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405)
411화 94. 무신(3)
가장했던 감정이 뒤엉켰다. 무신은 큰 소리로 포효하며 막무가내로 손을 휘둘렀다.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것 같았지만 그 손짓에는 어마어마한 힘이 실려 있었다.
닿는다면 치명적이겠지만, 닿지 않는다. 이성민은 무신보다 빨랐고 무신보다 강했다.
꽈앙!
뒤에서 밀어닥친 충격에 무신의 몸이 크게 휘어졌다. 쩍 벌어진 입에서 피가 뿜어졌다.
무신은 핏대 선 목을 움직여 뒤를 보았지만, 이미 이성민은 그곳에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빠를 수가……!’
무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악몽과도 같은 10년 전의 기억이 계속해서 떠오르고 있었다.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한 폐관에서 답을 내놓지 못해 도망쳤을 뿐. 마음을 도피시켜 왼팔의 통증을 잊었는데, 그 통증이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꽈아앙!
무신의 몸이 땅에 처박혔다. 지면이 들썩거리고 파편이 튀어 올랐다.
“무신!”
보고 있던 월후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진심으로 무신을 믿고, 존경하고, 따르고 있었다.
그런 월후였기에 엉망으로 밀리다가 바닥에 처박히는 무신을 보며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너, 사악한 괴물아!”
월후가 땅을 박찼다. 눈부신 백광에 휘감긴 월후가 원독에 가득 찬 눈으로 이성민을 노려보며 고함을 질렀다.
이성민은 거리를 좁혀오는 월후를 힐긋 보았다. 알고 있는 얼굴이다. 태고의 숲에서 만났던 엘프의 사냥조장.
이성민에게 죽은 권존의 딸이다.
월후에게 죽은 아버지를 위한 복수심은 없어 보였다. 레비아스의 인격은 완전히 사라졌고, 잘 단련된 엘프의 몸뚱이는 완전히 월후의 것이었다.
그런 월후가 괴물이라 외치는 것이 우스웠다. 따지고 보면 월후도 만만찮은 괴물 아닌가.
월후가 일으킨 싸늘한 냉기가 공간을 얼어붙게 했다. 기온이 뚝 떨어지고 입에서 하얀 김이 나왔다.
스치는 것만으로 뼛속까지 얼려버릴 냉기의 장력이 이성민을 덮쳤다.
그 거창한 공격을 상대로 이성민은 창을 가볍게 쭈욱 밀어내기만 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모든 무리가 창에 담겨 있었다. 군더더기를 모두 덜어낸 지극히 실용적인 찌르기.
창에 불어넣은 힘은 마주하는 모든 힘을 짓이길 정도로 강맹했다. 냉기가 둘로 갈라지면서 월후와의 거리가 열렸다. 월후의 두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월후!”
무신이 고함을 질렀다. 무신이 때린 일장이 이성민의 등 뒤를 노렸다.
장력에 충돌하는 순간, 이성민의 몸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던 월후가 무신의 장력에 얻어맞았다.
“커읍!”
월후의 입에서 피가 뿜어졌다. 무신의 입이 쩍 벌어졌다. 질풍신뢰로 무신의 옆으로 이동한 이성민은 무신의 허리를 향해 창을 찔렀다.
당황하기는 했지만, 무신은 무신이었다. 그는 옆으로 찌르고 들어오는 창을 오른손으로 낚아채면서 다리를 휘둘러 이성민의 머리를 노렸다.
이성민은 피식하고 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창을 쥐지 않은 손을 휘둘렀다.
빠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신의 다리가 뒤로 밀려났다. 무신은 이를 악물며 공중에서 한 바퀴 몸을 돌리며 두 다리를 함께 휘둘렀다.
이성민의 등 뒤에서 아수라가 일어났다. 수라천살공의 아수라파천무가 펼쳐졌다.
꽈꽈꽝!
연이어 터진 타격에 무신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무신의 장력에 피를 토하던 월후가 다시 이성민의 뒤를 덮쳤다.
그 움직임이 뻔히 보였다. 이성민은 작은 소리로 용언을 외웠다.
쿠우웅!
머리 위에서 짓누르는 무게에 월후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녀는 거대한 압박감을 떨쳐내기 위해 허우적거렸지만, 이어 펼쳐진 용언 마법이 월후의 움직임을 빼앗았다.
빠지지직!
내리 찍힌 빛의 창이 월후의 몸을 꿰뚫었다. 등에서 가슴까지 커다란 구멍이 뚫린 월후가 피를 뿜으며 아래로 추락했다.
“으아아아아!”
그 모습을 보며 무신이 고함을 질렀다. 이래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10년 전만 해도 우습던 사마련주의 제자가 어떻게 이렇게 강해졌단 말인가. 10년을 보낸 것은 서로가 똑같은데.
바닥에 쓰러진 월후는 흐려진 눈으로 무신을 보고 있었다. 악귀처럼 고함을 지르며 휘두르는 무신의 공격은 저 끔찍한 괴물에게 닿지 않았다.
이성민은 한 줄기 번개가 되어 무신을 농락했고, 그가 펼치는 공격에 무신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월후는 그 광경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생인 영매가 말했다. 둘이 힘을 합치면, 틀림없이 종언의 재앙인 귀창을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그것은 영매가 장담한 것이 아닌 신령의 뜻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그토록 강하고 위대해 보였던 무신은 왜 저리도 약한가. 아니, 무신이 약한 것이 아닌가? 이래서는 안 된다.
월후는 피가 흘러넘치는 배의 구멍을 손으로 막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제발, 신령이시여…….”
월후는 간절한 목소리로 신령을 불렀다. 귀창이 정말로 종언의 재앙이라면, 신령은 틀림없이 답을 줄 것이다.
10년 전에 그 악랄하고 강했던 사마련주를 죽이기 위해 신령이 힘을 주었듯이.
“제발, 제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10년 전에 간절히 신령을 찾았을 때, 신령은 그 부름에 답을 주었다.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드는 찬란한 빛의 힘을 하사하셨고, 종언의 재앙인 사마련주에게서 부조리한 힘을 빼앗았다.
귀창이 정말로 종언의 재앙이라면, 이번에도 신령은 답을 내려 주실 것이다. 월후는 엘릭서를 꺼내 상처에 들이부으면서 신령을 불렀다.
월후의 중얼거림은 이성민에게도 들리고 있었다. 10년 전의, 북쪽 설원에서의 일이 자꾸 떠올랐다.
이성민이 보고 느꼈던 것과 사마련주가 겪고 느꼈던 것.
그 기억이 서로 뒤섞이고 있었다.
허우적거리는 무신을 보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피범벅이 된 입술을 씹으며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이성민에게는 너무나도 잘 보였다. 무신이 극한까지 익힌 환의 묘리는 이성민의 눈을 현혹하지 못했다.
신령은 이 상황에 개입하지 못한다. 운명에 속해있던 사마련주와는 다르게, 이성민은 운명을 탈출했다.
그렇게 된 이상 신령은 사마련주와 허주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성민의 힘을 빼앗을 수가 없다.
‘하지만 월후나 무신에게 힘을 부여하는 것은 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했을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에서 새하얀 빛이 떨어졌다. 두 줄기의 빛이 월후와 무신의 몸을 휘감았다.
“오, 오오오오……!”
월후가 탄성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상처와 피로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온몸에 활력이 돌았고 힘이 흘러넘쳤다. 월후와 마찬가지로 힘을 얻은 무신이 당황하여 자신의 몸을 내려 보았다.
“이, 이건……?”
“신령, 신령께서 답을 주셨습니다!”
월후가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 외침이 무신의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았다.
엉망으로 짓이겨진 자존감이 다시 꿈틀댔다. 그래,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마련주 본인도 아니고 제자에게 이런 수모를 겪을 리가 없잖은가.
저 말도 안 되는 힘은 무도의 길을 걸어 얻은 것이 아니다. 비열한 요마의 힘이고, 종언의 재앙으로서 얻은 힘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이성민은 무신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아니, 아예 맞는 말이다. 이성민은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무신의 외침에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았다.
‘이성민’이 이렇게 강한 이유는 틀림없이 요마의 힘이고, 종언의 재앙으로서 얻은 힘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성민의 육체는 학살포식의 것이다.
하지만 무공은.
흑뢰번천은 사마련주의 것이다.
신령의 가호를 몸에 두른 월후과 무신이 뛰어들어왔다. 이성민은 움직임을 멈추고서 그 둘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이성민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증오와 살의를 갈무리했다. 공간 전체를 관조했다.
활짝 열린 기감이 눈을 감아도 모든 것을 느끼게 만들어주었다. 무신과 월후의 움직임이…… 너무 느리게 느껴졌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시감. 하지만 기억 속에는 있었다.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간다고 생각했다. 몸이 아닌, 마음이 앞으로 걸었다. 그 순간 어둠이 뒤흔들렸다.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성민은 눈앞에 펼쳐 있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구불구불한 외길을 보았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마령에게 들었다. 투신전…… 격을 초월한 필멸자들이 도달하는 곳. 육체에 구애되지 않고, 의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세계.
이성민은 자신의 발을 내려 보았다. 투신전으로 향하는 길의 입구에 발끝이 간신히 닿아 있었다.
완전히 각성한 이성민은 투신전에 들어올 자격을 얻었다. 마음먹는다면, 당장이라도 저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이성민은 시선을 들어 앞을 보았다. 저 먼 곳에서 허주의 모습이 보였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리던 허주의 걸음이 멈추었다.
허주가 천천히 머리를 돌려 이성민을 보았다. 히죽 웃는 허주의 웃음이 보였다.
이성민이 허주를 보듯, 허주 역시 이성민을 보고 있었다.
그 뒤편에 다른 이들이 보인다. 아는 뒷모습이 있었다.
이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씹었다. 사마련주는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는 냉막한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이성민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이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었다.
창왕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이성민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 역시 이성민이 이곳에 서 있음을 느끼고 있겠지만, 창왕은 이성민을 돌아보는 것보다는 그사이에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전력을 쏟고 있었다.
창왕다운 일이었다. 이성민은 돌아보지 않는 창왕에게 웃었다.
그리고 사마련주와 허주를 향해 머리를 꾸벅 숙였다. 당신들에게는 너무 많은 것을 받았다.
당신들을 만나, 당신들을 보내고……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게 되었다. 이성민은 숙인 머리를 들지 않고서 걸음을 뒤로 물렸다.
아직은 아니다. 당장이라도 투신전으로 향하는 길을 걸을 수 있다지만, 아직은 그래서는 안 된다.
허주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살아서, 모든 것을 즐기고, 더 이상 미련이 없을 때 오라고 했다. 아직은…… 하나도 즐기지 못했다. 미련은 잔뜩 있다.
그래서, 아직 갈 수 없다.
걸음을 완전히 뒤로 물렸을 때 길은 사라졌다. 처음으로 보았던 그 풍경은 잊지 않았다.
알고 있는 이들이 걷고 있던 곳도, 그들과의 거리감도 잊지 않았다.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결국 남에게 받은 것뿐인 내가, 떳떳하게 저 길을 걸을 수 있을까.
‘그게 미련인 거야.’
조금, 아니, 많이 민망한 일이니까.
‘뭐야?’
느끼고 있는 시간이 다르다. 이성민이 투신전으로 향하는 길을 보고 온 동안 무신과 월후는 아직 이성민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무신은 두 눈을 감고 우두커니 서있는 이성민을 보며 감정이 격앙되는 것을 느꼈다.
‘무시하는 건가?’
감히, 감히. 무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신의 오른팔에 거대한 힘이 모였다. 그는 자신의 전력을 오른손에 끌어모았고, 무자비한 일장을 준비했다.
“음.”
이성민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는 여전히 다른 시간에 있었다. 뛰어드는 무신과 뒤쪽의 월후.
무신의 손에 모이는 힘의 흐름이 뻔히 보였다. 이거 참. 이성민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 무형창이 쥐어졌다.
팟.
빛이 한 번 터졌다. 서로 다르게 느끼던 시간이 맞춰진다. 괴력난신의 풍압에 월후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꽈아앙!
성벽까지 날아간 월후는 모여 있는 구경꾼들과 멀지 않은 곳에 처박혔다.
무신은 날아가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에 모인 힘은 터지지 않고 그대로 소멸했고, 그 힘을 모아 두었던 오른팔은.
“……엇.”
무신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은 자신의 오른팔을 떨리는 눈으로 내려 보았다.
그럴 리가 없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대응하지도 못했는데.
오른팔이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팔 같은 것은 없었다는 듯이.
절단면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고, 팔이 사라졌는데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끄, 아아아악!”
하지만 무신은 비명을 질렀다.
사라진 오른팔 대신에, 왼팔이 있던 자리가 미칠 듯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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