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59
059. 백야의 별 (1)
“······자작곡?”
그레고리의 반응에 파벨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형의 놀라는 표정이 한서호에게 같은 얘길 들었을 때의 자신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외모도 성격도 완전히 다른 형이지만 그래도 형제이긴 하구나, 싶었다.
“응. 서호가 자작곡이 하고 싶다네?”
“그래서? 너, 설마······.”
눈이 가늘어지는 그레고리에게 파벨이 툭 던지듯 말했다.
“허락해버렸어.”
“미친 건가?”
“그건 아닐걸. 미쳤다고 하기엔 여기 오기 전에 들은 녀석의 연주가 너무 또렷하거든.”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던 그가 이내 진지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걸 들으니 허락할 수밖에 없었어.”
그의 변명(?)에 그레고리는 침착하게 움직이던 펜을 기어이 탁하고 내려놓았다. 그가 파벨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주최 측에서 달가워하지 않을 거다. 그들이 원한 건 콩쿠르 우승자의 연주이지, 검증되지 않은 작곡가의 곡이 아닐 테니.”
“내가 보증해도 그럴까?”
“······.”
그레고리는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허구한 날 한심하게 바라보는 동생이지만, 적어도 음악계에서 녀석이 갖는 위치는 대단하다. 특히 러시아에선 더더욱. 녀석은 러시아 클래식계의 희망이자 자랑이니까.
그러니 녀석이 보증한다면 주최 측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청에서도 어느 정도 납득 하겠지. 녀석이 한서호에게 콩쿠르 추천장을 써줬을 때 로스콘서트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레고리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게 견고하게 쌓아온 자신의 명성을 걸 정도로 중요한 일인지
그렇게 못마땅해하던 차에 파벨이 말을 이어간다.
“서호는 이미 대단한 연주가야. 그건 형도 부인 못 하겠지.”
이 점에 대해선 그레고리도 반박할 생각이 없었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우승자를 대단하지 않다고 한다면 세상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혀를 깨물어야 할 테니까.
무뚝뚝하게 바라보니, 파벨의 입꼬리가 들썩이고 있었다. 장난스러운 표정은 아니었고, 약간 흥분한 듯한 얼굴이었다.
“근데, 녀석의 연주 능력이 음악적 재능의 극히 일부라면 어떨 것 같아?”
“······.”
그레고리는 다시 한번 침묵했다.
동생의 말이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표정도 한몫했다.
그동안 수없이 부딪혀왔기에 알고 있다. 속된 말로 때려죽여도 꺾을 수 없는 고집이 있다는 걸. 그리고 그럴 때마다 꼭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걸.
······참 닮지 않은 동생인데, 이럴 땐 형제 같다고 해야 하나.
그 옛날, 파벨은 음악을 해야 한다고 부모님께 대들던 자신이 떠오르는 표정이었다.
“···네가 그 정도로 자신한다면, 주최 측은 내가 설득하도록 하지.”
“응? 형이? 이렇게 순순히? 웬일이래?”
새삼스럽다는 반응이 연달아 나오자.
그레고리가 무미건조한 표정,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설득은 항상 내 몫이었어.”
끼익─쿵─.
파벨이 집무실로 돌아오자, 결과를 기다리며 구급차를 불러야 하나 고민하는 임진규가 있었다. 곧바로 시선이 온몸을 훑는다.
“······안 맞았어요?”
“다행스럽게도.”
씩 웃는 파벨. 목적을 이룬 자의 미소라 임진규도 마주 웃었다.
“잘 설득하셨나 본데요?”
“아직 주최 측 입장도 들어봐야겠지만, 애초에 곡 선정은 자유롭게 해도 좋다고 한데다가(-자작곡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겠지만) 형이 설득하겠다고 하니 문제없을 것 같아.”
“이걸 허락한 이사장님이 대단한 건지, 허락을 받은 마에스트로가 대단한 건지. 아니면 이런 상황을 만든 서호 그 녀석이 대단한 건지······.”
파벨이 픽 하고 웃으며 주변을 훑었다.
“그러고 보니, 서호는 갔나 보네?”
“네, 티켓을 받더니 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면서 먼저 갔어요.”
“여분의 티켓 안 줬으면 큰일 날 뻔했네.”
“그러게요. 여기서 친구라도 사귄 건지.”
느슨하게 웃으며 끄덕이던 임진규가 갑자기 파벨을 힐끔거리더니 머릴 기울였다. 조금 신기하다는 눈빛이었다.
“근데, 마에스트로.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
“제가 서호를 지켜보고 응원하는 이유는 마에스트로께서도 아시죠?”
파벨이 끄덕였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동안 임진규와 나눈 대화를 통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연주 한 번으로 이루지 못한 꿈에서 벗어나도록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고, 결국 콩쿠르 우승으로 꿈을 간접적으로나마 이뤄주기도 했지. 그리고 자국의 클래식에 대한 인식을 바꿔주고 있기까지 하다.
짐작 가는 것들을 나열하자, 임진규가 크게 동조했다.
“정확합니다. 그래서 전 솔직히 녀석이 이뻐 죽겠습니다. 여전히 놀랍기도 하고, 또 자랑스럽기도 하고요. 꼭 모차르트와 친구를 하고 있는 기분이랄까요. 근데, 마에스트로께선 왜 그렇게 서호를 지원해주시는 건지 문득 궁금해져서요.”
“나도 너와 비슷해.”
파벨의 대답에 임진규가 푸슬푸슬 웃으며 농담 섞인 말투로 물었다.
“마에스트로도 모차르트와 친구가 되고 싶으셨나요?”
“아니.”
고갤 저은 파벨이 손을 휘휘 저었다. 지휘였다.
“난 모차르트를 지휘해보고 싶었거든.”
웃음을 터트리는 임진규.
하지만 그 웃음이 그리 길게 이어지진 못했다.
처음으로 한서호를 봤을 때.
그때 녀석의 연주에 해일이 밀려오는 듯하던 감상이 떠올라 버렸기에.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정말 가능할지도.’
그런 생각이 그때처럼,
해일처럼 밀려온다.
#
재단 건물을 나와 거리로 나섰다.
나름 모스크바 두 달 차다 보니 이제는 거리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8시가 넘었지만, 여전히 여전히 대낮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한국으로 돌아가면 해 지는 것부터 적응이 안 되겠는걸.’
한국은 여름이 지나가면 6, 7시만 돼도 깜깜해질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지난번처럼 음악 소리를 따라 걷고 있다.
물론 이번엔 목적지가 있는지라 중간중간 크렘린 궁전의 지붕도 확인하면서.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역시나 가장 고민이었던 문제가 낱낱이 드러나 머릿속을 가득 메워버렸다.
내가 연주로 이 거리를 표현할 수 있을까?
과거, 거리엔 영감이 넘친다고 말했던 그 이름 모를 음악가처럼?
······그의 말에서 힌트를 얻어 거리를 나섰고, 결국 곡을 완성했다.
하지만 곡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음악의 완성이라 할 순 없다. 음악이란 연주되는 것까지가 완결이니까.
그렇기에 틈나는 대로 걷고 있다.
모스크바의 거리···
정확히는 백야와 함께 시작되고 끝날 모스크바의 여름을 더 완벽하게 연주하기 위해서.
내가 느낀 영감을 모두에게 경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인가 하고 봤더니 단톡방이었다. 곧 개학이라는 화제로 아까 시끌시끌하더만.
[채이연: 난 이제 끝났어······.]소프라노 촬영이 이제 끝났나 보다.
처연한 문장에 피식 웃다가 문득 여러 가지 궁금한 것들이 떠올라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들려오기 무섭게 쾌활한 목소리가 넘어온다.
-뭐야, 뭐야. 먼저 전화를 다 하고 무슨 일이래~.
“촬영은 잘 되고 있나 궁금해서.”
-그렇구나. 촬영이 궁금했구나···.
묘하게 풀이 죽은 듯한 목소리길래 물었다.
“실망했어?”
그러자 퍼뜩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 응? 아니? 지금 좀 피곤해서······아니, 그렇다고 통화를 못 할 정도는 아니구! 촬영은 무지 잘 되고 있어! 보면 깜짝 놀랄걸?
“그래?”
-응! 주인공 어릴 때랑 성인이 된 후를 동시에 촬영하고 있는데, 난 거의 다 끝나가. 이제 몇 번 안 남았어. 그리고······.
채이연이 재잘재잘 쏟아내는 얘길 듣고 있으니 어느 정도 윤곽이 그려진다. 소프라노의 진행 상황과 내가 돌아가면 해야 할 것들까지도.
“돌아가면 엄청 바빠지겠네.”
-지금도 너 되게 바쁘다던데.
“누가?”
-기사 엄청 올라와. 콩쿠르 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메인에도 걸려. 거기서 백야 축제 준비 중이라며. 베이···베이···.
“베이노프 심포니.”
-그래! 거기랑! 근데, 이번엔 생중계를 안 해주는 것 같더라···.
“그래도 며칠 뒷면 영상 따로 올라갈걸?”
-오, 그럼 그거로 봐야지~.
그리곤 만족스럽게 웃던 채이연이 물어왔다.
-그래서 지금은 뭐하는데?
“그냥, 걷고 있어.”
-와··· 외국 거리 걷는 거, 진짜 좋겠다.
그녀의 말에 자연스레 주변 풍경을 훑었다.
한산한 거리와 한가로운 사람들. 그 배경에 자작하게 덮인 음악까지.
“응, 좋아. 문제는 이 좋은 걸 어떻게 표현할지가 고민이지.”
-음? 뭘 표현하는데?
“지금 이 거리. 내가 이번에 연주해야 할 곡이 모스크바의 거리를 영감으로 만들어졌거든.”
-거리를 영감으로······헤, 어렵네.
배시시 웃는 목소리에 나 또한 따라 웃는데, 채이연이 덧붙였다.
-근데, 잘 할 거야. 난 윤짜르트 촬영 때 봤거든.
“응? 뭘?”
-봄이 흩날리는 거.
#
······생각지도 않던 응원을 받고서 광장으로 향하는 길.
나는 내가 연주했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학교 운동장에서 마을의 축제가 열리고, 주인공을 비롯한 클래식 단원들의 어설픈 연주와 이어지는 쇼팽 왈츠 No.5 Op 42.
그때 나는 봄을 흔들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흩날리는 꽃잎이 경쾌한 왈츠와 너무나 잘 맞아 떨어질 것 같아서.
‘의도하는 대로 청중이 느낀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비록 그걸 채이연만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어딘가 싶다. 그때의 감각을 발전시켜 연주하면 이번엔 서너 명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그 서너 명 안에···
저분은 꼭 포함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광장. 언제나처럼 빅토르 할아버지가 연주 중이었다.
‘오늘도 사람이 꽤 많네.’
처음과 비교하면 정말 두, 세 배는 되어 보인다. 듣기로는 할아버지와 내 협주 영상이 인터넷에 돌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점차 알려졌다고.
처음엔 내가 오늘도 있을까, 하고 오는 이들이 많았다면. 지금은 할아버지의 연주를 듣기위해 찾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멀찌감치 떨어져 서서 공연을 지켜보았다. 온전히 할아버지만의 무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할아버지의 첼로 연주를 얼마나 들었을까.
연주가 모두 끝나고, 박수치던 관객들까지 모두 흩어지고 나서야 정리 중인 할아버지께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행복해하시는 얼굴이 선명해진다.
“할아버지.”
“어! 연주자님.”
“말 편하게 하시라니까요.”
“어떻게 그래요. 우리는 음악으로 만난 사이 아닙니까. 선생님이라고 부를 걸 참고 있는 걸요.”
“······그냥 연주자님이 나은 것 같아요.”
‘그래요, 연주자님.’ 하며 웃는 할아버지. 어쩐지 낚인 듯한 기분을 느끼며 내가 물었다.
“그나저나, 오늘도 사람 엄청 많던데요?”
“연주자님 덕분이죠. 제가 고작 이런 실력으로 환호를 받는 호사를 누리네요.”
“받으실 만했어요.”
“여기서 도로 하나만 건너도 유명한 연주자들의 연주가 흘러나오는걸요.”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원이 실연을 어떻게 이기겠어요. 더군다나 멋진 중년의 연주인데.”
할아버지가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연주자님이라 한다고 복수하시는 겁니까? 뭐,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중년······. 그랬다면 참 좋겠어요. 너무 일만 하지 말걸. 첼로를 좀 더 진지하게 대해 볼걸··· 그런 생각이 듭니다.”
“후회하시기엔 지금 그렇게 하고 계시잖아요.”
“그렇죠.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하고 있어요. 그저 취미일 뿐인데.”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내 생각을 내뱉었다.
“취미는 진지하면 안 된다고 누가 그래요. 바쁜 시간 쪼개서 쓰는 취미이기에 더욱 진지해야죠. 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자 날 빤히 바라보는 할아버지.
아차 싶어 입술을 핥았다. 내가 너무 가르치려든 걸까?
사과하려고 마음을 먹는 순간, 할아버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역시 선생님이라 부르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60년을 넘게 살아왔는데도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아니, 어쩌면 외면해왔을 것들을 연주자님은 벌써부터 명료하게 보고 계시네요.”
하하. 그저 웃었다. 그리고 얼른 화제를 돌린다. 나도 이렇게 되기까지 두 인생이 걸렸다고 말할 순 없잖아.
“그··· 제가 백야 축제에서 공연을 해요.”
“알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아내와 함께 보러 가고 싶었는데······ 백야의 별(-백야 축제 속 음악 축제)은 이미 표가 매진이더라고요.”
“다행이다.”
“···?”
“그럼 와주실 수 있겠네요?”
얼른 품에서 티켓을 꺼내 건넸다.
엉겁결에 티켓을 받아든 할아버지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날 바라본다.
잠시 후, 살짝 붉어지는 눈시울에서 나는 또다시 어떤 영감을 받는다.
“···고마워요. 연주자님.”
사실, 그건 내가 할 말이었다.
“제가 감사합니다.”
······짧은 밤이 끝나고, 날이 밝는다.
그런 날이 반복되며, 조금씩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밤이 길어지고 있음을.
그리고 그걸 자각할 때쯤, 우리는 마침내 마지막 연습을 마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해가 지지 않는 여름.
그 끝을 연주하기 위해, 축제의 한가운데로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