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does the land document of the fantasy Demon Castle belong to? RAW novel - Chapter 190
제190화
날이 밝았다. 성벽 동쪽에 싸움을 위한 터가 만들어졌다.
재르보는 아침부터 일어나 어제와 같은 연설을 반복했다.
티머시는 멀찍이 떨어져 정신이 아득해지는 연설을 들었다.
연설을 듣는 것도 네 번째였다.
어제 아침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밤에 한 번, 그리고 지금.
재르보의 연설을 듣는 사람은 조금씩 늘어났다.
재르보는 연설에 재능이 있었다. 동서의 여러 역사를 끌고 오는 걸 보면 제대로 된 교육도 받았다.
귀족은 아니겠고, 아마 이름 있는 유파에서 수학한 경험이 있는 듯했다.
그의 연설은 아침 안개를 따라 뚜렷하게 퍼졌고, 용병은 통나무 위에 올라간 한 명의 서부 사람이 외치는, 서부를 진정한 의미로 멸망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열광했다.
연설을 듣는 사람들의 눈에서는 광기마저 엿보였다.
어제 하루 동안 결투의 소문은 성벽을 둘러싼 용병 전부에게 전해졌다.
티머시 말고도 여러 용병이 근처에서 재르보의 연설을 들었다.
연설 내용에 노골적으로 인상을 쓰는 용병도 있었고, 슬쩍 관심을 보이며 재르보에게 다가가는 용병도 있었다.
티머시의 감상은 하나였다.
이거 놔두면 큰일 나겠다.
고작 하루 사이 재르보 근처에 모인 사람이 수십 명은 늘었다.
저 인간들이 마을로, 도시로 돌아가 술을 마시며 술기운에 똑같은 소리를 해대는 모습이 벌써 눈에 보였다.
마르할의 말대로 방치하면 귀찮아질 사상이다.
안개가 사라지고 온도가 서서히 올랐다.
셰이븐은 말도 없이 걸어와 준비된 무대에 올랐다.
멀찍이서 연설을 듣고만 있던 용병들도 대강 만든 공터로 다가갔다.
어떤 사람은 까치발을 들었고, 어떤 사람은 말에 앉아 고개를 돌렸다. 어떤 사람은 말 위에 균형을 잡고 섰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한 장소를 향했다.
마르할의 부하 한 명이 성벽에 딱 달라붙었다.
어제 성벽 여기저기서 보이던 사람이었다.
수백 명의 용병이 잠깐의 유희를 위해 모였다. 성벽을 포위하고 있던 용병이 거의 다 모인 것처럼 보였다.
이만한 숫자가 모인 건 사람들이 성벽을 돌며 소문을 퍼 나른 영향도 상당하리라.
티머시는 자리를 떴다. 마르할과는 성벽 바깥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용병을 대부분 모으긴 했지만, 서쪽에 남은 자들도 있을 거고, 그들과의 전투는 피하기 어려웠다.
환성과 함께 결투가 시작되었다. 셰이븐이 손도끼를 던졌고, 연달아 두 개의 손도끼를 쳐낸 재르보가 포효했다.
하늘로 튕겨 나갔던 두 개의 손도끼가 궤적을 바꿔 재르보의 머리로 떨어졌다. 재르보는 궤적을 바꾼 도끼를 쳐내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셰이븐이 던진 세 번째 도끼는 막지 못했다.
재르보의 이마에 손도끼가 박혔고, 재르보는 입을 벌린 채 뒤로 넘어갔다.
셰이븐이 이마에 박힌 손도끼를 뽑아 재르보의 머리를 잘랐다.
셰이븐이 재르보의 머리를 들어 올리자 사방에서 환성이 터졌다.
티머시는 살면서 딱 두 번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무게를 가늠하기 힘든 무수한 돌덩이가 떨어지며 수천만 마리 벌들이 한 번에 날갯짓하는 듯한 소리를 내고, 돌덩이가 떨어지면 땅이 진노한 듯 지진이 일어난다.
흙먼지가 일어나고 토사가 퍼진다.
떨어지는 돌덩이 앞에서는 아이와 노인의 구분이 없었고, 초인과 초인 아닌 사람의 구분이 없었다.
전신 갑옷을 입은 기사도, 대포에도 끄떡 않던 마족도 무너지는 성벽 앞에서는 평등했다.
재르보와 셰이븐이 결투를 벌이는 싸움터는 성벽에서 떨어지지 않은 장소였다.
티머시는 생애 세 번째로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꿈쩍도 하지 않던 성벽 일부가 허물어졌다.
용병들이 비명을 질렀고, 비명은 돌이 떨어지는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수백 용병들의 모습은 돌덩이와 돌덩이가 만들어내는 먼지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티머시는 성벽에 붙어 있던 마르할의 부하를 찾았다.
티머시가 발견한 건 마지막까지 성벽에 붙어 성벽을 두드리고 있는 한 명의 용병이었다.
남자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족에 맞서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의 모습이 저러했다.
이미 구할 단계를 넘었다. 저기로 뛰어들어 봤자 함께 죽는 꼴밖에 안 된다.
비명과 굉음을 뒤로하고 티머시는 말을 채찍질했다.
* * *
성벽이 무너지며 나는 소리는 도시 중앙까지 들렸다.
이미 대피는 시작되었고, 그쪽은 샤힐레에게 맡겼다.
파름과 붉은 해골 용병단에게도 성벽 바깥에 남아 있는 용병들의 청소를 부탁했다.
전쟁 전문인 그들에겐 청소보단 무리 지은 전투가 익숙할 터였다.
마르할은 마리나, 노아와 함께 교회 입구에서 기다렸다.
무엇을?
악의를.
“시작됐습니다.”
“왔슴다.”
마리나와 노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르할은 다리가 무거워졌다.
그림자가 피처럼 붉었다. 붉은 그림자가 다리를 타고 오르며 마르할을 집어삼켰다.
침식은 무릎 언저리에서 멈췄다.
꾸물거리며 무릎 위로 올라오려는 핏빛 그림자는 마르할에게 과거 서부에서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용사 일행에는 품고 있는 역사가 가벼운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도 마족의 침식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마르와 율란의 조치가 없었다면, 모두 얼마 가지 못해 마족이 되었을 것이다.
전투 중에도 위험한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다.
마르할의 역사는 남들처럼 바로 침식당하는 얕은 역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르의 마법이나 율란의 축복이 사라지고, 그러고도 전투가 이어지는 날이면, 검은 안개는 진득하게 마르할의 피부에 달라붙고는 했다.
핏빛 그림자는 검은 안개가 몸에 붙었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이거 괜찮은 검까?”
“그리 강한 신비는 아닙니다. 단지 이 질척거림은 성가시군요.”
“탈 없이 끝나기를 바랐지만, 그건 무리였네요. 들어가죠. 이대로 그림자를 다리에 달고 다니는 건 너무 눈에 띄니까요.”
마르할이 교회 문을 열었다. 낮임에도 교회는 검었다.
핏빛 그림자가 교회를 뒤덮었다. 교회 천장에 뚫렸던 구멍도 막혔다. 그림자는 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마저 삼켰다.
사위가 분간되지 않았다.
마리나가 어둠의 중심에 불덩이를 만들자 비로소 교회 내부가 보였다.
알란이 어제 봤던 의자에 똑같이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 있는 돌멩이는 그림자에 뒤덮여 돌로 된 기둥과 하나 되었다.
“우선, 이게 무슨 짓인지 물어도 될까요?”
“저희가 살기 위한 조치입니다.”
“저희라…. 도시 사람들은 이미 안전해요. 세인을 뒤에서 조금만 도와주면 용병 백 명이 몰려와도 큰 피해 없이 정리될 테고요.”
“저는 서부에서 열다섯 번을 배신당했고, 초면인 사람에게 죽을 뻔한 숫자는 헤아리기도 힘들어요.”
핏빛 그림자가 알란의 다리와 알란이 앉은 의자를 타고 올랐다. 알란은 저항하지 않았다.
“이해해요. 믿기 힘들겠죠. 저도 처음 보는 사람이 같은 말을 했다면 의심부터 했을 거니까요. 상대를 죽일 함정을 파도 그러려니 해요. 하지만, 구차한 별명은 못 들어주겠어요.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요. 내가 살고 싶다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개인이 짊어질 수 있는 짐의 양은 정해져 있어요. 당신은 필요 이상의 짐을 짊어졌고, 그 대가를 치르고 있죠. 놓아 버리세요. 포기하면 여기서 끝낼 수 있어요.”
그림자가 알란의 목까지 차올랐다. 그림자는 알란의 입을 지나 코를 넘어, 눈을 덮었다. 그리고 알란을 감쌌다.
“저거… 마족 아님까?”
이단이 만드는 신비와는 다르다. 메라는 준수한 실적을 가진 이단심문관이고, 노아는 메라를 따라 많은 이단을 만났다.
알란의 모습은 이단이 만들어내는 신비와는 어딘가 달랐다.
그녀의 지식에서 저런 형상을 한 생물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었다.
“맞아요. 마리나, 공국에 갔을 때 인간의 탈을 쓴 마족과 만났다고 했죠?”
“그랬습니다.”
“사실 반대였어요. 마족의 탈을 쓴 인간을 만났어요.”
“그 말장난이 미칠 여파를 알고 하는 말입니까?”
마리나가 마르할을 쏘아보았다.
인간 행세를 하는 마족은 책에도 기록되어 있다. 아주 특별한 마족이지만, 자료를 찾으면 있긴 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마족 행세를 하는 인간은 기록 자체가 없다.
인간이 마족의 탈을 쓴다는 말 자체가 잘못되었다. 인간은 마족의 탈을 쓰지 못한다. 마족의 탈을 쓴 인간은 검은 안개에 침식되어 마족이 된다.
탈을 쓴 시점에서 이미 인간이 아니다.
“멀쩡한 수행자였는데, 갑자기 마족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죽을 뻔했죠.”
“원인은 모릅니까?”
“전혀요. 짐작도 안 가요.”
마족의 탄생은 거대 역사에 의한 현상이다.
거대 역사는 마르조차 완전히 해명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 거대 역사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을 마르할은 알 도리가 없다.
마르할이 품은 마족의 역사가 사전에 반응했다는 게 작은 단서가 될까.
하지만 그건 여기서 말할 주제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알릴 정보가 아니기도 하고.
“저번 토지 경주에서도 마족이 나타났었다고 했죠. 당신은 마족을 끌어당기는 재주라도 있는 겁니까?”
“제 과거를 생각해봐요.”
“…그렇군요.”
“둘만 아는 이야기는 나중에 나누면 안 됨까?”
노아가 투정했다.
그녀는 마족과의 대치가 처음이다. 이단심문관 교육에서도, 성기사 교육에서도, 마족과 싸우는 법은 배우지 않았다.
노아는 제법 초조했다. 메라에게 세상의 진실을, 업에 대해 들었던 날보다 더.
“노아, 마족을 죽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뭔지 알아요?”
“목을 베는 거지. 특별한 능력이 없다면 말이야.”
목소리는 뒤에서 났다.
세인이었다.
“세인?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됐죠?”
“용병들이 주변 정리를 해주었고, 사람들은 무사히 탈출했습니다. 이제 알란 님만 오시면 됩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잠깐 도와줘요. 바로 저들을….”
세인이 몸을 날렸다.
“잠깐만요! 지금 죽이면…!”
마르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인의 검이 알란의 목을 갈랐다.
기사답게 그의 검은 돌로 된 의자에 앉은 알란의 목만을 깔끔하게 잘라냈다.
그림자에 덮인 알란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알란의 몸이 진흙처럼 녹았다. 녹은 알란의 몸은 어제 바쳐진 산 제물처럼 한 줄기 핏물이 되어 돌멩이 안으로 흡수되었다.
“세인…? 어째서?”
알란의 목소리가 교회 안에 퍼졌다. 교회 자체가 알란이 되어 말을 걸어왔다.
“무슨?”
세인이 사방을 살폈다. 투구 아래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가 당황한 게 드러났다.
마르할이 한숨을 쉬었다. 옆에 있는 마리나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이래서 변수는 배제하려고 했는데.”
“무슨 소리지?”
“그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건 당신도 알고 있었죠?”
“그래. 하지만 그건 유물을 다루느라 정신력을 소모해서….”
마리나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진짜 마법사들도 잡아먹어 버릴 유물을 평범한 학자가 다룰 수 있을 리 없잖습니까. 저 사람은 예전부터 유물과 반쯤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천천히 단계를 밟아가며 죽였어야 했는데… 덕분에 망했습니다.”
사람들은 알란을 숭배했지, 그의 앞에 있는 작은 돌멩이를 숭배한 게 아니다. 하지만 돌멩이는 유물이 되었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알란은 자신이 받은 숭배를 돌멩이로 돌렸다.
효율을 위해 이단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남자다. 마리나가 모르는 이단의 비술도 알고 있을 법했다.
“특별한 마족이 아니면 목을 베면 죽는다고요? 맞습니다. 그리고 저기 있는 남자는 특별한 마족이고요.”
“마리나. 가능해요?”
“시간이 필요합니다.”
멈췄던 침식이 진행되었다. 핏빛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마르할의 무릎 위로 올라오려고 했다.
교회를 감싼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뱀처럼 뻗어 나왔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아니, 도시 안에 있는 모든 게 느껴져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세인. 설명해 주세요.”
수백 가닥의 그림자는 가닥마다 한 음절을 발음했고, 음절들은 교회 안을 돌아다니며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었다.
마족과의 전쟁에서 최전방에 있던 세인도 처음 보는 기괴한 일이었다.
세인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차라리 거대한 마족이라면 달려들어 검이라도 휘두르겠지만, 그림자 상대로 기사인 그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아. 알았어요.”
“여기 있는 모든 게.”
“저를 위한 포상이군요.”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그림자가 채찍처럼 휘어졌다. 노아가 바닥을 발로 찍었다.
성가를 부르는 듯한 울림과 함께 그림자가 물러났고, 그녀의 허벅지까지 올라갔던 핏빛 그림자의 색이 옅어졌다.
“노아, 잘했어요.”
“잘했다고 끝이 아님다! 이거 몇 번 못 함다!”
“알란. 들려요?”
벽과 바닥과 천장에 붙어 꿈틀거리던 그림자들이 마르할을 향했다.
그 일체화된 동작에 노아는 혐오감을 느꼈다.
“들립니다.”
“마치 제 배 속에서 들리는 소리 같군요.”
“당신은 이제 마족이에요. 그것도 신의 뜻이라고 말할 건가요?”
“마족이라고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는 신의 선택을 받은 겁니다.”
그림자가 분노한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외부인의 말을 들을 상태가 아니네요. 그럼 세인에게 목이 잘린 건 기억하죠?”
“맞습니다.”
“세인.”
“어떻게 된 일이죠?”
“설명해 주세요.”
세인은 손을 떨었다. 무력함과 공포에 그는 반쯤 넋을 놓았다.
경험 많은 기사도 감당하기 힘든 공포가 교회 내부에 도사렸다.
“당신 말이 아니면 듣지 않을 거예요. 도시 사람들이 휘말리지 않게 하려면, 여기서 막아야 해요. 당신이 알란을 벤 건 지키기 위한 선택 아니었나요?”
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당신을 따랐던 건 당신의 선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산 제물도, 거짓 숭배도, 모두 사람들을 위한 일이기에 따랐습니다. 최선의 결과라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 근간에 선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선의조차 아닙니다.”
“제가 틀렸다고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림자가 격렬히 흔들렸다. 열병에 시달리는 듯한 알란의 신음이 교회 내부를 으스스하게 울렸다.
교회 중앙에는 마리나가 만든 불덩이가 여전히 타올랐고, 흔들리는 불덩이가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래서 사방에 그림자가 꾸물거렸다.
“부탁 하나만 할게요.”
마리나가 마르할에게 속삭였다. 그녀는 한 손으로 자기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제 손가락 하나만 깔끔하게 잘라줄 수 있어요? 미친년 보는 표정 하지 말고요! 저도 좋아서 이런 말 하는 줄 알아요!”
“하나면 되죠?”
“네.”
마르할이 단검을 뽑았다. 스릉 소리와 함께 마리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합니다.”
“말하지 말고 그냥 해요!”
마르할이 마리나의 왼손 새끼손가락을 잘랐다.
마리나는 이를 악물고 격통을 참았다. 눈물이 찔끔 났다.
바닥의 그림자가 떨어진 손가락을 감쌌다. 손가락은 녹아내려 그림자 사이로 사라졌다.
꾸물대던 그림자가 멈췄다.
알란의 목소리도 뚝 그쳤다.
끼에엑!
인간의 것이 아닌 비명이 울렸다. 그림자가 곤두섰고, 시든 들풀처럼 고개 숙였다.
마리나가 외쳤다.
“유물!”
“노아. 가요!”
“알았슴다.”
노아가 돌멩이로 달려갔다. 그녀가 다리를 높게 들었다. 그리고 돌멩이와 돌멩이가 올려진 기둥을 한 번에 박살 냈다.
성가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교회 천장에 뚫린 구멍과 교회 입구에서 빛이 들어왔고, 붉은 그림자는 빛에 밀려나 사라졌다.
“휴. 힘들었어요.”
마르할이 이마를 훔쳤다.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슴다.”
“알란이 작정하고 우릴 공격했다면 더 힘들었을걸요?”
“떠들지 말고, 저 지혈 좀 해주세요. 진짜 죽겠으니까.”
마리나가 울먹였다. 손가락 하나가 잘린 그녀의 손에서는 피가 철철 흘렀다.
노아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마리나의 손가락을 주웠다. 그림자에 녹아들었던 손가락은 떨어진 자리에 멀쩡하게 나타났다.
“어, 손가락을 붙이지는 못함다?”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습니다.”
손가락을 붙여줄 사람은 따로 생각해뒀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손가락 없이 사는 것보다는 낫다.
노아가 마리나의 상처를 지혈하는 동안 마르할은 세인에게 말을 걸었다.
“도와주려던 건 고마워요. 도움은 안 됐지만요.”
“…미안하다. 그런 이유가 있을 줄은 몰랐다.”
“알란을 죽인 이유요. 진짜 말했던 그대로예요?”
“마을에 정기적으로 오는 노예상이 가진 마차에서 그와 처음 만났다.”
세인은 투구를 벗었다. 그리고 알란의 의자가 있던 자리로 다가갔다. 알란도 없고, 유물도 부서졌지만, 알란이 앉아 있던 돌로 된 의자는 멀쩡했다.
세인은 의자 팔걸이에 손을 올렸다.
“이미 팔 하나를 쓸 수 없고, 고문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나는 그를 샀지.”
“노예를요?”
“마을에는 언제나 젊은 노동력이 부족했다. 고향에서 도망치며 가지고 온 보석이 조금 남아 있었고, 그걸로 노예를 사 마을에 필요한 노동력을 보충했다. 사람을 노예로 대우한 적은 단언컨대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찔리는 부분이 있다는 거 아닐까요?”
“…그럴지도. 생각해보니 산 제물로 먼저 뽑힌 사람들은 내가 사들인 노예 출신이었어.”
나도 죄가 없지는 않군, 하고 세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만일 내가 그런 몸이 됐다면, 나는 다시는 인간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알란은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고, 인간을 믿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어.”
“산 제물 같은 말도 안 되는 수단을 허락한 시점에서 잘못됐죠. 상식적으로 그렇잖아요?”
“그렇군.”
허탈한 대답과 함께 세인은 장갑을 벗고 눈가를 쓸었다. 그리고 다시 투구를 썼다.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일행은 멀쩡하다. 사람들도 피난을 마쳤다. 말도 안 되는 부탁이지만, 나를 보내다오. 마을에는 내가 필요하다.”
세인은 검을 허리춤에서 뽑아 땅에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세요. 누가 죽인다고 했어요?”
“정말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죠. 둘은 어떻게 생각해요?”
“수괴를 죽였으니, 전 불만 없슴다.”
“괘씸하긴 해도, 누군가 이미 용서해버린 탓에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다네요.”
“고맙다.”
세인은 검을 줍고 교회를 뛰쳐나갔다.
급하겠지. 자리를 비우면 안 될 때 무리해서 나온 거니까.
“우리도 정리하죠. 마리나의 손가락만 챙기면 되나요?”
“그런 농담이 나옵니까. 인간쓰레기.”
“그러는 마리나도 입은 살았네요.”
“부축해줘요. 너무 집중해서 어지럽습니다.”
마르할이 마리나의 옆으로 가자 마리나는 마르할의 뒤로 갔다.
마르할이 자세를 낮추자 마리나가 마르할의 등에 업혔다.
“그런 걸 꼴값 떤다고 하는 검까?”
“손가락 하나 잘려볼래요? 아, 씨. 어지러워.”
“농담임다. 저는 먼저 가서 사람들을 살펴보고 있겠슴다.”
노아가 교회를 뛰쳐나갔고, 마르할도 걸음을 옮겼다.
아침 해에서 떨어진 빛이 빈 교회의 바닥을 비췄다.
교회 바닥은 얼룩 하나 없이 깨끗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