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298
298. 모두의 음악 (2)
“끝인가요?”
영국 여왕의 눈이 거울에서 떨어졌다.
그녀의 화장을 담당하던 이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예, 폐하.”
“그러면······이제 가볼까요?”
모든 준비를 마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만찬을 위해 걸음을 옮긴다.
백발이 무성한 그녀의 발걸음이 소녀의 것처럼 가벼웠다.
유난히 음악가들과의 만남을 좋아하는 그녀였기에.
그때만큼은 여왕이라는 무거운 왕관이 아닌 청자라는 옷을 입게 되었기에.
모든 것을 조심히 계산해서 이성적으로 얘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 그저 들은 것에 대해 솔직하고 감성적으로 말할 수 있기에.
걸음도, 입꼬리가 가벼웠다.
게다가 오늘은 조금 더 특별한 날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끝없이 감탄하며 듣고 있는 곡들이 있는데, 그 곡들을 전부 만든 이가 지금 저 너머에 와있기 때문이었다.
“폐하께서 입장하신다 알릴까요?”
함께 걷던 직원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큼이나 민망한 것이 없기에.
직원이 문을 열어젖힌다.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인사를 해왔고, 그녀 또한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중엔, 기대했던 이도 있었다.
다악의 천재, 제2의 모차르트, 작은 거장······.
한서호.
살랑이는 바람처럼 미소지으며, 흐르는 강물처럼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상석에 앉자 음악가들도 착석한다.
부드럽게 음악가들을 살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어떤 곡을 연주할지 선곡 목록도 보지 않았답니다. 너무 기대되어서요. 이 기대를 조금이라도 지우기 싫었거든요.”
“폐하께서 그렇게 기대하시니 저희는 더욱 긴장해야겠네요.”
영국의 거장, 런던 필하모닉의 마에스트로가 웃으며 답했다.
“듣고 싶으신 곡이 있는지 여쭤보려 했는데 힌트를 얻긴 어렵겠군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밴드, 트릴로지의 리더가 아쉬워했다.
그밖에도 영국에서 각 장르의 대가로서 전 세계를 뒤흔든 이들의 대답이 이어졌다.
그 모든 영국인들 사이에서, 유일한 한국인이 입을 열었다.
“제건 보셔도 되셨습니다.”
“···?”
음악가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왕은 그의 말뜻을 이해한 듯 고개를 주억였다.
“새로운 곡이니 그렇겠네요.”
한서호의 신곡. 이에 음악가들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그가 이번 자선 공연에서 곡을 처음으로 선보인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걸 본인 입으로 확정하는 순간이었으니까.
‘음악가의 음악가라는 건가.’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석처럼 한서호에게로 이끌리는 것을 보며 여왕은 내심 감탄했다.
그리고 그 감탄은 만찬이 시작되며 더욱 커져갔다.
유일한 외국인인 그가, 그렇기에 이 자리가 사뭇 불편하리라 예상했던 그가.
‘너무나 자연스럽다.’
모든 예법이 들어맞는다. 심지어 어떤 것은 너무 낡아서 고루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것이 과도한 격식이나 지식의 뽐냄으로 느껴지지 않아 그 자체로 고귀해 보인다.
고귀함에 정점에 있는 그녀조차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클래식(Classic).
그 이름에 걸맞는 이가 눈앞에 있으니.
······.
···즐거운 음악가들과의 만찬이 끝나고, 여왕은 독대를 위해 응접실로 향했다.
따뜻한 홍차 두 잔이 응접실로 들어오고, 뒤이어 독대의 주인공이 뒤따라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마치 이곳이 처음이 아닌 사람처럼.
참 신기한 사람이란 생각을 이어가는데, 그가 먼저 말을 뗐다.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에 여왕은 그가 초대장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그녀 또한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저 빚을 갚은 거예요.”
“빚···이요?”
“그대의 곡을 들으며 위로를 받고 있거든요. 간혹 이 커다란 궁이 답답한 새장처럼 느껴질 때마다요.”
누군가는 이렇게 화려하고 커다란 새장이 어딨냐며 반문할 말에 그는 너무나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 그랬던 적이 있습니다.”
“그대가요?”
“물론 저는 책임감 같은 게 아닌, 스스로를 부끄러워해 가두었지만요.”
“그건 의외네요.”
혹여 침묵이 속절없이 흐를까, 그와 나눌 음악 얘기들을 몇 가지 준비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음을 깨닫는다.
마치 즉흥연주를 하듯 그와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나저나, 초대장을 받는 이들이 굉장히 인상 깊더군요.”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궁금했던 것이 있어 물었다.
하이든에 모차르트, 베토벤까지.
그들에게 초대장을 보낸 이가 낭만주의 시대 이후로 누가 있겠나.
“제 곡에 도움을 준 이들이라서요.”
“그 얘긴 벨라에게 들었어요. 과연 그렇겠다 싶더군요. 클래식이란 건 결국 아주 오래전부터 지켜져 온 것들. 새로운 클래식은 그 위에 계속 이야기를 쌓는 과정이라고 하셨으니까요.”
최근 호프만 쇼에서 한서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에 한서호가 주억인다.
“그렇죠. 그들이 만든 역사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여왕은 알게 된다.
여왕과 음악가. 그 전혀 다른 것 같은 이들 사이에 대저 어떤 연결점이 있어서 그토록 그의 음악이 와닿았는지.
“내가 그대에게 위로를 받았던 이유를 알 것 같네요.”
그게 무엇이냐는 한서호에게 그녀는 대답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간혹 저를 ‘지키는 자’라 표현하는 이들이 있지요. 예로부터 내려온 것들을 올곧게 지키는 자리가 바로 이곳이니까요.”
새장처럼 답답할 때도 있으나.
어느 날은 자신이 새장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이든 새로이 쉽게 바뀌고, 바꿀 수 있는 시대에, 늙었다 하여 버려질 운명의 새를 지키는.
그러니 클래식을 지키는 새장과도 같은 그에게.
동질감이 들 수밖에.
“그대도, 나처럼 지키는 자였네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상대의 반응을 보며 감탄한다.
호수와 같다. 어떤 물장구가 일어도 결국 잔잔해지는.
당혹스레 잠시 휘청이던 눈빛이 또렷해지고, 그가 말한다.
“여왕님과 같은 칭호는 제게 너무 과분합니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제 인생을 바친 적이 없으니까요.”
선명히 답하고서, 흐릿하게 덧붙인다.
‘전부 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뿐.’
그의 사연은 알지 못한다. 직원이 뽑아준 그에 대한 정보가 있으나,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다. 자신에 대해 알려진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그렇기에 더욱 궁금해진다.
그대는 어떤 자리에 앉아 있는가.
그대는 어떤 관을 머리에 썼는가.
“저는 그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들려왔다.
“기억하는 자입니다.”
#
“이번 공연에 대해 기대를 아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여왕과의 독대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
자신을 왕실 소속 기자이자, 음악 평론가라 소개한 이가 악수를 청했다. 사실 기자라기 보단 왕실의 홍보 담당자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오기 전까지 단원들과 간단한 인터뷰를 나눈 참이었다.
격식 있는 정장에 안경, 고급스러운 가죽과 만년필을 들고 있는 모습이 참 영국스럽달까. 왕실답달까.
‘간혹 저를 ‘지키는 자’라 표현하는 이들이 있지요. 옛부터 내려온 것들을 올곧게 지키는 자리가 바로 이곳이니까요.’
···영국스러운 것이 왕실다운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기자가 몸을 앞으로 당기며 속삭였다.
“저작권이 없는 곡이라고 들었는데······.”
역시 왕실 소속답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그 이유가 있을까요?”
“그 곡이 자선 공연에서 공개되니 잘 어울리지 않나요?”
“그렇죠. 퍽 잘 어울리는데, 이유가 그것만은 아닐 것 같아서요.”
그의 말이 맞았다. 숨길 이유도 없기에 나는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제 이야기를 빠짐없이 넣었으니, 빠짐없이 들어주었으면 해서요.”
“누가요?”
“제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들이요.”
이미 정보가 많은 그는 손가락을 튕기며 답했다.
“초대장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나는 그저 씩 웃었다. 그게 긍정임을 알기에 덩달아 웃으며 노트에 무언가를 적는다. 그러다가 돌연 탄식을 터트린다.
“그나저나 개인적으로 참 안타깝네요.”
“어떤 것 때문에 안타까우신 거죠?”
내 질문에 그가 답했다.
“이번 공연이 이례적으로 야외지 않습니까. 관객들이 최대한 많을 수 있게 한 조치라곤 하지만, 이게 야외면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좀······.”
미간을 찌푸리며 아시지 않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린다.
그리고 그의 질문에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팀장님, 장소 섭외 좀 해주셨으면 해요. 아주 넓은 공터로요.’
‘녹음 앞두고 갑자기 공터는 왜? 단원들하고 야유회라도 가려고?’
‘아뇨, 연습하려고요.’
‘······야외에서?’
‘공연이 야외인걸요.’
스치는 기억을 보내고서 왜 웃는지 영문을 몰라하는 그에게 답했다.
“저희가 연주를 더 잘해볼게요. 실내인 것처럼.”
“에이,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래도 야외는 야외인걸요.”
그러더니 슬쩍 날 보며 말을 이어가는 기자.
“···라고 콧방귀를 뀌고 싶은데, 그 말을 하시는 분이 지휘자님이라서 못하겠네요.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그의 말에 나는 슬며시 웃었다.
“계획, 있죠.”
“···?”
“최대한 멀리까지 들리게 하는 거.”
귀를 기울인 그가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계속 웃었다.
이후로 다른 질문들 몇 개를 던지고, 답을 들은 그가 나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떠났다.
나는 호텔 로비에 남아 남은 커피잔을 기울였다.
잔을 내려놓으며 호텔 내부에 있는 분수대를 바라보았고, 그 분수대를 둘러싸고 있는 노란 유채꽃까지 눈길이 닿았다.
‘조화려나······.’
시선이 그곳에 머물며, 생각 또한 자연스레 한 기억에 머문다.
널따란 들판에 핀 유채꽃.
그리고 그곳에서 나에게로 오고 있던 아실리.
비극적인 날이기에 입이 쓰지만, 계속 생각하게 된다. 계속 기억하기 위해서.
“······.”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뜬금없이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어쩐지,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어서.
#
“또, 또 뭐 챙기지?”
유채봄이 어질러진 방을 훑으며 묻자, 그녀가 들고 있던 핸드폰 너머에서 귀찮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챙겨야 할 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그리고 무슨 하루 자고 오는 건데 이렇게 난리야.
최겨울의 반응에 유채봄이 콧방귀를 뀐다.
“얼씨구? 너 어제 옷 쇼핑 엄청 한 거 다 알거든?”
-그, 그건 내가 가을에 입을 옷이 없어서······.
변명을 들으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유채봄이 히죽 웃었다.
“톡 보냈어. 이거 봐봐.”
-뭔데?
“교수님 기사. 교수님은 저기서도 내 옆에 계시네~.”
-뭐라는 거야···.
“거기 사진 봐봐.”
-봤어. 뭐, 교수님 혼자—.
“옆에 유채꽃이 있잖니.”
-······.
곧이어 최겨울이 질색팔색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애초에 저런 반응을 기대했는지 낄낄대며 웃던 유채봄이 핸드폰 화면에 떠 있는 사진을 조금 더 바라보다가 얼른 옷장으로 달려갔다.
“오케이, 내 펄스널 컬러~.”
그곳에서 샛노란 원피스를 꺼내 들은 유채봄.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