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was reincarnated, I was a discontinued nanny RAW novel - Chapter 301
301화. 노비 세습제 폐지 (3)
윤서가 홍위와 함께 편전인 사정전에 들어섰을 때,
영의정 황희를 비롯한 조정의 대신은 모두 허리를 굽히고 맞이하였다.
이날 윤서는 처음 편전에 들던 때와 달리 얼굴을 가리는 멱리를 쓰지 않았다.
이는 세종의 결정이었다.
“이질적인 것은 저절로 경계심을 일으킨다지? 관복을 갖춰 입었을 뿐인 무리 사이에 중전 홀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면 그 자체로 이질적이어서 배타심이 들 것이다.”
마침 정식 조회가 아니라 왕과 신하가 학문과 그 적용을 논하는 경연의 자리라는 것도 구실이 되었다.
그래서 윤서는 가채 없이 단정하게 쪽을 지어 올린 머리에 진한 곤색의 장삼을 입고 편전에 들었다.
“어마마마, 이쪽으로 오르소서.”
홍위가 의젓하게 당집 위, 두 분 전하의 옥좌 동편에 놓인 좌석으로 윤서를 안내하였다.
경연에서 윤서의 자리를 어디에 배치할 것이냐도 한참 논의가 되었다고 하였다.
보통 때 편전이나 대전 회의에서 일월오봉도가 뒤에 걸려 있는 옥좌에는 금상 전하가, 그리고 옥좌가 놓인 당집 앞 한 단 낮은 동편에 세자의 자리가 배치된다.
하지만 이날 경연은 금상 전하뿐 아니라 상왕 전하, 중전, 세자까지 모두 참여하는 드문 경우였다.
예조에서 논의한 끝에 당집의 맨 중앙 최상석에 금상 전하가 앉으시고, 좌우 양옆으로 상왕 전하와 중전마마, 그리고 중전 마마 옆으로 세자 저하께서 좌정하시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윤서와 홍위가 나란히 앉은 다음에도 상왕 전하와 이향은 아직 편전에 들지 않았다.
이향은 동별궁에서 오시는 세종을 맞이하며 함께 편전에 오기로 되어 있다.
윤서는 앞에 놓인 서탁에서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편전 안팎을 둘러보았다.
바깥문은 모두 들어 올려 처마 끝에 매달아 둔 덕분에 사방이 훤히 트여 있다.
밖에는 담장을 따라 붉은 철릭을 입은 금군이 벽을 향해 돌아선 채 엄정한 자세로 호위를 서고 있고,
안에는 신하들이 좌우로 나뉘어 앉아 낮은 목소리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논의되는 내용을 정리할 수 있는 종이와 붓, 벼루가 올려진 작은 서탁을 앞에 두고서였다.
서편으로 영의정 황희 대감을 비롯하여 의정부의 세 정승과 육조의 판서가 앉아 있고, 동편으로 참의와 집현전 출신 신료들이······!
편전 안을 훑던 윤서는 동쪽 맨 앞에 앉은 이와 눈을 마주쳤다.
“!”
수양 대군이었다.
수양 대군이 자색의 단령을 입고 동편 맨 앞에 앉아 있었다.
윤서와 눈이 마주친 수양 대군은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머리를 공손히 숙여 보였다.
도원군의 혼례일 이후 첫 대면이었다.
‘수양 대군은 요새 매일 이른 아침 상왕 전하와 소헌 대비께 아침 문후를 올린 후 강녕포의 조선소에 가 선박을 건조하는 것을 감독하는 한편, 오후부턴 무역소의 재정을 총괄했던 이계전과 함께 남방의 여러 국가에 대한 보고서를 상세히 작성 중이라고 하였다.’
전에는 왈패 무리와 곧잘 어울려 사냥도 하고 호탕하게 놀았는데 지금은 은인자중하며 여송의 무역소 일대를 조선의 개척지로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에만 매진하고 있다고 하였다.
윤서도 살짝 고개를 숙여 답례를 할 때였다.
“상왕 전하, 주상 전하 듭시오!”
겸사복장의 우렁우렁한 음성이 밖에서 들려왔다.
순간 편전 안의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깊게 허리를 굽혔다.
왕이 등장하는 문은 옥좌 옆으로 난 문이었다.
요새 홍위와 함께 걷는 격구를 하시면서 섭생에 유의하시는 덕에 많이 건강해지신 세종은 도포와 갓을 쓴 평복 차림이셨다.
이향의 부축을 받아 당집 위에 오르신 세종은 윤서에게 “긴장하지 말거라.” 이르시고는 서편 옥좌에 앉으셨다.
붉은색 곤룡포를 입은 이향은 윤서와 홍위에게 부드럽게 웃어보이고, 옥좌에 앉았다.
모두 좌정한 후 처음 입을 연 이는 병조판서 김종서였다.
이 경연이 열리게 된 것이 김종서의 부탁을 받은 영의정 황희 대감의 건의 때문이라더니, 정말로 김종서는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우리 조선에서 저화의 유통 시도가 거듭 실패한 이유가 애초에 물건을 사고팔 시장이 부재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제 잘 압니다. 신이 이해하고 싶은 것은 화폐의 통화량이 늘어나면 그에 따라 물건의 가격이 올라 민생이 어려워질 수 있으니 나라에서 통화량을 인위적으로 조절할 필요가 있다는 이치입니다.”
그러자 이번에 호조 판서로 승진한 정인지가 바로 입을 열었다.
“경께서는 먼저 화폐가 무슨 기능을 하는지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화폐는 그 기본 기능이 교환의 매개체입니다. 은화 일 냥은 저화 1장, 쌀 다섯 말, 오승 면포 한 필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고, 이를 통해 필요한 만큼의 물건을 사들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이미 알고 있소이다. 화폐가 면포나 쌀과 달리 저장하기도 쉽고 운송하기도 쉬워 교환의 기능이 더 빼어나 상업 발달에 훨씬 더 이롭다는 것은 이미 시중에서 증명되었소. 내가 이해하고 싶은 것은,”
“아, 그럼 수요와 공급의 법칙도 아시겠지요? 팔고자 하는 이와 사고자 하는 이가 만나는 지점에서 가격은 결정된다는 것 말입니다. 화폐의 통화량도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묻는 것에 바로 답을 하시게. 두 분 전하와 중전마마까지 모신 이 경연의 자리가 경의 지식을 뽐내는 자리인가!”
정인지가 경제 이론의 기본 사항만 자꾸 말을 하자 김종서가 기어이 화를 내었다.
윤서는 고개를 숙여 피식 새어나는 웃음을 감추고, 두 사람의 차이를 생각했다.
두 사람은 황희와 조말생, 허조, 맹사성 등의 명신들 뒤를 이을 차세대로 세종의 총애를 오랫동안 다퉈왔던 인재였다.
그러나 정인지의 저 빠른 이해와 자부심이 과연 진정으로 조선을 위한 새 정책을 만들고 스스로 실천할 정도로 깊은 애정과 헌신으로 연결되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계유정난의 주역에게 그런 진심이 있었더라면 반대파를 숙청해야 함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그 이후 그 자식까지 잔혹하게 처형하고 여인들을 관노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노비로 서로 나눠 갖는 행태, 또 몰수한 재산을 자신들끼리 나눠 갖는 행태를 보이진 않았으리라.
이는 정적 정도전은 죽였지만 그 아들을 다시 신하로 불러 쓸 정도로 숙청의 범위를 해당 인물에게만 철저하게 한정한 철혈군주 태종의 행태와 확연히 대비되는 것으로,
아무리 포장한다고 해도 결국 그 반정은 최소의 도덕 원칙도 결여된 것이자 원시 부족이 상대 부족을 치고 전리품을 나눠 가지는 것처럼 야만적인 작태였다.
‘당신 말이야, 수양 대군. 당신이 이끈 그 명분 없는 반정에 이어 한명회나 신숙주 등 당신의 동조자들이 보인 그 부도덕과 탐욕이 모르면 물어서라도 배워 제대로 국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신하들의 건전한 헌신을 다 망쳤다고!’
새삼 치미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윤서는 수양 대군을 매섭게 쏘아보다가 옆에서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으로 오가는 논의를 집중해 듣고 있는 홍위를 눈에 담고서야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
용상 쪽에서 따가운 눈빛이 화살처럼 날아와 박힌 것을 느낀 수양 대군이 고개를 돌려 어좌를 바라보았을 때, 상왕 전하와 금상 전하, 중전과 세자 모두 평온한 눈빛으로 김종서와 정인지 등 아래에 앉은 신하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착각이었던가.’
되려 이 많은 신하들 중 하나로만 취급받는 것 같은 소외감을 느끼며, 수양 대군은 다시 정인지에게 눈을 돌렸다.
김종서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눈초리도 따가워지자, 그제야 정인지는 느물거리던 태도를 싹 고쳐 진지하게 답을 내놓았다.
“화폐의 통화량이 늘었다는 것은 세간에 돈이 많이 풀렸다는 것입니다. 돈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물건을 더 많이 소비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사려는 사람은 많은데 팔 물건은 한정되어 있으니 당연히 물건값이 올라가겠지요. 물건값이 올라가면 돈이 많지 않은 서민이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그 이치입니다.”
“그럼, 돈을 찍어내기 전 적정 통화량을 어떻게 계산해 냅니까? 그리고 일단 찍어낸 돈이 너무 많이 풀려 물가가 치솟는 상황에서 통화량을 어떻게 조절할 수 있습니까? 나라에서 강제로 백성의 돈을 거둬들여 없애는 것입니까?”
동편에 앉아 있는 집현전 부제학 성삼문이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그 어조에는 교환의 매개체로서 화폐가 가진 편의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물가의 앙등을 불러올 수 있는 통화량의 조절책을 확실하게 세울 수 없다면 화폐는 위험한 매개체란 불신이 짙게 배어 있었다.
성삼문의 질문에 편전에 있는 모든 신하가 정인지를 바라보았다.
이는 모두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원나라가 종이 화폐인 교초를 남발하는 바람에 화폐 가치가 폭락하고 이에 따라 원나라의 지배를 받아 교초를 사용하였던 고려의 지배층도 큰 어려움을 겪었던 일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조선은 화폐가 적어서 문제입니다. 날로 커져가고 있는 시장의 규모를 화폐 발행량이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지금은 통화량이 많음을 걱정할 단계가 아니에요.”
“대감, 그 적정량을 어떻게 계산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과도하게 풀린 화폐를 어떻게 조절할지도 물었고요.”
“···그것까지는 모릅니다. 제가 아는 것은 우리 조선은 아직도 화폐가 심하게 부족하단 사실이오.”
화폐의 통화량을 적절하게 계산하고 조절하는 것은 미국 연준도 못 하는 것이 아닌가.
현대에서도 늘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의 공포 속에서 정부와 중앙은행이 우왕좌왕하는 것을 뉴스로 읽어온 윤서는 김종서나 성삼문의 추궁이 너무 어려운 것을 묻는다고 생각하였다.
한편으로는 김종서와 성삼문, 그리고 내심 이 두 사람의 지적에 동조하는 눈빛을 보내는 신료들의 우려가 무엇인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애초 시장경제 자본주의가 공기처럼 익숙한 세계에서 살다온 자신은 화폐 존재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 조정 중신들은 늘 실패하기만 하는 화폐 정책을 보아온지라, 이제 와 새로운 화폐의 유통 제도가 안정적으로 정착하리란 믿음을 가지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더 근원적인 것이 있었다.
“전하, 신 등은 조선을 창업한 선조들이 가져온 믿음을 저버려야 할 이유를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백성을 먹이는 일을 우리 조선은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상황에서 나라 안팎으로 상공업을 적극 장려할 때 자칫 농업의 중요성이 퇴색할까 신은 그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직제학의 말이 옳습니다, 전하. 당장 두 달 후 노비가 모두 양민으로 속량되고 나면 농지에 강제로 묶어둘 수단이 없어지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상공업을 장려하는 풍조가 더 성해지면 힘들게 농사를 지을 이들이 적어져 큰 위기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노비를 속량하지 말자는 뜻은 결코 아니옵니다.”
누군가가 화급히 노비 세습제 반대가 아님을 덧붙였다.
아직도 굶주리는 백성이 많은데 개선된 위생과 함께 종두법 등 의학의 발달로 인구가 급속하게 늘고 있다.
식량이 늘 부족한 현실에서 이들의 우려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더욱 다양한 퇴비법을 알아내 농업 생산량을 더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분위기가 경직되자 황희 정승이 노련하게 나섰다.
“전하, 화폐의 유용함은 이미 증명되었습니다만 상공업으로 급속히 이행하고 있는 현실과 노비 속량이 맞물려 자칫하면 농업이 쇠퇴하거나, 또 고려 말기와 같이 화폐의 가치 폭락으로 인해 나라의 운영까지 큰 타격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충분히 대비를 하기 위해 화폐와 경제 운영 전반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화폐가 과도하게 풀려 생겨날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는 이미 숙지하고 있소. 그래서 그에 대해 대비를 하기 위해 은행을 설립할 계획을 가지고 있소.”
이향이 계획 중인 왕실 은행에 대해 말하였다.
“은행이 무엇입니까?”
“은행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문서로 정리하였소. 도승지!”
그러자 도승지 이사철이 나서서 내관들을 시켜 두툼하게 철한 문서 꾸러미를 신하들에게 나눠주게 하였다.
“그 문건을 읽어보면 은행이 무엇을 하는 기구인지, 아까 병판이 우려한 화폐 통화량을 어떻게 조절할지에 대한 이론이 들어 있소이다. 이에 대해 읽고 이해하고 다음 경연에서 논하였으면 하오.”
첫날의 경연은 이렇게 끝이 났다.
신하들이 물러간 후.
이향은 병조 판서 김종서와 북방의 일을 논하기 위해 편전에 남았고,
홍위는 성균관에 가기 위해 나서고.
윤서는 세종과 함께 천추전으로 향하였다.
“어떠하더냐?”
구수한 커피의 향이 천추전을 가득 채운 가운데, 세종께서 첫 경연에서 오간 논의에 대해 물으셨다.
“새 경제 정책의 근간이 되는 이론을 이해하고자 하는 열정도 놀랍고, 또 무엇보다 다들 상당한 노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노비제를 폐지하는 것에 대해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아서, 정말 놀랐습니다.”
“에이, 그거야 왕 앞이니까 그렇지. 또 아직 보상안이 구체적으로 나오질 않았고.”
세종께서 껄껄 웃으시고는, 다시 하문하셨다.
“그래서, 그 화폐량 조절은 어찌하는 거라고?”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