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75
75화
“군사를 너무 몰아세우지 마시게.”
“허헛. 저놈이 저렇다니까요.”
등여평이 중년인의 말을 받아 웃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진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일어나 대답했다.
등여평과 함께 들어온 인상이 강해 보이는 노인.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피부는 오히려 중년인의 그것처럼 보였다.
과거라면 몰라도 지금으로서는 일어나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정무맹주 검성 철지량.
어찌 잊겠는가? 자신의 숙적 중 하나였는데.
더욱이 과거에 보았을 때와는 너무나 다른 느낌이었다.
무겁다.
그저 방 안에 들어오기만 했는데 공기가 무거워졌다.
진한 압박감에 숨이 막혀 올 정도였다.
그것은 격차였다.
과거와 달리 지금 눈앞에 있는 철지량은 진무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한 무인이기 때문이었다.
‘젠장, 아직 멀었군. 저 자식을 따라가려면.’
진무가 놀라고 있는 사이 철지량 또한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일부러 기세를 흘렸다.
그런데 저 모습은 뭐란 말인가?
처음에는 당황하는 것 같더니 이제는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도발적이기까지 했다.
‘허, 이거 들은 것보다 훨씬 이상이구만 그래.’
진무는 자신을 보았음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분명 첫 만남이었다. 아무리 무당지검이라는 칭호를 받은 도사라고 해도 그 반응은 너무나 예상외였다.
당금 무림의 후기지수들 중 그런 자가 있던가?
대부분 황송한 표정으로 일어나 삼생의 영광이네 뭐네 하면서 한껏 격앙된 목소리를 내뱉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마치 오랜 대적을 보는 것 같은 저 도발적인 눈빛은 뭐란 말인가?
약관에 강의 경지에 오른 무당의 도사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습니까? 제 말이 맞지요?”
둘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기류를 느끼고 있던 등여평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려. 과연 용봉관주의 말대로입니다. 이거 참, 내가 부끄러울 지경이에요.”
아주 죽이 잘 맞는다.
그리고 용봉관주?
등여평이 결국 수락을 한 모양이었다.
금시초문이라더니 지가 언제부터 용봉관주였다고 철지량 옆에 딱 붙어서는.
둘의 대화에 진무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하핫! 이런이런. 이리되면 우리가 서신을 괜히 보낸 셈이 되었나?”
“…….”
서신?
그러고 보니 무당 장문인 명현도 서신을 주고 선택을 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거 원. 이보게 대군사. 이거 우리가 큰 실수를 한 모양일세.”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
둘이 아주 주거니 받거니 잘도 웃는다.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모르는 진무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 앉으시게.”
철지량이 앉으며 자리를 권하자 진무를 누르던 기세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쳇, 시험을 해 보았다는 말이지.’
자신이 숨이 막힐 정도였다.
등여평은 둘째 치고, 미리 언질을 준 게 아니고서야 제갈협진은 물론 제갈산산이 무표정하게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대놓고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앉으라니까.”
재차 권하는 손짓에 진무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딱히 그와 동석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맹주에게 인사를 전하고 표주를 떠나라는 스승과 장문인의 명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굳이 나흘을 더 기다릴 필요가 없었으니까. 인사만 끝나면 곧바로 떠날 수 있었다.
“내 직접 서신으로 자네를 보고자 청한 이유를 아시는가?”
“…….”
딱히 이유를 생각한 적은 없는데. 그런데 청해?
“처음에는 비흔이 천거하여 자네를 가르쳐 볼까 생각했네.”
철지량은 제갈협진처럼 둘러 오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밝혔다.
그런데 비흔? 진무가 의아한 표정을 하자 제갈협진이 대신 대답해 주었다.
“무풍개 어르신을 맹 내에서 칭하는 직명입니다.”
“아.”
그냥 무풍개라고 하지. 쓸데없이 명호를 여러 개 만들어서 사람 헷갈리게.
아니, 그런데 누굴 가르친다고?
그제야 진무는 장문인이 내민 선택지 중 하나가 저들이 먼저 청한 것임을 깨달았다.
아, 잠깐. 이 새끼들이!
만약 그들이 청하지 않았다면?
진무에게는 대제자와 무당지검이라는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았을까?
가정이 아니라 분명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굳이 자신이 운공의 말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도문을 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게 아닌가?
더욱이 남아 있는지의 여부도 불확실한 양의심공의 후반부였다.
만약 그들이 장문인에게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면.
‘반쪽짜리건 뭐건 양의심공을 벌써 익히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진무는 빽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어쨌든 자네의 실력을 보니 가르침을 받기는 실격일세.”
누가 가르침 따위를!
할 생각도 없고 필요도 없었다.
“당연한 말입니다. 무당지검이 아닙니까? 더구나 저 아이는 벌써 저와 동수를 이룰 정도입니다.”
“그렇구려. 흠, 이거 용봉관주이신 등 대협과 동수라면 무관에 입관을 시킬 수도 없고. 어디 좋은 자리가 없으려나?”
철지량이 진무를 힐끗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혹, 용봉관의 무사부는 어떨까요? 나이는 어리지만 저 아이의 신분이나 무공에 대한 깨달음을 보면 충분할 것 같지 않습니까?”
“충분이요? 차고도 남지요.”
이것들이?
등여평은 제갈산산과 함께 정무맹에 들른 이후 계속 머물렀다. 분명 둘 사이에 이런저런 말들이 오고 갔을 테고 말하는 걸 봐서는 지금의 저 대사도 미리 맞춘 게 분명했다.
“이보게, 대군사.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지당하십니다. 근래에 내리신 결정 중에 단연 최고입니다.”
“허허, 자네 생각도 그러한가?”
“암요.”
“저도 찬성입니다.”
제갈산산까지 걸걸한 목소리로 동조를 하고 나섰다.
하지만.
“싫습니다.”
“어?”
“뭐?”
“응?”
“예?”
진무의 단호한 거절에 각양각색의 반응이 터져 나왔다.
마치 거절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듯이.
벙찐 표정으로 진무를 바라보던 등여평이 설득하듯이 입을 떼었다.
“아, 아니 이보게, 진무 도장. 용봉관의 무사부 자릴세. 자네가 속세에 무관심하여 잘 모르는 모양인데, 거론되는 사람만 해도…….”
“싫다니까요.”
진무로서는 당연하다.
맹주 자리를 준다 해도 거절할 판이었다.
“…….”
정말이지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용봉관의 무사부 자리? 당연히 지들 아랫자리다.
더욱이 그냥 자리만 맡겨 둘 리 없었다. 엄청나게 부려 먹을 것이 틀림없었다.
진무가 뭐가 아쉬워서 중원 각지에서 모인 코흘리개나 가르치고 있단 말인가?
겨우 표주를 핑계로 무당을 떠나왔다.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꿈, 양의심공을 하루빨리 찾아내는 것도 시급한데 이것들이 어디서 엮어 매려고.
“저는 그저 장문인께서 인사만 드리라 하여 찾아온 것뿐입니다.”
진무는 ‘인사’라는 단어를 한껏 강조했다.
철지량은 그런 진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민되겠지. 고민될 수밖에 없다.
다른 이도 아니고 강의 경지에 이른 무인이 가지는 이름값은 어마어마하다.
등여평이 다시 한번 설득한다.
“이보게 진무 도장. 잘 생각하게. 보통 기회가 아닐세. 무당지검이 용봉관의 무사부가 된다면 무당의 위신도 한껏 세워질…….”
“인사만! 드리고! 갈! 겁니다.”
진무는 곧바로 말을 끊음으로써 철벽 방어를 쳤다.
절대로 싫었다.
“진무 도장, 한번 생각해 보시는 게.”
“…….”
초롱초롱한 사슴 눈망울로 걸걸한 목소리를 내는 요망한 제갈산산의 말에는 조금 휘둘릴 뻔도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결정은 동일합니다. 인사만입니다.”
“…….”
“음.”
모두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하하, 그런가? 인사로구만. 인사야.”
진무의 의도와 달리 철지량이 시원스럽게 웃었다.
“어쩔 수 없군. 그럼 인사만 받도록 하겠네.”
“……예?”
철벽 방어가 너무 쉽게 해결되자 되레 진무가 어안이 벙벙했다.
“자네 무림인들 간의 인사가 무엇인지는 알지?”
“…….”
무림인들 간의 인사?
그게…… 뭐였지?
처음 듣는다.
혹시나 싶어 슬쩍 쳐다본 제갈협진이나 제갈산산도 모르는 눈치다.
“자, 나가세. 인사를 받으러.”
“예?”
“허, 이 사람. 뭘 모른 척하고 그러시는가?”
모른 척이 아니라 모른다니까.
“허헛, 이거 참, 검을 꺼내 든 것이 얼마 만인지.”
철지량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일어나 벽면에 걸린 자신의 검을 잡았다.
응? 그런 뜻이었어?
“하핫! 그렇지요. 무인 간의 인사. 받으셔야지요.”
제갈협진이 거들고 나선다.
누가 봐도 어거지로 때려 맞춘 게 분명하다.
“하긴 그렇구만. 무인 간의 인사인 게지. 다치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말이야.”
“맞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정무맹에는 의룡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목숨만 붙어 있으면 살려 내신다는. 무당과 연락을 주고받자면 한 한 달 요양할 정도로 다치면 딱 좋겠네요.”
등여평과 제갈협진이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아니 진짜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
저희들끼리 요양 시기까지 정해 놓는 상황에 진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데.
“인사……하신다면서요?”
제갈산산이 걸걸한 사내 목소리로 방긋이 웃는다.
“…….”
잊고 있었다. 이것들이 죄다 한패라는 것을.
인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누가 그 검은 속내를 모를 줄 알고?
어떻게든 힘으로 눌러서 다치게 하고 무당을 압박해, 어떻게든 진무를 용봉관에 눌러앉게 할 참인 것이다.
“…….”
진무가 그들을 보며 한숨을 짓다가 문득 피식 웃었다.
철지량. 몇 번이나 부딪쳐 보았던 그의 검공이었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궁금하기도 했다. 과거의 철지량, 그리고 지금의 철지량.
그리고 자신의 무위는 어느 위치에 와 있는가?
어차피 언젠가는 만나야 할 상대였다. 정파의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 반드시 꺾어야만 하는 상대였다.
‘좋아. 해 주지, 인사.’
진무는 자신의 허리춤에 매여 있는 검을 힘껏 움켜쥐었다.
* * *
정무맹주의 집무실이 있는 대전각 아래.
‘크기도 하다. 이건 뭐 죄다 크구만.’
그런 공간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집무실 한쪽 벽면의 통로를 따라 지하로 한참을 내려왔다.
그 비싸다는 야명주를 통으로 때려 박아 밝힌 복도.
‘저게 다 얼마야?’
마음 같아서는 몰래 하나를 파내 가고 싶을 정도였다.
휘황찬란한 야명주의 복도를 지나자 거대한 철문이 나왔고, 그 안에는 장방형(ㅁ)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공동이 있었다.
“내 개인 수련장이라네.”
철지량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진무는 속으로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무림에 알려진 그에 대한 평가는 매우! 소탈한 정무맹주.
권력을 가졌음에도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수하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참, 개소리도 여러 가지다. 도대체 누구의 기준으로 말하는 소탈함이란 말인가?
진무는 사패천주였을 때도 이런 개인 연무장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줄줄이 박힌 야명주도 야명주지만 이건 뭐 한 백 명쯤 들어가도 모자라지 않을 정방형 개인 연무장.
더욱이 그 높이가…….
지하에 어떻게 이런 걸 뚫었을까?
과하다. 과하기 짝이 없다.
그냥 들판에서 하면 될 것을 굳이 아까운 돈을 써 가며 이런 공간을 만들었단 말인가?
돈지랄도 이런 돈지랄이 없었다.
“맹주님은 너무 소탈하십니다. 연무장 바닥을 이런 잡석으로 까시다니요.”
“어허, 이 사람. 맹의 재정도 생각해야지.”
제갈협진이 안타까워하자 그걸 맞장구친다.
금강석을 깔아도 진각 몇 번 밟고 칼질 몇 번 하면 다 박살 난다.
“그렇군요. 놓여진 무기들도 고작 백련정강이라니, 정말이지 맹주님의 검소함에 제가 다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허헛, 제갈가에서 너무 과용하는 게야.”
제갈산산이 걸걸한 목소리로 감탄하자 그걸 또 웃으며 받는다.
백련정강? 자고로 수련을 할 때 목검이나 목봉을 써야지 뭔 놈의 백련정강? 그게 돈이 얼만데!
이런 미친 것들이 있나.
가질 것 다 가지고 태어난 가문의 족속들은 이래서 문제다.
니들이야 당연하겠지.
아주 당연하겠지.
니들이 녹슨 철검 들고 무림에 나서는 사파의 낭인들을 알아?
날 때부터 보검을 처들고 다니니 알 수가 있나.
진무의 몸으로 들어가고 나서조차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넝마를 기워 만든 도포를 입고 다녔다.
풍족하게 먹을 게 없어서 벽곡단을 하루 세끼 챙겨 먹으면서 오늘도 일용할 양식이 생겼음을 감사하는 무당파의 도사들도 있는데.
이것들은 저런 낭비를 하면서도 검소하다고 하고 있다니.
“자, 그럼 시작할까?”
철지량이 자신의 검을 들고 연무장의 중심에 서자 제갈협진과 제갈산산이 진무의 곁에서 멀찍이 물러났다.
꾸욱.
진무는 기다릴 것 없이 검을 뽑았다.
쑤욱!
그리고 곧바로 검에 기운을 집어넣자.
“허어! 검강?”
철지량을 비롯해 모두가 놀란다.
“이 사람, 한두 수 나누며 서로 간의 실력을 봐야지, 처음부터 끝을 볼 참인가?”
“…….”
철지량이 너털웃음을 터트렸지만 그딴 거 없다.
양손 가득 잡은 검에 사파의 처절함과 가난한 무당의 울분을 담아.
낭비벽이 심한 네놈들을 내 친히 단죄하리라!
파앙!
진무가 곧장 진각을 내리밟으며 철지량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