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360
360화 테레사 1
* * *
“제국을 떠받치는 노장의 목숨값이 그거밖에 안 되나? 다섯 배는 줘야 하지 않겠나.”
어디까지 추해질 수 있는지 보고 싶은 마음에 카인은 무리한 요구를 입에 담았다.
“세 배, 그 이상은 어렵다.”
“어렵다고 하면 끝나나? 네 배.”
“그래, 네 배. 그 정도면 네게 의뢰한 사람의 목까지 가져올 수 있겠나?”
“그건 또 다른 이야기지 않겠나.”
“이 빌어먹을 수전노 새끼가.”
“서운하군. 역시 네 배로는 성이 차지 않는데…….”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 상대가 말을 바꿀세라 알펜타리온은 침낭 속에서 금화가 가득 든 주머니를 꺼내 던졌다.
“과연 제국의 공작은 남다르군. 이만한 현물을 들고 다니다니 말이야.”
묵직한 주머니를 받아든 카인은 히죽 웃었다. 금화는 물론이고, 채권까지 들어있었다.
어림잡아 500만 골드 내외.
이게 이번 전쟁의 전리품이라는 건 그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용서가 안 되는군.”
“뭐?”
카인은 슬그머니 가면을 벗었다.
여태까지 베일에 감춰져 있던 리벨리온의 수장, 엠의 맨얼굴을 감상한 알펜타리온은 사색이 되었다. 유명인일 수도 있다는 건 이미 짐작한 바였다. 하지만 드러난 결과는 그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너…….”
가면이 카인의 손가락 위에서 빙그르르 돌아갔다.
“반푼이처럼 사는 동안 남는 시간이 많아서 말이지. 분발해서 또 다른 신분도 만들어 봤다. 어때?”
그제야 알펜타리온은 자신이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까지 보여 줬는데 살려 둘 리 없었다. 처음부터 협상 따윈 없는 거였다.
완벽하게 농락당했을 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치솟은 수치는 금세 분노로 변했다.
“이 자식이!”
알펜타리온이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먼저 장전된 검지가 겨눠졌다.
[정련정심 ― 극진]오색찬란한 빛이 터져 나와 알펜타리온의 심장을 깨끗하게 지우고 지나갔다. 가슴에 바람구멍이 뚫린 노장은 찌푸린 미간도 풀지 못한 채 뒤로 쓰러졌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죽음.
하지만 이 상태로는 원흉이 누구인지 금방 들킬 가능성이 높았다.
카인은 품 안에서 물건을 하나 꺼냈다.
엔지니어의 본거지에서 수거해 온 나노 마테리얼로 제작한 신기.
‘세열수류탄.’
소소한 무기지만, 처참한 광경을 재현하는 데 이만한 것도 없었다.
더구나 여러 차례 특별한 공정을 거친 제품이기에 이렇다 할 소음도 없었다.
안전핀을 제거한 세열수류탄을 알펜타리온의 가슴에 장식해 준 카인은 무심하게 등을 돌렸다.
그가 밖으로 나온 것과 천막에 핏물이 흩뿌려진 건 거의 동시.
카인의 발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
알펜타리온은 시작에 불과했다.
하이렌과 결탁한 녀석들을 전부 만나려면 이 밤도 모자랐다.
* * *
간밤에 일어난 피의 축제 때문에 토벌대는 난리가 났다. 정체불명의 거수자가 진지에 들어와 아스테리스크의 인사들을 죽였던 것이다.
더구나 시신은 하나같이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온전한 건 찾아보기 힘든 수준.
카인은 심심한 위로의 말을 하이렌에게 건넸다.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한날한시에 하이렌의 의견에 동조한 무리가 싹 다 명을 달리했다. 누가 보아도 카인이 저지른 짓이었으나,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하이렌은 앓는 속을 스스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한 짓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건 일종의 시위였다.
천둥벌거숭이처럼 제 권력만 믿고 날뛰면 그냥 죽여 버리겠다는.
“그대는 이게 우연이라 생각하나?”
“우연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노골적인 물음에도 카인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대외적으로 유력 인사들의 죽음은 엔지니어의 잔당이 암살한 걸로 되어 있었다.
그 누구도 구할 수 없는 신기가 유력한 증거.
성황교에서 파견된 신의 인형이 증인이 되어 주었다.
어쩌면 그들도 진상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지 몰랐다. 아니, 십중팔구 그러할 터. 하지만 베리타 제국의 독주를 견제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아스테리스크의 쇠락을 환영하는 건지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제 의견만 피력했다.
카인으로서는 잘된 일.
하이렌의 손에 이끌려 천막 안으로 들어온 카인은 심드렁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여긴 왜 데려오신 겁니까?”
“우리끼리 있으니 한 번 허심탄회하게 말해 봐라.”
“허심탄회라 함은?”
“저 같잖은 참상을 꼭 일으켜야 했냐는 거다. 그대는 베리타 제국과 전쟁이라도 치르고 싶은 건가?”
“삼황자 저하께서 언제 베리타 제국을 대표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와 별개로 무슨 말씀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아주 오만하군.”
잘못에 대한 벌을 받았음에도 하이렌은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런 성격이라는 건 카인도 알고 있었기에 실망하지 않았다.
“듀나미스 공작을 죽였다는 건 내게 있어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베리타 제국에 돌아가는대로 이 일을 아바마마께 진언할 생각이다. 기대해도 좋다. 이대로 끝내지 않을 테니까.”
“베리타 제국과 충돌할 수도 있다는 겁니까?”
“왜? 이제야 레서 왕국의 안위가 걱정되나 보지? 하지만 이미 늦었다.”
결단코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역력했다. 하지만 카인은 그 의지를 꺾는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삼황자 저하께서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어서 말입니다.”
“그게 뭐지?”
“전쟁은 윗사람이 지시하고, 아랫사람이 희생되는 이율배반적인 희극입니다.”
“감히 내게 전쟁에 대해 가르칠 셈인가?”
“그럴 리가요. 그저 상층부의 목만 전부 꺾어 버리면 삼황자 저하께서 그렇게 좋아하는 전쟁이 성립될 수 없다는 걸 말해 드리는 겁니다.”
송곳니를 드러낸 카인이 하이렌에게 다가갔다.
“대륙이 혼란스러워질 테지만 제 알 바는 아니지요. 뻗댈 자리도 모르고 고개를 들이미는 짐승 새끼까지 제가 보듬어 줄 의리는 없으니까요.”
카인을 올려다본 하이렌은 마른침을 삼켰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테지만, 상대는 무신이었다.
그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굳은 표정 좀 펴시지요. 만약의 사태가 일어나면 그렇다는 거지 않습니까. 삼황자 저하께서 중심을 잡고 계시면 그럴 일도 없습니다.”
밝게 웃은 카인이 하이렌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번 일도 그렇습니다.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네 왕국을 도와주는 건 어떨는지요? 어디에서 배워 먹지 못한 녀석이 할 법한 불평등 조약이 아니라.”
하이렌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형언할 수 없는 굴욕감이 등골을 스쳐 지나갔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말은 한정적이었다.
“이 일은 잊지 않겠다.”
아무렴.
잊지 말라고 저지른 짓인데.
이제부터 선을 넘으려고 할 때마다 죽은 알페타리온이 떠오를 거다.
만용을 부린 대가가 어떠한지도.
“이걸로 네가 이겼다 생각하지 마라.”
이 한마디를 남기며 하이렌이 떠난 것과 동시에 공간을 뛰어넘은 호른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를 으쓱인 그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었다.
“이거 괜히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드린 게 아닐까 몰라.”
“이 정도도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굽신거리기 위해 지금껏 힘을 키운 게 아니었다. 보다 주도적으로 시류를 조정하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거였다.
“호른, 하이렌을 주시해라. 그리고…….”
“그리고?”
“조금이라도 수상한 거동을 보이거든, 죽여라. 내 인가는 받지 않아도 된다.”
카인이 하이렌에게 지금 손을 대지 않은 건 그가 삼황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스테리스크를 돌리는 톱니바퀴로 쓸모가 있다 여겼을 뿐.
조직을 처리한 뒤에는 어찌되든 알 바 아니었다.
* * *
슈발체베인가로 돌아온 카인의 생활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테마 파크 순찰, 영지 관리, 개인 수련.
엔지니어를 처리한 덕에 그 위명이 대륙에 쩌렁쩌렁 울렸으나, 그런 건 사소한 부분에 불과했다. 그의 관심을 끄는 건 따로 있었던 것이다.
‘내려가지 못하는 문.’
깊은 지하에 존재하는 보물 창고엔 신의 무덤으로 향하는 출입구가 하나 있었다.
그 정체에 대해선 어렸을 때부터 줄곧 의문이었다. 하지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성의 주춧돌인지라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그에 걸맞는 열쇠를 찾아왔으니까.
“이게 그건가?”
“네, 카타스트로피입니다.”
알리파 제국의 초대 황제, 알파가 사용했다 전해지는 보검.
그리고 로 가는 길을 여는 열쇠.
카인은 이걸로 내려가지 못하는 문을 열 수 있다 여겼다.
“정말 이곳에 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닐 확률보다 그럴 확률이 더 높지.”
제로원과의 대화에서 가 테레사를 뜻한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게 대단위 냉각 시스템을 겸비한 대규모 양자 컴퓨터 단지라는 것도.
인류가 구상한 최초이자 최고인 인공지능, 테레사. 그녀는 다른 안드로이드들과 달리 거대한 몸체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연산 능력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
카타스트로피를 손에 든 카인은 문 앞에 섰다.
벽에서 시작된 균열은 바닥까지 연결되어 ‘ㄴ’자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외곽선은 지그재그를 그리며 이어졌다. 억지로 여는 것조차 쉽지 않은 구조.
“외부와 완벽하게 단절된 문이군요.”
“그래서 여태 애를 먹었던 거야.”
후, 하고 한숨을 내뱉은 카인은 문 중앙에 새겨진 굵고 긴 홈에 카타스트로피를 꽂아 넣었다. 될까, 되지 않을까. 여러 상념이 교차하는 가운데―
달칵.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한 물건을 찾아왔다는, 그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다.
이제 진실을 확인할 시간이었다.
있는 힘껏 카타스트로피를 돌리자 홈이 매끄럽게 돌아갔다. 기이익, 수천년 간 열린 적 없는 문이 기지개를 켜자 지축이 흔들렸다.
묵직한 소음이 연신 저편에서 울려 퍼졌다. 장내를 강타한 진동이 멎은 것과 문이 활짝 열린 건 거의 동시.
이윽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또 지하로 내려가라는 건가.”
눈에 보일 정도로 짙은 냉기가 발목을 스치고 지나가자 카인은 침음을 흘렸다. 구두에 서리낄 정도로 강한 한기. 저 밑에 무엇이 있든 범상치 않다는 걸 간접적으로 보여 주었다.
“안 가실 겁니까?”
“아니, 갈 거다.”
주위는 어두컴컴했다. 어디가 위이고, 아래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내부는 외부인의 침입을 거부하는 듯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어갔을까.
탁.
더 이상 밟고 내려갈 계단이 없다는 걸 인지한 카인은 지면에 발을 내디뎠다. 보이는 건 없지만 느껴지는 건 있었다.
‘엄청나게 크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임에도 피부로 다가오는 개방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신의 무덤이라는 사실만 몰랐다면 밖이라고 착각할 정도.
“불 켜겠습니다.”
어느새 스위치를 찾은 건지 이브가 그리 담담하게 고했다. 나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장내가 밝아졌다.
시야에 들어온 광경을 목도한 카인은 두 눈을 부릅떴다.
거대한 단지가, 거대하다 못해 광활한 대규모 양자 컴퓨터 단지가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