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91
61화
옥황의 거처를 일컬어 상천궁이라 한다.
하늘 위의 하늘에서 세상을 모두 굽어보는 곳이지만, 막상 궁이라기에는 민망할 만큼 아담하고 소박하다.
있는 것은 두 그루 나무와 정원, 옥황이 몸 기대 쉬는 한적한 평상이 전부이니, 누가 이곳을 궁이라 생각하겠는가.
물론, 눈에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다.
때론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서 천계의 모든 이가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하고, 때론 까마득히 높아 오르고자 하는 마음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공간 자체가 옥황의 마음에 달려 있어 원하는 만큼 커지고 또 작아지기에, 그 크기가 무엇으로 규정되지 않고 무한(無限)하다.
하지만 귀모의 거처인 포궁은 달랐다. 다른 의미로 무한함을 느끼게 한다고 해야 하나?
“……넓네.”
그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높음과 낮음이 없이 그냥 쭉 뻗은 평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그저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이 하늘과 맞닿은 일직선의 지평선뿐이었다. 뭔가 땅에 하늘을 엎어 놓은 형상 같달까?
“굉장하네. 귀모가 기거하는 궁이라길래, 난 또 거창한 무언가가 있을 줄 알았는데…….”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첨탑이나 웅장한 건물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광활하기만 한 대평원. 그것이 진무의 눈동자에 보인 포궁의 전부였다.
“어서 오십시오.”
“……?”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진무가 멀뚱히 눈을 끔벅였다.
뭐지?
언제부터…….
지평선에 고정했던 시선을 거두니, 한 사내가 눈에 띄었다.
호리호리한 체구를 한 미형의 사내.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상의를 풀어 헤친 채였는데, 보기 좋게 근육이 잡힌 미끈한 상체와 간간이 어깨 부근을 쓸고 지나가는 검은 머리칼이 흐트러진 차림새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흰자위 없이 검게 빛나는 눈동자가 아니라면 인간으로 착각했을 법한 모습이었다.
“순조 님, 오랜만입니다.”
“아, 우융 님, 혼천 님.”
북리도천의 깍듯한 인사에 진무를 쳐다보던 순조가 생긋 웃었다.
요사스러운 느낌이었다.
생긴 건 사람, 아니 아주 잘생긴 청년의 모습이었으나 묘하게 신경이 거슬렸다.
진무는 미간을 찌푸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솜털이 곤두선다.
본능이 경고를 해 온다.
위험한 놈이라고…….
“호법귀장일세.”
“호법……?”
“귀모님 아래 가장 강한 분이라고 해야 하나?”
“뭐?”
북리도천의 무심한 평에 진무가 살짝 놀랐다.
귀모 아래 가장 강하다? 그럼 여섯 마왕 중 가장 강하다는 북리도천보다?
“믿지 마십시오. 제 힘은 그저 포궁에 국한되어 있을 뿐이니. 귀모님 아래 우융 님께서 가장 강하시다는 것은 지계의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
“정식으로 인사드리지요. 저는 귀모님의 곁을 지키는 포궁의 호법귀장 순조입니다. 쉽게 수호령쯤으로 여기시면 됩니다.”
“진무입니다.”
물 흐르듯 이어진 소개에 진무가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 중얼거렸다.
“진무 님이시군요. 천계의 두장군이시라죠?”
“……예.”
“제가 알던 분과는 다른 분이네요.”
“…….”
“아주 오래전에 뵌 적이 있거든요. 전의 그분은…….”
뒷말은 듣지 않아도 충분했다.
천계의 두장군, 지계 포궁의 수호령.
둘이 만났다면 반갑게 악수나 하며 담소했을 리가 없다.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살았다.
순조가 살아서 그때를 추억하고 있으니…… 그가 이전에 봤던 두장군은 죽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익숙한 느낌이면 좋을까 싶어 남성체로 준비해 보았는데, 어떻습니까? 원하신다면 여성체로 바꿔도 되고, 아니면 천계에서 신성시하는 산군의 형상도 괜찮습니다.”
순조가 그린 듯한 미소를 머금고 진무의 의사를 물었다.
남성체니, 여성체니, 심지어 짐승의 모습까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니 제 입맛대로 외형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모양이었다.
“모습이야…… 크게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혹여 귀모님께서 직접 청하신 손님의 심기를 어지럽힐까 걱정했는데.”
그는 시종일관 부드럽게 웃었지만, 진무는 참기 어려운 답답함을 느꼈다.
그의 미소와 함께 눈빛이 요사스레 빛날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성별과 무관히 사람을 홀리는 듯한 귀신의 눈빛 같았다.
빌어먹을……. 선인이 지계의 마귀 놈에게 심적 혼란을 느끼다니.
자신이 그러할진대, 나머진 어떠하겠는가?
진무는 뻣뻣하게 굳어서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하는 제 일행을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그냥 귀천옥 써서 돌아가라니까…….
“혹시나 싶어 건물이며 생명들이며, 포궁에 존재하는 것들은 미리 치워 두었습니다.”
“치워요?”
진무가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다시금 광활한 대지를 쳐다보았다.
“음, 건물은 잠시 부숴 재생을 막아 두었고, 포궁에 가득했던 생명체들은…….”
슥.
순조가 손을 들어 목 긋는 시늉을 했다.
치웠다는 것이 그 말이었냐?
놀란 진무를 향해 순조가 또다시 싱긋 웃었다.
“옮기는 것보단 그편이 빠르거든요.”
“…….”
“부활하는 장소만 바꾸어 놓으면 되는지라.”
이놈…… 정상인가?
아니면 마귀 놈이라서 제 놈이 하는 말에 일말의 감정 동요도 없는 걸까?
죽였다는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실실거리며 하다니.
게다가 몇 명을 죽였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광활한 영토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면…….
수천? 아니 수만? 수십만?
아니, 셀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이다. 포궁의 대지는 지금까지 자신이 지나온 도산옥이나 박피옥, 심지어 그 둘을 합친 것과도 비교도 안 되게 넓으니까.
혹시 미친 새끼시냐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진무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힘의 차이를 떠나 순조가 가진 기이한 존재감에 위축된 것이다.
“너무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세요. 그냥 그편이 나을 듯해서 그리한 거니까.”
“그, 그런가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만 진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런 젠장, 특정 상대에게 말을 더듬어 본 것이 언제였더라?
“근래 귀모님께서 화를 내시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거든요. 부서지고 깨지고 죽는 거야 빈번한 일이지만 사방에서 비명이…… 어휴, 말해 뭐 하겠습니까?”
“…….”
“두 분 마왕께 명을 내려서까지 모셔 온 분인지라 미리 손을 써 두었을 뿐입니다. 필경 중한 사안일 것이고, 깊은 이야기일수록 조용한 곳에서 하는 것이 좋으니까요.”
이제는 이 말 많은 놈의 미소가 징그럽기까지 했다.
마치 아름다운 껍데기 안에 감춰진 무시무시한 괴수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참,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포궁의 수호령입니다.”
“…….”
“굳이 주의를 드릴 필요는 없지만, 귀모님과 포궁을 지키는 것이 제 책무이자 존재의 가치여서…….”
“…….”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약 귀모님께 위협이 될 행동을 하신다면 객으로 대우할 수 없음을 부디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또, 또 웃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과 달리 요사스럽다든지 징그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베인 듯했다.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눈 뜬 채 몸이 수만 갈래로 찢겨 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피가 싸늘히 식어 그런지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오르고, 솜털이 온통 곤두서 옷자락을 스친 듯 따끔거렸다.
수호령, 순조.
비로소 북리도천의 말이 이해되었다.
마왕보다 강한 존재.
스스로 포궁에 국한되어 있다고 겸양하였으나, 달리 말하면 포궁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굳이 수하들을 대동해 몸집을 부풀리지 않아도 그 이상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귀모도 모자라 순조에 두 명의 마왕까지.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된다 했는데, 뭔 놈의 호랑이가 이리도 많아? 굴이 아니라 호랑이가 떼로 살고 있는 소굴이지 않은가?
이거…… 살아 나갈 순 있을까?
“자, 그럼 갈까요?”
“그러죠.”
한동안 홀로 떠들어 대던 순조가 가볍게 발을 들었다 내리자 거짓말처럼 풍경이 뒤바뀌었다.
드넓은 평원은 변함없었으나, 눈앞에 작은 초옥이 생겨난 것이다.
무척이나 아담한 초옥.
인계의 그것과 다름없이 주위엔 싸릿대를 엮어 만든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었고, 그 안에 나른해 보이는 표정을 가진 여인이 언짢은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오지.”
“…….”
듣는 이로 하여금 어떠한 거슬림도 느끼게 하지는 않으나,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지는 나지막한 목소리.
그녀다.
옥황과 대척점에 서서 세상을 조율해 온 존재, 귀모.
“후우…….”
깊이 들이마신 숨을 내쉬며 긴장을 푼 진무가 순조가 열어젖힌 사립문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딛고, 또 딛고…….
걷는다는 말로 표현되는 단순한 과정이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되고 신경 쓰였다.
막 첫걸음을 뗀 아이가 그러하듯, 쓰러지지 않으려 무진한 애를 쓰고 나서야 진무는 귀모의 앞에 도착했다.
나무 밑동을 잘라 만든 의자에 가만히 앉은 왜소한 여인이 진무의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이상했다.
자신보다 작아 왜소하다 느껴지던 그녀가 한눈에 담기지 않는다. 분명 보고 있는데도, 코끼리를 만진 장님처럼 정형할 수가 없었다.
“쯧, 순조.”
“예, 귀모님.”
“니가 한 짓이더냐?”
“모처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시라 준비해 보았습니다.”
“괜한 짓을…….”
“죄송합니다.”
“되었다.”
빙긋 웃는 순조를 향해 한차례 언짢은 눈길을 보낸 귀모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자 오감이 규정하던 모든 것들이 달라졌다.
초옥도, 사립문 울타리도 사라졌다. 어느새 그곳에는 거대한 석조 기둥을 세워 만든 신전이 서 있었다.
무엇이 실체고 허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영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쯧, 천계에서 두장군씩이나 해 먹고 있는 놈이……. 여태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냐?”
귀모의 일침이 당황으로 이루어진 껍질에 균열을 일으켰다.
파삭!
귓가를 파고든 환청과 함께 비로소 현실이 인지의 영역으로 돌아왔다.
이제야 보인다.
거대한 석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손으로 턱을 괸 채 자신을 내려보는 귀모의 모습이 눈동자에 비쳤다.
“기대 이하로구나.”
“……예?”
“별안간 신마합일을 이루기에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는데, 네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실망이 크다. 불완전하다 하여도 태초가 정해 놓은 한계마저 뛰어넘은 놈이…….”
“…….”
한심하다는 티를 숨기지 않는 귀모의 질책에 머릿속에 가득하던 무언가가 햇살에 닿은 안개처럼 거두어졌다.
젠장, 이게 뭔 꼴이야?
어차피 뒈지거나 살아 나가거나 둘 중 하나인데 쫄다니.
진무는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활짝 펴곤,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곧이어 걸었다.
자세 또한 꼿꼿해지니 아장거리며 걷던 위태로움은 온데간데없고, 사뭇 당당했다.
드르륵.
그러곤 귀모가 앉은 석좌 아래 놓인 의자를 가져다 놓고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불량스럽게 올려다봤다.
그 모습에 순조의 눈매가 살기등등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달리 먹은 뒤였다. 진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노려보며 살기를 풀풀 날리는 순조를 향해 웃었다.
팍씨! 이게 어딜 꼬나봐?
눈 깔아, 이 수호령 나부랭이 새끼야. 기껏해야 따까리 주제에…… 어디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눈을 부라려?
이 순간, 진무는 순조의 존재감 따위에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법.
어느새 거만함을 되찾은 정신이 위축된 육체를 지배했다.
“거, 처음 뵙겠습니다.”
……진무는 그 어느 때보다 당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