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133
133화 가속 1
* * *
어제 벌어졌던 사건은 마크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날 그 시각에 우연히 엠을 보았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수였던 것이다. 더구나 사전에 막았기에 겉으로 드러난 피해자는 아무도 없었다.
괜히 거론해 봤자 마크의 의심병만 도지게 만들 뿐이었다. 재수 없으면 용의선상에 올라갈 수도 있었다.
그 과정에 논리는 필요 없었다. 그는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진상이었으니까.
그래도 방관할 수 없는 일이라, 왕궁 주변에 리벨리온을 대거 대기시켰다. 설령 퍼스널 네임이라도 그 자취가 남을 수밖에 없도록.
“손 안 대고 코를 풀기 위해 나를 따라한 걸 테지만, 이렇게 걸렸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겠지.”
“하지만 누구를 노리고자 그런 짓을 한 건지 모르겠구나.”
나이아의 물음은 지당했다. 하나, 카인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때 마크와 세라는 논쟁 중이었고, 라일은 소녀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세르듀스는 청장미궁에 있었으니 논외.
소녀와 마주친 장소로 추정하건데, 그녀가 노린 건 로제가 틀림없었다. 건강이 악화되어 성년식에 참가하지 못했으니까.
마크가 세라와 재혼한 연유도 설명할 수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하나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어째서 조직이 로제를 노리냐는 것.
뭐,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궁금증은 아닌지라 카인은 곱게 접어 가슴속에 넣어 두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해결해야 할 게 많았다.
“일단 미티어벨가로 가야겠지.”
* * *
로스가 카인을 초대한 곳은 응접실이 아닌 집무실이었다. 보다 긴밀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뜻일 터. 아니나 다를까, 자질구레한 인사말을 건넨 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네도 알겠지만, 현재 레서 왕국은 일부 기득권층에 의해 점점 나락의 길을 걷고 있다네. 후계자를 그리 선정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입으로라도 부정해야 하는데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건이군요.”
“그것뿐만이 아니네. 귀족파의 부패도 상당하지. 그들은 그런 왕실파의 일방적인 주장을 들어주는 척 연기하면서 중간에서 상당한 이득을 챙겼다네.”
“후계자 선정에는 귀족파의 소리도 들어가니까요. 짐작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그 과정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귀족도 나왔다는 걸 알겠군.”
왜 모르겠는가. 눈앞에 있는 로스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데.
“나는 그런 이들을 끌어모았네. 처음에는 피해자 모임에 불과했지만, 그것도 사람이 모이니 세력이 되더군. 하나의 파벌이 된 우리는 스스로를 중립파라 칭하기로 했네.”
“그렇군요.”
미티어벨가는 여태껏 침묵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로스는 칼을 갈고 있었다. 그것도 수십 년에 걸쳐.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고 했으니 로스는 능히 군자라 불릴 만했다.
“자네가 수도에 등장했을 때,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네.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으니까.”
“저는 배경이 부족하고, 중립파는 자금이 부족하기 때문입니까?”
“허허, 이제 보니 반푼이라는 소문은 허황된 거 같군. 그래, 자네도 왕실과 무관한 관계는 아니니 내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금 불공평하군요. 중립파가 정말 제게 필요한지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자네가 가진 부에 걸맞은 능력이 있는지 알고 싶다는 건가?”
“밑 빠진 독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물을 부을 정도로 얼간이는 아니라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로스가 은근히 물었다.
“혹시 왕에게 후궁이 있다는 소문은 들어봤나? 전부터 관심이 있었다면 한 번쯤 들어 봤을 법도 한데 말이야.”
“설마…….”
“그래, 그 소문을 퍼트린 건 우리라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선동과 날조라면 저도 할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 로제는 세르듀스를 낳지 않았네.”
“그건 또 놀라운 주장이군요.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 겁니까?”
중립파도 파벌 중 하나인 만큼 대의명분이 중요했다. 로스가 그 주장을 전면에 내세우지 말란 법은 없었다.
“나는 로제가 이미 죽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네.”
“딸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일단 들어 보겠습니다. 수십 년 동안 참고 기다린 백작이 그 말을 허투루 입에 담을 리 없으니까요.”
토해 내듯이 한숨을 내뱉은 로스가 두 눈을 감았다.
“로제는 땅콩 알레르기가 있어. 물론 그리 심한 건 아니네. 많이 먹어도 입술이 부어오르는 게 전부니까. 크면서 자연스레 땅콩을 멀리했으니 아는 사람도 없을 거네.”
로스가 위화감을 눈치챈 건 18년 전, 어느 날.
세라가 태어나 어쩔 수 없이 마크와 한 자리에서 식사하던 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땅콩버터가 잔뜩 발린 빵을 로제가 입 안에 털어 넣었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행동이었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었다. 부풀어 올랐어야 할 입술이 그대로였으니까.
“그 빌어먹을 자식이 기어코 마지막 선을 넘었더군. 녀석은 로제에게 가장 소중했던 것마저도 빼앗았네.”
“그러니까 지금 왕비님이 진짜 왕비님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까.”
“말했을 텐데, 후궁에 대한 소문을 우리가 냈다고.”
“아.”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 나온다. 가짜 로제가 임신했다면 그런 소문을 낼 리 없었다.
“왕세자가 태어난 정황을 알게 된 겁니까?”
“그래, 수많은 조사 끝에 우리는 후궁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네. 아니, 파악하게 되었다고 해야겠지.”
“그게 대체 누구입니까?”
“후궁의 이름은 살로메. 알펜마 공작이 아끼던 전속 시녀지. 이미 확인 작업은 끝났네. 그녀가 퇴직한 시기와 세르듀스가 태어난 시기가 열 달 차이로 정확하게 일치하니까.”
“잘도 들키지 않았군요.”
예상치도 못한 정체에 카인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세르듀스도 전속 시녀라는 말에 눈이 돌아가서 피아를 노렸다. 그런데 그 아비인 마크도 친구의 시녀를 노렸다니. 피는 속이지 못한다는 걸 이런 걸 보고 말하는 걸까.
“공작은 고향으로 내려가서 쉬고 싶다는 살로메의 말을 듣고 순순히 보내 주었다더군, 묵직한 금화 주머니와 함께. 그만큼 그 아이를 아꼈던 거겠지.”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네.”
“증거 인멸입니까.”
“그녀의 동생만 겨우 살아남았네. 지금은 중립파의 일원이 되었지. 그 아이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그날의 진실을 알 수 없었을 거야.”
“왜 고발하지 않았습니까? 전하에게 큰 타격을 입혔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잘하면 왕실파가 두 쪽으로 갈라질 수도 있는 주제였다.
“내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쓸 만한 증거는 모두 불에 타 없어진 뒤였다네. 그리고 나는 로제의 아버지이지 않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것 같았다.
“공신력이 떨어진다는 거군요.”
“그래서 나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네. 저울추를 기울일 정도로 강력한 우군이 나타날 때를.”
“그게 저라는 겁니까?”
“자네도 시커먼 속내를 가리기 위해 지금까지 반푼이인 척하지 않았나? 수단은 달라도 우리의 목표는 같을 걸세, 아니 같네.”
강렬한 안광이 얼굴을 꿰뚫을 듯 쏘아지자 카인은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까지 로스는 풀숲에 숨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마크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를 텐데도.
그러한 성정은 돈으로도 살 수 없었다.
“아주, 아주 마음에 드는군요. 자금은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다른 두 파벌에 밀리지만 않으면 되네.”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백지 수표를 꺼낸 카인은 로스의 눈앞에 내려놓았다.
“원하는 만큼 쓰십시오. 두 파벌이 고개를 들지 못할 만큼.”
미티어벨가에서 나와 마차에 오른 카인은 소리 죽여 웃었다.
“크크.”
왕실파와 귀족파, 두 세력을 견제할 중립파가 등장하면서 라일의 마음을 흔들 패가 결정되었다.
유익한 시간이 될 거라는 로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 * *
수도 그라함의 분위기는 점점 흉흉해지고 있었다.
세르듀스가 후궁의 소산이라는 말이 떠도는가 하면, 로제가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성격이 바뀌었다는 말도 떠돌았다.
이거나 저거나 뜬소문뿐이었지만,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모든 일의 시발점, 카인은 집무실에 앉아 보고서를 읽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리벨리온이 가져온 정보에 따르면 마크와 왕실파의 일부가 회동했다고. 라일 또한 다른 귀족들을 모으고 있다고 하니 머지않아 결실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누구나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심화되었다. 왕궁의 경계가 강화되고, 라일이 사병을 끌어모았으니까.
마치 이렇게 될 걸 기다렸다는 듯 확산되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중간에서 중재해야 할 세르듀스는 일의 경중도 모르고, 음주가무에 심취하니 산 넘어 산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뒤로 아바마마와 이야기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바마마의 뜻이 워낙 강경해 이렇다 할 제안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어디에나 차선책은 존재하는 법. 제피로스 왕실의 유일한 희망, 세라와 대면한 카인은 그녀의 근황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창 바쁘실 겁니다. 귓가에 거슬리는 소문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테니.”
“내가 이리도 가슴을 졸이는데, 정작 일을 저지른 너는 태평하구나.”
“태평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레디샤를 구하면 해결되는 건데.”
대책 없는 발언에 어깨를 으쓱인 세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말하면 화라도 나야 하는데, 한없이 편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실로 기묘한 기분이었으나, 그녀는 애써 무시했다.
“그나저나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다고?”
“네, 공주님의 재능이 범상치 않아 보며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내 재능? 혹시 무예에 대한 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 성년식에서도 말했지만 이미 알펜마 공작이 검증한 후다.”
“공작님이 일부러 거짓을 고했다면 어떨까요?”
“알펜마 공작이 내게? 그럴 이유는 없을 건데?”
쉬이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무렴. 요 며칠 본 사람이 좀 속살거린다고 철이 들기 전부터 본 사람을 내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건 듣는 것보다 깨닫는 게 더 빠를 터.
“일단 따라오시죠.”
카인을 따라 연무장에 들어간 세라는 한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저자는?”
“슈발체베인가의 부기사장, 오리올입니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데려온 인재죠.”
“백작은 정말 내게 거는 기대가 큰 것 같구나.”
“내키지 않으면 거부하셔도 됩니다. 제 개인적인 호기심을 채우고자 공주님께 무례를 범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부기사장이 내 첫 상대라는 게 마음에 걸렸을 뿐이니 개의치 말아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련은 철저하게 공주님의 수준에 맞춰 진행할 테니까요.”
그 말대로 오리올이 쥔 봉의 끝에는 솜뭉치가 묶여 있었다. 엉겁결에 목검을 쥔 세라가 주춤하자 카인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리고 공주님도 궁금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떠밀리듯이 연무장에 선 세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라고 어찌 궁금하지 않겠는가. 내심 카인의 말대로 재능이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마저 들 정도인데.
순간, 조심스레 자세를 잡은 오리올이 봉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공주님. 준비가 되면 언제든지 오셔도 됩니다. 선수는 양보하겠습니다.”
“그래, 호의는 잘 받겠다.”
검을 어떻게 잡는 거였더라. 하도 오랜만에 쥐는 거라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세라는 금세 잡념을 떨칠 수 있었다. 머리보다 먼저 몸이 반응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