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132
132화 균열 2
* * *
“저도 연관이 있습니다. 레디샤는 레서 왕국의 국보이기 전에 슈발체베인의 가보니까요.”
“도와주겠다는 말로 들어도 되나?”
“제가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지 보셨지 않습니까? 도움이 되면 됐지, 방해가 되진 않을 겁니다.”
“일이 술술 풀리는 걸 보니 어쩐지 백작에게 떠밀린 듯한 기분이 드는구나.”
“착각입니다.”
무언가 석연찮다는 듯 한동안 카인을 쳐다본 세라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나는 아바마마와 조금 더 이야기해 봐야 할 것 같구나. 승산이 없는 내기를 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아서 말이다. 미안하지만, 여기에서 헤어져야 할 것 같다.”
“공주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니 저도 이만 퇴장해야겠군요.”
“그래, 다음에 보자꾸나.”
세라가 떠나는 걸 본 카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성년식은 세라의 생일이기도 하지만, 레서 왕국에 있는 모든 귀족이 참석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달리 말하자면 여기에서 선언한 말은 마크도 쉽사리 뒤엎을 수 없다는 뜻.
‘자충수를 두었군.’
웃음이 절로 나온다.
설마하니 레디샤를 구해 오라고 할 줄이야. 슈발체베인 성에 고이 잠들어 있으니 가져오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언제 꺼내냐는 것.
절뚝거리며 밖으로 나온 카인은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슈발체베인 백작.”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 고개를 돌리니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노인이 보였다.
주근깨가 가득한 코에 한껏 부풀어 오른 뺨. 전체적으로 푸근한 인상이었으나 눈빛만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보아하니 자네는 공주님을 밀기로 한 모양이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감추지 않아도 되네. 적어도 자네에게 해가 되는 사람은 아니니까.”
의심스럽기 그지없는 말에 카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누구십니까?”
“이거, 소개가 늦었군. 내 이름은 로스 미티어벨. 미티어벨가의 당대 가주라네.”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백작이 바로 왕비님의…….”
“그래, 그 아이의 아비 되는 사람이지.”
“왕실파에 소속된 분이 왜 제게 온 건지 모르겠군요. 방금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런 겁니까?”
로스가 나지막이 고개를 저었다.
“난 왕실파 소속이 아니라네. 엄밀히 말하자면 귀족파도 아니지.”
하긴 강탈당하듯이 딸을 빼앗긴 이였다. 왕실파에 계속 붙어 있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할 터.
“왕실파는 그렇다 치더라도 귀족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건 의외군요.”
“세상만사를 어찌 흑백으로만 가를 수 있겠는가.”
“제3의 세력에 소속된 거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니 그렇게 봐도 무방하네.”
로스의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숨기고 있지만 카인은 알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동류라 할 수 있었으니까.
“두 세력과는 궤를 달리하는 파벌이라……. 들어본 적이 없군요.”
“당연하지. 한 번도 대외적인 활동을 한 적이 없으니까.”
“구태여 그런 비밀을 제게 밝힌 이유는 무엇입니까?”
“백작이라면 동참해 줄 거라고 믿기 때문이네.”
그렇다면 제3의 세력이 어디에서 파생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슈발체베인과 미티어벨의 공통점은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왕비님이 혼인했을 때부터 확장한 세력입니까?”
“그 이야기는 차차 하지.”
역시.
알 만하다는 듯 카인은 눈웃음을 지었다.
“한번 미티어벨가에 방문해 주게. 허투루 듣지 않았으면 하네. 자네에게도 유익한 시간이 될 테니까.”
등을 돌린 로스가 언제 다가왔냐는 듯 홀연히 사라진다.
경쾌하게 지팡이를 두드린 카인도 그에게서 멀어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얻은 게 많았다.
“그러면…….”
품속에 넣어 두었던 가면을 꺼낸 카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왕궁이 어떤 구조인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조금만 봐도 괜찮겠지?”
* * *
야시장에는 활기가 넘쳤다.
오늘은 세라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 대대적인 축제가 벌어지며 여기저기에서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다.
마법 폭죽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끝을 모르고 이어진 특가 판매에 홀린 이들도 있었다.
질겅질겅.
양념된 오징어를 단번에 씹어 먹은 나이아는 메마른 눈으로 저 먼 곳에 있는 왕궁을 쳐다보았다.
“지금쯤 공주의 손에 놀아나고 있겠지.”
그 말에 피아는 능글맞게 웃었다.
“불만이 많으신가 봐요? 평소에는 못살게 굴어도 역시 가주님에게…….”
“시끄럽구나. 나는 나쁜 여자에게 속을까 봐 그런 거다. 너도 알다시피 녀석은 수련과 일밖에 모르는 바보이지 않더냐.”
그렇지 않아도 입만 열면 우리 세라, 우리 세라, 라고 지껄이고 다니는데 걱정이 되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피아는 괜한 걱정이라는 듯 닭꼬치를 들었다.
“제가 보기엔 착한 여자에게도 절대 속지 않을 것 같은 분이 가주님인데요.”
나이아는 모를 테지만 카인에게는 기묘한 벽이 있었다. 가까이 가는 건 쉽지만 품 안으로 들어가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리고 사정은 나이아도 들었잖아요? 남매끼리 오붓하게 파티에 참가한 것뿐이에요.”
“흥, 피도 안 이어졌는데 남매는 무슨 남매. 그런 건 남매가 아니라 남이라 부르는 거다.”
닭꼬치를 교편 삼아 훈계한 나이아가 입을 벌린 순간, 그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쓰윽 지나갔다.
“응?”
고개를 들어 올린 나이아의 눈에 수상한 이가 또렷하게 보였다.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었다. 누군가 왕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니까.
왕실에서 파견한 밀정일 수도 있지만, 나이아는 그 가정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았다. 그자의 행색이 눈에 익었던 까닭이다.
검은 코트에 귀신 가면.
꼭 누군가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십중팔구 노린 게 분명했다.
닭꼬치를 피아에게 넘긴 나이아는 서둘러 얼굴을 가릴 만한 천을 찾아다녔다.
“잠깐, 여기에서 기다리거라. 아니, 내가 제 시간에 오지 않으면 먼저 가도 된다.”
“무슨 일인데요, 나이아? 나이아?”
피아가 애타게 불렀으나 나이아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 * *
수도 그라함은 그 규모에 어울리게 복잡한 사거리가 거미줄처럼 얼키설키 뒤얽혀 있었다. 하지만 건물과 건물 사이를 넘나드는 아리아에게는 외길이나 다름없었다. 저 아래에 펼쳐진 야시장의 불빛은 징검다리를 비추는 등불과 같았다.
주위의 경관이 휙휙 바뀌고, 어느새 분위기가 일변한다. 떠들썩한 축제에서 멀어진 그녀는 귓가가 먹먹할 정도로 고요한 거리에 섰다.
성벽 부근에 돌아다니는 이는 없었다. 간간이 기사들이 순찰을 돌 뿐.
어둠 속에 스며든 아리아는 구석진 곳으로 몸을 옮겼다.
경비 체계는 사전에 조사했다.
일국의 왕이 사는 곳답게 사각 지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 들어가든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는 구조.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걸어서 갈 때 발생하는 문젯거리였다.
땅이 안 되면 하늘로 가면 되었다.
지면을 박차며 날아오른 아리아는 추진력이 떨어질 즈음, 성벽을 걷어차며 다시 한 번 속도를 올렸다.
고작 두 걸음 만에 수십 미터에 달하는 장애물을 뛰어넘은 그녀는 제 집처럼 벽을 넘나들며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왕비가 있는 곳까지 앞으로 100미터 남짓.
“기다리거라.”
난데없이 들려온 소리에 아리아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조심스레 고개를 돌리니 축제에서 자주 쓰이는 천으로 온몸을 감은 괴인이 보였다.
“…….”
아리아가 빤히 쳐다보자 괴인, 나이아는 활을 들었다.
“그런 모습으로 왕궁에 왔다는 건 좋지 못한 의도가 있다는 것일 터. 순순히 항복하거라, 피를 보고 싶지 않다면.”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걸 본 아리아는 반사적으로 코트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화살이 쏘아진 것과 코트자락에서 단검이 쏘아진 건 거의 동시.
찰나의 순간, 서로의 송곳니가 허공에서 교차했다.
휘이익.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단검에 놀란 나이아가 재빨리 화살을 겨눴다. 하지만 그때는 아리아도 만전의 준비를 끝냈을 때였다. 손가락 사이에 8개의 단검을 끼운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팔을 휘둘렀다.
쿵, 쿵, 쿵.
가까운 벽 뒤에 몸을 숨긴 나이아는 두 눈을 부릅떴다. 고작 투척술로 이만한 위력이라니. 정면에서 맞았다간 벌집이 될 게 자명해 보였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활시위를 잡아당긴 순간,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자그마한 소음.
바람이 불었다고 착각해도 이상할 거 없지만, 본능에 몸을 맡긴 나이아는 재빠르게 엎드렸다.
동시에, 무언가가 벽을 뚫고 지나갔다.
그게 다리라는 걸 깨달은 나이아는 앉은 자리에서 화살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주먹구구로 내뱉은 수가 통할 리 없었다.
비처럼 쏘아지는 화살을 여유롭게 피한 아리아는 단번에 거리를 좁혔다.
몸놀림이 깃털처럼 가벼운 게 마치 빙판 위를 달리는 것 같았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좁혀진 간격.
상대를 뿌리치기 위해 서둘러 활을 바꿔 잡은 나이아는 깨닫고 말았다, 자신이 한 박자 늦었다는 걸.
‘급소를 내줄 수밖에 없나.’
속절없이 맞는다고 생각한 순간―
“코트에 가면이라, 과연 내 흉내를 내는 녀석이 있다는 건가. 하긴 그럴 때도 됐지.”
생각하지도 못한 지원군이 나타났다.
쿵.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돌적으로 달려오던 이가 끈 떨어진 연처럼 나뒹굴고 나서야, 나이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정말 고맙다. 덕분에 살았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나아간 지원군, 카인은 눈앞의 상대를 쳐다보았다.
“무엇 때문에 나처럼 변장한 거지?”
“…….”
엠의 등장에 아리아는 아무도 모르게 어금니를 깨물었다. 처음으로 맡게 된 단독 임무는 변수의 연속이었다. 정체불명의 괴한이 따라붙은 건 물론이고, 만나서는 안 되는 상대까지 나타난 것이다.
운이 좋지 않아도 너무 좋지 않았다. 이대로 속행하는 건 과욕일 터.
들어갈 때와 나올 때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 또한 크롬의 평가 항목에 있을 게 분명했다. 지금은 한 발자국 물러날 때.
“이 빚은 잊지 않겠습니다.”
“여자아이?”
상대, 아니 소녀가 미련 없이 등을 돌리자 카인은 그녀를 잡기 위해 성벽을 뛰어넘었다.
‘잠깐 조사하려고 남은 게 이렇게 될 줄이야.’
엠의 이름을 빌려 왕궁에서 일을 벌일 만한 간 큰 녀석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것도 험상궂은 사내가 아니라 이제 막 변성기가 온 듯한 소녀가.
카인은 건물과 건물 사이를 내달리며 침음을 흘렸다. 거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줄다리기를 하듯 지지부진한 성과가 이어질 뿐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어리다 해도 소녀는 귀신이었으니까. 활성화된 초월 감각이 그녀의 동작에서 많은 걸 읽었다.
소의 저력, 개의 순발력, 말의 각력, 그리고 토끼의 가속력까지.
‘미친. 몇 개까지 꺼낼 셈이지?’
어렴풋이 본 것만 해도 대여섯 개. 과거에 저런 귀신은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스물세 살까지 무술 사범으로 훈련소에서 살았던 카인이었다.
저만한 재능을 보았다면 잊었을 리 없었다.
소녀의 나이대를 생각하면 더더욱.
카인이 상념에 잠긴 사이, 소녀는 냉큼 도시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하, 어려도 차기 퍼스널 네임은 자기라 이거지.”
허탈하게 소녀를 놓친 카인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제는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었다. 오늘은 한창 축제가 진행 중이었으니까. 떠들썩한 이들이 소녀의 흔적을 모두 지울 터.
아무래도 다음 만남을 기다려야 할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