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Heaven Sword RAW novel - chapter 60
##第二十章 떨어지는 꽃잎.
1
그는 싸움터로 폐허가 되어버린 산신각(山神閣)을 택했다.
밋밋한 야산 중턱에 세워져 있는 산신각은 사람을 발길이
닿지 않은 지 오래된 듯 부서진 흙담 벽만이 세월의 무상함을
일깨워주었다.
산신각 왼쪽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오른쪽에는 왼쪽보다
는 조금 작은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산신각 주위는 잡풀이
군데군데 자라고 있지만 대체로 흙바닥이었다.
산 정상은 힘껏 달리면 금방 정상에 올라버릴 것 같았고,
산 아래로는 초가(草家) 십여 채가 보였지만 거리는 역시 손
에 잡힐 듯 가까웠다.
자그마한 돌덩이들이 몇 개만 치워버리고 부서진 곳만 다듬
는다면 편안한 안식처가 될만한 곳.
그가 이곳을 싸움터로 정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움직이는 폭이 최대한 적으면서 효과적으로 몸을 은신할 수
있는 곳이어서 좋다. 나무라고 해봐야 겨우 허리춤에 올라올
뿐인 낮은 나무들은 효율적으로 몸을 은신시켜준다. 반면에
적의 움직임은 뚜렷하게 부각시켜 주리라.
그는 암기 위주의 공격을 펼칠 계획이다. 그러자면 앞을 가
로막는 장애가 적어야 하는 데 그 점에서도 이곳은 만족스러
운 곳이다.
그는 산신각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전에는 밭으로 사
용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잡초만 무성한- 수풀가에 앉았다.
석양이 지고 있다.
범가에서부터 따라온 사내 세 명은 조만간 산신각을 찾아낼
게다. 흔적이라고는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았다고 자부했
건만, 그들은 석가에까지 따라온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석가
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산신각을 찾아내지 못한다
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는 반쯤 눈을 내리 감았다.
그가 앉아있는 곳에서는 산 아래가 환히 내려다 보였다.
붉은 노을에 휘감긴 논에는 푸른 곡식이 익어가고 있다. 허
름하기 짝이 없는 초가에서도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저들에게는 가족과 둘러앉아 있는 이 시간이야말로 그 누구
에게도 빼앗기기 싫은 시간이리라.
노부모가 있는 집도 있으리라. 갓난아기가 있는 집도 있을
게고, 하루종일 뙤약볕에서 놀아 살갗이 시커멓게 그을린 자
식도 있으리라. 편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노망난 부모는
연신 싫은 소리를 해댈 수도 있고, 생활에 찌들린 아낙은 편
한 보금자리 대신 잔소리를 할 수도 있다.
어쨌든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는 편안한 가정을 가지고 있는 산아래 마을 사람들이 부
러웠다.
저녁놀은 그에게도 비쳐들었다. 얼굴도 붉게, 검은 의복도
붉게, 온 몸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병기도 붉게……
언제쯤 올 것인가.
반쯤 내리 감은 눈이 몽롱하게 변해갔다.
가면(假眠)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체력을 아껴야 하기 때
문에.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적을 끈기있게 기다리기 위해서
는, 그리고 그들과 한 줌 미련 없이 싸우기 위해서는……
그는 눈을 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반쯤은 내리 감았던 눈이건만 지금은
활활 불타는 투지로 이글거렸다.
적은 앞에서 다가오고 있다.
삼면(三面)이다. 정중앙에 한 명, 좌우에 한 명씩. 그들은
오장 거리를 유지한 채 정상을 향해 올라오고 있다.
그는 산신각 왼쪽을 돌아 커다란 느티나무에 몸을 숨겼다.
가장 왼쪽에 있는 자. 그가 오늘의 첫 희생자가 될 것이다.
그는 연노(連弩)를 들어올렸다.
단 일격에 숨통을 끊어놓아야 한다. 단 한 번의 실수는 죽
음으로 이어진다.
숨을 멈추고 기다렸다.
사내 세 명은 무공이 지고한 듯 풀잎을 밟고 오는데도 ‘사
삭’거리는 소리조차 흘리지 않았다.
피윳! 피윳! 피유웃……!
연노 열 발이 일시에 발사됐다.
적과는 삼 장 거리. 적이 위험을 깨달았을 무렵에는 이미
황천을 헤매고 있으리라.
파앗!
그는 신속하게 왼쪽 무인을 향해 날아갔다. 그의 몸보다 십
자표가 더 빨랐다. 어느새 연노를 집어던지고 십자표를 꺼내
든 그는 열 개 모두를 한 무인에게 던져냈다.
그가 무인 곁에 다다랐을 때, 그의 양손에는 양쪽 가슴속에
찔러 넣었던 죽침 이십여 개가 들여 있었다.
파르륵……!
죽침이 일시에 날았다.
거리를 주지 않아야 승산이 있다. 적과의 거리는 불과 두
걸음. 피할 여력이 없으리라.
“끄응……!”
무인을 스쳐 지날 때, 그는 미미한 신음소리를 들었다.
적이 당했다는 증거다.
그는 무인의 곁을 스쳐 지나며 유엽도 한 자루를 허리 속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미리 만들어놓았던 구덩이 속으로 뒹굴
어 들어갔다.
그가 막 덤불을 들어 몸을 가렸을 때, 다른 두 사내가 일시
에 다가섰다.
“허허! 한심하군.”
유엽도에 당한 사내가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내의 무공은 놀라웠다. 연노 열 시, 십자표 열 개, 죽침
이십 개. 그 중에 사내의 몸에 자리를 잡은 것은 불과 두 개
뿐이었다. 죽침 두 개. 하지만 그 두 개는 절망적인 상처를
입혀 놓았다. 한쪽 눈과 손목에 틀어박힌 것이다.
그리고도 사내는 반격을 가해왔다.
사내의 허리에 유엽도를 쑤셔 넣는 순간, 사내의 검은 배에
서 가슴까지 치올렸다.
빗나가기는 했지만, 그리고 그와 같은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상처지만 두 사내가 남아있는 상황에서는 아주 중한 상
처였다.
배에서 시작하여 가슴까지 그어놓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
린다.
그는 조급해지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진기(眞氣)를 일주
천(一周天)시켰다.
상대는 그와 같은 자들이다.
암기를 사용하지 않고 검을 쓰지만 몸놀림이라든가 검을 쓰
는 것이 모두 일격필살(一擊必殺)을 노리고 있다. 자신의 죽
음에는 연연하지 않고.
지금만 해도 그렇다.
남아있는 두 사내는 동료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지혈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두 사내는 ‘잘
가라’라는 등의 인사 한 마디 건네지 않는다. 슬픔이나 격동
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두 사내는 담담하다. 그것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피냄새!’
그는 가슴속에서 곱게 접힌 유지(油紙)를 꺼내 섬세한 손놀
림으로 풀었다.
유지를 풀자 하얀 가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색(無色), 무미(無味), 무취(無臭).
유지에 담겨있는 하얀 가루는 약이 아니다. 아니다, 약이
다. 사람 한 명쯤은 순식간에 죽여버릴 수 있는 독약이다.
그는 미련 없이 하얀 가루를 상처에 골고루 뿌렸다.
이내, 피가 그치면서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독약은 상처를 급속하게 부패시킨다. 하지만 단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우선 피를 멈춰주고, 무엇보다 피가 흘러나오며
풍겨내는 냄새를 지워준다.
그에게는 피냄새를 없애는 것이 독에 중독되는 것보다 중요
했다.
사내들은 자신과 같은 어둠의 그림자들. 그들의 후각은 개
보다 예민해서 극히 미미한 냄새에도 즉각 반응하리라.
사내 두 명은 숨이 끊긴 사내를 남긴 채 사방을 훑기 시작
했다.
그는 수리도 열 자루를 꺼내 한 손에 다섯 자루씩 나눠 쥐
었다.
독가루가 살을 태우고 피를 말리는 고통은 극심했다. 하지
만 그는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이마에서 구슬 같은 식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지만 그는 무섭게 부릅뜬 눈으로 사내들을
노려볼 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두 사내는 흩어질 생각이 없는 듯 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사내들은 그가 지척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숨어 있다고도, 아니면 바로 지
척에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동료를 죽이고 몸을 숨기기까지 많은 시간을 주지 않았다.
지금 움직인다면…… 그들은 잡아낼 수 있다고 확신한 듯
하다.
그는 숨이 막혔다.
독기가 뱃속을 뒤흔들어 놓고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땅바
닥에 데굴데굴 구르면서 비명을 토해낼 만한 고통이다. 하지
만 그는 숨을 멈추고 이를 악물며 참았다. 진기를 한바탕 유
통시키기만 하더라도 조금은 고통을 멈출 수 있을 텐데.
진기는 일격을 가하기 위해 남겨두어야 한다. 양손에 운집
된 진기를 풀었다가는 공격도 못해보고 죽음을 맞이할 게다.
이미 이 세상에서 이름을 지워버린 많은 살수들이 죽음으로
일깨워준 산경험이다.
두 사내는 조금씩 가깝게 다가온다.
그들은 내색을 하지 않지만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혈흔(血
痕)을 찾아냈음이 틀림없다.
그는 목표를 정했다.
이번에도 왼쪽 사내다.
그가 두 번째 희생자가 될 것이다. 그 다음은…… 몸을 피
할 여력이 없다. 적을 눈앞에 두고 은신하려는 행동을 취했다
가는 당장에 목이 떨어진다.
다른 한 명은 정면으로 부딪친다.
두 사내가 구덩이 근처에까지 다가왔다.
순간, 그의 손에 들려있던 수리도 열 자루가 암흑 속을 날
았다. 수리도 열 자루는 시작일 뿐이다. 왼쪽 어깨 뒤에 메어
져 있던 만자탈이 뒤를 이었고, 허리춤에 꼽아둔 비단검(飛湍
劍)도 풀어졌다.
화산파(華山派)의 독문 암기인 매화표(梅花 )도 날았다.
매화표의 꽃잎은 모두 여덟 개이며, 각 꽃잎마다 칠보사(七步
蛇)의 독을 묻혀놓았다.
개방( )의 독문 암기, 타개정(打開丁)도 날았다. 개방인
들은 타개정에 최혼분(催魂粉)을 묻히지만, 그는 매화표와 마
찬가지로 칠보사의 독을 묻혔다.
이 모든 암기가 오로지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더군다나
거리는 두어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사각!
그는 허리부근에 뜨겁게 달구어진 인두가 닿는 충격을 받았
다. 곧이어 왼쪽 반신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내 살이 아
니라 다른 사람의 살을 붙여놓은 것 같았다.
그는 한 사내의 무릎이 꺾이는 모습을 보면서 웃었다. 아
니, 웃으려고 했다. 고통으로 얼룩진 얼굴에 떠오른 웃음은
야차(夜叉)가 울부짖는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다시 번갯불이 스쳐갔다.
이번에는 목이다. 숨이 콱 막히며 눈에서 불똥이 튀긴다.
그는 무릎이 풀썩 꺾이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쓰러진 사내가 있다.
마지막 검을 쳐왔던 무인. 사내는 너무 방심했다. 이미 저
항력을 잃어버렸다고 단정한 듯, 마지막 검에 힘이 가득 들어
갔다.
그와 같은 살수를 대할 때는 마지막 숨통을 끊어놓을 때까
지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기본 철칙인 것을.
그가 목을 내주며 아래에서 위로 쳐 올린 검이 사내의 심장
을 갈라버린 것이다.
“끄윽……!”
이상한 신음소리가 머리맡에서 들려왔다.
그와 마지막 사내는 묘하게도 머리를 맞대고 누웠다.
“네, 네놈은 도대체……”
사내가 기가 막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살…… 수의 검은…… 주, 죽음…… 의 검.”
그는 간신히 대답했다. 그리고 물었다.
“그대들…… 은…… 나와…… 같은 부…… 류. 누구……”
“훗! 백중, 백손, 그리고 나는 백단.”
“삼백(三白)! 그…… 렇군.”
“사부님이 좋은 사제를 두었다고 자랑하더니만…… 역시 뛰
어났어. 삼백을 요리하다니.”
그는 미소를 흘리려고 했다. 삼백이라면 당당한 승부였다.
사부, 적수노인이 양성한 살수 중 가장 뛰어났다는 세 명의
사형.
그러나 사부는 뛰어난 제자는 거뒀지만 제자복(弟子福)은
많지 않았다. 삼백은 살수의 음침한 생활이 싫다며 떠나가 버
렸다. 그들이 어디로 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들이 떠난 이
후, 중원에서 삼백을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중
원 최남단 외딴 오지에 웅크리고 있었다니.
그는 삼백이 어떤 사유로 범가에 몸을 담고 있었는지 물어
보고 싶었다. 그가 살아날 수 있다면 아마 가장 궁금한 일이
될 게다.
허나, 그의 혀는 이미 굳어졌다.
머릿속도 텅 비워지고…… 살아온 일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 중에는 마음껏 정담을 나눠보지 못한 두 사람의 얼
굴도 섞여 있었다.
두 사람…… 두 사내……
그는 고개를 떨궜다. 그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
다. 야차 같은 일그러짐이 아니라 새신랑 같이 기대에 부풀은
미소.
그가 숨을 거두기 전, 백단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 * *
중년인의 나이는 오십에 가까워 보인다.
아래턱까지 길게 이어진 구레나룻이 인상적이지만 그밖에는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족인의 모습이다. 키는
보통 키에 마른 편이다.
입고 있는 옷도 허름한 마의다. 더군다나 군데군데 기운 곳
이 많아 언뜻 보면 걸인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중년인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십 년이 지난 다음
에도 잊지 못할 것이다.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에 뭉툭한 코, 굳게 다문 입술.
마치 단단한 바위를 연상시키는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년인이 풍겨내는 분위기가 단단한
바위와 마주 선 듯한 느낌을 들게 만든다고나 할까.
그는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아 수북하게 쌓아지는 암기들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바위는 어린아이의 무릎까지밖에 닿지 않을 정도로 낮았지
만, 넓이는 장정 서너 명이 다리를 쭉 뻗고 앉을 만 했다.
지금 바위에 앉아있는 사람은 중년인 혼자뿐이었다.
십여 명에 이르는 여족인들은 그를 호위하듯이 빙 둘러서서
바위 위에 쌓이는 암기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착잡한 표정이었다.
행낭에서 나오는 암기는 끝이 없었다.
유엽도, 수리도, 매화표, 죽침……
“기어코 죽었는가. 해남파의 무공이 그토록 강했단 말인가.
적엽명은 호랑이처럼 날뛰고 있는데……”
중년인의 입에서 신음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일절 입을 열지 않았다.
중년인은 행낭에 들어있는 암기들을 모두 꺼내기 전에 일어
서고 말았다.
“시신은?”
“산 정상에 바위 네 개가 옹기종기 모여있었습니다. 그 틈
에……”
“잘 썩겠군.”
“좋은 인연으로 다시 태어날 겁니다.”
“좋은 인연은 필요 없네. 다시 태어난다면 제발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 고생만 하다가 갔어.”
중년인의 음성은 여전히 침통했다.
“우화, 마음을 약하게 잡수시면 안됩니다.”
누군가 입을 열었다.
우화!
그는 분명히 우화라고 말했다.
신비 속에 가려진 인물, 해남파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도
찾지 못하던 인물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중년인을 우화라고 부른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탕( )은 비록 죽었지만 뛰어난 살수 비기를 남겨주었습니
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대력검이 있습니다. 검수(劍手) 이십
명입니다. 그들이 살수 비기만 익힌다면 아무리 남해삽십육검
이 강하다 해도……”
“하하하!”
우화는 울화를 허공에 날리려는 듯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대력검을 익혔다고? 그래, 우리는 자만했어. 이제 이만하
면 해남파를 상대할 수 있다고.”
“사실이 그렇습니다.”
“아니야. 너희들은 모두 탕이에게 죽은 몸이야.”
“……?”
“탕은 강성오가주를 치기 전에 너희들부터 쳤다. 그 결과
너희는 모두 죽었어. 탕이는 끝이라고 확신한 순간 물러났을
뿐이야.”
모두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탕이 언제 자신들 곁을 다녀갔단 말인가.
십 장 밖은 몰라도 삼 장 정도의 거리라면 낙엽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탕이 검
을 겨누고 물러갔다?
“잊지 마라. 탕은 강성오가주에게 죽은 것이 아니야. 범가
의 식객(食客)이나 다름없는 자들에게 죽었어. 너희 모두를
암살한 아이가 말이다.”
“……”
“기다린다. 천년을 기다려 왔는데 백 년인들 기다리지 못할
까. 너희들은 기재를 선출해서 대력검을 전수해라. 아직은 해
남파와 정면 승부 할 때가 아니다.”
모두들 불만스런 표정을 떠올렸다. 일부는 강한 불만을 드
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우화에게 대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그들에게 우화의 말은 곧 신의 말이나 진배없다.
더군다나 오늘은 우화의 친자식이 죽은 날이다.
탕의 나이 올해로 스물 셋. 한참 젊음을 꽃피울 나이이지
않은가.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나이가 아닌가.
팔 년 전, 적엽명이 해남도 전역을 떠들썩하게 뒤흔들어 놓
았을 때, 혼란을 틈타 해남도를 빠져나간 탕.
탕은 여족인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거둬준 은자를 적수
노인에게 바치고 살수 비기를 배웠다.
어린 나이지만 여족인들의 꿈을 잘 알고 있던 아이다. 아버
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 끝없이 도망 다니는 것이 무엇을 뜻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잠자는 시간, 밥먹는 시간…… 촌음(寸陰)을 아껴가며 살수
비기를 배웠고, 남만의 무신이라는 사왕을 죽임으로써 명부객
이라는 무명(武名)을 얻었다.
남만에서 탕은 한인으로 행세했다.
모든 사람의 눈을 피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노리는 궁극적인 목표는 해남파 장문인.
장문인의 몸에 검을 쑤셔 박기 전까지는 명부객이 누군지
몰라야 된다. 적어도 해남도에서만은.
떠날 때 적엽명과 같이 떠난 탕은 돌아올 때도 적엽명과 같
이 돌아왔다.
이런 것을 두고 전생의 인연이라는 것일까?
적엽명이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도주하는 바람에 제일급관
찰대상자로 선정되었다고 짐작되던 탕이 수월하게 빠져나갔
다. 당시 해남파 무인들 모두 여족인에게는 관심도 없었으니
까. 그들은 오로지 적엽명을 잡아죽이려고 혈안이 되어있었으
니까.
돌아올 때도 적엽명이 도와주었다.
만약 적엽명이 때맞춰 배에 승선하지 않았다면 바다에 투
신한 우화대원들과 한광에게 팔이 잘린 제삼구휼조장(第三救
恤長)은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탕은 해남도에 발을 딛지도 못했으리라.
아마도 선상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져 고기밥이 되었겠지.
그들에게 탕이 흑월이란 점만 일러줬어도 그런 실수를 저지
르지 않았으련만. 만사와해(萬事瓦解)만을 생각했다. 혹시 탕
을 만나기 전에 해남파 무인들에게 신분이 노출된다면 아무
것도 모르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차라리 마중을 보내지 않았으면……
은 우화대가 오지봉에 둥지를 튼 것을 모르고 있다. 탕이
해남도를 떠날 때만 해도 우화대는 각 마을에 산재해 있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탕이 해남도에 들어온 다음, 접촉했어야
옳다.
결국은 그렇게 됐다.
잠시에 불과하지만 해남파는 적엽명을 명부객으로 오인했
고, 덕분에 손쉽게 해남도에 들어온 탕은 아무의 손도 빌리지
않고 제 스스로 은신처를 마련했다. 그리고 또 제 스스로 오
지봉을 찾아왔다.
탕을 과소평가했다.
해남도를 떠날 때의 탕만 생각했지, 남만의 무신 사왕을 죽
인 인물로써의 탕은 생각하지 않았다.
탕은 부모형제와의 재회도 간단히 한 채, 살수 비기가 적힌
책자만을 남기고 홀홀 떠났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다.
우화대원들은 아무 말 없이 하나 둘씩 돌아서서 개미굴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금 현재 추진하고 있는 일은 어떻게 할까요?”
우화의 의견을 묻는 사람은 궁바의 안식처인 호평평야에서
우화를 자칭하며 적엽명과 만났던 중년인이었다.
“모두 중지시키게. 모든 힘을 정보수집에 쏟으라고 지시하
게.”
“모두 말입니까?”
“대원들이 죽일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어. 이제까지는
대력검을 믿었기 때문에 마음놓고 파상적인 공격을 할 수 있
었지만…… 큰 잘못을 한 거야. 그런 행동은 해남파의 약을
올리는 결과밖에는 얻는 것이 없어.”
“그럼 언제까지……?”
“이십 년. 이십 년이면 충분할 거야. 여보게. 우리 대에서
는 영화(榮華) 볼 생각을 버리세. 우리는 다음 대를 위해서
밑거름이 되세나. 싸움도 다음 대에 시키고…… 지금으로써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야.”
“그래도 적엽명은……”
“적엽명은 많은 희망은 주었지. 우리도 하면 할 수 있다는
희망. 그 희망을 버리지 마세. 우리가 적엽명과 같은 인물,
두어 명만 길러낸다면 충분히 해남파를 상대할 수 있어. 자존
(自存)의 길이 까마득한 것만은 아냐.”
“알…… 겠습니다.”
“대원들을 설득해주게.”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화의 생각에 동조할 수는 없었다. 언제는 강한 힘
이 있어서 해남파와 싸워왔단 말인가. 약하면 약한 대로 싸우
면 된다. 목숨을 내주고 팔 한쪽만 자르면 된다. 그런 다음
다른 사람이 또 목숨을 내주고 팔 한쪽을 자르고, 그 다음 사
람이 무팔이 된 자의 목숨을 거두면 된다.
여태까지 그런 방식으로 싸워왔지 않은가.
그는 오늘따라 우화가 몹시 약해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
었다.
탕이 죽었기 때문일까?
오늘은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고 그냥 물러가는 것이 좋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나 모레쯤 심기가 평온해졌을
때 다시 투쟁대책을 논의하는 게다.
“참! 탄이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됐는가?”
우화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적엽명이 간여하고자 하는 일…… 의외로 복잡합니다.”
“……?”
“해남도에 새로 나타난 인물은 없습니다. 모두 해남도 사람
들입니다. 수귀 탄이 암중조직의 일원이라며 내준 사망자 명
단 속에는 저희 우화대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화는 놀란 듯 했다.
우화대원 중에 우화대말고 다른 조직에 가담한 자가 있으리
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우화대가 지니고 있는
민족혼(民族魂)보다 더 강렬한 무엇이 있단 말인가.
“황유귀 술이 제대로 조사했다면, 그리고 객사한 여족인들
이 평범하게 죽은 게 아니라면 분명합니다. 저희는 지금껏 해
남파 무인들에게 죽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만…… 광동성 쪽
에서 벌어진 공물 강탈 사건에 간여한 듯 싶습니다.”
“관군에게 죽었단 말인가?”
“……”
중년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할
만한 사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