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18
18화
은은한 달빛이 내려앉은 깊은 밤중.
어둠 속에서 짐승을 닮은 한 쌍의 눈동자가 빛난다.
바스락, 바스락.
스윽, 스으윽.
조심스러운 손길이 높이 쌓인 천 무더기를 한참 뒤지더니, 무언가를 움켜쥐고 빼냈다.
“…….”
넓게 펼친 천을 예리하게 살피던 눈동자에 실망이 어리고, 손이 다시금 천 무더기로 향한다.
스으윽.
이번에 뽑아낸 천은 제법 그럴싸했는지 몸에 대 보기도 하고, 가만히 팔에 문질러도 보는 등 아까보다 오래 쥐고 난리를 친다.
그러다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다시 원래 있던 곳에 짜증스레 쑤셔 박고는 또 스윽, 스윽…….
“거기 누구요?”
“……!”
최대한 조심한다고 했건만, 계속되는 헛수고로 인한 짜증에 저도 모르게 손길이 거칠어진 것일까?
누군가 잠에서 깨어나 호롱불을 비추어 왔다.
“응? 이게 왜 이래?”
어스름한 불빛 아래 드러난 풍채 좋은 중년 사내가 난장판이 된 내부를 보고 놀라 급히 다가왔다.
아침이면 보기 좋게 펼쳐 행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켜야 할 의복들이 죄 바닥에 흩어진 것이다.
“망할, 어디서 괭이 새끼라도 든…… 어?”
신경질이 잔뜩 난 표정으로 옷을 정리하던 사내가 옷 위로 난 흔적을 발견하고 유심히 살폈다.
흙이 잔뜩 묻어 선명하게 드러난 그것은…….
“……사, 사람 발자국?! 서, 설마 도……!”
깜짝 놀란 사내가 다급히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툭.
“…….”
“…….”
하려던 말을 채 완성하지 못하고 바닥에 털썩 쓰러진 사내의 뒤편 어둠에서 호롱불 아래로 걸어 나온 또 다른 사내.
도주를 위해서 미리 봐 둔 포목점에 옷을 훔치러 온 운연이었다.
그로서도 이럴 생각은 없었다.
사람들에게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는 몸에 딱 맞는 옷이 필요했을 뿐이었고, 최대한 멀리 떠나기로 작정했기에 웬만하면 그럴싸한 옷을 가지고 싶었던 것뿐이다.
고르다 보니 욕심이 생기고, 욕심이 생기다 보니 조금 지체되었는데…… 하필이면 포목점 주인이 잠에서 깨 버릴 줄이야.
분명 누가 업어 가도 모를 것처럼 코를 골며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했건만, 귀도 밝지.
이를 사리물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운연이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었다.
상황이 난처해지니 절로 지난날의 실책이 떠오른 것이다.
빌어먹을. 산적들에게 돈을 죄다 주는 게 아니었는데!
진허가 용돈 하라고 쥐여 준 돈을 필요 없다고 전낭째 냉큼 던져 버리다니, 그때의 나는 얼마나 머저리였던 거야?
다시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평생 돈을 아끼고 사랑할…… 아,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누군가 잡아당긴 듯 후회의 늪에서 현실로 돌아온 그가 머리를 뜯던 손을 내리고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들켜 버린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된다.
일단 지금은 소란 피우지 못하도록 기절시켜 뒀지만, 깨고 나면 사방팔방으로 떠들어 댈 것이 분명하니…….
게다가 지금 자신은 도주하는 중이다.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했다.
“…….”
문득 운연의 눈동자에 스산한 살기가 일렁거렸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입을 막자면 역시 살인멸구(殺人滅口)가…….
“……제길.”
차마 그럴 순 없었다. 포목점주가 무슨 죄가 있어서 옷을 도둑맞은 것도 모자라 죽기까지 하나.
그래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찌이익!
운연은 곧바로 사방에 널린 옷 중 하나를 길게 찢었다.
손발을 묶고,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입에 재갈도 물리고…….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이만하면 별 탈은 없을 터였다.
누군가 발견하면 구해 줄 테고, 그때가 되면 자신은 벌써 멀리까지 도망쳤을 테니까.
주섬주섬.
꼼꼼히 포목점주를 구속한 그가 포목점 주인을 한쪽에 기대어…….
“…….”
바닥이 찬데?
밤새 입이 돌아가면 어쩌지?
도둑질까지 당했는데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우뚝 서서 한동안 고심하더니, 바닥에 흩어진 옷들을 끌어모아 넓게 펼쳐 깔기 시작한다.
조금 푹신하다 싶을 만큼 차곡차곡 쌓은 자리에 포목점주를 가지런히 눕히고 천 무더기에서 두툼한 장삼까지 한 장 골라 덮어 준 뒤에야, 운연은 만족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래, 이걸로 됐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꼭 맞는 옷도 골랐고, 입고 있던 옷은 보자기에 잘 쌌다.
이제 시간이 없다.
어서 가야…….
힐끗.
운연이 다시 한번 포목점 주인을 쳐다보곤, 살짝 비뚤게 덮인 장삼을 바로잡았다.
어디 보자…… 포목점 주인이 발견이 안 되면 곤란하니까 대문을 살짝 열어 두는 것이 좋겠지?
끼이익.
“…….”
운연이 굳게 닫혀 있던 포목점의 대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밤이 늦었기 때문인지 상점 거리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보는 눈이 없으니 더는 흔적이 남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운연은 문을 슬쩍 열어 닫히지 않도록 고정해 두고는 몰래 빠져나와 걸었다.
뒷골목, 뒷골목이 안전하다.
어둡고, 칙칙하고…….
도주하는 이들에게 뒷골목은 만고의 진리와도 같은 선택지 아니겠는가?
운연은 주변을 주의 깊게 살피며 어둠이 깔린 뒷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인 거리가 끝나자 집 없이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들의 판자촌이 드러났다.
이곳만 지나면 바로 산길이었다.
천천히, 아무도 의심하지 않도록. 평범한 행인처럼.
담벼락의 어둠을 따라 걷고 또 걸은 운연이 막 부랑자들의 거리를 벗어나려는 때였다.
“저주받은 놈이다!”
“간악한 핏줄이다!”
“당장 꺼져라!”
어디선가 분노 섞인 외침이 들려왔다.
“……?”
잠시 호기심이 동했지만, 세상일에 호기심을 느낄 시간조차도 없는 처지였다.
운연은 고개를 두어 번 내저어 호기심을 떨치곤, 걸음을 재촉했다.
한데 소란이 하필이면 그의 행로 어딘가에서 일어난 모양이었다.
움막촌을 벗어나 산길에 가까워질수록 커지는 목소리에 운연은 고민에 빠졌다.
방향을 바꿀까?
아니다. 조금만 더 가면 산길이 아닌가?
설마하니 그냥 지나가는 것뿐인데 무슨 일이 있으려고…….
아까보다 속도를 더 높여 걷던 운연의 시야에 널찍한 공터가 들어왔다.
부랑자들로 보이는 수많은 사람이 무언가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고, 둘러싸인 건…… 아이?
“…….”
운연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팼다.
낡고 더러운, 옷이라 부르기도 모자란 넝마를 입은 아이가 자신을 둘러싼 이들의 고함에 겁에 질린 눈으로 떨고 있었다.
대략 일고여덟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
한데 왜? 그리고 어째서 혼자인 거지?
……하긴, 부랑패 중에는 부모를 잃고 떠도는 아이들이 많다고 했던가?
개중엔 부모를 일찍 여읜 아이도 있을 것이고, 버려진 아이도 있을 것이다.
“가! 꺼져! 다신 얼씬거리지 말라고!”
한데, 다들 너무도 매몰차다.
저리 어린데, 어디 갈 곳조차 없어 보이는 아이인데…….
가엾이 여겨 하루쯤 재워 줄 만도 하건만, 하나같이 제 영역에 날아든 벌레 쫓듯 아이를 핍박하고 있었다.
저 어린것이 무슨 큰 죄를 지었길래 다들 저런 반응일까?
의문이 드는 한편,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언제나 동족들에게 외면받았던 자신의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되어서였다.
“…….”
운연은 이를 앙다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사연이 있겠지.
한 번만 모른 체하자. 아니, 모른 체해야 한다.
괜히 구한답시고 나섰다가 그 개 같은 황신 놈이 만든 덫에 걸렸던 전례가 있지 않았던가?
지금은 도망치는 것만 생각하자.
안 그래도 시간을 꽤 지체한 참이다. 산길부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야 했다.
억지로 동정심을 가라앉힌 그가 주먹을 꽉 쥔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안 가? 이 망할 한씨의 족속! 네놈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와!”
“…….”
한 부랑자의 외침에 운연의 걸음이 뚝 멈췄다.
지금…… 뭐라고?
“그래, 이 좀 벌레 같은 것들!”
“패악한 놈의 핏줄!”
고개를 푹 숙인 채 아이를 향해 쏟아지는 온갖 악다구니를 한동안 듣고 있던 운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나하나 선명하게 와 박히는 부랑자들의 얼굴.
아이를 향한 그들의 눈동자에 떠올라 있는 것은 지독한 환멸이었고, 언뜻 살기를 품고 있는 듯도 했다.
“한씨들은 애새끼고 어른 새끼고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어 버려야 해.”
“맞아. 저런 것들이랑 있으면 분명 재수가 없을 거야.”
“쫓아 버려야 해.”
곳곳에서 수런거리는 비난의 목소리가 송곳처럼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글자 하나하나, 억양에 스며 있는 감정까지…….
휘이익! 퍼어억!
“……!”
누군가 던졌고, 날아갔으며, 맞았다.
못 박힌 듯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운연의 눈동자에 그 작고 볼품없는 아이가 비틀거리는 모습이 비쳤다.
깨져서 피가 줄줄 흐르는 이마와 붉게 물들어 바닥을 뒹구는 돌멩이…….
“저런 지독한 놈 보게!”
“허 참, 돌을 맞고 피를 흘리면서도 도망칠 생각도 안 하네?”
“과연 한씨의 종자야. 돌로 쳐 죽여야 해.”
“맞아, 저런 개 같은 종자를 죽이는 게 무슨 죄가 된다구!”
“…….”
군중 심리라는 것이 그렇다.
어떤 작은 계기 하나가 일파만파로 퍼져 전체를 휘어잡는다.
거짓이 진실로 바뀌고, 불의가 정의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진위(眞僞)는 중요치 않은 법이다.
모두가 옳다고 믿는 순간, 그것이 진실이며 정의가 되니까.
“죽이자.”
“그래, 죽여 버리자.”
조롱과 악담이 난무한다.
누구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누구도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는 저 작고 불쌍한 아이를 동정하지 않는다.
정의를 실현한다는 믿음 아래, 이 자리의 모두가 죄의식 없이 아이를 처단하려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아이를.
그저 한씨의 피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휘이이익!
사방에서 돌이 날았다.
퍽! 퍼퍽! 퍽!
저를 노리고 날아오는 돌에 아이는 두려워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웅크렸고, 징벌자들의 눈동자는 광기로 번들거렸다.
“……?”
어찌 된 것일까?
시간이 지나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자, 아이가 조심스레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괜찮니?”
“…….”
아이의 눈앞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무척이나 슬픈 눈빛을 하고, 날아온 돌을 전부 몸으로 막으며.
“뭐냐! 뭐 하는 놈이냐!”
“비켜라! 이놈!”
“한패다! 저놈도 한씨의 핏줄이다!”
“죽이자! 애새끼와 함께 죽이자!”
성난 외침에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자신들을 막는 그마저 쳐 죽여 마땅한 한씨로 단정 지은 부랑자들이 다시금 돌을 주워 들었다.
“어? 어어?”
하지만 누구도 던지지 못했다.
사아…….
어디선가 찬 바람이 불어온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목 뒤의 잔털들마저 곤두서는 섬찟함에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리고 일어났다.
아이를 대신해 돌을 맞은 사내, 운연이 천천히 몸을 세워 부랑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꺼져. 죄 죽여 버리기 전에.”
“……!”
밤처럼 시커멓게 물든 눈동자에 담긴 칙칙한 어둠, 목에 칼이 스미는 것만 같은 잔잔하고 쓸쓸한 목소리에 몇몇은 주저앉았고, 더러는 뒷걸음질 쳤다.
“으, 으으으…….”
아무리 수가 많아도 토끼는 범의 눈빛을 받아 내지 못하는 법.
묵룡을 품은 이가 가진 광포한 눈빛과 의기를 넘어선 무인이 뿜어내는 진득한 살기는 거리를 전전하는 그들이 감당조차 할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이었다.
공포는 순식간에 전이되었다.
아이를 향해 돌을 던지던 부랑자 패거리는 마치 작은 구멍에 무너지는 둑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
운연의 시선이 아이에게 다시 돌아왔다.
겁에 질려 사시나무처럼 떠는 아이를 보자 마음이 착잡해진 그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나서면 안 되는 일이었지만,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동족이라서? 망해 버린 한씨의 핏줄이었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아직 아이이기 때문이었다.
아무 죄도 짓지 않은, 한씨가 어째서 역천을 꿈꾼 것인지조차 모를 어린아이.
그저 그리 태어난 것뿐인데, 그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인가?
“……괜찮아. 이제 너한테 뭐라 할 사람 없어.”
“…….”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운연이 아이를 보듬어 안았다.
한동안 등을 다독이며 기운을 북돋아 주자 긴장이 풀렸는지 아이가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괜찮다니까? 괜찮아. 부모님은…….”
부모의 행방을 물으려던 운연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뒷말을 흐렸다.
뒤늦게 아이의 부모가 없을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저도 모르게 품에서 아이를 떼고 눈치를 살피는데…….
“……없어졌어요.”
“뭐?”
“오줌 마려워서…… 다녀오니까 사라졌어요, 흐윽…….”
“…….”
무슨 소릴까?
오줌 누러 갔다 온 사이에 없어졌다니?
“엄마 아빠 찾아 돌아다니는데, 길이 하나도 없어서…….”
“……?”
“아니, 있는데 깜깜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두서없이 늘어놓는 말을 가만히 듣던 운연이 한숨을 내쉬며 아이를 품에 안고 일어났다.
요컨대 오줌 누러 간 사이에 그 부모가 잠시 자리를 비웠고, 불안함에 나왔다가 길을 잃은 모양이었다.
어찌한다?
이대로 두고 가면 또다시 부랑자들에게 험한 꼴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갈 길이 급한 와중이었다.
언제 쫓기게 될지 모르니 조금도 지체해서는 안 되는데…….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을 고민하던 운연이 결심한 듯 맑게 웃으며 아이를 향해 말했다.
“집에 가자, 데려다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