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37
037화 조우하다 3
* * *
벽에서 솟아난 그물 모양의 빛줄기가 크루웰을 관통했다. 마력을 통해 신체를 강화했으나 헛수고였다. 빛줄기는 모든 걸 꿰뚫었다. 플레이트 메일과 방패, 그리고 그 육신까지도.
방금 전까지 동행했던 이가 큐브 스테이크처럼 잘게 썰린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광경. 차라리 어마어마한 괴물이 나타나 갈기갈기 찢었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뿐인 동료를 죽인 건 형언하기도 힘든 무언가였다.
다가오는 빛줄기를 쳐내기 위해 레이피어를 들었지만 그 또한 허망하게 잘려 나갔다. 항거할 수 없는 위험을 감지한 엘리사가 소리쳤다.
“모두 도망치세요!”
모양이나 형태가 있다면 대응할 수 있다. 하지만 구조물 ‘전체’가 적이라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모두가 빠르게 움직였다.
“같이 가.”
아비규환의 현장 속에서 마만이 숨을 헐떡였다. 몸을 쓰는 데 익숙하지 않은 그에게 전력 질주는 가혹한 처사였다.
뒤처지는 건 당연한 수순. 마법을 사용해도 한계가 명확했다.
아니나 다를까, 발걸음이 한 박자 늦어지자마자 벽에서 솟구쳐 오른 빛줄기가 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살려…… 줘.”
털썩. 정찰대에서 가장 강력한 화력을 자랑하는 마만이 고깃덩어리가 되자 제반은 넋이 나간 듯 메마른 웃음을 연달아 내뱉었다.
“여기는……, 신의, 무덤이라도 되는 거야?”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호칭은 없다고 생각한 엘리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치와 섭리를 벗어난 구조물. 생경함을 넘어 경이로운 기계 장치들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해한 게 없었다.
마치 미개인이 된 듯했다.
달리면서 활시위를 당긴 제반이 빛줄기가 솟구쳐 오르는 지점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쾅.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빛줄기가 사그라들었다.
기계 장치도 무적은 아니라는 뜻. 활로가 보이는 듯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팔이 휘어져라 활시위를 당긴다. 제반의 노력이 통한 건지 쫓아오던 빛줄기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물론,
착각이었지만.
“제길.”
복도를 지나자 또 다른 빛줄기가 추적에 가세했다. 도망칠 수 있는 범위가 한정적이라는 걸 깨달은 제반이 엘리사의 등을 밀었다.
“엘리사, 너라도 나가야 해! 나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야 한다고!”
“하지만, 제반. 당신은…….”
“걱정하지 마.”
거짓말이라는 걸 알지만 지금은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입술을 깨문 엘리사는 제반의 각오를 받아들였다.
눈물을 머금으며 다리에 채찍질한다. 제반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가서 전해야 했다. 여기에서 본 모든 걸.
엘리사가 입구에 다다랐을 때, 바닥에서 기다란 막대기가 올라왔다. 속이 비어 있는 원통형 막대기. 이 또한 처음 보는 도구였기에 반응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을 거라 예상했던 막대기 속에서 강렬한 빛이 쏘아졌으니까.
* * *
“벌써 일주일째입니다.”
“이쯤 되면 살아 돌아올 일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는 건…….”
“결과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재빨리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저 밑에 부족의 정예들조차 가볍게 짓뭉개는 무언가가 있다는 건 확실하니까요.”
부족의 기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떠난 정찰대가 돌아오지 않은 지도 벌써 일주일째. 장로들이 혀를 세우고 설전을 벌이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소란스러운 장내를 본 데이아가 손을 저었다. 족장이라는 중임을 맡은 그도 장로들 앞에서는 빛을 잃었지만 발언권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더구나 부족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기에 관망하는 건 죄악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지어야 했다.
“그곳에 부족원을 다시 보낸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을 것 같습니다. 정찰대로 보낸 이들은 모두 흠잡을 데 없는 정예 중의 정예였으니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반박할 여지가 없는 정론에 냄비처럼 끓어오르던 장로들도 입을 다물고, 한 발자국 물러났다.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데이아가 지도의 한 곳을 가리켰다. 정찰대가 목숨을 잃은 장소. 부족과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걸 상기시키려는지 툭툭 두드리며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저희들의 힘만으로는 부족한 상황이라는 것도 잘 아실 겁니다.”
오판은 한 번뿐이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귀중한 인재를 넷이나 잃었으니까.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고 자만하는 건 무능의 소치였다.
“그러면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하잔 말인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저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태만한 우두머리는 결코 용서받지 못하는 법. 그렇기에 데이아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이곳의 주인을 부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해결되는 건 금방일 겁니다.”
노튼 설원의 주인. 데이아가 누구를 말한 것인지 깨달은 장로들이 술렁였다.
“하지만 그 인간을 불러들이는 건 어떨지……. 자네도 알겠지만 인간과 얽혀서 좋을 건 없네.”
장로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하자 다른 이들도 동의한다는 듯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노튼 설원에서 평화를 얻을 때까지 그들이 감내한 희생은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울 만큼 참혹했다.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야 했으며, 세상의 편견과 싸우는 건 물론이고, 사랑했던 이들까지 보내야 했다.
물론 데이아도 그 혼란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냉정하게 대처해야 했다.
“저희가 이곳에 살게 된 것도 그 인간의 호의 때문입니다.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잊은 건 아니시겠죠?”
여전히 불만인 듯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 장로들이 보였으나 어깃장을 놓지는 않았다. 그들이라고 마땅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연히 말하자면 이 땅 또한 그가 다스리는 영토입니다. 자신의 영역 안에서 벌어진 이변이라면 분명히 흥미를 가질 겁니다.”
“하지만 그가 관심을 가진다고 해도 문제네. 그가 대가를 바란다면 외면하기 힘들어.”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있을 틈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도움을 청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거래란 그런 거니까요.”
장로들은 이견을 말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들 또한 그게 최선의 수라는 걸 알고 있었다.
못마땅한 건 못마땅한 거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부족의 미래까지 감정에 맡기는 건 옳지 못한 일이라고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체득했을 뿐이다.
혼란스러웠던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 같아 데이아는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의견을 정리했다.
“그러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겠습니다. 그 시절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면 저희들의 청에 관심을 기울여 줄 테니까요.”
회의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사실상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슈발체베인 백작령의 상태가 어떠한지 그들이라고 모를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모두의 이해가 일치했다. 자그마한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장로들에게서 풀려나 겨우 집으로 돌아온 데이아는 무뚝뚝한 여동생을 볼 수 있었다.
“나 왔어, 나이아.”
머리카락도 피부도 모두 새하얀 그와는 다르게 소녀는 자신의 색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었다. 흥 하고 고개를 돌린 나이아가 입술을 삐죽인다.
“왜 또 그래?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너무 늦었어. 밥도 혼자 먹었다고.”
그제야 회의가 밤늦게 끝났다는 걸 자각한 데이아가 살며시 나이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솔직하게 몸을 기대는 동생을 보며 흐뭇하게 웃는다.
“오늘은 노튼 설원에서 이상한 아이를 만났어.”
“이곳에서? 설마 수상한 아이는 아니겠지?”
흘러가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별거 아닌 것에도 자연스럽게 눈꼬리가 올라간다. 데이아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자 나이아가 먼저 끼어들었다.
“길을 잃고 이곳으로 들어오는 아이들도 종종 있었잖아. 아마 비슷한 부류일 거야. 멍청해 보였거든.”
물론 자신의 온천까지 점령할 정도로 담력이 장난이 아닌 아이였지만. 혹시라도 들킬세라 뒷말을 삼킨다.
데이아는 동생의 손을 꼬옥 잡았다.
“나이아, 백작령은 위험한 곳이야. 우리 같은 아인종은 조용히 살아갈 수 없어. 그러니 항상 조심해야 해.”
“알고 있어. 오빠가 매일 말했던 거잖아.”
슈발체베인 백작령이 범죄자들의 온상지가 되었다는 건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그 아이가 내뱉은 말이 노예 상인들의 귀에 닿을 수도 있어. 우리들의 경계가 어느 정도인지 보기 위해 들여보낸 걸 수도 있다는 소리지.”
“그런 아이는 아닌 것 같았어.”
나이아의 입에서 즉답이 나오자 데이아가 손에 힘을 주었다.
“뭐?”
“그도 그럴 게, 어, 엄청나게 노력하는 녀석처럼 보였거든.”
흉측했던 손을 떠올린다. 온몸에 새겨진 상처들도. 몇 초밖에 보지 못했지만 나이아는 그게 학대의 흔적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건 고민하고 고뇌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훈장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활을 다루며 성절을 익혔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솔직하게 사과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상대와 싸우고 싶지 않았으니까.
* * *
가장 높은 건물 위에서 거리를 내려다본다. 밤에도 불빛이 꺼지지 않는 도시.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끊이지 않는 미얀시는 백작령 내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소영지였다.
규모나 크기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경제적인 측면을 말하는 거였다.
미얀시는 여러모로 특이한 도시였다.
특히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개미굴에 버금가는 암 덩어리가 이곳에 있었다.
“그러니까 하프문의 투론이라고?”
가면 아래에서 목소리가 나오자 호른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래, 가주님이 없는 틈을 타 지하경제를 활성화한 장본인이야. 여기에 있는 암시장도 그의 것이지. 주로 인신매매를 한다고 해. 돈만 된다면 몰락 귀족은 물론이고, 아인종까지 거래를 하는 악질 중의 악질이지.”
놀라울 건 없었다. 인간은 본디 돈이 되는 거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생물이었다. 정도가 있을 뿐이지 유무는 없었다.
“저기 보이는 곳이 암시장의 입구야.”
호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린 카인이 본 건 한 건물이었다. 곧게 솟은 대리석 기둥과 돔 형태의 천장. 곳곳에 모자이크 글라스가 배치되어 있는 벽까지.
건물은 박물관처럼 보였다.
“불은 다 꺼놓은 주제에 야간개장을 하는 곳이군.”
“등급제로 운영되는 곳이지. 소수만이 경매에 출입할 수 있어. 알부자들이 자주 애용하는 곳이기도 하지.”
“추잡하군.”
평가는 빠르고 냉혹했다.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란 듯이 대로변에 있는 박물관도, 그런 곳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이들도.
“하지만 나를 부르다니 의외네. 뭐든지 혼자서 할 것 같았는데 말이야.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게 밝혀지면 역효과가 나올 수 있다고 주장한 건 도련님이었잖아?”
“암시장에 돌고 도는 금화를 모두 챙기려면 네 능력이 꼭 필요하니까 부른 거다. 처리하는 건 내가 할 테니 너는 다른 녀석들과 함께 뒤처리나 해라.”
“욕심이 덕지덕지 붙어서 흘러내리는 말, 잘 들었어. 돈 앞에서는 가차 없네.”
“멍청하긴. 돈이기에 가차가 없는 거다.”
“정말 도련님은 악질이네.”
“여기에서는 대장이다.”
“네, 대장님.”
호른이 장난스럽게 답변했지만 카인은 짧게 혀를 찰 뿐,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시간이 아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