
해남오지가 눈에 불을 켜고 수굴일지를 다툰다면 그것은 강
성오가의 불화로 번지고 만다. 적당한 선을 지키고, 적당한
선에서 물러서 주고…… 해남파 본문과 강성오가는 서로가 존
중하는 관계이지 않은가. 전팽은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마음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한가에서 내리 장문인을 배출하고 있지만 강성오가를 완전
히 휘어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공과 재력이 비슷하기 때문
이다. 무력으로 어쩔 수 없다면 재력이라도 월등해야 한다.
‘장문인은 내 자식이나 손자가 해도 충분……’
전팽은 가문을 확장하는 데 모든 신경을 쏟았다. 잔인할 정
도로.
– 비가의 종부비법을 알았습니다. 적엽명은 간혈경(懇穴
經), 본원진경(本源眞經), 약초비경(藥草秘經)이라는 의서 세
권을 애지중지 아낍니다. 황담색마를 종부시키면서는 약초비
경을 자주 들여다보곤 했습니다. 황담색마가 먹는 건초에는
약초가 배합되어 있으며…… …… 약초비경을 필
사(筆寫)해 놓았습니다. 건초에 섞은 약초는 약초비경 인체보
혈편(人體補血篇)에 나오는 약초와 똑같은 바, 황담색마의 종
부비법은 건초에 있다 할 것입니다. 돌아가서 뵙겠습니다.
전가를 떠나오기 전에 받은 전서대로라면 지금쯤 전방은 목
부를 만나고 있으리라.
비가에서 종부비법을 낱낱이 훑어본 목부는 황담색마의 종
부에 성공할 것이고, 시간이 흐르면 여타 가문은 도저히 따라
오지 못할 재력을 형성하게 된다.
남은 문제는 오직 하나다.
자식, 청혼검 전혈이 얼마나 높은 무공을 성취하고 돌아오
느냐 하는 것. 거기에 전가의 미래가 달려있다.
전팽은 자식을 믿었다.
“후우!”
찌꺼기를 토해내듯 폐기(廢氣)를 쏟아낸 전팽은 비룡을 천
천히 끌어냈다.
유난히 가늘고 길어 창백하게까지 보이는 검신이 달빛을 받
아 반짝인다.
“좋아.”
그는 간단하게 말했다.
마음에 들었다. 검도 자신처럼 홀가분해 보였다.
검의 달인이 서른 여섯 명, 명검이 서른 여섯 개. 그 중에
세 명이 죽고, 검 네 개가 임자를 잃었다.
석두의 천혈검(千血劍), 전동의 백일명(白日明), 전남의 설
인곡(雪人曲), 전혈의 뇌성천(雷聲天).
비룡은 어떤 운명을 지니고 있을까.
깊은 어둠 속에서 전팽의 눈과 비룡의 검신이 반짝거렸다.
3
해남파 수련총 무인들이 정은구를 빙 둘러쌓다.
움푹 파인 분지(盆地)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해남
파 무인들뿐이었다. 일반 사람들은 여족인, 한인 가릴 것 없
이 분지 위에서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분지 안에는 장막(帳幕)을 펼쳐 놓아 뜨거운 햇살을 막고,
편히 앉아서 관람할 수 있도록 의자가 놓여져 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거, 조금만 더 들어갑시다.”
“입 닥치고 앉아있어!”
“에이. 여기서야 자세히 볼 수 있나, 원.”
“닥치지 못하겠어!”
“알았소. 닥치면 될 것 아뇨.”
정은구 꼭대기는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로 인
해 혼잡한 시장을 방불케 했다.
“장문인이닷! 장문인이 직접 왔어.”
“그럼, 이 사람아. 이게 어디 보통 비무인가.”
“저기 뚱뚱한 사람이 석가주지?”
“어디?”
“저기 말야. 키 작고 뚱뚱한 사람.”
“응, 맞아. 석가주도 왔네.”
“석가주뿐인가? 가주들이란 가주들은 죄다 온 것 같은데?”
사람들은 사람들을 구경하기 위해 서로를 밀쳐댔다.
해남십이가 가주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해남도에 살면서도 십이가주를 보지 못
한 사람도 있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단의 사람들이 정은구로 오르
고 있었다. 그들은 해남파 무인들이 군중들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쳐 놓은 새끼줄 안의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많은 사
람들의 눈길이 일신에 쏟아지고 있건만 그들의 행동은 여유가
넘쳐흘렀다. 당연하다. 군웅들의 눈길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
들이 해남십이가 가주들인 것이다. 이들이 바로 해남도를 지
배하는 왕이니까.
선두에는 해남파 장문인이 석가 가주와 무엇인가를 이야기
하면서 걸어왔다.
검은 피풍에 갓이 넓은 방갓을 쓴 추운단이 장문인의 뒤를
따르며 호위했다. 그들의 숫자는 십여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들을 뚫고 장문인 곁으로 다가설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이상한 일이라면 추운단이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
그들은 암중에 숨어 호위하는 그림자들이지 밝은 태양아래
모습을 보이는 무인들이 아닌 것이다.
장문인이 지나고 숨을 열 번쯤 들이쉴 시간이 지난 후, 거
목처럼 눈에 확 들어오는 거구, 범가주와 유사의 온화한 기풍
을 지닌 유가주가 걸어왔다.
다음은 중오가 가주들 중 세 명이 모습을 보였다.
십이가의 가주들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산뜻한 하늘색 무복을 입고 가슴에 제비 문양을 새겨 넣은
사람이 해남도의 모든 도기(陶器)를 장악하고 있는 악가(岳
家)의 가주 악빈(岳彬)이다. 악빈은 낙성검법(落星劍法)의 달
인이다.
그 옆에 진붉은 무복을 입은 사람, 눈이 너무 적어 감은 듯
이 보이는 실눈을 가진 사람이 박가(博家)의 가주인 박홍(博
鴻)이다. 박가는 대력검 검급을 잃어버렸다는 오명(汚名)을
안고 있지만, 정화방(情火房)이라는 고급 기루를 일곱 채나
가지고 있는 거부(巨富)다.
조가주 조후는 인상이 특이해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특이하게 굵고 진한 눈썹에 코도 크고, 입술도 두터웠다.
그는 남해삼십육검의 뒤를 이을 기재를 찾는답시고 해남도
전역을 자주 돌아다니는 까닭에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많았
다.
조가주는 전임 조가주에 비해서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약하
다는 말을 듣고 있다. 그는 해남오지를 뽑는 비무대회가 열리
기 전, 두 명의 기재에게 검을 주었으나 단 한 명도 해남오지
에 오르지 못했다.
“나는 가능성을 봤을 뿐이야. 두고 보라지.”
하지만 조가주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가의
무인들까지도.
중오가 중 삼가의 가주들로부터 한참 떨어져서 오는 사람은
약이가의 가주들이다.
염왕채(閻王債:고리대금)를 움켜쥐고 있는 강가(姜家)의 가
주, 강청(姜 )과 염색으로 일가를 이룬 단가의 가주인 단적
(段積).
강가는 마수광의에게 잔월검법을 잃어버린 전례가, 단적은
가주의 둘째형인 단대인이 흑월에게 암살 당한 전례가 있어
얼굴을 들지 못할 형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범가주의
형도 흑월에게 암살 당했다는 것.
십이가주 중 세 사람이 빠졌다.
비가주는 적엽명이 대신할 것이고, 오늘 비무의 당사자인
전가주가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하
가주 하금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가주는 아무런 종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하가에서도 모든 석수들을 동원하고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있지만, 본문에 다녀온다고 떠났던 하가주는 하늘로 솟은 듯
종적이 묘연했다.
본문도 방관할 수 없어 비파까지 동원하여 해남도를 이 잡
듯 뒤지고 있지만 본인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를 찾을
가망성은 없어 보였다.
해남오지도 모습을 드러냈다.
해남오지는 많이 오지 않았다. 우선 건곤검 한혁이 보이지
않았고, 유소청의 살인에 충격을 받고 해남오지를 그만 둔 금
잔서생 유광도 오지 않았다. 전가의 전방은 가주가 시합을 하
는 마당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른 무인을
보내 ‘혈이가 돌아올 때까지’라는 말 한 마디를 전했다고 한
다.
십삼대 해남오지는 출발도 하기 전에 흩어졌다.
정은구에 모습을 보인 사람은 단 세 명뿐이다.
한백, 범위, 석불.
한백은 여전히 천하제일 미장부였고, 범위는 뼈만 남은 듯
앙상한 몰골이어서 과연 한백과 같이 유소청을 다투었던 범위
인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석불도 왔다. 그는 한백과 무엇
인지 다정한 말을 나누고 있었다.
일단의 무리는 분지로 들어가 미리 장막을 쳐 놓은 곳에 앉
았다.
시간이 지루하게 흘러 오시초(午時初)에 들어설 무렵, 사람
들은 또 다시 술렁거렸다.
이번에는 관군이었다.
관병 이십여 명이 호위를 하고, 한 가운데 관병 네 명이 가
마를 매고 있는데 호화롭기 이를 데 없었다.
가마 위에는 검은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관원이 비스듬히
누워서 부채를 부쳐댔다.
“경주자사지? 맞지?”
“응.”
“웬일일까? 무인들 비무를 구경나오고.”
“이 사람아, 전가주가 치르는 비무 아닌가. 나오는 게 좋다
고 판단했겠지.”
사람들은 관부와 해남파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고 있다. 그래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관부에 호소하지 않는
다. 해 봤자 치도곤을 당하는 쪽은 오히려 자신들일 테니까.
“퉤엣!”
누군가 땅바닥에다 가래침을 힘차게 뱉었다.
그러나 관병 한 명이 고개를 돌리자 가래침을 뱉은 자는 사
람들 속으로 슬그머니 숨어버리고 말았다.
분지 안으로 들어간 경주자사가 해남파 장문인과 인사를 나
누는 광경이 보였다. 경주자사는 장문인뿐만 아니라 자리에
배석한 가주들과 일일이 포권지례를 취한 후, 장문인과 나란
히 앉았다.
“콱 전귀(戰鬼)가 이겨 부려라.”
누군가 배알이 뒤틀린 듯 중얼거렸다. 물론 해남파 무인들
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로. 하지만 곁에 있는 사람도 듣
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는 아니었다.
“하하하!
“하하!”
일제히 웃음이 터져나왔다.
“뭐야!”
수련총 무인이 눈을 부릅떴다.
“아니오. 우리끼리 잡담 좀 했소.”
누군가 시원한 소리로 대꾸했다.
수련총 무인은 ‘떠들지들 마.’라는 한 소리를 하고는 고개
를 돌려버렸다.
“나는 여기 있을래.”
“그래. 그게 좋겠어.”
유소청도 적엽명도 짧은 눈인사만 주고받았다.
오늘 아침, 적엽명은 두 벌의 옷을 놓고 망설였다.
한 벌은 비가에서 급히 달려온 목부가 내놓은 옷으로 화화
부인이 밤을 새워가며 지은 옷이라 한다. 옷감은 좋은 편이
아니지만 마음에 드는 밝은 청색에 무엇보다 처음으로 가져보
는 무복(武服)이었다.
또 한 벌은 황함사귀가 내 놓은 마의(麻衣)였다.
해남도에 들어왔을 때 입었던 옷으로 황함사귀가 깨끗이 빨
아서 몰래 숨겨온 듯 했다.
적엽명은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벗고 마의를 입었다.
홀가분했다.
철없이 날뛰던 팔 년 전 그 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천여
마리의 말들 중에서 아무 말이나 집어타고 초원을 달리던 그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편해 보인다.”
유소청이 해준 말도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어머님이 지어주신 옷…… 꼭 입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화화부인이 지어준 옷은 곱게 접어 황함사귀에게 건네주었
다.
그의 허리춤에는 취옥검이 꼽혀 있었다.
그래도 묵검이 손에 익었지만 유소청의 간절한 눈빛을 저버
릴 수 없었다.
“간다.”
적엽명은 한 마디만 던진 채 뒤도 안 돌아보고 곧장 걸어갔
다.
“죽기만 해봐. 가만 안 둘 거야.”
유소청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에서 그렁거리던 눈물은 기어코 방울져 떨어졌다.
한백이 그녀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안 죽을 겁니다. 무운(武運)이 무척 강한 분이니까.”
“죽으면 나도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빌어먹을 자식, 팔 년
이나 지났는데 왜 나타나서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거야.”
호귀 류가 무릎사이에 고개를 묻으며 말했다.
그들은 모두 따라가지 않았다.
황유귀 술과 수귀 탄은 아침 일찍 정은구에 올랐다. 그들은
조망(眺望)이 좋은 자리를 골라 앉아있을 게다.
적엽명은 점 하나로 변해 점점 멀어졌다.
“전귀다!”
“전귀! 전귀가 왔어?”
여족인들은 적엽명이나 비건이라는 이름보다 전귀라는 그들
의 작호를 더 좋아했다.
“전귀, 꼭 이겨!”
누군가 소리쳤다. 그러자 누군가 ‘전귀, 이겨라!’하는 말을
다시 소리쳤고, 그 소리는 물결처럼 군중 사이로 퍼져갔다.
“전귀, 이겨라!”
“전귀, 이겨라!”
적엽명이 한 걸음씩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전귀, 이겨라!’
라는 소리는 하늘을 찌를 듯 울려 퍼졌다.
“조용히 햇!”
“조용히 못하겠어!”
수련총 무인들이 당황해서 검을 뽑아들었지만 이미 고삐 풀
린 망아지처럼 흥분을 더해 가는 군중 앞에서는 힘없는 속삭
임에 불과했다. 위험했다. 이런 현상은 반란이 일어나기 전과
똑같은 현상이지 않은가.
그 때였다.
꽈앙!
엄청난 폭음이 정은구 정상 부근에서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죽였다.
“뭐야? 무슨 소리야?”
“화약이 터지는 소리 같은데……”
사람들이 일단 조용해지자 수련총 무인 중 한 명이 득달같
이 소리쳤다.
“조용히 햇! 지금부터 함부로 입을 놀리는 자는 가차없이
목을 베어버리겠다.”
소리를 지른 무인은 힘차게 검을 휘둘러 보였다.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여족인들이 우르르 물러섰다.
물러섬은 또 다른 물러섬을 불러온다. 여족인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고, 계획되지 않은 즉흥적인 흥분은 쉽게 가라앉
았다.
화약이 터지는 소리에도 분지 안에 앉아있던 무인들은 동요
하지 않았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화약을 묻어놓았다는 사
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게다.
적엽명은 새끼줄을 따라 빼곡이 늘어서 있는 여족인들을 보
며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피골이 상접한 모습…… 광채를 잃은 눈동자…… 햇살에 그
을려 검은 색을 띠고 있는 피부……
적엽명은 탄을 이해했다. 우화를 이해했다. 자존을 위해서
목숨마저 과감히 버리는 우화대원을 이해했다. 오래 전부터
이해했다.
해남파가, 십이 가문이 조금만 나눠준다면……
부질없는 소망이다.
한족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한인들은 소수민족(少數
民族)이 구박받는 것을 당연시한다. 옛날부터, 손가락으로 헤
아릴 수 없는 먼 옛날부터 고정되어온 사고(思考)가 하루아침
에 바뀌겠는가.
중원도 상황은 똑같다.
그런데도 중원이 조용한 것은 한인들이 월등히 많기 때문이
다. 감히 ‘찍’소리 한 마디 못할 만큼 많다. 그래서 그들은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자신들도 구박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며
산다.
해남도는 여족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것이 문제다. 사람
은 많으면서 핍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정은구를 딛고 선 적엽명은 잠시 분지 안을 쳐다보았다.
전가주는 아직 오지 않은 것 같다.
순간, 분지 안을 들여다보던 적엽명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
났다.
해남파 장문인과 가주들이 올 것은 예상했지만 경주자사는?
그는 천천히 분지 안으로 발길을 들여놓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적엽명은 공손히 포권지례를 취했다.
“많이 변했구나. 강해졌다는 것을 알겠어.”
한민이 눈을 가늘게 좁히고 인사를 받았다.
“진작 찾아뵈어야 한다는 것이 늦었습니다.”
“허허허! 찾아뵙기는…… 해남파 사람이 아니니 강요할 수
없지.”
한민은 은근히 해남파 무인이 아님을 강조했다.
“이번 중양절까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민의 눈에서 섬광이 터져나왔다.
적엽명의 말뜻은 무엇인가! 해남파 무인이 되는 것도, 되지
않는 것도 자신이 결정한다는 말이지 않은가. 사실이 그렇다.
팔 년 전에 추방을 당한 몸이지만 팔 년이 지났으니 지난 죄
는 사면되었다.
파문……
그것은 돌아온 자의 뜻에 맡기는 것이 해남파 규율이다.
네 피가 의심스러우니 안 된다는 말은 지금에 와서는 못할
소리다. 적엽명은 분명히 비가주의 둘째 아들 자격으로써 해
남파에 입문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그 자격으로 비가를
재건하고 있다.
“중양절…… 기대하지.”
한민은 빙긋이 웃었다.
“전검을 익혔다고 들었다. 보자.”
범가주 범장은 말 한 마디로 끝냈다.
유가주 유질은 단지 고개만 끄덕였다.
적엽명은 그것만으로도 유소청이 짊어진 짐을 덜어준 느낌
이었다. 외면하리라 생각했는데. 아니면 쌀쌀맞게 비웃던가.
유가주의 눈은 적엽명의 허리춤에서 떠나지 않았다.
취옥검, 당신의 딸이 지녔던 검.
소문을 사실로 확인시켜 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요부(妖婦)가 된 유소청이 밤마다 적엽명을 찾아간다는 소
문.
그러나 유가주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오물거렸지만 이내 꾹 다물고 말았다.
아홉 가주에게 일일이 인사한 적엽명은 십이대 해남오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