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iger follows the wild flowers on the cliff RAW novel - Chapter 28
28. 다가갈 수 없는
의원의 집에서 돌아온 후로도 달래는 보름을 누워 있었다. 몸에 새겨진 흔적들이 옅어져도 하루 종일 병든 닭처럼 졸기 시작했다.
약속한 대로 달래는 이전의 누이로 돌아왔다.
몸보신에 좋다기에 백구 한 마리 사 왔더니, 어찌나 좋아하던지. 백구와 달래는 사이좋게 포동포동해졌다.
잘 먹고 잘 자는 다래를 보며 장호는 마냥 행복해서 밤벌레처럼 통통하다 놀려 대기 바빴다.
여느 때처럼 달래의 다리를 베고 누운 장호는 얼굴에 닿은 배가 꿈틀거리자 기절할 듯 놀랐다.
두말 않고 산파의 집을 찾아 나섰다.
집으로 데려온 산파의 말에 장호는 하늘이 무너진 듯 주저앉았다.
완벽한 가정을 꿈꾸며 행복해하는 모습에 장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장호는 자루가 부러질 때까지 밤새도록 도끼질을 했고 달래의 배신은 집 주변의 나무들이 치렀다.
달래의 배가 불러 올수록 장호의 마음은 타들어 갔다. 날짜가 많이 남았다는 달래의 말에도 산파를 집에 상주시킬 요량으로 길을 나섰다.
비싼 값을 치르고 사흘 후에 오겠다는 산파의 약속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새하얀 눈 위로 뿌려진 붉은 핏자국들, 그 끝에는 척추뼈가 드러난 백구가 누워 있었다.
백주 대낮에 범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는 길에 보았던 핏자국을 따라 달려간 곳에는 다리가 뜯겨 나간 달래가 있었다. 작은 몸에서 쏟아 낸 피가 새하얀 눈밭에 붉은 매화처럼 피어 있었다.
“아무 일도 없는 거야.”
그의 눈을 가리는 가녀린 손을 붙잡고 오열했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누이의 죽음으로 빛은 사라지고 암흑만이 가득한 겨울이 시작되었다.
아들, 오라비, 낭군, 아비가 되는 것조차 허락지 않은 하늘은 장호가 움켜쥐는 모든 것을 부숴 버렸다.
배 속에서 탯줄을 놓았다면 친모 또한 죽지 않았으리라.
큰스님과의 대화를 떠올린 장호가 뜨거운 숨결을 토해 냈다. 벽운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그 무엇도 움켜쥐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건만…….
“오라버니?”
조심스레 얼굴을 들이미는 창의 숨결이 봄날의 미풍처럼 그의 코끝을 간질였다.
두근. 두근두근.
커다란 눈은 별처럼 반짝이고, 긴 속눈썹이 나비처럼 팔랑였다. 달처럼 하얀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가 잘 익은 복숭아처럼 곱다.
‘움켜쥐지 않을 것이다.’
물러앉는 장호에게 창이 슬금슬금 들러붙었다.
“소녀는 호야를 찾으러 나왔는데, 내외하는 오라버니는 예서 무얼 하십니까?”
“생각한다.”
“내외하는 오라버니께서 앞으로 어떻게 어색하고 불편하게 서걱거릴지 생각하십니까.”
두근거리는 맥이 귓가에서 울려 대자 행여 그녀가 들을까 장호는 또다시 물러앉았다.
“길 떠나려면 좀 자 두는 것이 좋겠다.”
“날이 찹니다.”
“들어가 쉬거라.”
“북쪽이라 봄이 늦는 건가…….”
딴전을 부리던 창이 장호를 힐끔거렸다.
‘자는 척하면 들어올 줄 알았더니, 영 안 들어올 기세네. 범이라도 나오면 어쩌려고 저러지?’
나가란다고 진짜 나갈 줄도 몰랐고, 이리 청승 떨고 있을지는 더더욱 몰랐다. 게다가 목소리는 왜 이렇게 슬프게 들리는지. 도저히 혼자 두고 갈 수가 없다.
“지리산보다 더 추운 것 같습니다.”
“들어가라 하였다.”
“때가 되면 가지 말래도 갑니다.”
“…….”
“내외하다 얼어 죽으시렵니까.”
숨을 들이켠 장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외를 왜 해야 하는지 물었더냐.”
“답을 찾으셨습니까.”
천천히 고개를 돌린 장호가 창을 응시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제요?”
‘네 마음 살피느라 화여령을 포기했을 때.’
속절없는 마음을 따라 장호의 몸이 그녀에게 기운다.
‘의심했어야 했다. 네 마음의 짐을 덜어 주려 다시 화여령으로 향할 때 확신했어야 했다.’
화공의 죽음 앞에 영영 듣지 못할 목격담보다 미안해할 그녀를 먼저 떠올렸다. 아무리 가혹한 진실이어도 알아야 한다 생각했건만.
‘네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오……라버니?”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창은 점점 더 기울어 오는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을 두드리는 울림이 그녀의 마음을 뒤흔든다.
그녀를 가득 담은 눈동자, 그윽하게 밀려든 숨결에 창은 눈을 감아 버렸다.
닿을 듯 말 듯 한없이 조심스러운 입맞춤은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봄비처럼 잔잔하다. 꽃잎에 맺힌 이슬 흐르듯 그녀의 숨결을 앗아 가는 단단한 입술은 정작 제 것은 내어 주지 않으며 애를 태웠다.
묵직한 향기를 잡을 수 없는 창은 배고픈 아이처럼 서글프고, 그녀를 움켜쥐지 못하는 장호의 손가락이 바위를 긁어내렸다.
“창…….”
흩어지는 숨결이 아쉬운 창은 호안으로 변해 버린 눈동자가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오라버니, 내가 심통 부려서 미안해.”
“틀렸다.”
동백꽃처럼 발그레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다시금 입술을 댔다.
“어찌하여 내외를 해야 하는지 묻지 않았더냐.”
“…….”
“네가 여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서글픈 음성에 터질 듯 두근거리던 창의 가슴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욕심부리지 않을 것이다.’
그의 생에 움켜쥐었던 두 명의 여인은, 어미였기에 죽었고, 아내였기에 죽었다.
“너는, 너만은…… 누이로 머물러 주었으면 좋겠다.”
“왜 그래야 하는데?”
“깨진 그릇에 고운 보석을 담아 흠집을 만들까.”
‘마음이 깨져 버릴 만큼 좋았어?’
깨진 그릇이라는 말에 창은 코끝이 아려 왔다.
“그렇게나 행복했어?”
‘사내가 되어 주지 못해 괴로웠다.’
“이제는 아무도 안 되는 거야?”
‘이제는 너를 품고 싶어 괴롭다.’
그 무엇 하나 대답하지 못한 장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의 정이 깊었다고 오해하는 편이 이제 막 자라났을 마음 베어 내기 수월하리라.
‘8년을 준비한 여정에 달래도, 짝귀도 없이…… 너만 가득하다.’
별처럼 반짝이는 보석에게 향하던 손길이 그녀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에 멈췄다.
‘나는 너를 잡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 또한.’
장호의 손을 잡아 살포시 머리에 얹는 창을 내려다보는 그의 가슴에 서글픈 파도가 밀려든다.
“마음에 나를 담지 말거라.”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 창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껏 조여든 가슴이 비수로 찌르는 듯 쿡쿡 쑤셔 왔다.
‘그렇게 죽을 것 같은 얼굴 해야 하는 거야?’
첫 입맞춤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서글픈 고백이라니.
‘언제까지 죽은 아내 붙잡고 살 건데?’
달을 감싼 구름은 왜 저렇게 다정해 보이는지!
소춘풍이 했던 말이 가시처럼 박혀 들었다.
“흩날리는 복사꽃처럼…….”
그의 숨결이 닿았던 입술을 어루만졌다.
“내가 휘어 감겼네.”
무릎을 세워 두 팔로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복사꽃 날리는 법을 오라버니한테 배울 줄이야.’
물고기 잡으러 갔다가 물고기에게 낚시질 배운 꼴이다. 우울해진 창이 무릎에 턱을 고였다.
머리를 쓰다듬던 다정함도, 발을 감싸던 따뜻함도, 너른 등에 업혔을 때의 포근함도 그립다.
‘곱단이 취급이 싫은 게 아니었어. 곱단이처럼 되고 싶지 않았던 거지.’
여인이 되고픈 마음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들켜 버렸다.
‘전쟁은 선제공격이 최선인데…….’
시큰거리는 코끝을 문지르던 창의 입술에서 새하얀 숨결이 끝도 없이 터져 나왔다.
새까만 밤하늘에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임금보다 귀하다며, 보석 하나 안 사 줬나?”
어머니의 옥노리개로 호두를 까먹다 들킨 것이 한두 번인가. 귀한 보석일수록 단단한 법이다.
낭림으로 향하는 하검산을 넘어 향로봉에 도착했지만, 짝귀의 목격자는 만날 수 없었다.
“먼 길 오셨는데 어쩝니까. 형님께선 작년 여름에 호식을 당해서 그만…….”
목격자인 형의 죽음을 전하는 나무꾼 막돌은 눈두덩이 심하게 붓고 입술이 터져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뼈 한 줌 못 찾지 못하고 나뭇가지에 걸린 옷가지만 수습하여 화장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엽전 꾸러미를 건네자 극구 사양하던 막돌이 눈물을 쏟았다.
“일면식도 없는 처지에 갚을 길 없는 부의금을 어떻게 받겠습니까.”
“망자의 극락왕생을 바라는 마음 전하며 어찌 돌려받을 생각을 하겠소.”
“고맙습니다, 나으리. 호식자의 집이어도 괜찮으시다면 하룻밤 묵어가시지요.”
“마음은 고마우나 개를 밖에 둘 수가 없소.”
“같이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묵어만 가신다면 이놈 마음이 덜 미안하겠습니다.”
벌떡 일어선 막돌이 맞은편 방문을 열곤 누더기 이불을 폈다. 난감한 듯 바라보던 장호와 눈이 마주친 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에 불을 때는지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막돌이 방 안으로 밥상을 들였다.
“차린 것이 너무 없어 면구스럽습니다.”
멀건 시래깃국에 붙은 보리 몇 알이 궁색하기 짝이 없어도 장호는 묵묵히 밥그릇을 비웠다.
“차려 온 성의를 봐서 한 숟가락 들거라.”
“오라버니 많~이 드세요.”
호야를 끌어안고 누운 창을 바라보던 장호가 그녀의 그릇을 묵묵히 비웠다.
팔을 베고 누워도 속절없이 그녀에게로 흐르는 시선을 거둘 길 없어 눈을 감아 버렸다.
‘어쩌다가, 이렇게 스며들었던가.’
처음 겪는 난감한 상황에 봉착한 장호는 늘 그렇듯 지난 시간을 되새기며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분명 조짐이 있었을 것인데…….
‘있었구나.’
폐가에서 몸을 더듬어 대던 손길이 떠올라 가슴에 손을 얹었다. 토끼 찾는 아이들을 피해 그를 덮쳤을 때도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몸이 먼저 알았던가.’
장창에 빠진 그녀에게 달려갈 때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아니면 마음이 앞섰던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어찌나 곱던지, 성난 콧등에 주름마저 어여뻤다.
그래서 앙증맞은 발을 놓고 싶지 않았다.
돌이켜 보니 조짐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둔하고 무디기가 목검만도 못하다.’
그를 치마폭에 휘어 감지 못해 안달하던 기생들이 목석같다 조롱해도 화 한 번 낸 적 없었거늘.
그녀의 말 한 마디에 노여웠으며,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이 곤두서고 가슴이 덜컥거렸다.
‘화여령이 아니었구나.’
그보다 훨씬 이전에 시작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장호는 얼굴을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