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r cowardly winter RAW novel - Chapter 5
4. 논두렁 별 밭
애써 챙겨온 노트북 화면에는 쓰다가 만 이력서 창이 띄워져 있었다. 반쯤 쓰다가 머리가 당겨서 쉬었다. 기분이 바닥을 칠 만큼 좋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공무원 강의나 후기를 몇 개 찾아보다가 말았다. 몇 줄만 읽어도 시험의 결과가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는 방치 신세였다. 구석에 처박아두었다. 아예 보질 않으려고 애쓰듯이 대했다.
돈을 쓸 일도 없었다. 내 통장에 대강 얼마쯤 있다고 세보는 걸 그만뒀다. 잔고를 생각하면 풀 수 없는 과제를 떠맡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손에 잡히는 대로 일해야 할 것 같았다.
가끔 안부랍시고 내 근황을 묻는 대학 친구들이나 동창회 모임 연락이 왔다. 읽고 싶지 않아도 SNS에 합격했다는 소식이나 인증하듯 공부하는 사진 같은 것이 눈에 띌 때. 자연스레 내 처지가 비교되는 게 싫었다. 무작정 핸드폰도 꺼두었다.
세상과 단절된 나는 오로지 김유을에게 매달렸다. 내게 유일하게 기쁨을 주는 것은 그였다. 그가 해주는 맛있는 한 끼, 섹스, 그리고 달콤한 말들. 현실이 독촉해올 때마다 그것들을 요구했다.
“입 맞춰줘.”
그가 방 청소하는 것을 구경하다가 뜬금없이 요구했다. 해줄까 안 해줄까. 심심풀이 도박하듯 점을 쳐보았다. 반반의 확률이었다. 그가 다가와 내 입술을 빠르게 훔치고 떠났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청소를 했다. 그가 개킨 이불을 한쪽에 두고 있는데 또 충동이 일었다. 양팔을 벌리고 흔들자 그가 곧바로 다가온다. 꼭 끌어안아 나를 일으켜줬다.
“왜.”
나는 할머니 바지에 그의 티셔츠를 입고, 까치집을 한 머리는 가관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것을 보는 눈을 하고서 봐준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연이어 들려온 바깥소식을 털어내고 싶은 것처럼 안겼다. 그의 품에 대롱대롱 늘어져, 종일토록 풍기는 그의 냄새를 맡았다.
“하고 싶어?”
요즘 이러다가 자주 잠자리로 이어져서인지, 그가 마주 안으며 물었다. 내 눈을 보며 의도를 가늠하는 듯했다. 나쁠 것은 없지만 아까 할머니와 통화를 한 후였다. 친구분이 집으로 데려다줄 거라고, 눈 깜짝할 새면 도착할 거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 떡볶이 먹고 싶은데.”
김유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알았다는 듯 나를 지나쳤다. 그는 신축으로 걸어가고, 나는 어미 뒤를 쫓아다니는 새끼오리처럼 따라갔다. 그는 그러든 말든, 내가 하는 행동을 무리 없이 받아줬다. 악어 등살이 먹고 싶다고 하면 해줄 것처럼 흔쾌하다. 내가 안주 삼아 하는 요구도 도통 거절한 적이 없었다.
나는 부엌이 잘 보이는 마루에 드러누웠다. 그가 떡볶이 재료를 꺼내는 모습에 시선을 뒀다. 농땡이 피우는 중이라 그러한가. 그의 다리 사이에 음전하지 못한 물건을 생각하게 된다. 저렇게 멀쩡한 사람처럼 서서 요리를 하다가도 나를 드러눕힐 때는 야차가 되지 않던가. 불쑥불쑥 그 간극이 떠오를 때면 나는 심술스러워졌다. 밤에는 달달 볶고, 낮에는 얌전하니 대접해 주고?
“유을아.”
김유을이 떡볶이 재료를 썰다가 말고 나를 돌아보았다.
“심심해.”
김유을은 단정히 웃으면서 다시 재료를 썰었다.
“핸드폰 해.”
“핸드폰 재미없어.”
“뭐 하고 싶은데.”
“뭐 할까?”
김유을은 드디어 내가 장난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어쩐지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드러누워 떼쓰듯 그를 불렀다.
“유을아. 유을아.”
김유을은 말없이 어묵을 썰고 있다. 그의 시선을 끌 만한 말이 없을까. 마침 부리나케 오고 있는 할머니가 생각났다.
“너, 할머니 어디서 만났어?”
김유을은 그제야 내 쪽을 바라봤다. 저번에 비밀이라고 말했던 게 서서히 기억났다. 찌르면 찌르는 대로 나오는 그가 비밀을 지킨 것도. 손이 근질근질할 만큼 궁금해졌다.
“할머니 프라이버시라서 말 못 해.”
“무슨 프라이버시?”
그러니까 더욱 의미심장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어묵을 썰고 있는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 김유을의 어깨에 옷걸이처럼 매달렸다.
“말해.”
“못 해.”
“말 안 하면 이제부터 키스 안 한다?”
김유을은 칼을 내려놓았다. 한숨을 쉬며 나를 보다가 내 입술을 노려본다. 나는 씨익 웃으며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언제 봤는데.”
새삼 가까워진 우리의 거리를 실감했다. 예전이라면 이따위 장난을 치느니 혀를 깨물었을 터다. 내가 허파에 바람 든 것처럼 굴 때, 김유을의 입술이 붙듯이 왔다. 무서울 정도로 표정이 빠진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내 뺨에 미쳐, 가벼운 소리를 내고 사라졌다. 쪽, 소리가 경쾌했다.
“앉아 있어.”
아닌 척하며 나를 놀렸다. 김유을은 다시 어묵을 썰었다. 반듯한 네모 모양으로 써는 일에 집중이었다. 그의 대답 대신이라 치고 어묵이라도 훔쳐 먹는데 철문 여는 소리가 났다. 대체 화투를 몇 날 며칠을 혼이 빠져 친 건지. 집 나간 할머니 얼굴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나는 어묵을 씹으며 마중 갔다.
“야. 우야.”
할머니는 묵직해 보이는 비닐봉지를 흔들었다. 실한 과일이 들었는지 한 손에 들지도 못한다. 냉큼 달려가 받으려는데, 나보다 앞서서 가로챈 이가 있었다. 귀가 좋기도 하지. 김유을이 바지에 젖은 손을 닦으며 대신 받았다.
“오셨어요.”
“어이.”
할머니는 그 말만 하고서 신을 벗고 들어왔다. 할머니의 얼굴이 화색인 것을 보니 판돈을 많이 땄나 보다. 할머니는 나는 본 척도 안 하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민망해져서 도로 상 앞에 앉았다. 김유을은 주방으로 들어가 봉지를 냉장고에 넣고, 나는 심심해져 티브이를 틀었다.
“우야.”
“네.”
할머니가 방에서 나오시면서 나를 불렀다. 곧이어 허리 두들기며 김유을 바라본다. 할머니는 주방으로 가지 않고 밥상 앞에 앉으셨다.
“쟤 뭐 하는데.”
“떡볶이.”
나는 리모컨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같이 드실래요?”
“어. 아니다. 또 금방 나가봐야 하는데.”
나는 할머니 옆에 놓인 가방을 보았다. 길고 너른 것이 뭐가 많이 들어가게 생겼다. 설마 저기에 현금 다발을 넣고 다니시는 건 아니겠지.
“할머니.”
“왜.”
“화투 너무 오래 치시는 거 아니야?”
할머니는 가방을 다시 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 보니까 자주색 립스틱도 바르고, 얼굴에 파운데이션도 하신 것 같았다. 방에 잠깐 들어가 화장을 손보시고 오셨나 보다. 할머니의 차림도 상견례 가듯 깔끔했다. 화투 치러 갈 때 할머니는 가능한 한 추레하게 입으신다. 다리를 쫙쫙 펴주어야 한다면서.
“화장은 왜 하셨어?”
여태껏 화투 치러 갔다 온 게 아니란 말인가.
“그냥.”
그러면서 좋아 죽겠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다. 나는 슬그머니 불안해졌다. 할머니가 무슨 강매 같은 것이라도 당하는 것은 아닐까. 저렇게 꾸며서 입고 가실 데가 없으실 터다. 손녀가 걱정하고 있건 말건, 할머니는 시종일관 잇몸미소셨다. 그때 밥상에 큰 냄비가 놓였다. 빨갛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볶이였다. 나는 신이 나서 허리를 폈다. 김유을은 자리에 바로 앉지 못했다. 상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젓가락을 가지러 갔다.
“유을아. 물도.”
나는 그렇게 말하고 하품을 했다. 이거 먹고 유을이랑 같이 낮잠이나 잘까 싶었다.
“아. 맞다.”
아까 낮에 편의점에서 사온 오렌지 주스가 생각이 났다. 곧장 몸을 일으켰다. 물잔을 내려놓던 김유을이 일어서는 내 어깨를 잡았다.
“왜.”
“아, 나 오렌지 주스 먹으려고.”
그 말을 듣고 김유을이 곧바로 일어난다. 금세 오렌지 주스를 꺼내와 새로운 컵에 따라줬다. 쭈욱 지켜보던 할머니는 혀를 찼다.
“아이고, 공주랑 머슴이 내 집에 있네.”
나는 왠지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김유을이 주는 컵을 잽싸게 받았다. 너무 익숙해 덤덤해졌지 무언가. 공주와 머슴.
“네 설거지도 쟤가 하지.”
“응.”
“네는 뭐 하나. 집에서.”
김유을이 자리에 앉았다. 떡볶이를 앞 접시에 떠다가 내 앞에 놓는다. 그 모습을 본 할머니가 웃으며 김유을에게 말했다.
“우도 손이 있다, 있어.”
“네.”
김유을은 아랑곳하지 않고서 국자로 떡볶이를 펐다. 내 앞에 가득히 담긴 떡볶이를 보고서 할머니가 한 소리를 했다.
“네가 얘 버릇 다 망쳐 놓는다.”
할머니야 돈 보따리를 안겨도 좋은 소리 안 하시니까. 원래라면 그러려니 할 터였다. 고약한 할머니의 성격이려니 할 터였다. 별생각 없이 떡볶이에 집중했을 것이다. 그런데 삼킨 떡이 목에 막혔다. 떡볶이의 고추장 맛이 밍밍하게 느껴졌다. 어금니는 씹을 의욕이 없었다. 내가 한숨 쉬며 젓가락을 내려놓자, 할머니가 나를 째리듯 보았다.
“뭐가 또 필요하누?”
“할머니.”
“왜 이리 쌍심지를 켜.”
“나는 가만히 좀 있으면 안 돼?”
어쩌다가 눈물샘이 말랑해졌는지 모르겠다. 예전에 윤 과장이 수없이 개지랄을 떨 때도 탄탄하던 눈물샘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아무 때나 눈물이 비집어 나오고, 나는 자존심은 개나 물어가라는 듯이 허락한다. 별 게 다 서럽고 별 게 다 억울했다. 할머니가 너는 굼벵이처럼 굴러다니면서 뭘 하냐고, 이만큼 키운 몫을 어째서 안 하고 있냐고 다그치지 않았음에도. 지레 상처를 받고, 지레 마음이 상했다. 할머니는 내 눈물이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야가 갑자기 왜 울까. 넌 아냐?”
할머니가 김유을하고 허물없이 말 트는 것도 싫었다. 언제 봤다고, 우리 아빠는 막대했으면서 김유을은 며칠을 묵어도 눈치 한 번 안 주고, 도리어 외손녀인 내가 부려먹는다면서 핀잔을 놓는다. 김유을의 품에서 눈과 귀를 막고 살다가, 할머니 구두코에 차여 현실로 내동댕이쳐진 기분이다. 여기가 네 원래 살던 위치지, 하면서.
황당하다는 듯 ‘허허’ 하는 할머니가 붙잡기 전이었다. 나는 일어나서 곧장 문으로 달려갔다. 겨울바람 막아주던 철문을 열었다. 할머니가 뒤에서 무어라고 소리를 쳤다. 듣기 싫어서 아무 운동화나 구겨 신었다. 마당에 나가자마자 김유을이 따라 나왔다.
“너 들어가.”
김유을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다. 할머니한테 부엌데기 취급을 받는 내 모습을, 안 그래도 울보가 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떡볶이 잡수며 뻔뻔하게 있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쪽팔렸다.
“어디 가.”
김유을은 다가와서 내 눈물부터 닦아줬다. 내가 약해진 것은 다 너 때문이었다. 내 현실의 추가 너와 청봉리에 있었다. 옮겨볼 엄두도 못 내는 바보가 되어갔다.
“나 혼자 있고 싶어.”
“어디 가려고.”
“요 앞에. 그냥 걷다가 올게.”
눈물 닦는 그의 손길을 피하자, 김유을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아무 말이나 뱉었다.
“혼자 생각 정리할 것도 있고.”
그는 가만히 있다가, 내 말에 주머니를 뒤적였다. 은색의 차 키가 나온다. 다름 아닌 내 손에 부드럽게 쥐여 줬다.
“동네 위험하니까 걸어 다니지 말고. 시내에 가서 커피 같은 거나 마시든가.”
“…….”
“어?”
“알았어.”
김유을은 뒤돌아서 철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운전은 할 줄 알기는 하지만 경력이 짧은 편이었다. 회사 차 몇 번 몰아본 게 다였다. 쟤는 나를 뭘 믿고 이런 엄청난 거를 맡길까. 나는 마당을 가로지르면서 그 차 키에 남은 온기를 만지작거렸다.
김유을은 왜 나를 사랑하는 걸까. 나라면 성가시기만 할 터였다. 제 앞가림도 못 하고 여기저기 엎어져서 울고 있지 않은가. 한 번도 할머니처럼 무얼 할 거냐, 이걸 할 거냐, 묻지 않을까. 내가 청봉리 백수로 삶을 마감해도 좋아할까.
그가 좋았다. 나를 사랑해서 좋았다. 어쩌면 평생 모르고 외면할 수 있었던 감정을 알게 해줬다. 그러나 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도 알고 그도 아는데 묻어두는 느낌, 이건 내 앞날에 대한 불안과 또 다른 색의 불안.
그는 이대로도 좋은 걸까.
* * *
같은 골목만 다섯 번째 도는 중이었다. 시내라고 해봤자 대학가 앞에 늘어져 있는 가게들이 전부였다. 대학가 카페 중에서 딱히 내 마음을 끄는 곳도 없었다. 저기에 혼자 앉아서 크림이나 휘적거릴 기분도 아니었다. 외곽 도로를 따라 번화가로 나가면 프랜차이즈 카페나 햄버거 가게가 있겠지만, 특별히 가고 싶은 데가 정해진 드라이브도 아니었다.
김유을이 있다면 좋을 뻔했다. 괜히 가라고 해가지고 독수공방이다. 멍청이처럼 나 자신을 탓하는데 신호등이 걸렸다. 차가 멈춘 동안 고민해 봤다. 역시 돌아가는 게 나았다. 싸돌아다니다가 김유을의 차를 망가뜨릴까 무섭고, 청봉리에서 갈 데가 거기서 거기인지라.
돌아가자는 결정을 내렸다. 거슬리는 앞머리를 뒤로 넘긴 순간이었다. 무심코 본 창밖에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초등학교,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소박한 피아노 학원. 분명 갈 데가 없다고 투덜거렸던 마음이 연녹색 간판으로 쏠렸다. 충동적으로 핸들을 돌렸다.
골목길 사이로 다니는 아이들을 조심하면서 빈 곳에 차를 세웠다. 급하게 나오느라 핸드폰도 없이, 지갑만 하나만 달랑 들고 나왔다. 몰골도 못 봐줄 정도는 아니지만 슈퍼 가듯이 가벼운 차림이었다.
갈까 말까 고민하는 그때였다. 피아노 학원의 문이 기다렸다는 듯이 열렸다.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면 가지 않으려고 했다. 이 나이 먹고 학원에 가는 것도 서러운데, 아이들과 건반을 가지고 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우리 엄마 또래의 여성분이었다. 학원 원장님인 걸까? 보라색 앞치마를 두르고, 광대까지 내려온 피곤함이 보였다. 안경을 쓴 인상은 푸근했다.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저 나이 정도였겠다.
학원에서 나오는 아이는 없고, 원장처럼 보이는 그분만 서 있었다. 잠시 바람이라도 쐬려고 나온 것 같았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자동차 시동을 껐다. 차에서 천천히 내렸다. 학교 쪽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분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왠지 어쭙잖게 마음이 쓰였다. 하얗게 흩어져 나오는 한숨에 어떤 동질감이라도 느낀 것일까.
피아노 학원으로 점점 가까이 걸어갔다. 나는 머리를 한 번 가지런히 정리했다.
“안녕하세요.”
학교만 바라보던 원장님의 안경 속 눈알이 나에게로 돌아왔다. 누군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준 것이 기쁜 사람처럼 반가운 눈이었다. 그분도 내게 고개를 숙였다.
“예. 안녕하세요.”
“어, 저기.”
대뜸 한 곡만 배우는 것도 괜찮으냐고 물을 수도 없고. 어떻게 하지 싶은 마음에 말을 멈추었다. 그랬더니 원장님은 학원 문부터 열었다.
“날도 추운데. 들어가서 얘기하시겠어요?”
“아, 네.”
얼결에 그녀를 따라 들어가고 말았다. 후끈한 히터가 나오는 피아노 학원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앞에 일렬로 쪼르르 놓인 실내용 슬리퍼가 너무 조그마했다. 게다가 아주 귀여운 토끼 모양이었다. 그것만 보아도 내가 찾아올 만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듯한 것 좀 드시겠어요?”
“아, 아니에요. 그렇게 오래 있을 건 아니라서.”
기꺼운 낯으로 찻잔을 꺼내던 원장님의 손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는데, 원장님은 금세 따듯한 표정으로 돌아와 내게 의자를 권했다. 내가 앉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작은 의자였다. 어린아이들의 키 높이에 맞을 의자와 탁자였다. 일곱 난쟁이에 나올 것 같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마주 앉았다.
원장님은 차를 가져오는 대신에 슈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봉지 과자를 내왔다.
“드세요.”
“네.”
그것까지 거절하면 원장님이 눈물을 글썽일 것 같았다. 재빨리 손을 뻗어 과자를 받았다. 원장님은 흐뭇한 얼굴로 과자를 꺼내서 입에 넣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음, 그게…… 혹시 성인도 가르치시나요?”
“성인요?”
“정식으로 배울 건 아니고, 제가 치고 싶은 곡이 하나 있어서요.”
원장님은 손뼉을 치면서 다급하게 과자를 삼켰다.
“아유, 당연히 가르쳐 드려요. 성인분들도 가끔 오셔서 상담도 받는 걸요.”
“네……. 아무래도 초등학교 아이들만 받으시는 것 같아서. 그럼 죄송하지만 아이들은 오후면 다 가나요? 제가 제일 늦은 시간에 오고 싶은데.”
“아무 때나 오세요.”
“네?”
“애들, 없어요.”
원장님은 망하기 직전이라며 호탕하게 웃었지만 나는 같이 웃어도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와서 다행이라며, 안심하는 모습에서 아까의 장면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애타게 학교를 쳐다봤는지도.
“이런 시골에는 점점 아이들이 없어지는데…… 그래도 재작년에는 조금 있는 듯하더니 걔네 졸업하고 나니까 애들이 없어요, 애들이.”
“그러셨어요.”
“그, 무슨 곡을 하고 싶으세요?”
나는 내가 봤던 영화의 제목을 말했다. 원장님은 내가 따로 곡의 이름을 말하기도 전에 알고 있는 듯했다. 원장님은 가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 곡 좋지.”
“비용은 어느 정도일까요?”
원장님은 간략히 수강료와 수업 시간을 말해줬다. 일대일 레슨인 만큼 각오를 했었는데 생각보다 얼마 안 되는 가격이었다. 원장님은 오후 6시까지 학원을 열어두니까 그 안에 언제든 오라고 말했다. 원장님은 사람과 이렇게 대화해 보는 게 오랜만이라며, 기어코 차를 한잔 내오셨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던 나도 하나둘 얘기하다가 보니까 어느새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러면 지금은 쉬시는구나.”
“네.”
“어우, 이럴 때나 취미 배우는 거지. 잘 생각하셨어.”
사실 공무원 시험을 본다고 하면 지금 이렇게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것도 사치였다. 그래서 할까 말까 망설이는 마음이 있긴 했다.
그런데 피아노 치기 좋은 손가락이라며 나를 치켜세웠다. 배우는 데 시간도 얼마 잡아먹지 않는단다. 그 말에 쓸데없는 자신감만 차올랐다. 공무원 시험은 의식 저편으로 밀쳐진 지 오래였다.
“해우 씨. 삼겹살 좋아해요?”
“싫어하는 사람 찾기가 더 힘들지 않나요.”
“있긴 있더라고. 그럼 요 옆에 잘하는 곳 있는데, 거기 나랑 안 갈래요?”
원장님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게 보였다. 나도 오랜만에 누군가와 얘기다운 얘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자주 볼 사이라서 거절하기도 그랬다.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원장님이 재빠르게 학원을 정리하고 문을 닫았다. 자연스럽게 내 등을 떠밀며 가는 원장님의 발이 그렇게 가벼워 보일 수가 없었다. 해우 씨가 없었으면 굶어 죽었을 거라는 말도 했다.
“저 건물이 우리 어머니 건물이어서 살았지. 아니었음 진즉에 딴 길 찾아봤어.”
시어머니가 건물주인 모양이었다. 원장님은 그 이후에도 이것저것 얘기를 해주셨다. 동네 사정이라든가, 어디가 개발된다든가. 듣고만 있어도 재미있어서 나는 웃으며 고깃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두 분이 술을 마시고 있었고, 그 외의 테이블은 텅텅 비어 있었다. 원장님은 자신의 단골집이라고 얘기했다. 들어가는 순간부터 손가락 두 개를 치켜세웠다. 사장님으로 보이는 분은 별다른 언질 없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정말 단골이 맞긴 맞나 보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원장님은 코트를 벗으며 물었다.
“해우 씨. 술 좀 해요?”
“조금요.”
고기는 금방 나왔다. 삼겹살이 타닥타닥 구워지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나는 원장님과 수다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목이 타면 소주를 마셨다. 소주가 달아서 한 병이 금방 동이 났다. 바싹 구워진 고기는 가끔씩 집어 먹었다. 이렇게 막 통성명한 사람이랑 마주 앉아 술 마신 게 얼마 만인지. 오늘 처음 만났지만 십 년을 안 사람처럼 우리는 정다웠다. 외로웠던 두 여자는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까르르 웃었다.
“잘생겼어요?”
“네.”
그러다가 당연하게 원장님은 남편 얘기, 나는 김유을의 얘기를 했다. 원래는 거기까지만 말하려고 했다. 이 정도는 남들한테도 다 얘기하는 거였으니까. 남자 친구가 있고, 걔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까지. 김유을에 대해 어떤 감정을 지녔는지는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본 적 없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고, 어떤 좌절에 떠밀려 사는지도.
그런데 그걸 술과 분위기가 해결해 주었다. 낯선 도시에, 절대 나랑 엮일 리 없었던 사람과 마주한 것도 한몫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진심이 술술 나왔다.
“나는 그 정도의 사람이 아닌데. 걔는 나를 너무 사랑해 줘요. 자세히 보니까, 그게 보이더라고요. 눈에서 보이고 나를 만지는 손에서 보이고. 그러니까 내가 꽤 나쁘지 않은 것 같고. 그러니까 걔 옆에만 있고 싶고. 걔가 어디에 안 가고 계속 그러고만 있어줬으면 하고.”
“좋은 사람인가 보네.”
“그런데 아까, 아 제가 할머니랑 산다고 말했죠. 할머니가 저한테 평소처럼 말하는데, 이게, 이게 서운할 일이 전혀 아닌데 서운하고……. 나도 내가 왜 이럴까 싶은데.”
원장님은 다 구워진 삼겹살을 내 앞 접시에 주었다. 나는 그걸 덥석 먹고서, 따라주는 대로 술을 마셨다. 어지러운 시선으로 둘러보니까 벌써 비워진 것만 세 병이었다. 어쩐지 입이 목을 축일 새도 없이 움직이더라니.
“내가 보기엔 해우 씨가 많이 지친 것 같아. 직장 생활 힘들었다며.”
“네.”
“상처 많이 받은 것처럼 보이는데.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자꾸 움직이려 하지 말고, 이참에 푹 쉬어요.”
“푹 쉬다가 계속 쉬게 될 것 같아서요.”
막노동판이라도 뛰어들어야 할 것 같았다. 이대로 할머니 집에서 평생 얹혀살며 놈팡이 취급을 받다가, 지친 김유을마저 떠나갈 것 같다. 당장 칼이라도 뽑아서 무얼 썰어야 하는데. 그럼 나는 뭐부터 잘라야 하나요? 허공에 묻고 앉아 있었다.
“하고 싶은 것도 없어요. 제 동생은 가수 하고, 아니지, 밴드 하고 싶다고 하는데. 한심한 한편 지금 생각하니 부러운 것도 있어요. 그래도 걔는 뭐가 하고 싶다고 그렇게 막 나서는데. 나는 누나가 돼서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가 싶고.”
“지금부터 찾아보면 되지, 해우 씨.”
“이 나이에요?”
가만히 술을 넘기던 원장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해우 씨 나이면 유학 준비해. 딱 해우 씨 나이만큼만 되면 소원이 없겠다.”
나는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 제 나이에 대학을 가고, 부랴부랴 이력서를 넣고, 사원증을 목에 걸고, 뜨겁게 연애하는 척도 해보고. 그런데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뭐 하나 잘한 게 없는 것 같았다. 속 터놓을 친한 동기도 없고, 직장은 쫓겨나다시피 그만두고, 연애는 젬병이었다.
“해우 씨.”
거칠거칠한 원장님의 손이 나를 잡았다.
“괜찮아. 괜찮아.”
원장님은 내 손을 토닥거렸다. 그 거친 손이 주는 리듬은 부드러웠다.
“나도 한때는 여기가 끝인가 했는데. 주저앉아서 펑펑 울다가 보니까 바로 종착지였던 거야.”
때로는 멈추어서 주저앉은 곳이 영 아닐 수도, 막다른 길일 수도, 또는 내리막길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원장님은 그럼에도 땅이 무너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돌아서면 길은 있고, 길 위에는 나를 위해 준비된 것이 넘쳐난다고, 끝끝내 멈추어 서야지 찾을 수 있는 것들도 있더라고.
내가 멈추어서 찾은 것이 무얼까. 나는 다 식은 삼겹살을 씹다가 멈췄다. 알코올이 점령한 뇌에서 한 이름을 꺼냈다.
김유을.
주머니를 더듬었는데 푹신한 지갑만이 만져졌다. 습관처럼 핸드폰을 찾기 위해 뒤적이다가 불현듯 챙기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순간 재빨리 벽에 붙은 시계를 봤다. 시계는 오후 10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원장님.”
“예?”
“전화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원장님은 다급해 보이는 내 얼굴에 덩달아 다급해졌다. 급하게 핸드폰을 찾아 내게 건넸다. 욕은 원장님 앞이라 차마 못 했다. 식은땀이 났다. 잠시 커피를 마시러 나간다고, 제 차를 빌려 나간 사람이 여태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 삼겹살집에 들어와서 전화한다는 것을, 먹고 놀다가 새까맣게 잊은 탓이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느리게 들리는 신호음에 내 마음이 조급해졌다. 원장님은 잔뜩 초조해진 내 얼굴을 보고 먼저 일어나서 계산을 하셨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내 지갑을 꺼내려는 찰나, 핸드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무겁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나는 입술을 깨물다가 고백했다.
“유을아. 나야.”
한참을 상대편에서 대답이 없었다.
“유을아?”
발음이 새어나가 어눌했다. 이건 누가 들어도 술에 취해서 꼬이는 발음이었다. 김유을도 그걸 알았는지 숨을 길게 뱉었다. 그때 계산을 마치고 온 원장님이 무슨 일이 있느냐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아니에요.”
조그맣게 대답을 했는데, 곧바로 핸드폰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너 지금 누구 걸로 걸고 있는 건데.
“내가 아는 분. 얘기를 나눈다는 게 너무 길어져서. 핸드폰을 안 갔고 나온 걸 잠시 잊었어.”
―내가…….
화를 내려다가 삼킨 듯한 목소리였다. 김유을은 다시 숨을 내쉬며 물었다.
―어디야. 거기가.
나는 곧장 삼겹살집의 이름을 말하고, 근처 초등학교의 이름을 말했다. 김유을은 큰 소리 없이 전화를 끊었다. 나는 원장님에게 핸드폰을 돌려드리며 고깃값은 나중에 반 보내드리겠다고 했다. 원장님은 되었다고 손을 저었다.
“무슨, 여기 내가 오자고 한 건데. 그나저나 남자 친구 많이 화났나 본데.”
결국 우리의 술자리는 거기서 끝났다. 원장님은 나를 초등학교 앞까지 데려다주고, 나는 곧장 차 안으로 들어갔다. 오히려 원장님의 귀가가 걱정이었는데, 원장님은 아까 그 학원 건물 2층이 집이었다. 곧바로 쑥 들어가는 모습에 안심하는 것도 잠시.
택시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시골 밤길에 홀로 나타난 택시는 곧장 커다란 인영을 토해냈다. 당연히 내가 예상한 사람이었다. 나는 재빠르게 차에서 내렸다. 빨리 가고 싶었으나 술기운에 다리가 휘청거렸다.
“유을아……. 저.”
그가 빠르게 다가온다. 나를 한 대 치려고 다가오는 듯, 그 험악한 기세에 멈춰 섰다. 그러나 김유을은 멈추지 않고 나를 잡아당겼다. 그의 품 안에 갇히듯 안겼다. 그제야 김유을의 이상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옷이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 밴 모습이었다. 나는 순간 택시가 아니라 뛰어온 것으로 착각했다.
할머니 집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못 해도 30분은 걸렸다. 지금 그는 고작 10여 분 남짓한 시간에 이곳으로 왔다. 그가 여기 근처에 있었다는 소리였다.
“유을아.”
“미쳤지, 네가.”
다정한 손과 달리 벼리고 벼린 목소리였다. 얼굴을 보고 싶은데 그가 보여주지 않는다. 내 머리를 꽉 끌어안은 손이 잘게 떨렸다.
“사고 난 줄 알았잖아! 전화도 없어서 나한테 연락 안 오는 걸까 봐.”
미안해서 말도 안 나왔다. 내 머리칼을 쓰다듬는 그의 손은 진정할 줄 몰랐다. 무어라고 용서를 빌어야 할지 모르겠다.
“미안해. 시간이 그렇게 된 줄도 모르고……. ”
“내 생각 안 하지.”
“아니야. 계속 네 얘기 중이었어.”
“안 하잖아, 내 생각.”
그는 달밤 가로등 아래에서 계속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진정되기까지 몇 분이 걸렸다. 그동안 그는 제 얼굴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등을 계속 쓸어내려 줬다. 달리할 게 없는 죄인은 판결만 기다렸다.
그때 그가 손을 풀었다. 우리는 가로등 아래서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김유을의 눈은 새빨갛게 충혈이 되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눈가가 불그스름했다. 그는 내 얼굴을 한 번 살펴본 뒤, 손목을 잡고서 제 차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김유을은 조수석의 문부터 열었다. 나를 집어넣고 앉힌 다음, 차가운 손길로 안전벨트를 매준다. 문은 세지 않게 닫았다. 운전석까지 걸어가는 그의 한숨 소리가 차 안에서 들렸다.
김유을은 운전석에 올라타, 제일 먼저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은 신호음이 채 몇 번 가기도 전에 받았다.
“찾았어요. 아니요. 친구를 만난 것 같은데. 네.”
짧게 대답하는 김유을의 목소리 끝으로 커다란 목소리가 꼈다.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김유을의 대답을 듣고서 전화를 끊는 그 순간까지. 미뤄둔 말이 많은 듯 쏟아내는 할머니였다.
그렇게 뛰쳐나와서 이 나이에 반항이라도 하듯 전화도 안 하다니. 완전히 할머니 골리는 어린애 같은 일이 아니던가.
김유을은 통화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후진하며 차를 빼내는 그를 보다가 고개를 떨궜다.
“미안해.”
내가 들어도 술에 취해서 해롱거리는 목소리였다. 진심을 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내 근처에 있는 김유을의 오른손을 살짝 쥐었다.
“나 찾으려고 시내 돌아다녔어?”
진심이 전해지길 바란 노력이 통한 것인지, 한참 뒤에 김유을은 대답했다.
“병원.”
“병원?”
사고라도 당해서 병원에 실려 갔을까 봐 시내에 있는 큰 병원부터 샅샅이 뒤진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듣고 더 미안해서 나는 양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할머니는? 집에?”
“어.”
“어디 안 나가셨어? 아까 보니 어디 나가시는 것 같던데.”
“못 나가셨지, 정확히.”
할머니가 눈을 부릅뜨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김유을이 보는 앞에서 눈물 쏙 빠져라 혼구멍 나겠지. 어쩌면 내일은 짐을 싸야 할지도 모르겠다. 집주인이 갑인 것은 만고불변의 법칙이었다. 나는 을도 아닌 병, 정이었다. 괜히 아까 할머니의 앞에서 질질 짜면서 나왔다. 그냥 헤헤거리며 떡볶이 처먹었으면 됐을 텐데.
“집 가기 싫다.”
김유을은 내 말을 무시했다. 나는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괜히 안전벨트만 만지작거렸다.
“유을아. 술이라도 깨고 가면 안 돼?”
이렇게 술 냄새 폴폴 풍기고 돌아가면 나올 말은 뻔했다. 어쩌면 할머니의 18번인 ‘그러니까 네 애비를 똑 닮아서’로 시작해서 ‘내가 못 산다’로 끝나는 그 말이 나올지도 몰랐다. 김유을한테 할머니의 18번은 들려주기 싫었다.
김유을은 말없이 핸들을 돌렸다. 그는 착실하게 나를 집으로 배송하는 중이었다. 집에서 칼을 갈고 계시는 할머니는 이 요리가 언제쯤 오는지 가늠하고 있을 터다.
“누구랑 마셨어.”
“피아노 학원 원장님.”
“피아노 학원?”
“오늘 등록하고 왔거든.”
말하고 나니까 쥐구멍을 찾게 된다. 오늘치 쪽은 다 팔았다. 백수가 돼서 할머니랑 싸우고 나간 애가 뜬금없이 피아노 학원에 등록했다니. 김유을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창가에 얼굴을 묻었다.
그때 차가 갓길에 멈추었다. 할머니 집으로 가기 직전에 논밭만 있는 그 길이었다. 아직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까지 가려면 더 들어가야 했다. 김유을은 다 쓰러진 컨테이너가 있는 빈 땅에 차를 세워두었다. 그리고 시동을 껐다. 설마 아무리 미워도 술 취한 사람을 길바닥에 버려두려고.
다행히 김유을은 먼저 내려서 조수석의 문을 열어줬다. 취한 내 허리까지 잡아주는 손이었다. 일단 버리려는 건 아닌 듯싶다.
“걸어. 도착하면 할머님 주무실 것 같으니까.”
“차는?”
“내일 와서 가져가면 돼.”
김유을이 내 손을 꼭 잡았다. 천천히 걸어가는 그의 발에 맞추어 나도 따라서 걸었다.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논밭 옆에 난 길은 풀벌레의 전쟁터였다. 찌르르, 찌르르 수다 소리가 귀 따가울 정도였다. 사람은 꿀 먹은 듯 조용했다. 오죽하면 내가 기침하는 소리가 온 땅에 울려 퍼졌다.
나는 김유을의 손을 지팡이 짚듯 잡고 걸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어지럽다기보다 졸렸다. 김유을은 그런 나를 보고서 한숨을 내쉰 다음, 내 앞에 다리를 굽혔다.
“업어주게?”
남사스러워, 말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화난 도깨비 같아서 쭈그러져 있었는데, 이건 김유을의 화가 반절 풀렸다는 신호였다. 나는 그의 등에 천천히 엎어졌다. 김유을은 내 무게가 실리자마자 곧장 일어섰다. 갑자기 세상이 확 높아졌다. 나는 그의 목을 조이듯 감싸 안았다.
김유을한테서 나와 똑같은 샴푸 냄새가 났다. 나는 남몰래 킁킁대며 맡다가 널따란 등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나를 사랑하나 보다. 나 같으면 진즉 종량제 봉투에 담아 버렸을 터인데. 예쁘면 얼마큼 예쁘다고 이렇게까지 해주는가 말이다. 술기운에 김유을이 불쌍했다. 오밤중에 병원을 뛰어다니게 하고, 이 시골에서 인력거 노릇이나 해주고 있으니.
그에 반해 줄 것 하나 없는 나는…….
“할머님. 화 안 났어.”
“응?”
“걱정했어, 너.”
갑자기 할머니가 내 머릿속을 차지했다. 김유을은 할머니를 아직 잘 모른다. 아마 김유을의 앞이라서 화가 안 난 척한 것일지도.
“그렇겠지.”
믿기지 않는다는 나의 말투에 김유을은 힐끔 돌아봤다. 나는 안 잔다는 뜻으로 다리를 흔들었다.
“안 자.”
“그래.”
옛날 청봉리 하늘은 입을 벌리면 별이 막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하늘도 술에 취한 건지, 시골 공기 좋다는 것도 옛말인지, 별도 나이를 먹어 사라진 건지. 고작 다섯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얼마 없는 별을 세어보다가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할머니, 새로 만나시는 분 생겼나?”
“왜.”
“화투 치는 것 같지도 않고, 친구네서 자고 온다고 해도 매번 늦게 들어오는 데다가. 외박에, 화장도 하고 예쁘게 입고. 누구 있으신 것 같은데.”
김유을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나는 할머니가 만약 누구를 만나는 거면, 안 그래도 거슬릴 내가 눈엣가시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김유을은 뭔가 아는 듯이 잠시 멈추어 섰다.
“할머니 어디 가시는 거야, 매일?”
나는 고민하는 듯한 김유을의 등을 쿡쿡 찔렀다. 김유을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물었다. 다시 걸으면서 겨우 한마디를 했다.
“할머님이 말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 말에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든가 하는 것은 둘째치고, 진지한 김유을의 목소리에 설마 몹쓸 병이라도 걸린 건가 싶었다. 내가 무서워서 가만히 숨죽이고 있자, 김유을은 결국 한마디를 덧붙였다.
“한글학교 가셔.”
“뭐?”
나는 누가 내 머리를 한 대 때린 줄 알았다. 술기운도 금방 달아났다. 아까까지 김유을의 등에서 솔솔 오던 잠도 날아갔다. 김유을은 내 반응을 예상한 것처럼 담담해 보였다.
“무슨 학교? 설마 할머니들 다니는 그런 데?”
김유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밤공기에 흘려보내듯 진실을 불었다.
“할머니 어디서 만났냐고 했지.”
“응.”
“졸업식에서 뵀어.”
김유을의 말은 그랬다. 할머니를 처음 뵌 것은 우리 고등학교 졸업식에서라고. 나는 그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무슨…… 할머니 그 날 안 왔었는데.”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고. 해경은 초등학생이어서 부르기도 그랬다. 결국 용기 내어서 할머니한테 전화를 했었다. 그날 성적 우수한 애들만 뽑아서 교장 선생님이 상장을 주는데, 할머니 혹시 오실 수 있으시냐고.
‘서울에?’
딱 보아도 오기 힘들 것 같았다. 할머니는 차가 있으신 것도 아니고, 버스를 계속 갈아타고 고속버스를 또 타고. 좋아하지도 않는 손녀 졸업식 때문에 그 고생을 하라고 할 수는 없어, 나는 그때 거짓으로 억척을 떨었다.
‘주소 문자로 보내드릴 테니까. 그래도 혹시 서울 들를 일 있으면 와. 서울 와서 일 처리하는 김에 잠시 들러도 좋고.’
어렵사리 꺼낸 말이었지만 할머니한테서 썩 좋은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졸업식 날에 기다렸다. 누구 하나라도 내가 상장을 받는 모습을 봤으면 했다.
그러나 허탕이었다. 헛된 기대에 괜한 마음만 다쳤다. 나는 그 날 할머니를 보지 못했다. 씩씩하게 상을 받고, 집에 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오셨어.”
“근데 왜…….”
“꽃만 전해달라고 하시고 갔어. 너한테는 비밀로 하고.”
할머니는 힘들게 거기까지 오셔서 김유을에게 꽃만 전해주고 사라지셨단다. 무슨 아련한 드라마의 한 장면이란 말인가. 나는 감동을 받기보다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 내 어린 속은 보듬을 수 없이 문드러졌다. 할머니가 주신 생활비 덕분에 고등학교 졸업도 하고, 좋은 성적도 받았다고 자랑하고 싶었는데, 빈말이라도 졸업 축하한다는 말이 듣고 싶었는데.
상념에 잠겨 있던 나를 깨운 건 김유을의 이야기였다.
“할머니께서 그날 나한테 처음 하신 말씀이.”
할머니는 긴 버스 여행 끝에 손녀의 졸업식에 오셨다고 한다. 가느다란 눈발이 날리는 그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쭈뼛쭈뼛 나타나셨다면서.
‘내 글을 몰라서 그러는데. 여기가 소경 고등학교 맞나?’
할머니의 손에는 학교 주소가 적힌 문자 화면이 띄워져 있었다고 했다. 조심스러운 물음에 김유을은 ‘네.’ 대답하고, 할머니는 눈에 띄게 안심한 얼굴로 학교 주위를 둘러보았다고. 그러다가 우연히 나를 발견했단다. 반가워하는 기색이었으나, 내 주위를 둘러싼 친구들을 보고는 한 걸음 물러나셨다고 했다.
김유을은 그때야 할머니가 내 할머니인 것을 알아차렸다. 우물쭈물하는 할머니에게 내 남자 친구임을 밝혔으나, 할머니는 도리어 그에게 꽃만 맡기고 홀연히 떠났다고 했다. 왔다는 것은 비밀에 부쳐달라는 신신당부와 함께 말이다. 나는 여태껏 졸업식 날 받은 노란 튤립이 김유을의 선물인 줄로만 알았다.
“왜.”
할머니가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내 앞에서 돋보기 끼고 신문을 읽던 할머니였다.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도 몰랐다. 손녀도 아닌, 남인 김유을도 아는 것을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할머니 학교, 네가 보내드린 거야?”
대답하지 않았지만 알아차렸다. 할머니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지신 것도, 밥 먹듯이 외출을 하신 것도 그래서였다. 학교가 꽤 멀리에 있어 김유을이 태워다 줬단다. 그 근처에서 학교 친구들끼리 모여 같이 소풍도 가고, 학교 근처 친구네 집에서 오가기도 한다고.
“왜 나한테 말을 안 해?”
“할머님이 창피하니까, 말하지 말래서.”
“내가 누구 닮았나 했더니…….”
할머니는 맨날 나보고 미련한 지 애비를 닮았다고 했지만, 이제 보니 나는 할머니 판박이였다. 그 심정을 알기에 속상했다. 가슴에 가뭄이 든 것 같았다. 갈라지고 미어진 틈으로 뙤약볕이 내리쬈다. 할머니가 내 뙤약볕이었다. 나는 김유을의 등에 얼굴을 문질렀다.
김유을은 할머니는 표현을 못 하실 뿐, 나를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긴 논두렁이 펼쳐진 길을 김유을의 등에 업혀서 오며, 나는 내가 놓친 또 하나를 주웠다.
나는 사람들이 편견에 갇혀 나를 판단하리라 생각했다. 사회적 기준으로밖에 나를 보지 않는다고. 그러나 나는 그것보다 더한 사람이었다. 나는 한 번 찍은 낙인을 절대 지우지 않았다. 할머니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고, 김유을은 나한테 관심이 없는 사람이고. 섣불리 짐작하고 상처받은 다음, 홀로 정리할 준비하는 겁쟁이.
원장님이 말했던 대로였다. 내가 달리던 자리에서 멈추어 섰을 때,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자신을 보아달라며 외치고 있었다.
버거울 때마다 꼿꼿이 버텼다. 주저앉으면 밀려날까 봐 무서웠다. 버티고 버티다가 한계에 다다르자, 나는 내가 패배한 줄로만 알았다. 여기에 낙오자처럼 숨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게는 낙오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 * *
다음 날, 비몽사몽 일어나자마자 김유을이 갈아준 토마토주스를 마셨다. 아침은 바삭하게 구운 토스트에 복숭아 잼을 발랐다. 김유을은 내 아침을 챙겨준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를 가져와야 한다는 소리에 잠이 깼다. 그제야 어젯밤에 아무 데나 세워둔 차가 생각났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밤새 업고 온 그도.
잘 다녀오라는 의미로 뺨에 입술을 누르자, 김유을은 혈색 좋아진 얼굴로 말했다.
“매일 이래 주면 좀 좋아?”
“나를 아주 껍질까지 벗겨먹으려고?”
내 말에 그는 웃었다. 진한 포옹을 한 뒤 밖으로 향했다. 토스트를 한입 베어 먹다가 말고 나는 배웅하듯 그를 지켜봤다. 작은 점이 될 때까지 앉아 있었다. 방금 봤는데도 보고 싶은 지경에 왔다. 심각한 중증이었다.
거실로 돌아와 배를 채우기 위한 활동을 반복하고 있을 때.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할머니가 나타났다.
할머니와 나는 서로 눈이 마주쳐도 알은체하지 않았다. 한 소리 하시리라고 생각했는데,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옆에 앉았다.
거실 창은 내 키보다 더 컸다. 커튼을 치지 않으면 마당이 훤히 보였다. 솔이가 얌전히 자고 있는 개집, 겨울에 시든 풀만 무성한 마당이 보였다. 할머니와 나는 나란히 앉아 이렇다 할 것 없는 창밖만 보았다.
나는 밤새 울었다. 할머니가 어쩐지 원망스럽다가도 안쓰럽다가도 이해가 갔다가도 안 갔다가도. 김유을의 품에서 울다가 눈이 붕어빵이 되어버렸다. 이런 얼굴을 할머니한테 보이기 싫었다. 꾸역꾸역 버티고 앉은 것 보면, 내 자존심도 정말 징글징글한 수준이었다.
“우야.”
할머니가 그때 나를 불렀다. 나는 부은 눈을 비비며 옆을 봤다. 할머니가 내게 자신의 핸드폰을 들이밀고 있었다.
“이거 좀 도와줘.”
나는 다급히 몸을 일으켜 할머니 쪽으로 갔다. 내려다보니까 할머니의 핸드폰 화면에 문자함이 떠 있었다.
“뭐를 도와?”
“이거, 문자를 보내는 것이 숙제인데, 아니, 보내야 하는데.”
그 말을 들으니 진짜로 한글학교인지 뭔지가 실감 났다. 나는 태연한 척을 했다. 할머니의 엄지를 편지지 모양의 아이콘 위로 옮겨놓았다. 함께 길게 눌렀다.
“이렇게 누르면 여기 하얀 화면이 나오잖아.”
“어이.”
“여기에다가 이제 내용을 적는 거야. 그리고…… 보내는 사람 여기서 선택한 다음에.”
“잠깐. 다시, 천천히 쫌.”
할머니는 평상시 늙은이들 같다며 잘 쓰지 않는 돋보기까지 가져왔다. 천천히 가르쳐 달라며 호통이었다. 나는 금방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할머니는 내가 손을 떼면 다시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멍하니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기 일쑤였다. 처음부터 다시 알려드리고, 다시 알려드리고. 그 과정을 다섯 번쯤 반복했을 때가 돼서야 할머니는 [우야] 한마디를 보낼 수 있었다.
“이거를, 이제…… 선생님한테 보내기를, 하면 된다고.”
할머니는 완전히 빠져들어 내 앞에서도 선생님, 이라는 단어를 마구 썼다. 나는 짐짓 모르는 척 할머니한테 물었다.
“할머니, 학교 다닌다면서?”
“아, 아, 거기, 누가 그래?”
“옆집 할머니가.”
할머니는 욕하듯 혀를 찼다.
“아이고, 소금물에 띄워도 제 입이 가라앉을 만큼 무겁다더니.”
할머니는 거기까지 말하고 ‘심심해서 다녀보는데.’ 하면서 덧붙였다. 할머니가 내게 글을 모른다고 말하기 싫다는 것을 알았다. 그건 할머니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셔.”
“아무렴.”
그러다가 할머니는 마침 잘됐다는 얼굴로 방으로 뛰어갔다. 소녀 시절로 돌아가신 것 같았다. 저렇게 신나 하시다니. 손녀인 나는 뭐 하고 두 손 놓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보면 볼수록 헛살았던 것 아닌가. 김유을한테도, 할머니한테도, 해경한테도. 나는 제대로 된 관심이나 확신을 준 적이 없었다.
“이거, 우리 학교 다니는 그기, 숙제거든?”
할머니가 가져온 책은 초등학생용 그림일기 같았다. 여기저기에 받아쓰기를 한 흔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내게 어려운 받침을 물어봤다. 나는 밥상을 끌고 와서 할머니의 개인 과외를 해줬다. 친한 할망구 숙제를 도와주는 거라고 하던 할머니는 어느새 밥상에 머리를 박을 듯이 집중하고 있었다.
우리 둘이 그러고 있는데, 할머니도 할머니지만 가르치는 재미도 컸다. 과외를 뛰던 습성이 나온 것인가. 아니면 원래 선생이 적성에 맞았나 싶기도 했다.
“우야. 너, 잘 가르치네.”
“그래?”
“수요일에 우리 친구들 과외 좀 안 해줄래?”
“나쁠 것 없지.”
할머니는 신이 나서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얘, 경숙아’로 시작해서 ‘그 M 대학교 나온 내 손녀있잖으’로 계속 이어져 갔다. 내 얘기를 하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자랑이 한껏 피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내 졸업식에 와서 꽃만 전해주고 온 할머니가 어땠을지 그려진다.
할머니는 통화를 끝마치고 신이 나서 내게로 왔다. 그러다가 내 붉어진 눈을 보고서 의아해졌다.
“너 또 우냐?”
“할머니.”
“무신 일인데.”
“왜 내 졸업식에 와서 그냥 갔어?”
할머니는 한순간 입을 꾹 다무셨다. 저건 나도 있는 버릇이었다. 곤란한 순간이 오면 입을 꾹 다물다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휑 돌려버린다. 그리고 말을 돌린 다음에 자리를 피한다. 할머니는 다행히 자리를 피하진 않으셨다. 그리고 유을이 말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어우, 입 싼 놈들이 한둘 아니다.’라고 말하며 머리를 긁었다.
“그냥, 저기, 친구들이랑 놀고 있는데 갑자기 끼어들기도 그러고…….”
“…….”
“그렇게 사람 많을 줄 모르고 옷도 조금 그래서.”
할머니를 많이 기다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말을 하면 할머니의 가슴도 나처럼 가뭄이 들 것 같았다. 직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할머니는 저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조차도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세상에 갇혀 살던 마귀 할머니가 책을 찢고 나왔다. 마귀가 아니라 등이 굽어지고, 머리가 하얗게 세고, 주름이 있는 할머니였다. 나처럼 표현도 못 하고 자존심 앞에서 도망치기 일쑤인 할머니.
나는 할머니의 손때가 묻은 공책을 조용히 닫았다. 조심스레 할머니한테 건네드렸다. 할머니는 내가 별다른 말없이 넘어간 것에 안도했다. 그때 손녀와 할머니 사이의 분위기를 솔이가 깨었다. 충성스럽게 컹컹 짖었다. 김유을이 돌아왔나 보다. 우리 둘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김유을은 들어오지 않고 대문 앞에 있었다. 마당에서 다 보이는 그의 뒷모습에 설레었다. 얼른 내게로 왔으면 좋겠다.
“섭섭했냐.”
할머니가 내게 말했다.
“뭐가.”
“저번에, 너보고 하는 것 없다고 한 거이.”
“조금.”
할머니는 한숨을 내쉬고 김유을을 계속 바라봤다.
“네가 힘든 거 아는데, 너무 많이 의지할까 봐서. 너무 많이 의지하면 네가 나중에 힘들까 봐서.”
“그랬어?”
“저것도 힘들지 않겠냐.”
할머니의 말에 설렘이 깨졌다. 할머니의 눈에 비친 김유을은 걱정거리였다. 나 대신해서 우리 할머니, 나까지 챙기고 있는 김유을이 보였다. 할머니는 ‘저거 사지 멀쩡한 게 여기서 뭐 하는지…….’ 했다. 내 뒤를 봐주다가 지칠 김유을을 떠올려보았다. 각오하고 있던 것처럼 그려낼 수 있었다. 지치고 찌든 그의 눈을, 코를, 입술을. 그에게 전부 의지하던 나는 기반을 잃어, 스스로를 구제하지 못하리라. 지금 나의 기반은 김유을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설 수 없으면, 내 기반을 내가 만들 수 없으면, 결국 김유을도 다칠 것이다.
할머니의 말을 듣고 나니까 내 모습이 보였다. 먼지가 쌓일 대로 쌓인 노트북과 꺼지는 게 일상인 핸드폰. 통장의 돈은 아까워서 쓰지도 못하고, 글을 배우겠다고 하는 할머니 집에서, 김유을한테 달라붙어 살고 있는 꼴이라니.
환상이 깨지고, 깨진 조각은 발밑에 찔렸다. 아린 만큼 정신이 들었다.
할머니를 두고 밖으로 나갔다. 계속 대문에 서 있는 그가 신경 쓰인 탓이었다. 그는 전화를 하고 있었다. 상대방은 멀리서 들어도 알 수 있을 만큼 화를 내고 있었다. 김유을은 덤덤한 표정이었다. 간혹 답하는 말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알아. 내가 알아서 해. 상관없으니까. 못 가.
그때 환상이 환상이었음을 알았다. 김유을이 이 시골에 내려와 지낸 지가 며칠이 지났지. 가만히 날을 세어보다가 경악했다. 내가 회사에 다닐 때, 김유을은 윤 과장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나보다 바쁘신 몸이었다.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지점 중 하나에서 일하면서도, 밤에 따로 불려가 조리 과정을 배우는 모양이었다. 그의 차에는 정갈한 조리복이며 앞치마가 항상 갖추어져 있었다. 잔뜩 지쳐 돌아온 내가 그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 나 때문에 여기서 이러고 있다.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다친 나를 돌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약한 내가 혼자 일어서지 못하니까. 그를 지지대로 써야 하니까. 이건 상생이 아니라 기생이었다. 나는 그가 없으면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할 거고, 그는 내 무게 때문에 땅 밑까지 들어갈 터다. 결국 그가 땅 밑으로 가라앉아 내 양분으로 변하든, 이 악물고 도망가든. 여하튼 우리에게, 특히 그에게 해롭다는 것은 알겠다.
“유을아.”
통화를 끝마친 그가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를 나직하게 불렀다. 김유을은 금방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거기에 서 있었냐는 듯 놀란 눈이었다.
“할머니랑 화해했어.”
김유을은 내 말에 표정을 풀었다.
“그래.”
“고마워. 그리고…….”
김유을은 다음에 나올 말을 차분히 기다렸다.
“이제 너무 도와주려고 하지 않아도 돼. 내가 알아서 해볼게.”
그날 김유을에게 한 말은 그것이 다였지만, 김유을은 무언가를 알아들은 듯했다. 신나서 내게 입을 맞추던 애가 손도 잡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은근히 언제쯤 돌아갈 것이냐고 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유을도 눈치가 꽝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게 맞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성인이었고, 나는 그의 자식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거리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