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78
478화
잔뜩 긴장한 응조가 부릅뜬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전장의 뒤편.
자신이 도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수하들이 적보다 수배나 되었음에도 순식간에 사기를 잃고 밀리기 시작했다.
그들이야 죽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어차피 버려져도 상관없는 자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대궁주에게 선택받은 자이며, 홍건의 맥을 이은 하늘의 핏줄이었다.
눈알을 굴려 빠르게 상황 파악을 끝낸 응조가 선택한 것은 능서현이었다.
전투 성향이 가장 잔인하였으나 두 사람에 비해 무공이 떨어진다.
짐작하기로 이제 막 강을 이룬 성강. 유강을 이루지 못했으니 자신과 비슷하거나 모자라다.
일대일이라면 비슷하거나 이길 수 있는 상대.
급습을 가한다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다.
응조대를 무당지검과 천우명에게 제물로 바쳐 추격을 지연시키고, 능서현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도주로를 확보한다.
판단을 마치자마자 결행에 옮기기 위해 명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이 새끼 이거, 눈깔을 하도 심하게 굴려서 모른 척할 수가 없네.”
“……!”
진무가 곧장 걸음을 내디뎠다.
“마, 막아라!”
응조의 명령에 응조대가 일제히 몸을 날렸다.
슈가가각!
빳빳하게 세운 응조대의 손가락이 진무의 몸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을 기세로 날아들었다.
되었다. 이대로……!
응조는 희열 어린 얼굴로 곧장 몸을 돌려 능서현을 향해 손가락을 세웠다.
꽈아악.
그러나 손을 채 뻗기도 전에 훅 당겨지는 머리카락.
머리 가죽이 벗겨지는 고통과 함께 고개가 뒤로 꺾인 응조의 눈에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동자와 새하얀 송곳니가 보였다.
“이형환위 처음 보냐?”
“이, 이형…….”
무릎도 발도 떼지 않은 채로 몸을 옮기는 보법의 전설, 이형환위(移形換位).
이런 씨발, 정도껏 해라.
대체 몇 가지나 보여 줄 참이란 말이냐!
응조는 절망감에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응조대가 찢은 것은 진무의 잔상이었고, 실체는 이미 응조의 곁에 서 있었던 것이다.
“모처럼이다. 넌 좀 세게 맞자.”
“……!”
섬뜩한 미소에 놀란 응조가 사력을 다해 손을 휘저었다.
쉬이이익!
절체절명의 순간이었기 때문일까?
한계를 초월한 속도로 휘둘러진 응조의 손가락에 진무가 다급히 고개를 젖혔다.
“…….”
잘린 진무의 앞 머리카락 몇 올이 허공을 날았다.
“이, 이놈! 내가 네놈 따위에게 당할 성싶으냐!”
악을 쓰는 응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무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이 새끼가…… 귀찮게.
그래도 한 수쯤 있다 이 말이지?
“서현, 우명!”
“예, 천주님.”
“나머지 정리해. 이놈은 나랑 대화를 좀 오래 나눠야겠다.”
“알겠습니다.”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천우명과 능서현이 철검단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적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야!”
“…….”
“너 이름이 뭐냐?”
“응조, 응조의 무향이다.”
“새끼, 대답은 빠르네. 근데 월도의 무향이니 응조의 무향이니, 다른 이름은 없냐?”
“뭐?”
“본명 말이야, 본명. 그래도 내 소중한 앞머리를 자른 놈인데 이름 정도는 알아 둬야지.”
“……이름 따위는 가져 본 적 없다.”
진무가 자세를 취하며 경계하는 응조를 빤히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아아…… 그래, 뭐. 그럼 이름도 없는 잡졸 새끼라는 거네.”
“……뭐?”
“야, 잡졸.”
“자, 잡졸?”
뭐 이런 새끼가?
이미 실력 차이가 명확하다.
굳이 도발할 필요가 없음에도 자신의 속을 있는 대로 긁는 진무의 껄렁대는 말투에 응조가 눈에 핏발을 세웠다.
“어쨌든 특기가 조법이라는 거지?”
“…….”
“내가 가끔 변덕을 부리는 성격이거든? 그러니까 딱 세 번만 기회를 준다. 그 안에 좀 전처럼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리면…… 음, 생각은 해 보마.”
“뭐?”
진무는 보란 듯이 일휘를 검집째 바닥에 꽂고 천천히 손을 거두어 뒷짐을 졌다.
“자자, 최선을 다해서 덤벼 봐.”
“네, 네놈…….”
진무의 호의에 응조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철저한 무시.
성강을 이루어 궁의 핵심 인사가 된 자신에게 삼 초를 양보한다는 것은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생각을 해 본다고?
살려 준다는 뜻인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으나, 일말의 기대를 걸어 볼 수밖에 없었다.
“하압!”
어떻게든 살기만 하면 된다.
응조는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끌어내 진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취리릿! 슈아아악!
두 손을 꼬아 만든 회오리가 날카롭게 진무의 몸을 헤집고 들어갔다.
하지만 진무가 고작 반보를 물러나며 몸을 비틀어 피한 탓에 그는 단 세 치의 간격을 두고 허망하게 허공을 할퀴어야만 했다.
“일 초.”
슈아악!
“이 초.”
“……!”
또 반보였고, 또 세 치였다.
마치 자신을 약 올리듯 같은 거리와 같은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해 내는 진무의 모습에 응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놈! 죽여 버리겠다!”
“…….”
괴성과 함께 모든 기운을 끌어 올린 응조가 두 손을 난잡하게 휘두르자 수많은 잔영이 일어나 사방을 가득히 채웠다.
진무는 그 잔영을 재미있다는 듯 응시하다 가볍게 일 보를 내디뎠다.
일 보에 생겨난 두 명의 진무가 이 보에 넷으로 늘어나더니, 순식간에 응조가 만든 손의 잔영만큼이나 많아졌다.
슛, 슈슈슛, 슈슛.
그리고 그 잔영들이 응조가 만든 모든 손을 피해 버렸다.
또다시 세 치와 반보의 움직임으로…….
“이걸로 삼…….”
그 순간 진무의 머리카락 한 올이 잘려 공중에 나풀거렸다.
진무는 허탈하게 웃으며 투덜거렸다.
“젠장, 또 스쳤네.”
응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됐다. 죽이진 못했으나 머리카락 한 올은 베었다.
“새끼, 더럽게 기뻐하네. 칭찬이라도 해 줄까?”
“…….”
“그런데 참, 웃기지 않아?”
“…….”
“고작 머리카락 하나 잘라 낼 실력밖에 되지 않으면서 뭐라도 되는 양 중원을 뒤집으려 한다는 게. 그것도 수하들을 사지로 몰아넣으면서 말이야.”
모든 것을 쏟아붓고도 끝내 머리카락밖에 못 건드린 응조가 두려움에 찬 눈길로 진무를 바라보았다.
“남들 위에 서자면 타인의 목숨을 안타까워할 줄 알아야 하고…….”
진무는 싱긋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중원을 무너뜨릴 생각이라면 무공이 이 정도는 되어야지.”
후아아악!
시커먼 기운이 진무의 손바닥에 겹겹이 씌워지며 몸집을 키웠다.
그러다 하나의 형상으로 변한 기운이 응조의 눈동자를 가득 채우고, 진무의 눈동자가 먹구름에서 모습을 드러낸 묵룡의 그것처럼 번뜩이며 응조를 향했다.
사지를 옥죄는 압박감에 심장이 터질 듯하고, 두려움에 폐가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요, 용의…….”
슈아아아악!
응조의 중얼거림 사이로 진무의 손을 따라 세상을 찢어발길 듯 떨어져 내리는 묵룡조(墨龍爪).
콰드드득!
“…….”
지면에 거대한 발자국 하나가 새겨졌다.
그리고 그 발톱 사이에서 살아남은 응조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극한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하얗게 센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초점 잃은 눈동자와 멍하니 벌린 입.
완전히 넋이 나간 듯 부들거리던 그가 떠듬떠듬 말했다.
“네놈, 분명 살려 주겠다고…….”
“누가, 내가? 생각은 해 보겠다고 했지, 살려 준다는 말은 안 했는데?”
응조의 말에 진무가 코웃음을 쳤다.
“그나저나 미친놈이네. 다른 죄 없는 목숨들은 아낌없이 내던진 주제에 지 목숨은 그렇게 안 되나 보지?”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경멸.
놈의 말을 오해했다.
놈은 자신에게 절대로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분명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다.
어떻게든 그 전에 죽어야 한다.
어떻게든…….
힘없이 주변을 살피던 응조의 시야에 땅에 박혀 반짝이는 부러진 검날 하나가 들어왔다.
그는 부들거리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꾸우욱.
“크윽.”
하지만 그마저도 용납하지 않은 진무가 검날에 막 닿으려는 응조의 손을 짓밟았다.
“역시나 잡졸이구만. 차라리 내공을 역류시키든가 혀를 깨물지 그랬냐?”
“…….”
“애초에 내가 자결 같은 사치를 허락해 줄 줄 알아? 네놈들의 목적을 위해 힘없는 이들을 이용한 죗값은 목숨 가지고 안 돼.”
“으으으.”
“하지만 잠시 유예를 두도록 하지. 들어야 할 말이 좀 있으니까.”
“…….”
저승 명부를 손에 쥔 저승차사처럼 그의 죽음을 결정한 진무가 가볍게 소매를 떨쳤다.
퓻, 퓨퓻!
쏘아진 지풍이 몸을 두들기자 응조의 몸이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리고 응조에게서 시선을 뗀 진무가 전장을 바라보았다.
치열한 격전.
능서현과 천우명을 필두로 악귀처럼 싸우는 철검단과 전의를 상실하고 방어하기 급급해하며 연신 밀려나는 홍건의 무인들.
모두가 칼 한 자루에 목숨을 건 이들이니 모조리 도륙한다 해도 무슨 문제일까?
그들은 적이었고 중원을 넘어온 침략자에 불과했다.
하나 대다수가 과거의 역사에 대한 복수심이 아닌, 누군가의 목적에 세뇌되어 길러진 자들이었다.
“쳇.”
문득 태자의 부탁이 떠오른 진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망할 성군 자식.”
고민은 잠시였다.
진무는 땅에 꽂아 두었던 일휘를 뽑아 어깨에 걸치고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철검단! 물러나라!”
묵룡의 기세가 더해진 목소리가 전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전투가 멈췄다.
철검단은 거리를 벌리며 물러났고, 홍건의 무인들은 겁에 질린 눈동자로 경계하며 서로 뭉쳤다.
진무는 철검단을 헤집고 그들의 앞에 나서며 질질 끌고 온 응조를 내던졌다.
땅바닥에 널브러져 꼼짝도 못 하는 응조의 모습에 홍건의 무인들이 눈을 부릅뜨며 웅성거렸다.
그들의 눈동자에 떠오른 수많은 것 중 공통되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모두 듣거라! 나는 무당지검 진무다!”
“…….”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진무의 모습에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네놈들을 이끌었던 응조와 그 휘하의 무인들은 패배했고, 싸움은 끝났다.”
“…….”
“칼을 버리고 무공을 폐하여 백성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관용을 베풀 것이다.”
진무의 말에 홍건을 쓴 이들이 서로를 보며 눈치를 살폈다.
“하나, 만약 계속해서 싸우겠다면…….”
슈욱!
진무의 싸늘한 눈빛과 함께 일휘가 새하얀 검신을 드러내며 당장이라도 쏘아져 나갈 듯이 떠올랐고, 물러났던 철검단이 무기를 움켜쥐고 달려나갈 태세를 취했다.
“닥쳐라! 관용? 배려? 네놈을 어찌 믿는…….”
슈아악! 스걱.
툭, 데구르르…….
머뭇거림 없이 뻗어진 진무의 손을 따라 허공을 날아간 일휘에 의해 반박을 가했던 이의 머리가 떨어져 땅바닥을 굴렀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왜 사람 말을 끊냐고.
정말로 용서해 주려는 것인가를 재차 확인하려 한 것인지, 아니면 절대로 항복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두 번의 기회는 없어.”
“…….”
더 이상 재고 따질 겨를이 없었다.
충분히 자신들을 학살할 무력을 가진 이들이 사방에서 노려보고 있었고, 일휘가 그들의 머리 위에서 다음 목표를 노리듯이 떠다니며 예리한 검날을 반짝이고 있었으니까.
철컥…… 털썩…….
눈치를 보던 이들 중 누군가 힘없이 칼을 떨구고 주저앉는 것을 시작으로 패전의 그림자가 삽시간에 번졌다.
아직 천여 명에 가까운 숫자가 살아남았으나 홍건의 무리 중 서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천 대 삼백의 싸움.
첫 번째 전쟁은 끝났다.
“우명!”
“예.”
“저들의 무공을 폐하고 남쪽으로 보낸다.”
“예?”
“내 말대로 해. 비록 적이긴 해도 수뇌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대궁주에게 속은 자들일 터다. 무공을 폐하고 나면 피난민이나 다를 바가 없어.”
“…….”
잠시 고민하던 천우명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 앞에서 관용이라니. 이전의 천주였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그러나 뭔 상관이란 말인가?
그에게 진무의 말은 진리이자 반드시 따라야 할 명이었다.
“알겠습니다. 철검단은 즉시 시행하라!”
천우명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철검단을 향해 외쳤다.
“주군, 괜찮겠습니까?”
“뭐가?”
“저들이 중원에 투항한다고 해도…… 시선이 곱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 핍박을 받을 것인데…….”
“내가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예?”
“저들도 저들 나름대로 책임은 져야지. 세뇌를 당했다고 해도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 내가 베푼 아량은 여기까지다. 이후의 삶은 저들이 알아서 할 일이야.”
“…….”
냉정하지만 옳은 말에 능서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황신!”
“예.”
“몇 마리나 날아갔냐?”
“……에, 그러니까 대략 다섯 마리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습니다.”
“좋아.”
전투 중 황신이 확인한 전서구.
대궁주라는 놈에게 간 것도 있을 것이고, 인접한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해서 막으라 하지 않았다.
대궁주라는 놈이 직접 나서 주면 좋겠지만, 다른 놈들이라도 상관없다.
습격은 여기까지.
지금부터는 쫓아 오는 놈들에게 친절하게 죽음을 선사해 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