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66
166. 한서호가 몇 명인데? (1)
손가락 크기의 아주 작은 지휘봉이 허공을 휘릭—하고 갈랐다.
동시에 백여 명의 악기가 동시에 기지개를 켰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경쾌하고 힘있게—!
저, 세상에서 가장 작을 것 같은 지휘봉을 두 손가락으로 잡고 흔드는 것은 마에스트로 발터 슈몰저.
그리고 그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는 건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이었다.
그들의 연주가 홀을 가득 채운다. 출구 앞에 서 있어도 바로 앞에서 연주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음압(音壓).
그들의 위명이 오히려 호사가들의 말솜씨가 부족해 축소되어 왔음을 알리듯, 연주는 대단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맹렬히 움직이는 발터.
실로 오랜만의 지휘였다.
병실에 갇혀 얼마나 기다렸는가.
한편, 그의 지휘를 받고 있는 연주자들의 얼굴에도 희열이 피어오른다.
발터 못지않게 고대했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가장 존경해 마지않는 마에스트로가 돌아와 자신들을 연주해주길.
어떨 땐 그늘처럼 촘촘하게, 어느 순간엔 하늘을 향해 치솟는 비행기의 흔적처럼 정갈히 소리가 뻗어 나간다.
수개월 만에 맞춰봐도 스위스 장인의 시계처럼 완벽히 들어맞는 조화.
그 모든 것이 발터의 손끝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탁—.
그렇게 모든 연주가 끝나고.
발터가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아주 작고, 뾰족한···.
이쑤시개.
마치 홀러웨이 교도소에서 칫솔로 지휘를 했던 에설 스미스처럼, 발터는 이쑤시개로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병실에서 이 작은 이쑤시개로 홀로 지휘를 했던 기억을 되살려가면서.
······지휘대를 내려온 발터가 이쑤시개를 입에 물었다.
뒤따라온 악장, 로날드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그거 괜찮은 아이디어 같습니다. 구하기도 쉽고 경제적이기까지 하네요.”
지휘봉의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특히 세계 최고의 지휘자가 사용하는 지휘봉이라면 당연히 가격 또한 특별할 수밖에.
로날드의 농담에 피식 웃은 발터가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이후로는 없어. 그저 안녕을 고한 거야. 병실에서의 나에게.”
그렇게 말한 발터가 느리지만, 힘 있는 걸음으로 향한 곳은 사무실.
사무실 문 앞에서 대기 중인 비서에게 그가 물었다.
“오늘 더 이상 스케줄은 없지?”
“네. 한서호의 첫 지휘가 있다는 말씀만 하셨었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여트막한 미소가 그려진다.
“가장 중요한 스케줄이 있었네. 기대되는군.”
출발점이 다르다는 건 이미 몸소 겪었다.
그렇다면······.
‘네게 흐르는 시간은 어떨까?’
남들보다 느릿하게 나아가도 이미 역사에 남을 음악가가 될 수 있을 재목일 터.
몹시 궁금했다.
그런 희대의 천재는.
지금, 어디쯤을 지나고 있을까.
#
—————!
여덟 마디를 지났을 때, 해금과 바이올린이 절묘하게 합쳐졌다.
여러 줄을 겹쳐 놓은 듯 판판해진 화음 위로 가야금이 과감히 뛰어들었다.
마치 외줄을 타는 곡예사처럼 튀어 오르고 낙하하는 선율.
나는 스타카토(Staccato)를 수십 종류로 나눈 것처럼 예민하게 손을 움직여 가야금의 소리를 조절했다.
뒤이어 반대 손을 가슴께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나머지 악기들의 소리가 점차 딸려 올라온다.
영상으로 보았던 장면과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투쟁의 기억을 천천히 음악에 녹여내었다.
하지만 기억만으론 부족했고, 나는 좀 더 정서적인 부분을 채워나갔다.
바로, 한(恨).
국악에 빠질 수 없는 요소 중 하나잖나.
그렇기에 나는 브리너로서의 한과 한서호로서의 한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결국, 내 두 생의 기억과 감정이 모두 녹아들어간 음악이 만들어진다.
누군가 지휘는 인생을 닮았다던 그 말이 단순히 젠체를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는 걸,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다.
발터도 내게 말했었지.
이제부턴 네 그릇의 몫이라고.
그가 말한 그릇은 단순한 음악적 재능을 뜻하기도 했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바로, 사람 그 자체가 경험한 시간의 크기.
그게 어느 정도냐에 따라 지휘의 수준이 달라진다는 거다.
······그리고 그건.
‘내가 누구보다 자신 있는 것.’
격동하는 선율을 손끝으로 그려내며 내가 슬며시 입매를 올렸다.
게다가 이 곡······.
——————!
심지어, 내가 만들었어.
······.
첫 협주가 끝났다.
고작 한 번.
하지만 연주자들은 마라톤 결승을 통과한 것처럼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였다.
금세라도 허물어질 듯 지친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클래식은 국악을, 국악은 클래식을.
그리고 의문을 던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방금의 연주는, 연주를 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마치 하나의 소리가 되어 바람 앞의 갈대처럼 이리저리 부는 대로 흔들렸달까.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어떻게 연주했는지도 모를 그들의 협주가.
단 한 번도 내본 적 없던 소리를 만들어냈다는 것.
그게 지금도 심장이 떨릴 정도로 아름다웠다는 것.
‘내가 이런 연주를?’
모두가 같은 생각이 스치고.
전율이 흐른다.
그렇게.
그들은 연주되었다.
#
······며칠 후.
악보를 일일이 연주하며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서 홀가분하게 작업실을 나왔다.
마침 녹음실에서 나온 강준서와 김영태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
이 사람들은 오늘 두 탕이다.
회사에서 다른 영화 녹음 하나 뜨고, 곧장 나와 함께 문화재단으로 이동해 ‘광대’ 녹음을 할 예정.
“수아 누나, 소현 누나는 아직 녹음 중이에요?”
“응. 수아가 계속 한 번 더 녹음하겠다고 해서. 소현인 그거 기다리는 중.”
“열심이네요.”
내 대답에 김영태가 고개를 내저었다.
“너무. 진짜 너무.”
강준서도 덩달아 혀를 내두르더니 이내 살짝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근데 저래서 괜찮을까?”
“왜요?”
“수아, 퀸 엘리자베스 나가잖아. 근데 다른 일을 너무 열심히 해. 지금 다른 참가자들은 전부 콩쿠르 준비에만 집중하고 있을 텐데.”
그의 말에 내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녹음이 한창인 녹음실. 문을 바라보다가 툭 말했다.
“아직 6개월이나 남았잖아요.”
“6개월밖에 안 남은 거지. 요즘 제대로 준비하는 애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콩쿠르 하나 딱 정해서 그것만 판다더라.”
미간을 찌푸렸다. 반년도 긴데. 초등학생 때부터? 마치······.
콩쿠르를 위해 음악을 하는 것 같잖아.
“근데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한 콩쿠르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한다는 게?”
그러자 김영태가 머릴 긁적이며 말했다.
“우리 같은 보통의 연주자들은 그래야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보이니까.”
그 말도 틀리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 결국 관점의 차이일 뿐인지도 모른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걸 작곡가들이 원할까 싶어요.”
오로지 콩쿠르를 위해 연주되는 곡.
내가 그런 곡을 작곡한 작곡가였다면.
······그건 좀 슬플 것 같은데.
“음악이잖아요.”
약간의 투정을 담아 말했다.
그리고 강준서와 김영태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뗐다.
“음악가고.”
“······.”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픽 하고 웃으며 주억이는 김영태.
“난 여전히 네 말에 완벽히 동의할 수는 없어. 근데, 좀 두근두근하네. 그 말은.”
서로 마주 보며 웃는데, 강준서가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토독톡— 뭔가를 열심히 쓰기 시작한다.
뭔가 하고 슬쩍 물었더니······.
“받아적으려고.”
“뭘요?”
“네 말.”
“뭔···왜요?”
“나중에 네 위인전 집필하게 되면 이 얘기도 넣으려고.”
“······.”
말문이 턱 막힌다.
그 와중에 대체 왜 메모장이 벌써 빽빽한 건데?
언제부터 그런 끔찍한 계획을 세웠는지 묻고 싶지만 관뒀다.
때론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거니까.
때마침 녹음실 문이 열리며 신수아가 말총머릴 흔들며 나왔다.
“오래 기다렸지?”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파닥거리는 강준서와 김영태.
나는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궁금한 걸 물어보았다.
“만족스러웠어요?”
“어?”
내 질문에 눈을 깜빡이던 신수아가 이내 답한다.
“응. 만족스러웠어.”
“축하해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돌아섰다. 여전히 신수아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지만 개의치 않고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오늘 나의 첫 녹음도, 만족스럽길 바라면서.
#
저잣거리에 모여 어제 산 명품백, 근처 파스타 맛집, 새로 나온 미니밴 얘기가 한창이던 배우들이 홍 감독의 부름에 몰려들었다.
모니터 앞에 둘러선 그들에게 홍 감독이 말 대신 보여준 것은 며칠 전 촬영했던 장면.
다른 것이 있다면 약간의 색교정과 CG. 그리고 결정적으로 음악이 입혀져 있었다.
그렇게 모니터링이라기엔 애매한 작은 상영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홍 감독이 의도한 대로, 어리둥절하던 배우들의 눈빛이 점차 달라진다.
선혈이 낭자한 장면을 보며 흥분한 눈빛들이라니. 모르는 이가 보면 섬뜩할 정도의 광경이었다.
배우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장면이 후작업으로 어떻게 바뀌었는지 체감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영상의 퀄리티가 어디까지 대단해질 수 있는지도.
사실감이 더해지고, 현장감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영상미 위로 입혀진 구슬프면서도 장대한 음악.
‘벌써 녹음했구나!’
영상이 끝나자, 가장 앞에서 화면을 지켜보던 주인공, 한세경이 입꼬릴 올렸다.
“이런 류의 촬영에서 배우가 제작진을 믿는 건 당연하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감독 정말 이 가셨네요.”
말없이 빙그레 웃는 홍 감독.
“그리고 음악은······.”
한세경이 덧붙였다.
“말도 안 되네요.”
그녀가 생각하는 영화 음악의 매력은 한 장면을 위해 존재한다는 거다.
그 생각에 완벽히 부합되었다.
“이 음악이 다른 곳에 쓰이는 건 상상이 안 가네.”
오로지 그 순간의 감성에 귀속된 음악.
홍 감독이 자신을 칭찬했을 때 보다 더욱 환하게 웃으며 끄덕인다.
그뿐만 아니다. 근처에 있던 모든 배우들이 동조하고 있었다. 심지어 멀찌감치 서 있던 자신의 매니저까지도.
감독도 아니고 시나리오도 아니고 음악 때문에 영화를 고르는 게 어딨느냐고 이해 못 하던 매니저였는데 말이지.
피식 웃으며 이번엔 옆을 보았다.
동생 역을 맡은 채이연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이거 보니까 다음 씬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좀 잡히는 것 같아서요.”
“오호? 한번 맞춰볼까?”
한세경과 채이연 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의 표정도 영상을 보기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욕심 한 덩이가 올라간 얼굴로 촬영을 준비한다.
“너 미쳤어? 네가 거기서 나서긴 왜 나서!”
“그치만, 영한 대감님은 좋으신 분이란 말이야···.”
“그게 뭐? 좋으신 분이라 칼까지 막아준다니?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냥 문 걸어 잠그고 싸움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누가 이기는지 그런 거 관심 끄고!”
“우릴 다스릴 사람들이잖아! 근데 왜 관심을 꺼?”
자연스레 시작된 리허설.
저잣거리엔 아까와 같은 웃음기가 사라졌다.
대신, 더 좋은 그림을 만들기 위한 열기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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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빈. 영상 심사 면제자 명단 들어왔어?”
“아니, 아직.”
동료의 물음에 고개를 젓는 터빈.
그들은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진행하는 주최 측의 직원들이었다.
그리고 영상 심사 면제자란 주최 측이 정한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으로 이미 검증된 연주자들을 영상 심사 없이 곧바로 예선에 올리는 규칙을 뜻했다.
“오늘 들어온다고 하지 않았어?”
“아직 퇴근 시간까진 한 시간 정도 남았잖아.”
으쓱이는 터빈에게 동료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아무래도 할 일이 없나 보다. 갑자기 오지랖까지 부리고.
“근데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예고편.”
“무슨 영환데?”
“몰라.”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고 예고편을 보는 거냐며 동료의 고개가 기울었다.
그러자 터빈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냥 한서호가 이번에 OST 참여한 영화라길래 흥미가 생겨서.”
“그래?”
모니터를 힐끔 본 동료가 다시 터빈을 보며 말꼬릴 올린다.
“그거 나도 흥미로운데?”
“그러게.”
“나 소프라노 꽤 재밌게 봤는데.”
“난 그거. 제목이 모차르트 비슷한 거였는데···.”
맛 좋은 냄새를 맡은 좀비마냥, 직원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몰려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