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29
29화
세상을 이루는 소리는 수만 종류가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 영왕의 장원에 울려 퍼지는 소리는 단 한 종류였다.
쩌억, 빠각, 빡!
진무의 주먹과 영왕의 몸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소리, 구타음.
뼈가 부러지고 살갗이 찢긴 영왕의 모습은 어디까지가 옷이고, 어디까지가 육신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피투성이였다.
하나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하늘을 가르고 산을 터트릴 힘을 지닌 진무였으나, 지금의 그는 오직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고통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의 힘만 담았다.
아파도 더 아프고, 고통스러운 중에도 더욱 고통스럽게.
보는 이들 모두가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참혹한 광경이었으나, 말리는 이도, 움직이는 이도 없었다.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황실의 종친이라는 그 대단한 위세가 잘 가꾸어진 육체와 함께 조각나 바닥에 떨어지고, 이내 흔적 없이 소멸하는 과정을.
죄(罪)라는 것의 대가를 치름에 있어 신분의 귀천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끄으으으…… 살려…….”
“…….”
이윽고 주먹질이 멎었다.
진무는 자신의 손에 매달린 채 축 늘어져 옅은 숨을 헐떡이는 영왕을 지그시 바라보다, 운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휙. 툭, 투두둑.
진무의 손짓에 온통 짓이겨진 영왕의 몸이 운연의 발치에 내던져졌다.
“……?”
그 행동에 담긴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운연이 살짝 커진 눈으로 진무를 바라보았다.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다.”
“……예?”
“그 목숨은 네 판단에 맡기마.”
“…….”
운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답을 구하듯 진무를 주시했다.
“운연.”
“…….”
“나는 이 길로 정무맹으로 갈 것이다. 관은 황제가 알아서 할 것이나 무림은 다르니까. 하나 아무리 모두를 다잡아도 똑같은 일은 또 생길 것이다. 중원은 넓고, 나와 뜻이 다른 놈들은 모래알보다 많으니까. 분명 어떤 곳에서 또 누군가가 핍박받겠지. 그럼에도 나는 그때마다 다잡으려 한다. 그것이 내가 가진 힘에 대한 책임이기에.”
“…….”
“나는 아직 너의 과거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혹은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하여 네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도 알 수 없다.”
“사조님. 저는…….”
운연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진무가 빙긋이 웃었다.
“오래전 나의 스승이 나에게 묵룡을 전하며 했던 말을 들려주마.”
“…….”
“가르친다 하여 그 사람의 인생을 강제하여서는 안 된다. 스승은 전하는 것으로 그 역할과 소임을 다하고, 방향만을 잡아 줄 뿐 제자의 삶에 관여하여서는 안 된다.”
“…….”
“나 역시 같은 입장이다. 다만 이는 나의 견해일 뿐, 너를 강제하려는 뜻은 아니다. 네 삶은 네가 정해야 한다.”
“……사조님.”
“네가 그저 모든 것을 외면하고 너 하나만으로 존재한다고 해도, 남아 있는 한씨의 백성을 책임지려 한다고 해도 나는 너의 뜻을 존중할 것이다.”
진무는 그 말을 끝으로 운연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운연은 긴 고민에 빠졌다.
누구에게도 들어 보지 못한 말이었다.
자신의 아비에게도, 어미에게도, 그리고 자신을 가르친 첫 스승이었던 상관평에게도…….
그들은 그저 이리 가라 했고, 가지 않으면 매질을 했으며, 따르지 않으면 버렸다.
“사조님, 어찌하여 제게 이리하시는 것입니까?”
“…….”
한참 만에 운연의 입에서 나온 질문에 진무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어찌하여서라…….”
“…….”
잠시 말끝을 흐리던 진무가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혁련무강의 팔십 년에 진무의 이십 년. 장장 백 년이라는 세월을 넘어오며 맺은 많은 인연.
사패오왕, 정무칠성, 마교.
청상과 청우를 비롯한 무당의 도사들, 황신과 아이들처럼 자신이 걷는 길에 동참한 자들.
혹은 자신과 적이 되어 싸운 수많은 이들.
그러나 그 많은 이들 중 제자라는 이름으로 맺어진 인연은 셋뿐이었다.
첫 제자 유월청.
그때는 모든 것을 정해 주어야 한다 생각했다. 매를 들어서라도 자신에게 맞춰야 한다 생각하고 가르쳤다.
하나 그는 묵룡의 연으로 맺어지지 못했다. 끝내 적이 되었고, 부쉈다.
두 번째 제자 우양진.
그는 처음부터 도문에 어울렸다. 그의 인연은 자신보다는 청상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운연.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의해 묵룡으로 맺어진 인연. 앞선 둘과는 다르게 연(緣)이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준 녀석…….
한참 침묵하던 진무가 천천히 입을 뗐다.
“너야말로 나의 연자이고, 내게 묵룡을 받아 갈 사람이며, 언젠가 누군가에게 묵룡을 이어 줄 사람이기에 그러하다.”
“…….”
“하여 나는 가르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짊어진 업(業)이기에 그렇다. 다만, 언젠가 네가 정한 삶이 내가 세운 선과 충돌한다면 최선을 다해 부술 것이다. 그 또한 스승으로서의 나의 책임이니까.”
“…….”
운연은 가만히 자신의 발치에서 꿈틀거리는 영왕을 내려다보았다. 이지를 잃은 채, 핏물 속에서 버둥거리며 어떻게든 살아 보려 발악하는 그를.
비록 지금은 벌레만도 못한 신세가 되어 살려 달라, 용서해 달라 애원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지만, 원래의 그는 황실의 종친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을 짐승처럼 대했고, 죄를 짓고도 당당했다.
어찌해야 하는가? 이제부터 걸어가야 할 자신의 길은 무엇인가?
거듭된 고민 끝에, 운연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스르릉.
손잡이에 새겨진 태극 문양이 일단의 각오에 뒤덮이고, 이어 모습을 드러낸 검신이 빛을 받아 눈이 시리도록 반짝였다.
검의 찬란한 광채와 대조적으로 깊이 가라앉은 눈빛을 한 채, 운연이 가볍게 검을 내리그었다.
짧은 호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단죄의 궤적은 정갈하고 단조로웠으며, 무심했다.
철컥.
돌아온 검이 피를 머금은 채 검집에 꽂히는 것과 동시에, 운연은 태극의 검을 버렸다.
데구르르…….
눈을 감지 못한 영왕의 머리가 육신과 분리되어 뒹군다.
잠깐의 침묵 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운연은 어쭙잖은 인정으로 죄를 지은 이를 용서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자신이 거짓으로 만든 이름들을 검집과 더불어 버린 것이다.
이제 이곳에는 더 이상 운연도, 야율성도 없었다.
“운연.”
“예, 스승님.”
호칭이 달라졌다. 사조가 아니라 스승으로.
그는 무당을 버린 것이다.
그간 뒤집어썼던 허울을 버리고, 진실된 본모습을 찾아간 것이다.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
“…….”
그를 주시하며 턱을 살짝 치켜든 진무가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하여 나 진무는 오룡궁주의 직권으로 운연을 파문한다.”
“……!”
파문(破門).
운연은 이로써 더 이상 무당의 제자로 살아갈 수 없다.
도적에 적힌 글자는 파일 것이고, 파문의 오명을 썼으니 누구도 그 이름을 부여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이미 영왕의 목을 베는 순간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그였으니까.
천천히 무릎을 꿇고, 운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진무의 처분을 기다렸다.
그리고 짙은 미소와 함께, 진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너의 이름은 한경홍이다.”
“……예.”
선택했고, 살아갈 것이다.
진무의 제자이자 새로운 시대의 묵룡 한경홍으로서.
“그만 가자. 무한까지 가려면 갈 길이 꽤 머니.”
진무의 발걸음이 영왕의 시신을 지나치고, 그 뒤를 한경홍과 황신과 아이들이 따랐다.
여전히 장원에 살아남은 자들이 가득했지만,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다.
진무 일행의 발걸음이 문밖을 나서자, 갑자기 나타난 무인들이 우르르 장원에 들이닥쳤다.
반항은 없었다.
그들은 이미 주인을 잃고 전의를 상실한 뒤였으니까.
* * *
“대체 어디 있는 게야?”
“그러게요.”
얼굴을 찌푸린 노인이 바위에 걸터앉아 짜증을 부리자 중년의 사내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며 대답했다.
진무를 만나기 위해 신나게 신교를 떠나온 북리도천과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다가 얼결에 끌려온 마강이었다.
신강에서 쉬지 않고 달려온 그들은 근 열흘 만에 소화산에 도착했다.
늦었다 생각지는 않았는데, 아무리 뒤져도 진무가 없었다.
해서 소화산 자락을 샅샅이 뒤지고도 모자라, 옆 산과 그 뒤의 산자락까지 뒤지는 중이었다.
이미 소화산과 한참이나 떨어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교주께서 벌써 다른 곳으로 가셨을까요?”
“소식은 없었냐?”
“같이 달려오셨잖아요.”
“…….”
하긴, 달리는 것에만 집중했기에 다른 소식은 접할 새도 없었다.
“젠장, 내 삭월천 녀석들로부터 기막힌 소식을 들었건만.”
“그러게요. 한경홍이라니,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한무화의 사생아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자가 신분을 바꾸어 무당으로 왔다면, 혹 복수를 꿈꾸는 것은 아닐까요?”
“복수?”
“예. 어쨌든 교주께서 그의 아비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흠, 그렇군. 하나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천하에 누가 있어서 그놈에게 복수를 꿈꾼단 말이냐?”
“하긴, 저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은 했었습니다.”
“암, 턱도 없다. 그놈이 이룬 경지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어. 반선, 아니 신선의 경지나 다름없단 말이야.”
“혹, 진짜 등선이라도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
마강의 말에 북리도천이 얼굴을 팍 찌푸렸다.
“재수 없는 소리 치우고 개방이나 하오문에 연락이나 좀 보내 봐라. 혹여 그놈, 아니 교주가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지도 모르니.”
“예.”
성마른 재촉에 마강이 서둘러 전서구를 작성했다.
북리도천은 마강의 잰 손놀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질겅거렸다.
조바심이 났다.
한경홍에 대한 것은 아직, 개방도, 하오문도 모르는 내용이다. 빨리 진무를 만나 알려 주고 싶었다.
“아! 그 녀석이 있었지?”
진무의 곁에 거머리처럼 붙어 다니는 청력 좋은 놈을 떠올린 그가 단전에 힘을 잔뜩 줬다.
일단 외치면 어디서든 듣지 않겠는가?
자신이 왔다는 것을 들으면 분명 만사를 제치고 달려올 터였다.
“화아…… 응?”
막 손을 모아 크게 소리를 지르려던 그의 눈에 이쪽으로 다가오는 한 떼의 사람들이 보였다.
꼬라지가 어째…… 산적?
북리도천이 삐딱한 눈초리로 그들을 쳐다보는데, 마침 눈이 마주쳤다.
“어?”
그들도 이쪽을 보고 놀랐음일까? 멈칫하더니 제 놈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한다.
잘되었다. 산적이라면 산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을 터이니.
“이보게들. 거 말 좀 물으…….”
북리도천이 반갑게 말을 거는데, 산적들의 표정이 상당히 요상했다.
한참을 수군대다가 제각기 고개를 끄덕이고 짐에서 하나둘 칼을 꺼내 드는 게…… 뭔가 영업을 나왔다가 쓸 만한 먹잇감을 발견한 느낌?
“핫핫, 이런 횡재수가 있나. 괴물을 피해 도망쳐 오느라 산채의 재보를 다 챙겨 오지 못했는데.”
“…….”
수염이 덥수룩한 짐승 가죽 걸친 놈이 북리도천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탐욕스러운 눈빛을 빛냈다.
쉬지 않고 달려온 터라 먼지가 가득한 몰골이었지만, 그런다고 둘의 화려한 비단옷과 금박 요대가 감춰지진 않았다.
게다가 둘이 오죽 고수인가?
하도 완벽히 기운을 갈무리한 덕에, 산적들의 눈에는 그저 힘이라고는 없는 늙은 상인과 호위하는 무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이, 노인네.”
“어엉?”
산적의 부름에 북리도천이 생소하기 짝이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우리가 원래 소화산을 주름잡던 만산채의 영웅들인데, 이제 산적질을 접고 낙향을 하려고 하거든?”
“…….”
“보아하니 호위와 어디 가고 있는 모양인데, 넉넉하면 우리 여비나 좀 보태 보지?”
“…….”
오, 신선하기 짝이 없는 기분.
긴 세월 중원에 나온 것은 몇 번 되었지만, 단언컨대 산적 따위는 만나 본 적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어떤 간 큰 놈이 무시무시한 마교의 교주가 가는 곳에 버티고 있을 수 있을까?
그게 아니더라도 교주가 가기 전에 마교의 무인들이 일말의 위험도 배제한답시고 싹싹 청소(?)해 놓기 일쑤였다.
“뭐 해? 전낭 꺼내. 그럼 인정을 베풀어서 목숨만은 살려 준다니까?”
“…….”
자신을 위협하며 다가오는 산적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북리도천이 입가를 실룩이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야 원, 살아생전 날 털어 먹으려는 놈들이 있을 줄이야.”
“…….”
난생처음 겪는 황당함을 한껏 만끽하던 그가 하늘을 슬쩍 보았다.
그러다 몸을 살짝 틀어 뒤에 선 마강을 보니 손바닥으로 단단히 입을 틀어막고 있는 게, 이 상황이 어지간히 웃긴 모양이었다.
어깨까지 미약하게 들썩이는 모습에 짓궂게 웃은 그의 시선이 다시금 산적들을 향했다.
장난스러운 눈길로 산적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뜯어보던 그가, 짐짓 부드럽게 말했다.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게, 뒈지기 딱 좋은 날씨다, 그치?”
“…….”
산적들은 생각했다.
왜 소름이 돋아 오르지? 눈빛은 또 왜 저렇게 스산하지?
상인이…… 아닌가?
그리고 산적들은 보게 되었다.
자신들을 향해 웃는 노인의 뒤로, 호위가 마찬가지로 실실 웃으며 시커먼 강기가 넘실거리는 검을 뽑아 든 모습을.
아, 고수셨구나.
귀띔이라도 좀 해 주시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