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291
291. 꽃 (2)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가야 할 곳이 있지도 않았기에.
나는 꽤나 오랫동안 길 위에 서 있었다.
백한길 회장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 앉아서 가만히 기다렸다. 혹여 내 생각에 방해가 될까 봐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는 듯했다.
그렇게 나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텅 빈 길 위에 생각을 채웠다. 울퉁불퉁한 길이 반듯이 메꿔지도록.
“이제······ 가죠.”
아무리 오래 있어도 충분할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완벽할 수 없다.
그녀의 마지막은 내게 미지의 영역이었고.
나는 이 미지의 영역에서 돌아섰다.
노란 유채꽃이 들판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곳을 바라보며 백한길 회장과 차로 돌아왔다.
“이것 좀 봐.”
기다렸다는 듯이 박 실장이 나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화면 속에는 이곳의 풍경이 옮겨져 있었다.
노란 꽃과 그 사이에 있는 나와 백한길 회장.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어때? 괜찮지?”
“그러네요. 예뻐요.”
두툼한 담요부터 얼른 옆으로 치운 백한길 회장이 물었다.
“뭐가?”
“실장님이 사진 찍어주셨어요. 저랑 회장님 나오게. 이거 저한테 보내주세요.”
“잠시만······보냈다. 확인해봐.”
핸드폰으로 들어온 사진을 백한길 회장에게 보여주었다.
그도 픽 하고 웃으며 내려다보더니 박 실장에게 말했다.
“난 이거 인화해서 액자에 부탁해.”
“알겠습니다~.”
자신이 찍은 사진을 마음에 들어 해서 기분이 좋다고 덧붙인 박 실장이 핸들을 잡았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뒤적거리며 덧붙인다.
“다음 목적지가······만하임. 이리로 쭉 가면 되네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밴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몸을 살짝 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빠르게 멀어지는 들판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자세를 고쳐 앉는다.
여전히, 노란 들판이 옆을 스치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괜스레 서글퍼지는 건······.
그날의 그녀가 더는 지나올 수 없었던 길을.
내가 바라보며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
······며칠 후.
만하임과 바덴바덴에서의 짧은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빡빡한 일정을 맞이했다.
이제 더는 쉴 틈이 없었다.
우선 한 필하모닉의 휴가도 함께 끝났고, 대학교는 개강이 코앞이었으며, 슬슬 곡 작업도 시작할 계획이었다.
그렇기에 아침 일찍, 직원들이 출근할 시간에 더 클래식 사옥으로 향했다.
마침 커피 머신 앞에 홍보팀 직원이 있어 인사를 했다. 조르르 내려오는 검은 커피 줄기를 동아줄인 양 간절히 바라보던 그녀가 날 보며 물었다.
“뭐야, 왜 이렇게 일찍 왔어?”
“해야 할 게 많아서요.”
그러자 직원이 천천히 고갤 끄덕인다.
“원래 휴가 다음이 바쁜 법이지. 그나저나, 휴가는 잘 보냈어? 별일 없었고?”
“네. 회사도 별일 없었죠?”
“여기야 뭐, 매일 똑같지. 한서호 지휘자님 인터뷰 좀···하는 전화가 하루에 수십 통씩 오고. 그것도 언어도 다양하게. 그리고 이메일로 들어가면 그 몇 배가 와 있고. 아직도 끈질기게 곡 의뢰를 하는 할리우드 감독들에, 한서호가 연인과 휴가차 여행을 간 게 아니냐고 떠보는 기자들까지.”
연인과의 여행? 커다란 전동 휠체어도 간편하게 실을 수 있는 밴에 연령대도 다양한 남자 셋이서 유럽을 횡단한 게?
나도 모르게 억울함이 묻어났을까. 내 표정을 본 직원이 이해한다는 듯 끄덕였다.
“막내가 뭐라고 답하냐며 쩔쩔 매길래 내가 확 뺏어서 그랬어. 내가 원래 그런 거 막으려고 온 사람인데, 우리 장독은 물 샐 틈이 없다고. 아니 애초에 물을 안 넣는다고. 그런 상황 생기면 읊을 매뉴얼도 다 만들어놨는데 이면지로 쓸까 고민 중이라고.”
“죄송해요.”
“얼씨구. 표정이 안 죄송한데?”
“사실 제가 죄송할 건 아니잖아요.”
씩 웃으며 말하자 그녀도 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다시 커피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암튼, 그것 말곤 뭐 별일이랄게······.”
말끝을 늘리던 그녀가 불쑥 고갤 돌려 벽을 보았다. 그곳에 걸린 캘린더 보드를 확인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오늘 있네.”
덩달아 나도 고갤 돌렸다.
그리고 오늘 날짜에 적혀있는 이슈들 중 하나를 보곤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아, 오늘이었구나.”
호프만 쇼의 방영일이었다. 그것도 내가 촬영했던 회차의.
직원이 주억거리며 다 내려진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
“방영하고 나면 또 한바탕 난리겠네. 안 그래도 사람들의 기대가 엄청나던데.”
말없이 웃으며 끄덕이자 직원이 팔짱을 끼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넌 맘 편히 음악하렴. 우리가 귀찮은 일은 다 해결해줄 테니.”
감사하다 말하며 머신으로 다가가 커피를 내렸다. 위이잉,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물씬 풍겨오는 커피 향을 맡는데, 직원이 무언가 떠오른 듯 ‘아 맞다.’하고 손뼉을 친다.
“네 방에 화분, 그거 네가 물 주라고 부탁했잖아. 그거 매번 선물했던 친구가 와서 주고 갔어. 방학인데도 아주 열심이더라.”
“네, 들었어요.”
유채봄에게 언제든 이곳에 와도 좋다고 했다. 심지어 내 방에 드나들어도 된다고 했지. 피아노를 치거나, 책장에 꽂힌 읽고 싶을 때 말이다.
“걔가 서호 너 무지 존경하는 거 같던데.”
픽 하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첫 수업에서 유채봄이 나에게 말했던 당돌한 선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한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음악가는 교수님이에요!’
존경의 이유(?)를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그렇게 직원과 수다를 마치고 2층 내방으로 올라왔다.
방안이 어쩐지 화사하다. 창가에 화분 하나 두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시선 끝으로. 코끝으로.
익숙한 색감과 향기가 아른거렸다.
“하필 또 같은 꽃이네.”
열차 사고가 일어난 지점. 그곳 양옆을 가득 메웠던 유채꽃.
마치 그곳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그때 느꼈던 감정들이 다시금 고개를 든다.
마음이 착 가라앉······.
“······?”
씁쓰름해지는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였다. 다가가자 화분 옆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포스트잇들이 눈에 들어왔다.
[올 때마다 하나씩 붙이려고요. 유채꽃이니까 노란 포스트잇.]아무래도 유채봄이 왔을 때 붙이고 간 것 같지.
[교수님이 말씀하신 책들 읽으려구 들어 왔어요. 온 김에 물도 주고요!]시선을 빼앗겼다. 자연스레 앉아 읽게 된다.
노란 길을 따라 눈을 움직인다.
[교수님 없는 교수님 방 좀 심심해요. 다음 곡 제목은 이걸로 할까요? 교수님 없는 교수님 방. 되게 쓸쓸한 노래가 될 듯해여 ㅜ]피식 웃음이 흘러나오고.
[아 참 저 계속 이 방에 있는 건 아녜요! 밖에서 공부도 하고 연습도 하다가 틈틈이 들어와서 붙이는 거랍니다!]고개를 내저어도 본다.
너무 유채봄다워서.
[교수님 얼른 오세요···작곡 너무 어려워여···]포스트잇이 끝났을 땐 아쉽기까지 했다.
전부 읽어버린 포스트잇을 빤히 바라보다가,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하루에 하나씩만 붙인다며.”
누가 보면 내가 죽기라도 했고, 유채봄이 몇 달에 걸쳐 이곳에 온 줄 알겠다.
그래봤자 내가 유럽으로 떠난 시간은 일주일. 그녀가 온 건 3일 정도인데 화분 옆은 포스트잇 천지다.
다시 또 웃음이 난다.
미소를 띈 채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꼬릴 내렸다.
“······.”
아실리에게 조금 미안해지는 건······.
가라앉던 기분이 슬그머니 부유해서일까.
#
한편, LA 다운타운에 위치한 지하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술집으로 운영되던 곳이 이젠 밴드 러스트의 합주실이 되어 있었다.
————!
테이블과 의자를 모두 치운 텅 빈 공간에서, 거친 일렉 기타의 굉음이 질주한다.
현란하면서도 질서 있게 스케일을 밟아나가던 연주가 마침내 진동을 일으키며 끝이 났다.
스틱을 쉴 새 없이 내리치던 러스트의 드러머가 땀을 닦아내며 뒤로 넘어갔고, 베이스와 퍼스트 기타 주자도 기진맥진한 얼굴로 자신들의 리더를 보았다.
반 은퇴까지 했었던 댄 호프만.
세컨 기타에 보컬까지 소화해낸 그가 한껏 밝은 표정으로 기타를 내려놓는다.
“휴—.”
짧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 털썩 앉는 댄.
벽에 커튼을 둘러서 소리 울림을 잡아야겠다고 피드백하는 그를 보며 멤버들이 헛웃음을 집어 삼켰다.
“흐아······정말 모든 곡을 다 할 줄이야.”
“그러니까. 농담인 줄 알았는데 결국 다 해버렸네.”
“너 솔직히 말해 봐. 음악 하고 싶었지? 근데 사람들이 은퇴한 줄 아니까 창피해서 못 한 거지?”
공허한 목소리로 경악을 하는 멤버들을 보며 댄이 피식 웃었다.
······한서호와의 쇼 촬영 후.
오랜만에 만나 맥주와 함께 회포를 푼 그들은 합주실부터 찾았다. 급하게 구하느라 웃돈까지 얹어 이곳을 구했다.
하지만 막상 악기 앞에 앉았을 때, 뭘 해야 할지는 막막했다.
‘뭐부터 해야 할까?’
그 물음에 고민하던 댄이 답했다.
‘돌아가서, 읽어보자.’
‘음? 돌아가서···뭐?’
그게 무슨 소리냐며 바라보는 멤버들에게 그가 말했다.
‘우리가 그동안 만들었던 모든 곡을, 전부 연주해보는 거야.’
그렇게 데뷔 20년 차 밴드의 전곡이 방금 모두 연주되었다. 전세계를 뒤흔들었던 히트곡부터 완전히 묻혀버렸던 곡들까지.
한숨 돌린 멤버들의 감상이 이어진다.
“그래도 오랜만에 시간 순으로 전부 연주해보니까 느낌이 묘하네.”
“왜 이걸 하자고 했는진 알 것 같아. 우리 아무래도 할 얘기가 많겠는데?”
“그러고 보니 오늘 호프만 쇼하는 날이잖아?”
‘호프만 쇼’라는 말에 질색하는 댄.
“호프만 쇼. 호프만 쇼. 호프만 쇼.”
오히려 훌리건처럼 외쳐대는 멤버들 덕분에 단숨에 짐을 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얘기하러 가자.”
“‘호프만 쇼’는 안 보게?”
“끙. 안 봐도 돼.”
이미 몇 번이고 촬영본을 돌려보았기에, 방송을 챙겨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멤버들은 생각이 달랐다.
“우린 보고 싶은데?”
“그러니까. 한서호가 대체 어떻게 했길래 네가 다시 음악을 하게 만든 건지 너무 궁금하다니까?”
“오랜만에 케밥 집 어때? 거기 사장님한테 호프만 쇼 좀 틀어달라고 하고. 같이 보고 나서 우리 얘기하면 되지.”
“아마 부탁 안 해도 틀어져 있을걸? 무려 한서호가 게스트잖아.”
우르르 합주실을 나서는 멤버들을 보며 댄이 눈을 끔뻑였다.
머릴 긁적이던 그가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그들 뒤를 따랐다.
‘뭐,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네. 아니. 그것도 좋을 것 같네.’
내심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와 쇼에서 얘기했던 이야기들은 분명.
멤버들에게도 많은 생각을 던질 테니까 말이다.
······찬란한 영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