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Mine RAW novel - Chapter 6
6화
“장문인! 장문인!”
화산파 장문인이 기거하는 소요정 안에서 붓질을 하던 진무는 반백이 된 눈썹을 찌푸렸다.
“어허, 도를 닦는 자가 어찌 그리 방정을 떠는 게야.”
헐레벌떡 뛰어온 일대제자 왕직은 장문인 진무의 꾸지람에 찔끔해 목을 자라처럼 움츠렸다.
“쯧쯧!”
진무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유수와 같이 흐른 세월은 어느덧 진무의 귀밑머리를 하얗게 물들이며 반백의 노인으로 변모시켰다.
“송구합니다, 장문인.”
“무슨 일로 소란을 피운 게냐?”
“괘월봉(卦月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발견됐사옵니다.”
“괘월봉?”
진무가 눈썹을 모았다. 괘월봉이 어딘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왜 있지 않습니까? 수십 년 전에 폭우로 무너져서 길이 끊긴 서쪽의 산자락 말입니다.”
“……!”
“요 며칠 전에 엄청난 비가 내려서 다들 걱정했는데 그때 또 그쪽에서 산사태가 일어나서 다들 여기까지 피해가 오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지요. 그런데 거긴 본 파를 통하지 않고는 사람이 오갈 수 없는데 어찌 된 일일까요? 감히 우리 화산파의 허락도 없이 외인이 침탈한 것이라면 단단히 혼찌검을 내주…….”
왕직의 수다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는 동안 늙은 진무의 눈은 저도 모르게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보자꾸나.”
“…예?”
왕직이 눈을 휘둥그레 치떴다.
대꾸할 틈도 없었다.
진무가 서두른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벌써 청풍각을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산파 장문인이 움직이니 매화검수인 일대제자들이 즉시 따라붙고 하릴없던 몇몇 도관의 관주도 뒤따라왔다.
화산파를 벗어난 진무는 멀리 보이는 괘월봉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어찌 저곳에…….’
진무는 까맣게 잊고 지낸 괘월봉을 보며 나이를 잊은 듯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해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어찌 그와의 추억을 잊을 수 있으랴.
장문인 진무를 따르는 일대제자들과 장로들은 이제껏 본 적이 없는 그의 붉어진 눈시울을 보며 의아해 마지않았다.
항시 물처럼 고요하고 득도한 선인처럼 탈속한 기풍이 흐르던 장문인이 이처럼 감정을 격정적으로 표출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괘월봉을 향해 오르던 진무는 양쪽을 마주 보고 있던 절벽 중 하나가 무너져 가파른 비탈길이 새로 만들어진 것을 발견했다.
“어? 여긴 절벽이었는데?”
“그러게. 산사태로 길이 만들어졌나 본데?”
뒤를 따르던 일대제자들이 어리둥절해하며 말을 주고받았다.
무너진 절벽을 따라 내려간 진무가 높이 솟은 마주한 절벽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땅을 박찼다.
“오!”
“과연 장문인이십니다!”
“본 파의 선학천리(仙鶴千里)가 저렇게도 가능하군!”
화산파 도사들이 탄성을 자아내며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절벽의 중간 즈음에 도달한 장문인을 쳐다봤다.
“속세에서 선광우사(仙光羽士)라는 존호로 불리시는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팔 하나에 의지해 절벽에 매달린 진무가 수직으로 뻗은 절벽의 위쪽을 쳐다봤다.
‘하지만 이 구절들은 현문정종의 상청비록(上淸秘錄)으로 아주 진귀한 보물인걸요?’
‘이놈아, 발에 맞추어 신발을 신어야지 보기 좋은 신발을 골라놓고 발을 깎을 셈이냐?’
‘저도 나중에 화산파의 이름을 드높일 훌륭한 도사가 될 수 있을까요?’
‘본디 귀한 것은 사람들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단다. 너를 알아주는 사람이 드문 것은 그만큼 네가 귀하기 때문인 것이야.’
고단하고 외롭던 어린 시절 얼마나 위로가 되었던 말인가.
막막하고 불안한 시절에 그 무엇보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무심했어.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었더라도 한 번쯤은 와봤어야 하는 것인데…….’
한창때에는 견문을 넓힌다고 강호를 주유하고, 경험을 쌓은 뒤에는 사문의 일을 거들었다. 막중한 직책을 맡아 격무에 시달렸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화산파를 이끄는 장문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렇게 잊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까맣게 잊어야 할 분이 아니었다.
“흡!”
진무가 절벽에 쑤셔 박은 손에 힘을 주며 다시 한 번 날아올랐다.
‘꿈은 희망이고 염원이다. 꿈을 꿔야 그걸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 것이고, 긴 삶의 행로에 즐거움을 줄 것이다. 꿈이 망상에 불과하다면 무엇을 위해 산단 말이냐?’
‘곧게 자란 나무는 제일 먼저 베이고 맛이 단 우물이 빨리 마른다고 했다.’
‘재주는 갈무리하되 겉으로 뽐내지 마라. 시기하는 자는 어디에나 있는 것이니라.’
‘호랑이와 표범이 사냥을 당하는 것은 그 무늬로 인해 사냥꾼을 불러 모으는 탓이다.’
‘절제를 잊지 마라. 할애비는 지난날 절제를 몰라 많은 후회를 남겼다. 짐승을 쫓는 자는 태산이 보이지 않고 탐욕을 좇는 자는 시비(是非)에 어두워져 버린다. 너무 방만하여도 절제를 못한 것이요, 너무 인내해도 절제를 못한 것이다. 알겠느냐?’
진무는 저 절벽 위에 올라서면 금세라도 염세악이 두 팔을 벌려 인자한 웃음으로 맞이할 것 같았다.
‘진무야, 진무야, 염치가 없구나. 이제 와서 어찌 욕심 어린 기대를 하느냐.’
진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단애를 휘감아 스쳐 가는 바람을 뚫고 솟구친 진무의 노구가 마침내 절벽 위에 올라섰다.
“……!”
순간 앞을 바라본 진무의 얼굴이 굳어졌다.
모든 것이 황폐하게 변해 버린 과거의 그때 당시 모습이 아니었다.
산사태로 무너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토굴이 그대로 있고 부드러운 양탄자처럼 땅을 덮은 풀밭도 그대로다.
그리고 생이 다해 쓰러진 나무껍질을 뚫고 새순이 돋아나고 있는 통나무에 앉아 있는 이.
햇볕을 쬐고 있는 듯 쪼그리고 앉아 부신 눈으로 하늘을 보던 이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를 바라보는 진무의 노안이 부르르 떨렸다.
볕을 쬐던 이가 주름진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이내 빙그레 웃었다.
“왔느냐?”
부릅떠진 진무의 노안에 불신의 빛이 어렸다.
다 해져 무릎과 팔꿈치까지 드러난 낡은 회의.
백발의 주름진 얼굴에 더없이 인자한 미소.
마치 시간이 거꾸로 돌아간 듯 그때 그대로의 모습.
육십 년 수양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진무의 시야가 짙은 습막으로 뿌옇게 변했다.
“많이 기다렸다.”
진무의 몸이 허물어졌다.
“어르신!”
***
염세악은 진무가 반백의 늙은이가 되어 나타났어도 한눈에 알아보았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도 앳된 옛 모습으로 비쳐지고,
놀람으로 치뜬 깊어진 눈은 과거의 선량한 눈망울이며,
백발이 성성하여 무릎을 꿇는 모습은 가르침을 달라며 매달리던 어린 진무의 모습 그대로이다.
오십 년의 시간을 건너 재회한 염세악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살아… 계셨습니… 까.”
진무의 질끈 감은 눈에서 주름 고랑을 타고 굵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염세악은 가슴이 뭉클했다.
죽기 전에는 만나겠지 하는 막연한 그리움과 기다림.
세상 천지에 누가 있어 자신을 위해 이처럼 눈물을 흘려 줄 수 있을까.
염세악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엎드려 오열하는 진무를 향해 다가갔다.
염세악의 손이 격정으로 들썩이는 진무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다 큰 녀석이 눈물이 이리 헤퍼서 어쩌누.”
노년에 접어든 진무에게 다 큰 녀석 운운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하지만 염세악에겐 그랬다.
진무가 고개를 들어 염세악을 올려다봤다.
“어르신…….”
염세악은 그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
“장문인!”
“헉! 장문인?”
그때, 경지가 낮아 한참 만에 절벽을 올라온 장로들과 일대제자들이 뒤늦게 정상에 도착해서는 놀람에 찬 소리를 내질렀다.
대화산파의 장문인이 누군가 앞에 무릎을 꿇고 있으니 당연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장문인! 대체 무슨 일입니까? 무릎을 꿇다니요!”
“장문인!”
문도들이 속속 도착하며 놀람과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저마다 떠들어대자 진무도 격동을 수습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소매로 눈물을 찍은 진무가 극진한 모양새로 염세악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들 인사드리시오. 본 파의 큰 어른이시오.”
“……?”
“예?”
진무의 말은 염세악과 화산파 문도 양쪽 모두를 당황시켰다.
‘큰, 큰 어른? 이 녀석이 나이를 먹고도 아직까지 오해를 하고 있다니…….’
하늘이 무너져도 놀랄 일이 없을 염세악이 벙찐 얼굴로 진무를 쳐다봤다.
“큰 어른이라면…….”
“누구……?”
장문인이 큰 어른이라 하는 말에 일대제자 매화검수들은 당장 표정이 경직됐지만 장로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지간한 문파의 원로들과 은퇴한 선배 도인은 아는데 염세악의 얼굴은 생면부지의 초면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리 많이 봐줘도 장문인과 비슷하거나 조금 연치가 많아 보일 뿐, 선배도 아니고 큰 어른 운운하기에는 어쩐지 연배가 부족한 감이 있어 보였다.
“내게 가르침을 주신 스승님이오.”
진무는 염세악을 가리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스승이라 호칭했다.
염세악은 그 말에 겸연쩍어했지만 화산파 문도들은 오히려 더 당황하고 말았다.
진무와 동기인 자운전의 손괴가 노안을 찡그렸다.
“하지만 장문인, 장문인의 스승님이신 대사백은 이미 오래전에 탈각하시지 않았소?”
그의 말에 다른 화산파의 문도들도 다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괴가 말하는 진무의 스승이란 과거 복마도인이란 외호로 이름을 떨친 담청을 말함이다.
의문 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그들을 향해 진무가 미소 지었다.
“그 이전 내가 어린 소년일 적에 가르침을 주신 스승님이오.”
“……!”
“예에?”
이어지는 진무의 말에 하나같이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장문인 진무와 염세악을 두 번, 세 번 거듭해 번갈아 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장문인 진무의 연치가 환갑을 넘긴 지 몇 해인데 어릴 적 운운하다니.
그럼 도대체 저 사문의 큰 어른이라는 분은 세수가 몇이란 말인가!
손괴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똑같은 생각을 했다.
진정 그토록 오래 산 기인이란 말인가?
사람이 정해진 수명을 초월해 이토록 오래 장수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장문인의 말을 믿지 않기도 뭣한 것이 미치지 않고서야 헛소리를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손괴가 염세악을 향해 절로 떨려 나오는 목소리로 물었다.
“허, 허면 함자가 어찌 되시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