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r cowardly winter RAW novel - Chapter 4
3. 너의 비밀번호
사람은 꽤 많은 순간에 눈물을 보인다. 꼭 슬픈 일이 아니더라도 재채기를 한다든가 하품을 한다든가 매운 음식을 먹는다든가. 평상시라면 찔끔 흘리고 말았을 눈물들이었다. 눈물의 의미가 내게 위협적으로 다가온 것은, 할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김유을은 할머니 댁에 완전히 적응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할머니를 회관에 데려가고, 할머니 친구분 댁에 내려주고, 돌아와 내 아침밥을 간단히 차린다. 시간이 10시를 넘어가면 나를 깨웠다. 그래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억지로 제 무릎에 앉힌 다음 밥상 앞에 데려다 놓았다. 예전이라면 내 밥을 지극정성으로 챙기는구나, 하고 고마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음험한 속사정을 안다. 먹이고 나서 무슨 짓을 할지도 다 안다.
“발정 났니?”
밥상을 내가 발로 밀어냈다. 일부러 알아먹으라고 신랄하게 말했다. 내 딴에는 시비조였다. 그러나 김유을은 젓가락질하며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발정 났다는 말에 화도 내지 않는다.
“어떻게 참았어, 지금까지.”
“사랑으로.”
김유을은 아침밥을 든든히 먹이고 곧장 나를 한옥으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우리는 오후까지 울고 불며 섹스를 했다. 내가 지쳐 쓰러져 자는 동안에 그는 근처 마트로 가서 장을 보고 온다. 혹은 내가 부탁했던 생필품 따위를 사오기도 했다. 저녁을 차린 다음, 할머니를 모시고 오기 위해 연락을 취한다. 할머니는 요즘 집에 잘 돌아오지 않으신다. 김유을이 용돈을 두둑이 줘서, 화투판에서 날아다니느라고 전화를 씹기 일쑤였다. 그러면 이제 내 불행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제발……. 유을아.”
깨웠음에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죄였다. 김유을은 당연한 듯 내 바지를 벗기고, 팬티를 치우고, 그 밑으로 얼굴을 밀어 넣는다. 내 음부를 손가락으로 넓히고, 그 사이에 혀를 무지막지하게 집어넣는다. 속살을 차지한 혀는 그다음에 살살 굴렸다.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발끝으로 먼저 그를 밀어내면서, 베개를 꼭 끌어안고 허리를 흔들었다. 그러면 김유을은 내 양 허벅지를 제 어깨에 올려둔다. 흘러나오는 물을 아주 맛나게 드신다. 이따금 심심해 보이는 음핵도 가지고 놀아주며, 내 눈물만큼 음부에서 쏟기를 기다린다.
“아, 읏!”
반응을 보이면 킬킬거리며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끝에 끝까지 다다른 것이 아니면 버텼다. 베개를 입에 물고서 참았다. 두 다리를 휘저으면서 밀어내기 시작하다가 도저히 참지 못할 때만 허리를 마구 흔들었다. 그를 떨치기 위함이지만 정작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다. 도리어 절정이 가까운 신호인 것을 알아챈다. 입술로 민망스럽게 추웁 빨아들인 다음, 혀를 좆처럼 쑤셔 넣는다.
“아, 아, 유을…….”
나는 둔부를 들썩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절정에 다다른 음부를 그의 입에 더욱 가까이 밀착한다. 습관이 든 탓이었다. 김유을은 한꺼번에 잡아먹을 기세였다. 제게로 떨어지는 것들을 맛나게도 받아먹는다. 나는 수치스러움에 밥상을 발로 밀어낸다.
그러나 그 수법도 이제는 통하지 않았다. 김유을이 차린 저녁을 먹지 않으면 곧바로 부푼 좆이 아래를 쑤셨다. 밥이 다 식어도 상관없었다. 김유을은 배고프고 지친 나를 상대로 위에 앉혔다가, 뒤로 세웠다가 하며 한 풀듯이 섹스하니까.
결국 다 식은 밥을 모래알 씹듯이 삼킨 다음, 죽은 듯이 자는 게 내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 할 섹스를 맞이하기 위해서 자는 사람처럼 그랬다. 그러나 김유을은 자는 동안에도 나를 영 가만두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살짝 음부를 헤집고, 잠결에 칭얼거리며 내가 달라붙을 때까지. 그 상도덕 없는 짓을 반복했다.
한 번은 목이 자꾸만 간지러워서 눈을 떴다. 달도 아직 기울지 않은 어두운 새벽, 눈부신 빛 하나가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모기가 물은 듯 간지러운 부분을 긁었다. 얼결에 손톱 끝으로 그의 손등을 긁었다. 그가 머리칼부터 내 목까지 쓰다듬는 중이었나 보다. 나는 아까 저녁을 먹고 잠든 그 자세에서, 위에 이불이 덮여 있는 것 말고는 바뀐 게 없었다. 아, 베개 대신 그의 허벅지를 벤 것도 있었다.
“뭐 해?”
나는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전등 꺼진 어두컴컴한 방 안이었다. 그는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핸드폰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이 무표정하다가 내 목소리를 듣고서 변한다.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보는 그의 눈이 일렁이는 감정을 낳았다. 순식간에 변화였다. 마치 흑백 영화에 색색의 물감을 탄 것 같았다. 그게 무척 신기했다. 그럴 때마다 느낀다. 너는 정말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안 잤어?”
“깬 거야. 그보다 뭐 해?”
아까와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가 들여다보고 있는 핸드폰이 그의 것이라면 이렇게까지 안달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 그가 들여다보고 있는 핸드폰 케이스는 내 것이었다. 그가 내 핸드폰을 백과사전 읽듯이 읽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그가 내 이마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덮었다.
“더 자.”
“나 자는 동안 뭐 하려고.”
나는 내 이마 위에 올려진 그의 손을 치웠다. 가뿐하게 몸을 일으켰다. 결국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우리 둘이 내 핸드폰을 보는 꼴이었다. 아주 남사스러운 꼴이 돼버렸다. 나는 핸드폰 화면에 띄워진 연락처를 보았다. 대학 동창들이 적힌 연락처였다. 그게 바람의 증거라도 되는 듯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는 뻔뻔하게 나를 앉힌 뒤, 계속해서 핸드폰 속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퇴사를 하면서 회사 단톡방은 곧장 나왔고, 필요 없어진 단톡방도 다 지운 상태였다. 내 습관이 그랬다. 통화 기록이든 문자든 필요 없는 것은 지운다. 별로 볼 것도 없다는 소리였다. 뭘 그렇게 구석구석 뒤지시는지, 느릿느릿 손가락을 움직이며 내 핸드폰을 수색한다.
“나도 네 거 줘.”
우린 한 번도 서로의 핸드폰을 본 적이 없었다. 뭐 그런 연인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었다. 서로를 너무 믿어서가 아니라 ‘네 핸드폰 좀 봐도 돼?’라고 할 만한 상황이 지금껏 형성되지 않았다.
주는 걸 거부하리라는 내 예상과 달랐다. 김유을은 비웃지도 않고, 제 뒷주머니에서 곧바로 핸드폰을 꺼냈다.
“봐도 돼?”
“응.”
김유을은 내 손바닥 위에 핸드폰을 적선하듯 올려뒀다. 그런 뒤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까는 문자함을 뒤지더니 이제는 사진 앨범으로 간다. 나는 질 수 없다는 듯이 그의 핸드폰을 열었다. 비밀번호가 설정되어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
“비밀번호.”
“1111.”
“와. 너 되게 쉽게 산다.”
그렇게 말하고 1111을 입력하는데, 문득 내 생일도 11월 11인 것이 기억났다. 핸드폰 화면이 켜지자마자 나는 잠시 멍했던 것 같았다. 아무것도 꾸며지지 않은, 핸드폰을 처음 샀을 때와 마찬가지인 기본 화면. 핸드폰 대리점에서 깔아둔 듯한 기본 앱. 벌써부터 김을 새게 만드는 핸드폰이었다. 대강 돌아다니다가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내 지문 등록해도 돼?”
“해.”
내 마음대로 이 폰을 쓰겠다는 선언에도 김유을은 묵묵부답이었다. 설령 제 핸드폰을 가져다가 팔아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태도였다. 의심도 주고받아야지 할 맛이 난다. 구경도 심드렁해졌다. 졸린 눈으로 그의 가슴팍에 기대었다.
사진도, 연락처도, 톡의 방도. 죄다 등록되어 있는 게 여섯 개 미만이었다. 핸드폰을 거의 연락용으로만 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설마 세컨드 폰이 있는 건 아니겠지? 하긴 김유을 성격에 그런 걸 두고 관리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쉬다가 마지막으로 문자함을 눌렀다. 거의 의무감으로 확인하는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핸드폰에 여자 이름으로 온 문자가 있었다. 흥미가 살랑살랑 꼬리를 쳤다. 이미진. 나는 조심스럽게 한 번 눌러보았다. 어제 날짜다.
온 것은 딱 두 개였다.
[전화해라.]
[해라.]
두 개가 이틀 연속으로 와 있었다. 나는 궁금해서 김유을의 허리를 찔렀다.
“이거 누구야? 이미진 씨?”
김유을은 내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엄마.”
“뭐?”
누가 자기 엄마를 이름으로 저장해 놓는단 말인가. 나는 혹시나 해서 연락처에 들어가 봤다. 이미진, 김권영. 부모님 이름일 게 분명했다. 그것들이 연락처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참 불효막심한 아들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김유을의 어깨를 치고 말았다.
해우.
세 글자 이름의 향연에서 내 것도 발견했다. 유일한 두 글자였다. 이 별스럽지 않은 두 글자 때문에 서글퍼졌다. 나도 모르는 곳에서 애정을 표현하면 무얼 하나. 나나 얘나 대책이 없었다. 김유을이 안쓰러운 동시에 어이없었다. 이렇게 좋아하면서 말이다. 그간 감정을 헹군 듯이 무심한 얼굴 하며, 잠자리에서 고고한 척하며. 어쩌면 제 딴에는 낸답시고 낸 티를 내가 못 주워 먹은 걸 수도 있었다.
“어머니한테 전화 안 드려? 여기 봐봐. 해라, 해라. 이렇게 보내셨는데.”
“안 해도 돼.”
“너 집에 안 가려고?”
김유을은 그때야 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그 눈에는 나에 대한 원망이 스치고 있었다. 그러나 잠깐이었다. 김유을은 샅샅이 살펴봐 빈껍데기가 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내 허리를 안았다. 그대로 우리 둘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가 내 머리를 안아서 제 가슴팍으로 끌고 갔다. 누가 봐도 자려는 품새였다. 나는 고개를 위로 쑥 내밀었다. 그제야 숨이 쉬어진다.
“안 가?”
“안 가.”
“왜?”
김유을은 내 허리를 조금 더 세게 안았다.
“너 살찌우려고.”
그의 입술이 내 이마에 닿았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나는 체리 색의 몰딩으로 된 창문과 성한 곳 없는 내부를 둘러보았다. 벽은 이 나간 듯 깨졌고, 창문이라고 달린 것도 좀스러웠다. 김유을이 발을 뻗으면 꽉 차는 방이었다.
이 방이 새삼 낯설었다. 나는 어느새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씻지도 않고 일어나서 쌀밥을 푹푹 푸고, 그가 씻겨주면 씻겨주는 대로, 또 입 맞추면 입 맞추는 대로 내버려두고 있었다. 그에게 스타킹을 당당히 주문하던 며칠 전의 나였다. 떠올리면 소름 돋듯이 경악스러웠다.
몇 년간 내숭을 그렇게 떨더니만 쪽팔리지도 않는가. 내가 발을 펑펑 차면서 앓자, 김유을이 “자.” 한마디를 했다. 그래도 창피함은 금방 가셨다. 김유을이 고른 숨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기회를 노렸다. 그의 자는 얼굴을 욕심껏 감상했다. 지난 몇 년간. 아니,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부터였다. 나는 한 번도 머릿속에서 생각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아주 사소하고 잡다한 것부터 나와 해경의 생활비까지. 매일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다른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거나 하면 신경 쓰고,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마음을 알아맞히려고 노력하고, 아무튼 머릿속이 비워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김유을이 청소부였다. 내 머릿속을 깔끔하게 비워준다. 그렇게 이를 갈며 떠난 회사를 까먹었다. 밥을 먹고 실컷 잠을 잤다. 그 과정에서 해경이, 배신한 동료, 그 어떤 것도 떠올리지 않았다. 그가 의도한 것인지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누가 나를 정성 들여 돌봐준 것도, 내가 먹을 밥을 차려준 것도 처음이었다. 부모님 이후론 없었다. 김유을만이 나를 돌봐주었다.
사랑받고 있음을 안다.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분명 사랑받는 느낌일 거다. 수시로 내게 입을 맞추고, 내 주변 사람에게 잘 보이고, 내 안위를 챙겨주는 것. 그래서 김유을이 흡착하듯 붙어 있었으면 좋겠다. 언제 집에 갈 것이냐고 물으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조마조마한 중독자처럼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네가 가면 내 밥은? 누가 나를 밤새 무아지경에 빠지도록 만들어줄까. 골 아픈 현실을 계획하고, 보이지 않는 앞날을 재고 싶지 않았다. 다시 냉랭한 도시로 내쳐지고 싶지 않았다. 계속 김유을이 있었으면 좋겠다. 네가 날 사랑한다는 걸 보여주면 좋겠다. 내 위안은, 내 즐길 거리는 당장 너뿐이었다.
김유을은 그걸 아는 것 같았다. 내가 한심하고 원망스럽겠다. 나는 밤새 김유을의 팔을 베고 누웠다. 이 초라한 한옥에 그를 가두어둔 건 나였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내 이기심 때문이었다. 떠나는 목적지를 숨기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내가 이곳에 있기에, 그 또한 여기에 있다. 나를 사랑한다는 죄로 아무것도 아닌, 이 청봉리 촌구석에 매여 나를 돌본다. 나 대신 할머니의 비위까지 맞추어주며 말이다.
나는 그에게 언제나 상냥하고, 바르고, 오점이 없는 여자 친구이길 바랐다. 사회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괜찮은 사람이고 싶었다. 이렇게 보여줄수록 초라한 자신을 깨닫는 게 아니라. 내가 그를 망치고 있다는 오묘한 기분에, 다시 나 자신이 상처받는 이상한 새벽.
그 때, 크지 않은 알람 소리가 울렸다. 새벽 5시였다. 김유을은 인상을 찌푸렸으나 저항 없이 눈을 떴다. 염탐하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미처 대처하지 못한 눈맞춤이었다. 그의 손이 올라와 내 뺨을 만졌다.
“왜 안 자.”
갑자기 가슴께가 시린 듯이 아렸다. 나는 대답 없이 몸을 굴려, 그의 요란스러운 핸드폰을 집었다. 알람을 끄고 그에게 핸드폰을 쥐여 줬다.
“할머니 데리고 오려고?”
할머니는 어제 돌아오지 않았다. 보통 할머니가 친구 집에서 밤을 꼴딱 새우는 날이면 김유을이 아침 일찍 데리고 오곤 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랐다. 그를 한숨 더 재우고자 물어본 것이었다. 김유을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했다.
“아니. 어제 통화했는데 하루 더 주무시고 오신다던데.”
“그러면 왜 이 시간에 일어나?”
“시장 때문에.”
그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이 덮던 이불을 걷은 다음, 멍하니 앉아 있는 내 몸 위에 얹어줬다. 그러곤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안 있어 물이 흐르는 소리에 나도 자리서 일어났다.
“시장에는 왜?”
한옥에는 따로 화장실이 없었다. 신축으로 지은 집 안에 들어가거나, 마당에 물을 뜰 수 있는 곳에서 씻어야 했다. 김유을은 신축까지 가기가 귀찮은가 보다. 이 겨울에 찬물을 틀어놓고 대충 얼굴을 씻고 있었다. 이불에 똘똘 말린 나는 툇마루에 앉아 그걸 지켜보았다.
“따듯한 물로 씻어!”
당혹스러웠다. 내 물은 매번 덥혀오던 그였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하얀 입김을 나무랐다. 그는 춥지도 않은지 그 찬물을 목까지 끼얹었다. 내 걱정은 나 몰라라 한다. 기어이 씻은 다음에 손에 남은 물기를 털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갈 거야?”
“어?”
“시장에.”
그가 사다 둔 식재료가 다 떨어졌는데, 마트에는 마음에 차는 물건이 없단 것이었다. 마침 근처에 서는 큰 시장에서 장을 봐올 계획이라고 했다. 나는 아예 여기에 귀향한 것 같은 김유을이 웃겼다. 그의 말 사이사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안 갈 거면 들어가서 자.”
“나 옷도 없어.”
가져온 것은 이미 세탁기 통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겉옷도 이렇게 오래 있을 줄 모르고 코트만 간신히 챙겨왔다. 그 안에 마땅히 입을 만한 건 없었다.
“내 거 입든가.”
요즘 세상이 좋아졌다. 옷 한 벌 안 챙겨왔어도 걱정 없었다. 김유을은 여기 오자마자 핸드폰으로 잔뜩 주문해 두었다. 덕분에 여벌의 옷은 차고 넘쳤다. 머리가 그쪽으로는 비상한 듯싶다. 그는 물기 있는 얼굴로 자신의 방에 들어가 숏패딩 하나를 꺼내왔다. 그걸 내 앞에 두고서 다시 할머니의 신축으로 들어간다. 칫솔을 어젯밤에 거기 두고 온 모양이었다.
나는 그가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그의 패딩을 한 번 입어봤다. 내가 여자치고 키가 작은 편이 아님에도 김유을의 패딩은 한숨 나도록 컸다. 하긴 그는 가끔 현역 선수로 오해받곤 하는 덩치였다. 아예 깃발처럼 펄럭거리는 소매를 보고 웃을 때였다. 저 멀리서 다 씻은 김유을이 오고 있었다.
“이러고 가면 시장에 동냥하러 온 사람인 줄 알겠다.”
바지는 할머니가 주신 편한 고무줄 바지에 티는 잔뜩 늘어났다. 아무래도 이 꼴로는 못 가겠다 싶을 차였다. 김유을이 신을 벗고 툇마루에 올라왔다.
“손 줘봐.”
“손?”
김유을은 내 손이 나오도록 소매를 접었다. 코흘리개를 돌보듯 능숙한 손길이었다. 겨우 해결됐음에도 우스꽝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품이 커서 여전히 깜장 포대 자루 같았다. 김유을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퍼를 내 목 끝까지 채웠다.
“머리만 다시 묶어.”
그러고는 방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나는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말대로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손가락으로 빗었다. 투명한 고무줄을 벌려 머리를 다 넣을 즈음, 간단한 겉옷을 걸친 김유을이 나왔다.
신발을 신고, 차에 시동을 걸고, 히터를 틀고, 내가 그 옆자리에 앉기까지.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뚝딱 벌어진 일이었다. 마치 새벽에 꾼 꿈의 연장선 같았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과 조용히 운전하는 김유을과 거지꼴로 실려 가는 내가. 영문을 모르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실어가면 실어가는 대??살고 있었다. 매일 현실에서 붕 떠 있었다.
나는 창가에 기대어 있다가 눈을 감았다. 김유을이 내비게이션의 소리를 줄이는 게 들렸다. 이런 사소한 것에서 나는 애정의 온도를 느꼈다. 귀를 덥히는 히터처럼 따뜻했다. 그리고 그 따듯함이 나를 감쌀 때 현실을 잊는다. 이것에 중독될수록 나는 김유을의 애정을 끄집어내려 한다. 보아도 보아도 보고 싶었다. 제한 없는 애정의 끝이 궁금했다. 왜 나를 챙겨주는 행동이 좋은지 모르겠다. 의지할 데 없던 인생이 안식처를 찾은 기분이었다. 좋아서 안달복달이었다.
이기적인 내 마음을 단물 날 때까지 곱씹었다. 눈을 감고 있었으나 자지는 않았다. 그런데 김유을은 내가 자는 줄로 안다. 신호가 걸리는 순간마다 내 머리칼을 만지작만지작하다가, 내가 편안히 쉴 수 있게 패딩 지퍼를 내려줬다. 그것 때문에 씰룩거리는 입꼬리였다. 진정시키기 힘들었다. 실실거리며 웃고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둑이 무너진 것처럼 울고 싶었다.
시장은 꽤 거리가 있는 곳이었나 보다. 시장 근방에 가는 것만으로 한 시간은 족히 걸렸다. 김유을은 구태여 여까지 와서 살 게 무엇이었을까. 매번 나한테 해 먹이는 게 전부 손 많이 가는 반찬들이긴 했다. 잡채나 꼬막 무침이나 볶은 멸치, 더덕 무침 같은 것들. 장을 봐오거나 인터넷으로 주문시키거나. 나라님 모시는 수라간 궁녀 버금가는 정성이었다. 이것저것 주워 먹는 내 혀만 고급이 되었다.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아버지 밑에서 배운다던 그 솜씨를 나한테 써먹는 터다. 아깝게시리.
시장에 도착했는지 차가 점점 느려졌다. 그런데 그는 차를 세워두고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소리가 나거나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기는 했다. 나를 깨우지만 않을 뿐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내가 슬쩍 눈을 뜨고 말았다.
“왜 안 깨워?”
핸드폰을 보던 김유을의 시선이 내게 돌려졌다. 그는 내가 일어난 걸 확인하자마자 곧장 안전벨트를 끌렀다. 내가 일어나기까지 기다려준 모양이다.
“가자.”
그리고 굳이 내 안전벨트까지 풀어준다. 그의 옷에 파묻혀 아무것도 못 하는 줄 아는가. 내가 한 소리 할 정신도 없이 그가 빠르게 내렸다. 내가 탄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갑자기 들어온 찬 바람에 뿌연 입김이 흘러나왔다.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차에서 내렸다.
“이렇게 다 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뭐가.”
“안전벨트 같은 건 내가 풀어도 되고. 문도 내가 열어도 되고.”
나는 괜히 민망해서 투덜거렸다. 그리고 덥석 그의 손을 잡았다. 김유을은 잡힌 자신의 손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내 뺨에 입을 누른다. 차가운 바람에 언 뺨이 놀란 듯 뜨거워졌다. 민망함에 그의 어깨를 때렸다.
그는 금방 떨어졌다. 그리고 내 손을 잡고 시장 입구로 천천히 걸어갔다. 시장은 이제 막 문을 연 듯 상인들이 생선을 깔고 삼삼오오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과일을 파는 아주머니와 채소를 파는 아저씨가 서서 수다를 떤다. 아직 손님을 받기보다는 들여온 물건을 진열하는 모양새였다.
그래도 우리 말고도 손님은 제법 있었다. 물건을 기웃거리는 이들은 하나같이 큰 수레를 끌고 다녔다. 그리고 예약해 둔 듯 이것저것 물건을 집어서 끈으로 묶는다. 아무래도 장사를 준비하는 치들인 것 같았다.
“커피 마실래?”
“아니야.”
김유을은 차가운 내 손을 제 주머니에 넣었다. 날것의 냄새가 그득한 시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이 시간에 시장에 온 것이 처음이었다. 내가 두리번거리자 상인들은 먹이를 노리는 승냥이처럼 웃었다. 능청스레 말도 걸었다. ‘한번 보고 가, 싸게 해줄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김유을 쪽으로 바짝 붙었다.
“이렇게 빨리 시장도 여는구나.”
손을 비비며 커피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한편에서 아는 사람들끼리 그 주변에 모여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종이컵을 들고 박장대소 중이었다. 내가 모르는 세상을 엿본 기분이었다. 참새도 이제 막 기지개 켤 시간에, 그보다 앞서서 세상 돌아가는 데 힘쓰는 이들이 있었다.
안색은 맑고 활기찼다. 지나가는 손님들에게 너스레를 떨면서 웃는다. 웃음살을 따라 주름진 얼굴에는 생기가 있었다. 나처럼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김유을은 내 손을 잡고서 필요한 곳에 멈추어 섰다. 채소 가게 앞에서 그는 신중했다. 사장님이 단숨에 나와 말을 걸었다.
“막 들어온 거예요.”
“네.”
김유을은 짧게 대답하고 무와 파, 배추를 샀다. 아저씨는 김유을을 보고 보는 눈이 있다며 아부했다. 고른 것으로만 조심조심 포장해서 건네줬다. 김유을이 별다른 말없이 지갑을 꺼내어 계산하는 동안, 기다리기 심심한 사장님이 나를 걸고넘어졌다.
“새댁?”
“네?”
그때 김유을이 실실 웃는다. 나는 고개를 저으려고 하는데, 김유을이 어깨를 끌어안고 “수고하세요.” 하면서 걸어갔다. 나는 끌려가면서 그의 미소를 실컷 보았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저런 인사치레에 지나지 않는 말에도 껌뻑 넘어가니.
“좋아 죽네. 응?”
나는 일부러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놀리고 장난치기 위함이었다. 김유을은 나를 내려다보더니 뺨이 붉어져라 웃는다. 그가 그렇게 크게 웃는 것은 처음이었다.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띠는 것이 아니라, 눈까지 휘어질 정도로 시원스러운 웃음이었다. 그는 걷다가 말고 내 뺨을 한 번 쓸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걸었다. 나를 제 손에 올려두고 가지고 논다.
그에게 팔짱을 낀 채로 걷는 내내 심장이 얼얼했다. 쓰리다고 느낄 만큼 뛰었다. 따귀라도 맞은 것처럼 뺨이 빨갛다. 손가락 까딱 안 한 그에게 얻어맞은 몰골이었다. 귀까지 윙윙 울려대고 있었다. 물기가 흥건한 시장 바닥만 보면서 걸었다. 김유을의 하얀 운동화 코가 보일 때마다 움찔거렸다.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눈을 굴리다가 젓갈을 파는 아주머니랑 눈이 마주쳤다. 결국 얼결에 시식대 앞까지 섰다.
오징어 젓갈을 이쑤시개에 껴서 한입 먹었다. 그때 김유을이 자기도 옆에서 입을 벌렸다. 나는 엉큼한 그의 입술에 아무거나 찍어서 넣어주었다. 젓갈 가게 사장님이 우리의 방정을 보다가 낄낄 웃었다.
“신혼인가 보네.”
하면서 옆집 아주머니랑 눈을 마주치고 “좋을 때지.” 했다. 김유을은 부정하지 않고 어리굴젓 하나를 더 먹었다.
“이걸로 주세요.”
“어리로?”
“네.”
사장님은 기분 좋은 듯 콧노래를 불렀다.
“신랑이 자알 생겼다.”
김유을은 뭔 말을 들어도 고개만 끄덕였다. 젓갈을 포장하는 내내 한마디도 응수하지 않는다. 내가 그를 대신해 대답했다.
“잘 골랐죠, 제가.”
“그르네. 부럽다. 내랑 바꾸자.”
익살스러운 사장님의 말에 거기에 있던 아주머니 세 명이 깔깔깔 웃었다. 김유을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볼 뿐이다. 포장된 어리굴젓을 받고 걸음을 돌렸다. 아직 시장을 반 바퀴도 돌지 않았는데 김유을의 손에 짐이 주렁주렁 달렸다. 나는 손을 뻗어 대파가 든 봉지라도 잡으려고 애썼다.
“하나 줘.”
“먹고 싶은 거 있어?”
“없어. 살 건 다 산 거지?”
“어.”
김유을은 내 손이 닿지 않게 봉지를 높이 들어 올렸다. 김유을의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 보였다. 나는 아까 그 얘기 때문인 것을 알았다. 농담임을 뻔히 알면서 이런다.
“하긴 이 시간에 이러고 돌아다니면 다들 부부인 줄 알겠지.”
김유을은 묵묵히 걷다가 손을 올렸다. 빗듯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는 사이 시장을 빠져나왔다. 시간 낭비 없는 장보기였다. 중간에 국숫집이 보여 먹고 싶다고 했더니, 김유을이 잔치국수를 만들어 준다고 했다. 이름만 들어도 배가 꼬르륵했다.
짐을 뒷좌석에 싣고, 차에 탔다. 김유을은 히터를 틀고 아까처럼 내 안전벨트를 손수 채웠다. 이제는 호들갑도 없다. 몸 둘 바 모르게 민망스럽지도 않다. 자연스럽게 의자를 젖히고 누워 몸을 기댔다.
창밖을 바라보는데 문득 ‘많이 익숙해졌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또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내 꾸밈없는 일상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런데 그가 잘해줄수록 불안이 알은체를 했다. 소심하게 기뻐하지 못하고 후들거렸다. 찝찝하다기보다는 불안함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아직 남아서 웅크려 있다. 전부를 보여주면 그가 질려서 도망갈 것 같다는 마음이.
시장을 돌아다니며, 하루하루 낭비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니까 알겠다. 나는 굼벵이였다. 시골에 내려와서 손톱 부서져라 굴을 파고 누워만 있었다. 김유을은 맥을 못 추는 나를 보며 무얼 떠올릴까. 어쩌면 속으로는 한심해서 혀를 찰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조금 창피했다. 두꺼운 수면 양말에 슬리퍼를 꿰신고, 꼬질꼬질한 모습에, 그런 여자 때문에 시골에 틀어박혀 잔치국수를 해줘야 하는 처지였다. 백 명을 데려다가 물어도 백 번 싫다고 할 터다.
시장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좋았는데,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림자의 악력이 세졌다. 나를 움켜쥐어 납작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밝은 시장 한가운데에 서서, 잠시 잊고 산 그림자가 선명하게 보이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그림자의 크기는 할머니 집에서 죽치고 앉아 있는 동안 배로 늘어났다.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멋대로 살을 불렸다. 내 두려움 뒤에 숨어, 신나게 덩치를 키웠다. 정면으로 마주해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진실을 마주 보기 싫어할 것이므로, 다시 망각하듯 두려움 뒤에 숨겨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언제까지 할머니 집에서 얹혀 있을 수도 없었다. 지금이야 할머니가 친구들과 놀러 다니느라 신경을 쓰고 있지 않고, 김유을도 있으니 별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이 나이 먹고 언제까지 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력서를 쓰고, 또 새로운 직장을 알아봐야 했다. 늑장을 부리면 아예 취업 시기를 놓칠 수가 있었다.
취직을 생각하자 가슴께가 막혀왔다. 차라리 다른 직업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만 다른 회피였다. 어쩌면 회사라는 곳이 나한테 잘 안 맞을 수도 있었다. 공무원을 해볼까. 그러면 시험은? 그 강의를 듣는 것만 해도 몇백은 할 텐데. 얼마 안 되는 적금이나 퇴직금을 다 거기다 쏟아버려? 생각이 엉킬 때, 시내 초등학교 앞에서 신호가 걸렸다.
“안 자?”
김유을이 창밖을 보는 나한테 물었다. 나는 한숨 쉬듯이 대답했다.
“안 자.”
그리고 창문으로 눈을 돌렸다. 저 멀리 등교하는 아이들 사이로 작은 피아노 학원 간판이 보였다. 지휘봉을 든 개구진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옛날에 딱 저런 피아노 학원에 가고 싶었다. 고등학교 적 본 영화 때문이었다. 주인공이 특정한 곡을 치면 과거로 돌아가는 내용의 영화였다. 당시 나는 줄거리보다 피아노를 쳐 과거로 돌아간다는 능력이 부러워서, 그래서 그 허황된 영화를 질리도록 돌려보곤 했다. 거기서 나오는 곡을 한번 배워보고 싶었다. 사정이 되질 않아 매번 놓쳤지만.
어차피 시간도 널널한데 한번 배워볼까.
그때 차 안에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유을의 핸드폰이었다. 이미진. 김유을의 어머니 이름 세 글자가 화면을 뚫을 것처럼 커졌다.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겁을 먹었다. 김유을은 울어대는 핸드폰을 무심하게 거부했다. 이윽고 기다렸다는 듯 다시 전화가 울렸다. 김유을 역시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거부한다.
“안 받아?”
김유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그에게 질책하듯이 말했다.
“왜 안 받는 거야?”
“받기 싫어서.”
묻지 말라는 태도에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때 김유을이 내 손을 잡았다. 깍지를 끼고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린다. 아까까지 불안으로 쌓은 돌담이 살그머니 허물어졌다. 나를 길들인 것 같았다. 그가 곁에서 나를 만지고, 내 머리를 아끼듯 쓰다듬으면, 나는 그의 우리에 갇혀 비를 피할 수 있었다. 현실을 직시하라는 비로 인해 춥지 않았다. 내가 지금껏 만들어둔 우산은 구멍이 숭숭 났다. 바람에 날아갈 우산보다 김유을의 우리가 튼실했다. 그런고로 나는 우리에 붙어살려고 안간힘이었다.
우리는 집까지 갈 동안 침묵했다. 그 조용한 차 안에서 나는 서로의 긴장을 느꼈다. 그의 손이 맞잡은 곳에서부터 나의 골수까지 전해졌다. 나는 어떻게든 창밖만 보려고 애썼다.
그렇게 집에 도착한 후였다. 그가 손을 놓고 차에서 내렸다. 이제 낡고 헌 심장이 나아지리라 여겼다. 그런데 아까 시장에서 그를 봤을 때보다 난리였다. 김유을이 차 문을 열어주었다. 태양이 그의 뒤에서 쏟아진다. 눈이 따갑도록 부셨다.
나는 김유을의 손에 이끌려 신축에 들어갔다. 그가 보일러를 켜고, 제집처럼 장 본 것을 꺼내서 잔치국수를 끓이기 시작했다. 나는 겉옷만 벗은, 그 꾀죄죄한 몰골로 있다가 겨우 이만 닦고 왔다.
밥상에 물만 따라놓고서 앉아 있었다. 그가 주방에서 일하는 뒷모습을 한량처럼 구경했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김유을은 지금껏 공들인 게 아까워서 참는 걸까. 손에 물 묻히는 게 고단하고 짜증스럽지 않을까. 그의 널찍한 어깨부터 길게 뻗은 다리까지. 고명을 자르는 뒷모습을 보다가 일어섰다. 홀린 것처럼 그의 등으로 걸어갔다. 김유을은 다가오는 내 발소리를 듣고 나지막이 말했다.
“앉아. 거의 됐어.”
그의 말을 껌 씹듯 씹었다. 끓는 육수를 맛보는 척, 나는 그의 등 뒤로 다가가 머리를 기댔다. 김유을이 잠시 멈칫하는 사이에 그의 허리마저 끌어안았다. 숫제 보약이었다, 보약. 그를 안으니까 마음이 노곤한 봄볕 같다. 그의 살에서 나는 냄새는 불안을 축내듯 녹였다. 그의 우리 아래서 근심이 사라진다. 나도 의지할 데가 생겼다. 나는 언제까지나 홀로인 줄 알았다. 내 구멍 난 우산을 버릴 수 없던 이유였다.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
그의 부모님이 거는 전화가 두렵다. 그가 여기 있을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래도 나는 비를 피하고 싶었다. 홀딱 젖은 나를 닦아줄 손이 간절했다. 그가 조금만 더 같이 있어줬으면 좋겠다. 그는 내 눈을 가려, 다정한 품을 담보 없이 내어줬다. 욕심을 한번 부려보고 싶었다. 나는 팔을 그의 허리에 둘렀다.
“언제 올라갈 거야?”
김유을은 그제야 내 팔을 내려놓고 뒤돌아보았다.
“쫓아내고 싶어 미치는 거 아는데. 너…….”
“안 가는 거지?”
사실 그에게 오늘이라도 올라가라고 말해야 했다. 이런 작은 시골 주방에 갇혀서 내 잔치국수나 끓여주고 있기에 아까웠다. 나약해빠져, 궁상을 떠는 여자 친구의 수발을 들어달라고 하다니. 이기적이고 몰상식한 요구였다. 더군다나 김유을은 서울에서 막 일을 시작해 보려는 참이었다. 배워야 할 게 산더미처럼 쌓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안 간다는 그의 말이 잔잔하게 나를 울렸다. 기뻐서 환호성이 입술을 가르고 나올 것만 같았다. 못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의 발목을 포승줄로 묶어두고, 내 외로움이나 한껏 달래달라고 하고 싶었다. 여기에서 나 좀 어루만져 달라고 하고 싶었다. 정작 그와 시간을 갖자고 하고 도망쳐 온 것은 나인데 말이다.
나는 발꿈치를 들어 그의 입에 내 입술을 가볍게 문대고 떨어졌다. 김유을은 가만히 그 이기적인 입맞춤을 받다가 가스레인지의 불을 껐다. 시선이 오갔다.
잔치국수는 오늘 못 먹을 듯싶었다.
* * *
할머니의 물건이 있는 곳에서는 김유을과 난잡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마음을 안다는 듯이 나를 단박에 안아 들었다. 내가 머무는 한옥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촌스러운 옷을 하고서 김유을과 연신 키스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벽에 나를 가두었다. 그리고 한 번에 바지를 끌어 내렸다. 내 목에 연신 입을 맞추면서 내 속옷을 지그시 눌렀다. 둔부부터 음부가 있는 곳까지 지나쳤다. 손가락 두 개가 속옷 위를 거닐 듯 쓸었다.
나는 몸을 떨었다. 그가 반복해서 문지르는 곳을 따라서 젖어드는 게 느껴졌다. 그는 나를 모로 눕혔다. 내 속옷을 다 벗기지 않고 살짝 엿보는 듯이 보았다. 손가락을 넣고 얄궂게 찌른다. 내가 약간 몸을 비틀자, 그가 화하게 웃었다. 나는 약이 올라 부푼 그의 청바지에 손을 올려두었다. 김유을은 내가 하는 양을 점잖게 지켜봤다. 나는 그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그가 하는 것만큼, 아니, 그것의 반만큼. 그를 기다시피 애태우고픈 욕심이 있었다.
그의 바지를 내리고 드로어즈 위에 선명하게 드러난 윤곽을 만졌다. 오른쪽으로 쏠린 그것을 부드럽게 만져 주자 금세 손 안에서 크기를 키워갔다. 그의 눈이 내 손을 향해 있었다. 놓친다면 손목을 부러뜨리기라도 할 것 같았다. 흥분된 마음이 공기 중으로 전염됐다.
그의 바지를 아예 끌어 내리고 성기를 꺼냈다. 그즈음 그가 내 음부에 박힌 손가락을 서서히 빼냈다. 나는 그의 드로어즈를 내리고 투웅 튀어나온 그것에 가벼이 입을 맞췄다.
“좋아?”
김유을이 내게 매번 묻는 것이다. 약간의 장난기를 섞어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표정으로 가만히 있는 그가 무서워졌다. 나는 분위기를 풀고자 했다. 일부러 혀를 내밀어 그의 길쭉한 것을 핥았다. 그때였다. 그 큰 것이 내 입 안으로 한꺼번에 쏟아지듯 들어왔다. 그가 내 머리통을 앞으로 당겼다. 나는 깜짝 놀라 그의 허벅지를 잡은 채였다. 김유을이 내 양 뺨을 잡았다. 한 번 더 들어왔다.
“으!”
성기가 다급히 내 입에서 나가는데 그의 눈이 열 난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새빨개진 눈으로 다시 내 입 안에 성기를 쑤셔 넣었다. 세 번째였다. 빼서, 넣을 때 내가 고개를 도리질을 쳤다. 그러자 내 뺨에 문지른다. 따지고 자시고 할 정신도 없었다. 투두둑 속옷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나를 눕혔다. 푸욱, 짓누르면서 들어온다. 다정함은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다.
“유을아, 아!”
한 번에 들어찼다. 편치 않은 느낌이었다. 손톱을 세워 유을의 등을 할퀴었다. 머리끝까지 채워지는 느낌에 고개를 흔들었다. 김유을의 성기는 욕심내듯 굴었다. 안으로 정신없이 밀고 들어온다. 내가 잠시 방심한 사이였다. 들어와 나를 눌러, 그가 미친 듯 허리를 움직였다. 성기가 푹푹 박힌다. 내 정신도 같이 깎여나가는 움직임이었다. 김유을은 밀려나가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아예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뭐가 뭔지도 모르는 사이에 등에 벽이 닿았다. 김유을은 거기에 나를 고정한 채, 내 머리를 제 어깨에 눌렀다. 나는 사방에 갇혀서 그의 성기를 받았다. 그의 목덜미를 깨물었으나 소용없었다. 무작정 박아대고 본다.
“하, 해우, 너…….”
그의 사나운 눈이 내 뺨에 닿았다. 음부를 때리는 그의 성기 때문에 정신이 알알했다. 속살이 짓눌리다 못해 두툼한 성기에 깔리는 느낌이었다. 다 빼내고 다 가져간다. 자지러지듯 내 정신을 쏙 훔쳐놓았다. 그가 내 둔부를 세게 내려쳤다.
“허리 움직여.”
“아, 잠깐……. 하!”
그는 무릎을 세우고 나를 벽에 거의 박아 넣을 듯이 굴었다. 나는 물러설 곳이 없는데도 출구를 찾듯 벽을 더듬거렸다. 그의 요구대로 허리를 움직이고 싶어서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여기저기 찔러대는 성기를 피하고자 어쩔 수 없이 비틀댔다. 애석하게도 그는 그 엉성한 몸짓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박아대는 속도가 일정했다. 쉼 없이 들어와 나를 찌른다.
나는 봐달라는 듯이 그의 뺨에 입술을 비볐다. 그의 입술을 한 번 머금었다가 놓아주고, 목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그가 미친 사람처럼 내 머리 위에 말을 쏟았다. 정신이 간 듯이 뒤집어씌웠다.
“또, 다시 해.”
“으, 아, 으읏…….”
“또 만져……. 나 만져 줘. 응?”
그의 악랄한 혀가 내 입술을 잡아채고 들어왔다. 속살에 끼우고 박는 행위에 나는 허리를 빼 들었다. 그러나 성기는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빼낸 만큼 따라서 더욱 안으로 들어왔다. 그 느낌이 몹시 이상했다. 키스하는 중간 중간 얼굴을 돌렸으나, 그는 또다시 따라와 내 입술을 먹었다.
푹푹푹, 벽에 눌러져서 정액을 받았다. 그는 싸면서도 내 안에 박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하얀 벽지를 뜯을 듯이 만졌다가, 그에 어깨에 기대어 울었다. 알량한 쾌락을 받아먹으며 다리를 떨었다. 음부에서 나온 물이 그의 성기가 들어올 때마다 밖으로 튀었다. 씨물과 합쳐진 것은 바닥에 흘렸다.
그를 도발한 대가는 컸다. 그는 나를 엎드리게 한 다음에 뒤에서 곧바로 들어왔고, 나는 간신히 쥔 이불을 뜯었다. 다음은 바닥에서 한 번 더. 그다음은 도망치다가 잡혔다. 질질 잡혀 끌려와서 박혔다. 작은 골방이 정액 냄새로 가득할 때까지 나를 가졌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에게 휩쓸렸다. 섬뜩하게 먹힌다는 건 알았다. 음부의 살을 다 내어주는 것도 알았다. 진저리나면서도 생각을 태우는 그 강렬함이 좋았다.
“유을아, 유을아……!”
이제는 그의 위에서 내가 어설프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의 어깨를 잡고 허리를 들썩거린다. 그러면 칭찬하듯 김유을의 입술이 내 가슴을 물고, 나는 울면서 절정에 몸을 떤다. 홀로 법석을 피웠다.
내가 절정에 다다르면 그는 성기를 빼내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넣어 씨물을 빼낸다. 뚝뚝 떨어지는 씨물이 장판에 고였다. 내가 걱정스러워하자, 그가 깨끗하게 해주겠다고 했다. 혀를 내 음부에 대고 쭉 빨아당겼다. 그리하면 걱정은 다 잊는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했던가. 뒤늦게 불붙은 우리는 부뚜막을 태워 먹어도 모자랄 정도였다.
나를 가져도 끝이 나질 않았노라고 했다. 김유을이 내 뇌수를 한 가닥 한 가닥 풀었다. 사람은 사람에 중독될 수가 있었다. 그가 내 몸을 탐하고, 내가 그의 몸을 탐하는 동안의 일이었다. 이곳은 청봉리가 아니라 김유을의 우리였다. 배를 갈라 공허와 외로움을 버려냈다. 김유을은 좋다고 날름날름 받아먹을 위인이었다. 격식이 사라지고, 나신으로 부대끼는 느낌이 좋았다.
잠금이 풀어졌다. 나는 김유을의 필요성을 이해해 버렸다. 이 억센 매듭에 순순히 묶여버렸다. 그러므로 수치는 없어지고 생각은 자유로워졌다.
나는 그날부터 김유을의 앞에서 아무렇게나 하고 아무렇게나 입었다. 무작정 나를 옭아맨 불안감마저 지웠다.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나신보다 더한 걸 보여줬다. 그의 손가락에 박혀 빌기까지 했었다. 그럼에도 김유을은 손톱만큼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제아무리 추해도 곁에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나는 그가 필요하면 손을 뻗었고, 김유을은 그럴 때마다 나를 힘껏 안아주었다. 내 안에 쌓인 불안을 희석시켜 줬다.
김유을이랑 있으면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았다. 초라하게 여기로 도망쳐 온 패배자가 아니라, 그에게 허물없이 대접받아야 하는 사람 같았다. 현실은 이미 뒷전이다.
그렇게 나는 김유을의 품에서 안주하고 있었다. 그는 질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걸 반기는 느낌이었다.
내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