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297
297. 모두의 음악 (1)
곡이 완성된 후에도 평소처럼 대학에서 새로운 학생들을 가르쳤다.
동시에 지난 학생들과도 계속 교류를 이어갔다.
그들 중 몇몇이 유채봄처럼 자신의 곡을 가져왔고, 나는 그것을 스스로 다듬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유채봄의 곡 작업도 꾸준히 지켜보았지.
강의가 모두 끝나고 교수실에서 학생들의 곡을 봐주다가 다음 수업 준비를 이어간다. 그러다 날이 지면 곧장 더 클래식 사옥으로 옮겨가서 남은 일들을 마무리 지었다.
일이 평소보다 일찍 끝날 때면 백한길 회장에게로 향했고, 그러지 않은 날엔 집에서 부모님과 짧은 시간이라도 함께 보내려 했다. 아무리 바쁜 순간이어도 그래야 한다는 걸 나는 전생을 통해 배웠으니까.
그렇게 나는, 모든 삶의 골목을 빠짐없이 지나쳐 큰길로 들어섰다.
강의가 없는 날, 문화 재단 콘서트홀에서 나의 곡을 단원들과 연습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곡은 이미 완성되었지만, 그 순간이 또 다른 시작을 뜻하기도 하니까.
곡과 연주는 엄연히 다른 영역이니까.
우리는 연주를 완성시킨다. 그것에만 몰두한다. 해야 할 일이 이것뿐인 사람들처럼 그 순간을 불태운다.
그렇게, 연주도 완성되어간다. 음악이 완성되어간다.
내 기억을 모두 담고 있는 음악이라서일까.
큰길을 따라 내달리는 나에게 문득 기억 하나가 스쳤다.
항상 파격(破格)을 고집하던 친우, 파가니니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미술도, 글도, 음악도 결국 누군가 보고, 읽고, 들어주어야 가치가 있는 거야.’
그때 나는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음악만 하면 행복할 것 같았으니까.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으니까.
그것조차 안 되는 나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분명히 알고 있다.
음악의 영속성은 사람들이 얼마나 기억하느냐에 있다는 것을.
내가 전생을 기억함으로 인해서 브리너가 되살아난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 음악을 만든 부모로서, 사람들에게 오래오래 기억되길 바란다.
그러니······.
—————!
“역시 한서호 작곡가님······ 이 곡, 정말 미쳤네요. 한 필하모닉도 정말 대단해요. 이 긴 곡을 원큐에 녹음할 줄이야······ 평생 술자리에서 자랑할 거리가 생겼네요.”
이제, 모두에게 들려줄 일만 남은 것이다.
#
백한길 회장의 전용기가 공연 날짜보다 조금 일찍 비행할 준비를 마쳤다.
무대에 오를 우리는 영국에 가서도 인터뷰나 리허설 등 할 게 많았기 때문.
그렇게 공항에 모여 단원들과 비행기 탈 준비를 하는데, 비행기의 주인이 찾아왔다.
“오셨어요?”
내 인사에 백한길 회장이 차분히 웃었다.
“그래. 준비는 다 된 건가?”
“네, 이제 비행기에 올라타기만 하면 돼요.”
“그렇군···.”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둘러보는 백한길 회장.
주위 단원들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는 것 같아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한쪽에서 모 영화감독과 통화를 하다가 끊고 온 아버지가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비행기 푯값에 숙박까지. 그것도 한 두 사람도 아니고 내가 초대한 모든 이들에게 후원한 사실 때문이었다.
단순히 그 금액이 커서가 아닌, 한 기업의 회장이 자신의 아들에게 이토록 신경 써주는 것이 감사한 아버지였다.
그런데 그게······.
“아, 하하. 아닙니다······.”
백한길 회장에겐 참 불편한 일이었다.
퍽 묘한 광경이었다. 백한길 회장이 저토록 당황하는 모습은 오랜만이니.
그도 그럴 게, 전생의 관계로 지금도 사적으로는 존대하는 이의 아버지잖나. 족보가 단단히 꼬이긴 했지.
연신 감사를 전하는 아버지와 그럴수록 당혹스러워하는 백한길 회장.
그 광경을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는데, 옆에서 엄마가 물어왔다.
“뭐, 빠트린 건 없지?”
“글쎄요.”
“글쎄가 뭐니. 옷도 다 챙겼고?”
“이미 다 실어서 빼지도 못해요.”
“그래도 뭐 빠진 거 없나 잘 생각해봐. 그래야 엄마가 갈 때 가져가지.”
같은 걸 스무 번째 물어보는 걱정 가득한 엄마와.
“준비 잘하고, 연락할게.”
“넵. 아버지도 일 잘 마무리하고 오세요.”
“그러마.”
아버지와의 인사를 짧게 마무리 짓고, 그 사이 단원들과 이야기하느라 멀찍이 떨어져 있던 백한길 회장에게로 다가갔다.
“먼저 가 있을게요.”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그가 좀 더 가까이 다가오라 한다. 무릎을 굽혔다. 그와 키를 맞추고 눈을 맞추자 그가 독어로 속삭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가 같이 가야 하지 않나 싶었는데······.”
“정말 괜찮다니까요.”
“하지만 그때······.”
그의 낯빛이 그늘처럼 어두워진다.
영국 왕실에서 전생의 내가 겪었던 일 때문이리라.
그날, 모두가 당황스러워했다.
음악의 예언가!
클래식이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으니 그 유명세가 거리에까지 퍼지진 않았지만,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그 사람이.
그 행적이 남다르고, 곱씹을수록 대단했던.
그래서 위대한 음악가들이 입을 모아 극찬했던 그들의 후원자가······.
병마를 이고 휠체어에 앉아 있다는 것에.
당황은 행동으로 이어져 나에게 꽂혔고, 나는 그곳에서 꽤나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음악가들이 많은 공간에서 음악 한마디 없이, 나는 숨 막혀 했다. 마치 음악을 만나기 전의 나처럼.
······그 모든 순간을 바라본 일페르소였기에 저렇게 걱정하는 것이다.
내가 그곳에서 그때를 떠올릴까 봐.
그 순간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그의 걱정을 알기에.
나는 씨익 하고 활짝 웃었다.
“괜찮아요. 이제는.”
브리너의 대답이었다.
#
런던 공항에 도착하자, 축구선수들이 타고 다니는 커다란 리무진 버스가 다섯대나 줄줄이 와 있었다.
모두 영국 왕실이 준비한 것. 덕분에 편하게 호텔로 향해 체크인을 마쳤다.
단원들 모두 들뜬 상태였다. 누군가는 런던이 처음이라서, 누군가는 자신의 고향이라서.
오늘만큼은 마음껏 여행 온 기분을 만끽하라고 단원들에 전달하고서 나는 왕실에서 나온 직원에게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저희가 서게 될 무대를 볼 수 있을까요?”
내일부터가 리허설이다. 그러니 무대는 이미 완공되었을 터.
흔쾌히 고갤 끄덕인 직원이 물어왔다.
“그럼요. 안내해드릴까요?”
“부탁드려요.”
그렇게 시끌벅적한 단원들 사이를 빠져나와 공연장으로 향했다.
광활한 들판. 바덴바덴에서의 공터보다 서너 배는 될 법한 크기의 공연장에 조립식이라고는 믿기 힘들 퀄리티의 무대가 솟아 있었다.
“보시다시피 무대는 모두 완공되었습니다. 이제 폭죽 같은 무대 장치들만 장착하면 모두 끝나는데, 혹시 필요하신 장치가 있다면 저희가······.”
직원이 미리 언질을 준 건지, 무대를 관리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이가 나타나 내게 이것저것을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무대를 자세히 살피기보단 먼저, 다른 곳에 집중했다.
“지휘자님?”
“아, 죄송해요. 잠시만요.”
양해를 구하고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공연 날, 날씨가 맑겠죠?”
이미 알아보았음에도, 어느 때보다 날이 좋을 거라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그래도, 그럼에도.
이곳의 날씨가 변덕이 심하기에.
“네, 아주 좋을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설령 비가 온다고 해도 폭우가 아닌 이상에야 취소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취소도 취소지만, 안 보일까 봐서요.”
“네···?”
“저 위에서.”
멀뚱멀뚱 내 손끝을 바라보던 관리자가 웃었다.
“아아~드론 걱정하시는 건가요? 하긴 생중계에선 드론으로 찍는 뷰가 장관이죠. 그런 디테일까지 신경 쓰시는 걸 보니 역시 대단하십니다.”
“······.”
작은 오해가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러려니 했다. 풀 수 있는 오해도 아니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무대 장치가 뭐라고 하셨죠?”
“아 그게 무대 장치 중에······.”
#
그날 저녁, 나는 식사에 초대를 받았다.
무려 버킹엄 궁으로.
궁에서의 식사라니. 단원들은 나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지만, 정작 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곳으로 가는 게 처음도 아니거니와 여러 기억들이 얽혀있기 때문이었다.
“먼저 여왕 폐하와 이번에 무대에 서게 될 음악인들과 함께 만찬을 나눈 뒤에 독대가 있을 예정입니다.”
차로 이동하며 직원에게 오늘 일정과 기본적인 궁중 예법을 들었다. 물론 시대가 시대인지라 강요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알아만 두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맺은 직원이 어느새 멈춘 차에서 내렸다.
뒤따라 내려 직원을 따랐다. 버킹엄 궁전의 깊숙이 안쪽까지 들어왔기에 곧장 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고, 삼엄한 경비를 지나 넓은 홀에 입장했다.
정갈한 독일과 화려한 프랑스, 그 사이 어디쯤인 양식. 균형이 잘 잡혀있는 내부를 둘러보며 기다란 식탁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뒤이어 다른 음악가들도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인사 뒤에 각자의 자리에 앉는 그들.
그렇게 한 자리만 빼고 모든 자리들이 채워졌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당신이··· 음악의 예언가?’
과거, 그때처럼.
하지만 명백히 다른 반응이었다.
눈을 위아래로 훑으며 주춤거리는 사람도.
적잖이 놀란 눈빛으로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혹여 저주가 옮을까 내게서 멀어지려는 사람도 없으니.
그럼에도 사람이란 참 단순해서, 순간 움츠러든다.
더 이상 나는 그런 시선을 받지 않더라도, 비슷한 상황만으로도 좋지 않은 기억이 불쑥 나타나 나를 잡아 침몰시키려 한다.
하지만 더는 기억에 사로잡혀 휘둘리지 않는다.
주눅 들고 슬그머니 뒤로 숨는 자아를 잡아 끄집어낸다.
더는 서글프지 않았다.
브리너가 받던 시선을 한서호가 부순 게 아니다.
이것은 그저 브리너의 극복(克服)일 터.
그렇게 나는 기억을 돌파하고, 트라우마는 그 결심만으로 간단히 깨어진다.
이 간단한 게, 그토록 어려웠음을 되새기며.
나는 전혀 다른 시점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모든 기억을 통틀어 가장 후회되는 순간 중 하나.
‘헙!’
나의 고통스러운 순간을 들키던 순간.
입을 막고 뒷걸음질 치던 그녀를 바라보며 세상이 무너져내릴 것 같던 순간.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달랐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 가장 추한 모습을 들켰더라도, 괜찮을 수 있었을 것 같다.
더는 내 고통이 추함으로 기억되지 않기에.
그러니······.
‘백작님.’
문밖에서 울먹이는 그런 목소릴 들었다면.
딸깍——.
그길로 나는 벌컥 문을 열고 나가.
‘아실리, 그날은 제가 좀 아팠어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을 걸 수 있을 텐데.
‘다시, 하프를 봐 드려도 될까요?’
그렇게···.
‘오늘은 몸 상태가 괜찮네요.’
아무렇지 않게 미소지을 수 있었을 텐데.
“······.”
그것이 못내 아쉬웠고.
그래도 끝내 다행이었다.
곧 그녀가 온다면.
아마도 그녀가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랐을 이곳, 영국에서. 무대 위, 그리고 아래에.
예전처럼 마주 보고 서서 만난다면.
······나, 그렇게 말하듯 연주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