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179
179화 가희 3
* * *
멀어지는 쥬시를 뒤로한 채, 카인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익숙한 뒤태가 보였다.
카르비나 롤랑.
모두가 인정하는 가희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건지 카르비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카인은 숨이 멎는 듯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에 맴도는 말이 많았는데, 막상 마주치니 그 속내가 쏙 들어갔기 때문이다. 어딘가 모르게 아련하기도 했다.
고심 끝에 그가 꺼낸 말은 솔직한 감상이었다.
“어리군.”
아직 순수한 모습이 남아 있었다. 기억에 남아 있는 카르비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게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어머, 무례하신 분이네요.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제 앞에 섰지만 그런 말을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실어 연기하는 듯했다. 과장스럽기에 일견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녀가 하니 무서우리만치 잘 어울렸다.
무엇보다 일품인 건 그렇게 말하면서도 심드렁하기 그지없는 낯빛이었다.
조롱과 경계가 가득한 환대였지만 카인은 서운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저런 얼굴이었으니까. 오히려 그때 그 시절이 떠올라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어떻게 제가 있는 곳을 찾은 건지 모르겠지만, 여기는 관계자만 출입할 수 있어요. 죄송하지만 외부인은 나가주셨으면 해요. 아니면 끌려나가고 싶은 건가요?”
“일단 소개부터 하지. 나는 카인 슈발체베인이라고 한다.”
“아, 그런가요.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내 얼굴을 봐서라도 잠시 동안 시간을 할애해 주지 않겠나?”
“여기에서 말씀하세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같이 바깥에 나갈 일은 없을 거예요. 선약이 있거든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대응이었다. 이런 상황을 한두 번 겪어 온 게 아니라는 거겠지.
카인의 예상대로 카르비나는 불청객의 등장이 고깝게 다가왔다.
“그러면 사양하지 않지.”
하지만 그런 그녀의 냉대에도 카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기실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애당초 그가 여기에 온 건 그녀와 친해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카인이 바라는 건 가희라는 이름의 영속. 달리 말해 카르비나가 평범하게 사는 거였다.
그 명제를 이루기 위해선 일단 선행되어야 할 과제가 하나 있었다.
‘어떻게 귀신이 된 거지?’
여태껏 풀리지 않은 의문이었다.
조직은 은밀하게 움직였다. 당연히 눈에 띌 행동 자체를 지양했다. 그런데 범대륙적인 인기를 누리는 이를 구태여 끌어들이다니. 소문이 나고 싶어 안달이 났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조직이 허투루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바, 카인은 자신도 모르는 뒷사정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에 여러 가설을 세웠다.
가장 합리적인 건―
“혹시 팬에게 특별한 보구를 받은 적 있나? 기억나는 게 있다면 말해 봐라.”
“갑자기 심문인가요? 내키지 않네요. 잘못 보낸 물건이 있다면 극단에 물어보세요.”
눈치를 보니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녀의 위치를 생각하면 아주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 순순히 납득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는 게 아니었다.
보구든 신기든 그 값어치를 인지했다면 집에 두고 다니진 않을 터. 카인은 즉시 가방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걸 잠자코 두고 볼 카르비나가 아니었다. 그녀는 카인의 손등을 가볍게 쳤다.
“당장 그 손 놓으세요. 레이디의 가방을 함부로 보려고 하다니. 정신이 있는 건가요, 없는 건가요?”
“잊어버린 물건이 있어서 찾고 있다. 협조해 줬으면 좋겠군.”
“방금 전에는 제 팬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것도 맞지.”
“말이 통하지 않는군요. 선문답은 딱 질색이에요. 흥이 식었어요. 나가 주세요.”
“다 너를 위해서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거기까지만 하세요. 제 소장품이 탐나서 그러는 거잖아요? 정 가지고 싶으시다면 다음 주를 노리세요. 자선 행사 때 제 물건이 경매에 붙여지니까요.”
“필요 없다, 그딴 거.”
“지금 행동하고 말하고 따로 노는 거, 알고 계시죠?”
설왕설래하던 도중, 카르비나와의 간격이 좁혀진다. 그 순간, 시계가 자그맣게 떨렸다. 카인은 두 눈을 부릅떴다. 아무래도 단서가 될 만한 물건은 그녀가 직접 소지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카인은 물어보지 못했다. 입을 열려던 찰나, 또 다른 방문객이 들어왔던 것이다.
“오, 나만의 종달새. 카르비나, 내가 왔어.”
“늦었잖아요.”
“오랜만에 보는 거니 한 번만 눈감아 주면 안 될까?”
“당신의 부탁이라면 백 번, 천 번이라도 들어드릴게요.”
펄쩍 뛰어오른 카르비나가 준미한 사내의 품에 안겼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온갖 미사여구를 붙이며 인사했다. 으르렁거리며 심드렁하게 대꾸하던 여성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카인은 반사적으로 사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열 손가락에 빠짐없이 착용한 반지는 영롱하게 빛을 발했다. 그게 어떠한 물건인지 깨달은 카인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보구?’
심지어 목걸이와 귀걸이, 그리고 벨트에 이르기까지. 남자의 장신구는 모조리 보구였다.
이해하지 못할 건 없었다. 일부 졸부들이 보구를 패션 아이템으로 활용한다고 들었기에.
그저 사내의 과욕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덕지덕지 꾸미면 위화감만 조성할 테니까.
하지만 한 걸음 물러서서 보니 제법 그럴듯했다. 타고난 기질이 그러한 걸까.
순간, 카르비나가 했던 말이 카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든 게 거짓뿐인 남자였어.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 순간마저도.’
시기를 고려해 보면 아마 눈앞의 남자가 그녀가 거론했던 당사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처음부터 내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거야. 그 사람의 이름은…….’
“이거 손님을 앞에 두고 추태를 부렸군요. 파르발 롤랜드라고 합니다.”
사내, 파르발이 어수룩하게 고개를 꾸벅이며 손을 내밀었다. 역시 예상했던 그 상대가 맞았다.
카인은 파르발의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카인 슈발체베인이라고 합니다.”
“아, 그 레서 왕국에서 유명한 공작님이시군요.”
순간, 마주 잡은 손에 가해지는 힘이 증가했다. 파르발을 쳐다본 카인이 침음을 흘렸다. 그의 입가에 걸린 건 명백한 조소. 카르비나의 눈에 띄지 않도록 등진 걸 보니 다분히 의도적인 시비였다.
“그런데 여기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부끄럽게도 평소에 롤랑 극단의 자랑인 가희를 흠모했던지라 이렇게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카르비나는 인기가 많으니까요. ‘공작님 같은 분’도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겠죠.”
사람 좋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린다. 그 동작 또한 악의가 스며든 건 당연지사. 카인이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이거 봐라?’
밉살맞은 저주였다. 위력은 크지 않았다. 며칠 동안 감기몸살로 고생할 정도.
카인은 파르발의 귀걸이가 명멸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보구들이 마냥 장식품은 아닌 듯했다. 그의 성을 감안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롤랜드.
그건 이곳, 네메시아를 다스리는 왕실을 뜻하는 이름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파르발은 왕자인 셈.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의 장난은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반격하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리던 카인은 황급히 경맥을 잠재웠다. 코끝을 간질이는 향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질리도록 맡아 본 냄새였다.
‘양의 인자.’
파르발이 어떻게 카르비나의 마음을 손에 넣었는지 짐작케해 주는 대목이었다.
‘조직의 귀신인가.’
가까이 있는데도 향기가 옅은 걸 보니 적성률은 낮은 듯했다. 이성의 환심을 사는 데 그칠 정도.
파르발이 카르비나를 조직에 인도했다는 가설이 새롭게 부상했다. 하지만 의문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카르비나가 스스로 들어왔다면 파르발을 원망할 리 없었으니까.
‘내가 모르는 사정이 더 있는 건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대충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애석하게도 오늘 만남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카르비나와 선약이 있거든요.”
파르발이 카르비나를 향해 고갯짓하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하지만 제 소장품 경매는 다음 주에 있어요. 잊지 마세요.”
그렇게 두 사람은 유유히 사라졌다. 홀로 남은 카인은 허탈하게 웃었다. 완전히 들러리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 그런가.”
* * *
오페라 하우스의 옥상.
출입이 금지된 난간 위에 선 카인은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사각지대에서 한 소년이 나타났다. 새롭게 들어온 동료이자 암성의 제자인 자넷이었다.
“쯧, 너무 부려먹지 말라고.”
“그만큼 보상은 확실할 텐데? 그보다 내가 준 표어와 표식으로 위치는 확인했겠지?”
“그래, 여기.”
자넷이 건넨 지도엔 조직의 거점이 차례대로 표기되어 있었다.
“역시 왕궁을 중심으로 모여 있나.”
왕자인 파르발이 귀신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주요 쟁점은 왕 또한 조직의 수족이냐는 건데, 안타깝게도 그건 리벨리온도 확인할 수 없는 정보였다. 추측해서 판단해야 했다.
카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자 자넷이 염려를 표했다.
“설마 거기로 쳐들어갈 생각은 아니지?”
“지금 당장은.”
결론이 난 게 없으니 주의 깊게 파악해야 할 때였다.
“잘 생각했어. 어차피 안 될 거라고. 돌아오면서 봤는데 경비도 한층 삼엄해졌더라고.”
“갑자기?”
“괴도 케이의 예고장이 날아온 듯해.”
괴도 케이.
방방곡곡에 수배된 범죄자―, 를 넘어 대륙 공적에 도전하는 이였다.
상대방이 대비할 수 있도록 사전에 예고장을 보내는 건 케이만의 시그니처였다. 방만하다 못해 거만한 도발이지만, 아직까지 그 꼬리를 잡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범행 수법 또한 밝혀진 바 없었다. 모든 게 오리무중이었다.
물론 직접 본 건 아니었다. 카인이 세상으로 나왔을 때, 케이는 이미 활동을 접은 뒤였으니까.
“배포가 크더라고. 롤랜드 왕실에서 가장 아끼는 보물을 훔쳐 가겠다던데.”
“가장 아끼는 보물? 그곳에 그런 상징적인 물건이 있었나?”
“글쎄, 괴도가 그렇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어.”
자넷은 어깨를 으쓱였다.
“간도 크군.”
네메시아는 작지만, 엄연히 하나의 국가였다. 나라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토대는 갖춰진 상태였다. 다른 왕국에 비하면 부족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인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주변에서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정말 성공하는지 내기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고. 어차피 가면 쓰고 다니는데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
“뭐?”
“싫으면 싫은 거지 왜 분위기를 잡고 그래.”
“아니, 잘했다.”
“응?”
“그런 적극적인 자세,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런지 저돌적이군. 본받을 만해.”
카인이 나지막이 읊조리자 자넷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카인은 진심으로 탄복했다.
“크크. 그래, 정체를 숨기면 누가 누구인지 알겠어?”
이건 절호의 찬스였다.
모든 죄를 케이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왕실의 분위기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일석이조.
“그래서 그 예고장에 표기된 일자는 언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