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Dragon Teacher RAW novel - Chapter 334
334화
허윤은 머리를 긁었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구멍이 생겼다.
서덕이 살짝 눈치를 보며 물었다.
“밖에서 기다리는데…… 들어오라고 할까?”
“휴…… 그러시오. 일단 얘기나 들어 봅시다.”
“응.”
서덕이 머쓱한 모습으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건강해 보이는 여 무인이 주변을 휘둘러보곤,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쪽은 두화.”
두화가 의자에 발을 턱 올리고는 앉아 있는 허윤을 내려다보았다.
“어이, 우리 산채를 탈탈 털어 간 허 선생이 당신이야? 생각보다 많이 어려 보이는데.”
서덕이 소수창으로 두화의 발을 밀면서 말했다.
“너만 한 딸 있어.”
“그래? 생각보다 샌님이 아니었네.”
“발 내려. 부탁하러 온 사람이면 거기에 맞게 굴어.”
“알았으니까 그 손 좀 치워. 징그럽게 뭐 하는 짓이야.”
“발부터 내리라고.”
“손부터 치워.”
“손 아냐.”
“뭐가 아냐. 누가 봐도 손이잖아.”
“백란이라고 불러.”
“미쳤어?”
둘이 옥신각신하는 걸 보며 허윤이 말했다.
“볼 일 없으면 가시오.”
두화가 발을 내리곤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거래를 제안하고 싶어.”
“마도와 손을 잡았던 녹림과 거래라니,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시오?”
“백룡선생, 생각이 왜 이리 고리타분해. 당신네는 상인이잖아. 우리와 특수한 관계니까 굳이 적대적일 필요는 없다고.”
“당신들이 먼저 칼을 들이댔잖소.”
“그렇게 따지자면 당신은 우리 산채를 몇 채나 털었지. 결과적으로 피해가 큰 건 우리야. 하지만 이렇게 제안을 하러 왔잖아? 강호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그게 진리지.”
“백룡장에는 정파가 아닌 이들이 많소. 거기에 당신네들하고까지 손을 잡으면, 남들이 나를 뭘로 보겠소?”
“그래서 당신에게 온 거야. 오히려 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고.”
두화가 서덕을 힐끗 눈짓했다.
“흑도는 물론이고 마도 애도 받아들였지? 거기다 저이가 손까지 잃고도 여기 남아 있는 걸 보면, 당신은 그릇이 큰 사람이야. 남들이 뭐라고 하든 마도 대종사를 죽인 남자고. 다른 놈들의 말에 신경 쓸 것 없어.”
그러곤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제부터는 당신이 가는 길이 대도(大道)야.”
허윤은 살면서 한 번도 자기가 대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상황이 사파와 마도까지 폭넓게 포용한 셈이 되었다.
괜히 실소가 나왔다. 전에는 땡전 한 푼에도 신경을 곤두세우던 속 좁은 노인네였는데.
허윤은 두화를 잠시 쳐다보다가 말했다.
“내용을 먼저 들어 보고, 답하겠소.”
“좋아. 우리가 제안할 건 단 하나.”
두화의 입가에 서늘한 기가 맺혔다.
“이 장원에 들어온 남십자성의 성주, 화령성은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겉으로는 절대 못 찾아. 그년을 죽이는 걸 도와줘.”
장원에 들어왔다던 남십자성이 무려 성주였다니.
하지만…….
“그게 다요?”
“화령성이 총표파자의 가족을 모조리 죽였어. 우리는 그년 목이면 돼. 다른 건 필요 없어.”
“흠.”
“어차피 마도는 당신의 적이기도 하잖아? 우리가 과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야.”
허윤이 고개를 저었다.
“과하진 않소. 그러나 원하는 건 하난데, 얻어 가는 건 하나가 아니잖소이까.”
두화는 순순히 인정했다.
“맞아. 당신이 도와줘서 이번 일에 성공하면 우리는 물러날 명분을 얻게 될 거야.”
서덕도 장강용왕 시절에는 제법 머리를 쓰던 이라 금세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대종사는 죽었고, 그와 했던 약속은 무의미해졌지. 따라서 우리 회주가 총표파자의 원수인 남십자성을 잡는 걸 도와주면, 그걸 명분으로 정파와의 반목을 철회하겠다는 거로군.”
녹림의 힘은 광대하게 퍼져 있다. 일순간 강호의 모든 물류가 막힐 정도였다.
그런 그들이 마음을 먹고 끝까지 싸우겠다 하면, 정파로서는 아주 긴 기간 동안 피해를 입으며 싸울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나 허윤이 도와주면 그걸 계기로 물러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에게 아주 큰 빚을 지게 되는 거지. 물론, 화령성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는 가정하에.”
허윤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는…… 오래전에, 녹림의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소. 녹림십팔채의 소속도 아니고 아마 소규모의 산적들이었을 거요.”
― 힘들어도 살아. 살아야지. 우리 같은 놈들도 사는데 댁이 살지 못할 게 뭐야.
도진을 잃었을 때 만난 대머리 산적이 돈 몇 푼을 쥐여 주며 해 주었던 말이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허윤은 없었다.
“내가 산적들로 인해 살아날 줄은 몰랐지. 사실은 그때 생각했소. 저들도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 그게 내 마음에 아직 남아 있소.”
서덕이 지그시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마음은 중요하지…….”
허윤은 서덕을 무시하고 두화에게 말했다.
“세상에 좋은 산적은 없을 것이오. 산적들이 활개를 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도 않소. 그러나 이번만큼은 적당한 수준에서 멈추고, 내가 배려로 인해 살아났듯 나도 당신들을 궁지로 몰아 상황을 악화시키지는 않겠소.”
“제안을 받아들인 걸로 생각해도 될까?”
허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화가 이어 말했다.
“우리는 화평의 대가로 전선에서 물러나 일 년간 모든 약탈 행위를 멈추겠어. 상행의 통행료 정도는 받겠지만, 그것도 일 년간은 적당한 수준에서 당신과 협의하도록 할 거고.”
녹림으로서도 굉장히 파격적인 약속이었다.
하나 더 싸우지 않고 물러날 수 있는 대가로 치면 적당한 값이기도 했다.
정파도 나쁘지 않다. 당장 녹림의 칼을 눈앞에 둔 중소 규모의 문파와 가문들은 한숨을 돌리게 될 터다.
또한 상행이 자유로워지니 백도맹에도 큰 선물이 될 것이다.
두화가 신의의 대가로 총표파자의 인장을 꺼냈다.
“일 년 뒤에 회수해 갈 테니, 잃어버렸다고 배 째지 마.”
허윤이 인장을 받기 전에 말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물을 게 있소.”
두화가 숨을 후, 하고 내쉬었다.
“그럴 줄 알았어. 대종사와 어떤 거래를 했는지 궁금한 거겠지. 총표파자께서 감출 필요 없다고 하셨으니 솔직하게 말해 줄게. 우리 산채는 사실 황족의 종친을 모시던 가신의 혈통이야. 권력 다툼에서 밀려 관군에게 쫓기다가 산으로 들어왔지. 그런데 벌써 몇 대가 지났는데도 대종사가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에게 복귀를 약속했어. 우리가 모시던 종친의 핏줄을 황제로 추대하여…… 사실상의 역모…….”
허윤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말을 홀린 듯 듣고 있다가 역모란 단어에 깜짝 놀라며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장강용왕과 왜 헤어졌는지가 궁금했던 거요!”
“아……!”
두화가 당황했다.
“그럼 빨리 말했어야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아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본인이 먼저 얘기한 것 아니오. 허, 참.”
“아무튼, 협정은 성사된 거야!”
두화는 인장을 떠맡기듯 허윤에게 쥐여 주고는, 허윤에게도 뭔가 내놓으라는 양 손짓했다.
허윤은 자기를 대표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잠깐 고민했다가 재촉을 받곤 옆에 돌돌 있는 족자에 서명을 해서 건네주었다.
몽혼도를 쥔 두화가 얼굴이 빨개져서 방을 나갔다.
허윤이 머리를 긁적이며 서덕을 보았다. 서덕의 얼굴이 침울했다.
“그녀가 이 인자라고 했으니, 가신 쪽 혈통이었나 보구려.”
산적 노릇을 하고 있어도 언젠가 조정으로 복귀할 직계 자손이라면, 수적의 대장과 혼례까지 할 수는 없는 신분이었다.
서덕은 말없이 방을 나섰다.
서덕은 전각을 나가서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후…….”
낙락이 서덕의 옆으로 걸어왔다.
그러곤 당과를 꺼내어 서덕에게 주었다.
서덕은 그것을 받아 입에 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겐 뱃멀미가 있다고 했는데…….”
낙락이 함께 당과를 빨며 조용히 옆에서 있어 주었다.
* * *
문상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생각하던 계획이 한 걸음을 더 나아갔다.
백도맹을 비롯한 단체들을 분열시키고 무림맹에 복속시키는 단계다. 한데 이미 백도맹은 거의 끝난 거나 다름없을 정도까지 진행됐다.
“왜 어렵다는 점괘가 나왔는지 모르겠군.”
모든 게 수월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제 녹림은 장강수로채의 잔당을 쳐서 덩치를 불리게 하고, 마도 역시 아직은 좀 더 버텨 줘야 하겠지.”
녹림이 허윤을 찾아왔다는 걸 알지 못한 그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가지를 뻗어 냈다.
조금 전에는 천가만호 사람들을 보았다. 천가만호는 중소에도 들지 못하는 군소문파, 군소방파, 소수 무가를 일컫는 말이다. 각각은 약해도 수가 수만에 달하기 때문에 결집하면 그 힘이 상당했다.
물론 수만의 단체가 결집한다는 건 당연히 어려운 일인데, 듣자 하니 이번에 고수를 영입해 연합맹주로 추대한다는 얘기가 있었다.
“중요한 건 백룡회를 고립시키는 일이지. 본래 속가와 백도맹, 팔대 세가까지 윗급만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천가만호까지 포함해야겠어.”
그는 곧 수하를 보내 천가만호와 접촉하게 했다.
연회는 이튿날부터 시작이지만 손님들에게 음식은 진작부터 제공되었다.
문상의 수하도 천가만호 사람들을 찾아가 함께 술을 마셨다.
“무황곡의 제자라고 하였습니까?”
“실력이 아주 출중합니다. 원앙쌍살을 가볍게 제압하였죠.”
“실력뿐입니까? 요즘 보기 드물게 인품까지 올곧은 협객 중의 협객입니다.”
거듭 사람들의 칭찬을 들은 연백룡이 잔을 들고 인사했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얼굴이 부끄러우니 거두어 주시지요.”
천가만호 사람들이 웃었다.
“이것 보십시오. 저희가 연합맹주는 아주 잘 모셨습니다.”
“저희 같은 천가만호의 수장이 되기엔 오히려 아깝고 죄송하지요.”
연백룡이 정색하듯 말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갈 길 잃은 저를 받아 주신 건 여러분입니다. 비록 협에는 대의와 소의가 있으나, 협을 행하는 이들은 대소가 없습니다. 하나 저는 아직 어려 맹주 같은 중책을 맡기 어렵습니다.”
천가만호 사람들이 모두 일어서서 포권했다.
“연백룡 대협의 나이는 어리시나 우리 모두의 존경을 받으실 만합니다.”
“부디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문상의 수하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본 맹에서도 천가만호의 연합맹주를 적극 지지할 겁니다.”
천가만호 사람들이 환호했다.
“연 대협. 무림맹에서 밀어주신답니다.”
“그야말로 호랑이가 날개를 단…… 아니, 대협은 백룡이시니 용이 승천하는 격입니다.”
그때 문상의 수하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이곳 백룡장의 주인인 회주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사파와 마도인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정사마를 모조리 통합하여 군림이라도 하고 싶은 건지, 원…….”
연백룡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곳 회주는 협객이라 들었습니다. 좋은 일도 많이 하였고, 대종사까지…… 처치하지 않았습니까.”
“협객이라면 마도가 소림사를 치는데 방관하지 않았겠지요.”
“그건…….”
“하여 본산이 불타지 않았습니까? 어쩌면 강호의 패권을 잡는 데 소림사가 눈엣가시였는지도…….”
그가 슬쩍 말을 흐리며 본론을 꺼냈다.
“대종사까지 죽인 이상, 그를 막을 자가 없습니다. 지금도 흑룡을 데려간 것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합니다. 대협께서 마도와 사파를 척결하려 한다면 필연적으로 그와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
“음…….”
연백룡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백룡선생을 직접 만나 보고 그의 도움을 받을까 했는데, 무림맹에서 꺼리는 인물이라니.
“아아, 제가 너무 주제넘었습니다. 못 들은 걸로 해 주십시오. 하지만 이건 개인적으로 드리는 말씀인데, 그와 너무 가까이 지내지는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하나,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물러설 생각이 없습니다. 그에게서 어떤 불의한 뜻이라도 보인다면, 제 검은 그를 향할 것입니다.”
성공했다.
문상의 수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술병을 들었다.
“하하하! 연 대협이 계시니 든든합니다. 자, 제 술을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