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28
428화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복면인은 무언가 외치기라도 하고 싶었다.
“꾸에에엑!”
하지만 태청산수를 섞음으로써 더욱 강력해진 진무의 따귀질에 복면인이 낼 수 있는 소리는 비명, 오직 비명뿐이었다.
“휴우…….”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끝에 따귀질을 끝낸 진무가 복면인의 머리채를 놓았다.
풀썩.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으나 복면인의 정신은 말짱했다.
눈동자에 저 무시무시한 놈이 똑똑히 보인다.
그토록 고통스럽게 맞았음에도 정신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했다.
“자, 이제 다시 물을까?”
“……!”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며 묻는 목소리에 복면인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병필태감 예하 서창 소속 이평세! 나이는 서른둘이며…….”
“…….”
복면인, 이평세가 자신의 내력을 힘찬 목소리로 읊기 시작했다.
그냥 통성명 먼저 하자니까 뭘 이리 세세하고 자질구레하게 말한단 말인가?
그런데 서창?
구구절절 뱉어 내는 이평세의 말 중 한 단어에 진무가 의아함을 느꼈다.
서창이라면 영왕과 대립하고 있는 귀비 쪽의 세력이 아닌가?
“잠깐 멈춰.”
“어려서 홀어머니와 함께…… 가난에 어쩔 수 없이 환관…… 예?”
“서창이 영왕부를 감시하고 있었던 거냐?”
“그, 그건…….”
“…….”
묻지도 않은 것까지 주절주절 나불대던 놈이 이미 다 말한 것이나 다름없는 걸 가지고 머뭇거리자 진무가 다시 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렇습니다!”
“좋아. 그렇게만 해. 그럼 다시 맞는 일은 없을 거야.”
“…….”
친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마저도 무서웠다.
“쯧쯧, 어쨌든 영왕도 조심성이 없구만. 제집에 쥐새끼들이 드나드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냐? 어째서 그렇게 급히 밖으로 빠져나온 거지?”
“실은…… 영왕이 좌군 도독의 본가로 향하여 그쪽을 지원하라는 명령이 내려왔기에.”
“좌군 도독을?”
“예!”
“뭐야? 그럼 영왕부에 없단 말이잖아?”
괜히 황신 등에게 영왕을 납치해 오라고 시킨 모양이다.
그나저나 진무가 영왕을 찾아온 것은 금군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인데, 벌써 군부로 움직였다면 꽤 심각한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할 자식이, 사람 귀찮게시리.”
“…….”
진무가 잔뜩 짜증을 부리며 일어나자 이평세가 겁에 질린 눈초리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퓻, 푸풋!
가벼운 지풍과 함께 혈도를 제압당한 이평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청우야. 이놈 좀 업어라. 나중에 영왕을 만나면 필요할 듯싶다.”
“예! 사숙.”
“청상아. 가서 황신이랑 애들 좀 불러와. 그냥 담 밖에서 나오라고 하면 될 거야.”
“알겠습니다. 사숙께서는?”
“가 봐야지. 영왕을 만나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
“좌군 도독의 본가가 어느 쪽이냐?”
“저쪽입니다.”
진무의 물음에 점혈 당해 청우의 어깨에 얹힌 이평세가 눈짓과 턱짓으로 공손하게 방향을 가리켰다.
“쳇, 군인 놈들과 만나는 건 영 별론데.”
진무의 말에 능서현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진다.
좌군 도독의 본가라면 수많은 군병이 있을 것은 당연한 일.
그리고 진무가 그곳을 찾아간다면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칠 것이 분명하다.
영왕을 납치하는 것도 문제기는 했지만 몰래 죽여 버리고 모른 척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좌군과 싸우면 순천부 전체가 시끌시끌해질 것이고, 그리되면 정말 군과 정면충돌을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걸 막아야 하나?
하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는다. 저 괴물을 누가 막을 수 있다고…….
* * *
오군도독부는 중원의 군권을 다섯 지역으로 분할하여 다스리게 한 현 나라의 군부조직이었다.
전, 후, 좌, 우, 중군으로 나누어진 다섯 도독은 지역별로 자율적으로 군을 움직일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힘을 가진 것이 영왕의 세력에 속한 좌도독 곽종산이라는 인물이었다.
나이가 칠십에 이르렀음에도 여전히 절륜한 노장수.
오랜 전쟁에서 수없이 나라를 구해 온 그는 총병관(總兵官: 전시의 총사령관)의 직위에서 물러나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황제의 신임이 두터웠고, 휘하 장수들이 가장 존경하고 따르는 군의 핵심 인사였다.
곽종산의 본가가 위치한 순천부 외곽.
영왕의 방문에 곽종산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그를 맞이했다.
“허허, 영왕 전하께서 어찌 이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셨습니까?”
“누추하다니요? 도독께서 계시면 황무지도 영왕부보다 귀해 보일 것입니다.”
“그 무슨 당치않은 말씀을.”
여전히 소탈한 그 모습에 영왕이 웃으며 답했다.
“마음이 적적하여 차나 한잔할까 들렀습니다.”
“…….”
웃고 있음에도 어딘가 수심이 가득해 보이는 영왕의 모습.
그 연유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곽종산이 애써 미소로 화답하며 농을 쳤다.
“저런, 모처럼 좋은 차를 구해 숨겨 두고 먹으려 했더니 전하의 코를 속이진 못한 모양입니다. 자, 오르시지요.”
“예.”
둘은 속마음을 감춘 채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줄지어 늘어서 경계하던 군병들이 각을 유지한 채 인사를 해 왔다.
그리고 그 너머 너른 훈련장에서는 군진(軍陣)의 훈련이 한창인 것이, 흔하디흔한 고관대작의 전각이 아니라 병영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도독께선 여전하시군요. 평시임에도 군병의 기세가 사뭇 매섭습니다.”
영왕이 감탄하자 곽종산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장수에게 평시가 어디 있고 전시가 어디 있답니까? 훈련이 곧 휴식인 법입니다.”
“허허, 도독 같은 인물이 있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
웃고 있었으나 혼란한 시대를 걱정하는 영왕의 마음이 전해져 곽종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묵묵히 걷던 두 사람은 훈련장을 지나 후원에 수수하게 지어진 작은 막사에 도착했다.
“자, 앉으십시오.”
“예.”
곽종산이 자리를 권하고 영왕이 착석하자 딱딱한 군례를 올린 장수가 차를 내놓았다.
“좋은 차를 숨겨 두었다더니 고작 하급 엽차입니까?”
“허헛, 수도만 벗어나면 헐벗고 굶주린 이들이 수두룩하니 제겐 그마저도 과한 사치입니다. 입에 맞지 않으시면 술이라도 준비할까요?”
“이거 원, 말을 말아야지. 됐습니다. 내 도독의 성품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영왕이 곽종산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차의 종류가 무슨 문제이겠냐마는 곽종산의 신분이면 사시사철 서호의 용정이나 안계 철관음을 마셔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최하급 병졸과 같은 질의 식사를 했고, 시골 객점에서 식사 전에 내주는 하급 엽차를 즐겼다.
비록 아랫사람이었으나 영왕은 언제나 곽종산의 검소한 성품을 존경해 왔다.
“한데 관대를 걸치신 것을 보니 입시하였다 오시는 길인 모양입니다.”
“예. 하나 뵙지는 못하였습니다.”
“뵙지를 못해요? 백관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귀비의 손발이 아닙니까?”
사정을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인지 곽종산이 얼굴을 찌푸렸다.
“망할 놈들 같으니. 이미 태자의 행방이 만천하에 드러났음인데…….”
“…….”
“영왕 전하. 차라리 제게 명하시면 즉시 휘하에 군령을 내리겠습니다.”
“…….”
“태자의 행적이 밝혀졌다는 이야기에 이미 감숙 지역에 군병을 준비해 놓았고,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것을 대비해 본가에도 좌군 최정예 일천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곽종산이 굳은 얼굴로 나지막이 말하자 영왕은 고개를 저었다.
“저들이 도독과 저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감시하고 있습니다. 괜한 빌미가 될 것입니다. 좌군을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최후의 방법이라야 합니다. 일단은 폐하를 뵐 때까지 기다려 봅시다.”
“…….”
영왕의 만류에도 곽종산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그동안 귀비의 횡포를 참고 또 참아 온 그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영왕의 말처럼 군이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그가 움직이면 귀비를 따르는 장수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들고일어날 것이 자명했다. 그리되면 순천부는 순식간에 전화(戰火)에 휩싸일 것이다.
“도독께선 어떠십니까? 서창으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계신다 들었습니다.”
“흥, 그깟 씨 없는 놈들이 설쳐 봤자지요. 놈들의 모함으로 인해 충직한 이들이 형장의 이슬이 되었으나 제 휘하의 장수들을 흔들기에는 부족합니다. 염려 놓으십시오.”
곽종산의 호언에 영왕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미 혈육 같은 이들을 잃고 흘린 피눈물이 가슴에 사무쳤음을 안다.
지금도 귀비는 서창을 이용해 자신은 물론 곽종산의 손과 발을 자르고 있었다.
하지만 곽종산이 버티고 또 버텼기에 진작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군부가 여태 귀비의 손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태자의 행적이 드러났으니 저들의 공세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압니다. 하나 걱정 마십시오. 저는 언제까지나 폐하와 영왕 전하의 편이니.”
“든든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영왕의 씁쓸한 표정을 바라보는 곽종산은 안타깝기만 했다.
황가를 지키기 위해 홀로 애쓰는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자꾸만 같은 대화를 반복하다가는 분위기가 더욱 침체될 것 같았기에 곽종산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진무라는 무인은 만나 보셨습니까?”
“아직입니다.”
“저런…… 안타까운 일이군요. 큰 도움이 되리라 여겼는데.”
“글쎄요. 이젠 그를 만나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예? 어찌해서요?”
“아시지 않습니까? 내 괜히 무림인들에게 의지해 태자에 관한 일을 꺼냈다가 어찌 되었는지요. 그들이 함부로 움직이며 입을 놀리는 바람에 되레 태자의 행적이 저들에게 알려져 버렸습니다. 서창 놈들이 계속해서 증원되고 있으니 일이 어찌 될지…….”
“…….”
곽종산이 잠시 영왕을 바라봤다.
귀비와 서창의 득세로 인해 동창의 세력이 약해지고 군병을 움직일 수 없게 된 와중에 진무라는 무인을 천거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군부에서도 유명한 서안 지부 태양명의 비리 사건.
당시 그의 치부책을 찾아 대대적인 감찰 조사를 진행함으로써 군부의 기강을 손본 일이 있었다.
그 사건을 주도한 것이 당시 서안부 위소를 담당하고 있던 방만평과 갈천벽이라는 장수였다.
이들의 공을 높이 산 곽종산은 그들을 승차시켜 좌도독부의 동지로 임명해 가까이 두고 아꼈다.
후에 치부책을 구해 대가 없이 그들에게 전한 ‘정의의 장사꾼’이라는 의인이 무림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진무라는 도사임을 알게 되었다.
그와 직접 대면했다는 방만평에 따르면 그 무공이 수천에 달하는 위소의 군병을 모조리 뚫고 들어올 정도로 뛰어났고, 무욕한 것도 모자라 의롭기가 말로 다 할 수 없다 했다.
진무의 이야기는 평소 무(武)를 숭상해 온 곽종산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꼭 한번 만나고 싶은 마음에 그의 행적을 은밀히 알아보는 내내 그 의로움에 어찌나 감탄했던지.
어쨌든 곽종산은 귀비의 파상공세에 힘겨워하던 영왕에게 그를 천거했다.
비록 무림인이기는 하나 그 정도의 의기를 가진 인물이면 필시 도움이 될 것이라 여긴 것이다.
“음…… 하지만 그는 다른 무인들과는 다를지도 모릅니다.”
“달라요? 뭐가 말입니까?”
“그만한 무는 노력한다고 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지가 곧고 마음이 정심해야 하는 법이지요. 또한, 방만평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동량으로서…….”
“허허, 도독.”
“…….”
“무학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일개 도사, 아니 무부입니다. 그런 자에게 국가의 명운을 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제가 잠시 힘에 부쳐 잘못 생각한 것이지요.”
곽종산의 말에 영왕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무림에 실망이 큰 모양이었다.
하니 곽종산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본인이 싫다는 것을 강요하여 무거운 어깨에 더욱 짐을 지우고 싶진 않았다.
“자, 듭시다. 도독의 굳건함을 확인하였으니 내 그래도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러시지요.”
더 이상 대화는 없었지만, 서로의 마음을 아는 그들은 침묵을 유지한 채 찻잔을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