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iger follows the wild flowers on the cliff RAW novel - Chapter 45
45. 무저갱
『토이모, 태화당 연회에 안 가?』
『푸린하고 둘이 다녀와.』
『연회에 초대받은 건 우리가 아니잖아.』
사르후의 닦달에도 창문에 턱을 괴고 앉은 토이모는 들은 척도 않는다.
‘조선으로 돌아갔을까?’
『정말 안 갈 거야?』
토이모를 졸라 대는 사르후를 보다 못한 푸린이 기지개를 켜며 탁자에서 일어섰다.
『사르후가 좋아하는 교월이 연회에 불려 갔다잖아. 그냥 다녀오자.』
『안 간다니까.』
『너의 예쁜이가 창문으로 나갔다고 창문으로 올 거라 생각해?』
『창이야. 내 예쁜이 이름…….』
벌써 사흘째 창문만 쳐다보는 토이모가 답답했던 푸린이 창가에 걸터앉았다.
『제 발로 돌아올 것 같지도 않고, 태화당 소당주에게 부탁해 보는 건 어때? 요동에서 소당주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던데.』
사라져 가는 창의 발자국을 쳐다보던 토이모가 후다닥 옷을 챙겨 입고 문으로 향했다.
『뭐 해? 안 가?』
얼씨구나 따라나선 친구들과 함께 말에 오른 토이모는 태화당을 향해 내달렸다.
“저를 기억하십니까?”
명륜원으로 들어서던 장호는 값비싼 흑초피 두루마기를 두른 야인을 응시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은 처음 보았을 때와 달리 앳되어 보인다.
“창은요? 그녀도 함께 왔습니까?”
‘그 이름 내가 지어 준 것이다.’
이름 알려 준 것도 기분 나쁜데, 두리번거리던 토이모가 창과의 이야기를 쏟아 내자 장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둘이 이야기를 얼마나 나누었기에 그새 이리도 말이 유창해졌단 말인가.’
“창과 함께 송가대원까지 찾아갔는데.”
“두 분 벌써 인사를 나누셨습니까.”
느긋이 다가선 청림의 시선이 장호와 토이모를 훑었다.
“아니면 구면이십니까.”
“길에서 마주친 적 있소. 말 목장을 지킬 개를 구한다 했었지.”
‘개가 아니라, 창 이야기를 하던데? 그것도 조선말로?’
장호를 바라보던 청림이 토이모에게 미소 지었다.
“인사드리시지요. 조선에서 오신 운장입니다.”
“여진 동만호의 아들, 오음회 오도리 동타의모첩목아, 조선의 운장께 인사드립니다.”
싸늘한 시선에도 토이모는 이곳 어딘가에 창이 있으리란 생각에 한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창은요? 운장의 누이는 어디 계십니까?”
‘오호라~ 소담화가 말한 정혼녀와 홍연이 말하는 거지가 운장의 누이로 이어지는 건가?’
흑요석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던 청림이 장호에게 웃음 지었다.
“운장께 누이가 있었습니까.”
“내게 누이는 없소.”
묵묵히 연회장으로 향하는 장호를 쫓으려는 토이모의 앞을 막아선 청림이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가 봅니다.”
“아닙니다. 담갈색 눈동자를 가진 아주 어여쁜 누이가 있습니다.”
“운장께서는 아내분과 청풍각에 머물고 계십니다.”
“아내요?”
‘아주 어여쁜 담갈색 눈동자를 가진 아내지요.’
장호의 착석을 확인한 청림이 물러서며 손을 뻗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숭왕의 입장을 알리는 외침과 함께 풍악이 울리며 아름다운 기녀들이 오색구름처럼 밀려들었다.
상석의 숭왕을 중심으로 오른편엔 장호와 친위대가, 왼편으로는 청림과 토이모의 친구들이 자리했다.
복잡하게 얽혀 드는 시선들 사이로 술 따르는 기녀들이 자리하자 그들의 거리는 한참이나 벌어졌다.
시작부터 쉴 새 없이 술을 들이켜는 숭왕 때문에 술동이를 나르는 시종들의 발걸음이 부산하다.
벌떡 일어선 숭왕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젊은 범은 그 기세가 태산 같고, 늙은 범 또한 백전노장처럼 노련하여 범 사냥은 전쟁과 다를 바 없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전례 없는 태평성대의 명나라 친위대는 전쟁을 방불케 했던 오늘의 범 사냥에 환호했다.
「범을 대적하는 것은 매 순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 오늘 그대들은 관운장의 현신을, 진정한 맹장을 보았다!」
우레 같은 함성 속에 숭왕은 한껏 격양되어 장호를 칭찬했지만, 정작 그의 관심은 청풍각으로 향해 있다.
‘신발까지 잃어버릴 정도로 다급했을까.’
흙 묻은 발을 떠올리던 장호는 청림과 눈이 마주쳤다.
미소 짓는 그에게 술잔을 들어 비우자 이번에는 열여섯 살짜리 야인이 두 눈을 번뜩인다.
‘토이모…….’
나이를 묻는 숭왕에게 열여섯이라 답하던 토이모를 떠올리던 장호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연배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곤두서 있었던가.’
열여섯 살짜리를 상대로 살기를 피워 올리고, 투기까지 부렸던 장호는 한숨이 새어 나온다.
‘누가 기다린다고 했나?’
도착한 첫날을 제외하곤 내내 장호와 각방을 써 왔다. 예쁘게 꾸며진 방은 너무 커서 허전하고, 깨끗한 비단 이불은 장호만 못하다. 호야를 안고 장호의 품에 잠들던 창은 가족처럼 서로의 체온을 나누던 토굴이 그리웠다.
침상에 누워 뒤척이던 그녀의 손가락이 입술을 훑었다.
“하아…….”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에 닿을 듯 말 듯 애태우던 첫 번째 입맞춤이 생각났다. 한없이 조심스러워서 봄바람처럼, 봄비처럼 잔잔하던 입맞춤이었다.
‘두 번째 입맞춤. 흐응.’
베개에 얼굴을 묻으니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것 같다.
‘세 번째야. 그날 두 번 했어.’
아쉬움을 남기고 멀어지던 묵직한 향기가 분명 입술에 다시 닿아 속삭였다.
‘내가 여인으로 보인다더니, 그래서 그렇게…….’
흩날리는 봄비 같던 입맞춤이 오늘은 여름날 소나기처럼 거칠게 쏟아졌다. 서늘했던 그날과 달리 창을 부둥켜안은 그의 열기는 온몸을 태워 버릴 것처럼 뜨거웠다.
영원처럼 이어지는 입맞춤에 그를 밀어냈을 때도 쪽빛 눈동자는 굶주린 범처럼 흔들림 없이 확고했다.
‘고운 옷 입고 머리 땋아 내려서 그런가? 갑자기 막 그냥 확 그냥 어여뻐 보이고 그랬나?’
서투른 고백에 불현듯 눈을 뜬 창이 몸을 일으키며 베개를 끌어안았다. 어딘가 이상하긴 했지만, 토끼도 못 잡던 단이가 사슴을 물어 왔을 때만큼이나 갑작스럽다.
침상에서 내려선 창은 문가에 기대어 잠든 총총에게 두루마기를 덮어 주곤 조용히 방을 나섰다.
“봄바람이 순식간에 태풍으로 변할 수도 있는 건가?”
마당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서던 그녀는 그림자가 일렁이는 원형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
마당을 가로지른 토이모가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토이모…….”
“너 여기서 뭐 해?”
다급한 그의 물음에 창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건 내가 물어야지. 내가 아니라 네가 왔잖아. 너 여기서 뭐 하는데? 어떻게 왔어?”
“말 타고 왔어.”
“아니. 어떻게 온 거냐고?”
“말 타고 왔어. 왜 이렇게 말랐어? 그가 널 굶겼어?”
안 그래도 어설픈 조선말이 횡설수설 엉켜들고, 흥분하여 들썩이는 만주어 억양에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날 왜 기다려?”
“오라버니라며. 낭군 아니라며. 조선에서는 오라버니하고 혼인하지 않아. 거짓말한 거야? 낭군 구하려고?”
오라버니 낭군 조선 오라버니 혼인 낭군? 어지러운 단어의 조합에 창의 머릿속이 팽팽 돌기 시작했다.
“뭐……라는 거야?”
멍하니 쳐다보는 창의 모습에 토이모는 울분을 토했다.
“운장에게는 누이가 없대. 너는 그럼 뭐야?”
“운장? 오라버니를 만났어? 어디서?”
“연회에서 만났다.”
오싹하리만치 가라앉은 목소리에 창이 토이모의 옆으로 고개를 뺐다.
“어? 오라버니. 늦는다더니…….”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토이모의 빈자리를 주시하던 장호는 지체 없이 청풍각으로 향했다.
다시 볼 일 없다는 그녀의 말을 믿었다.
열여섯 살짜리에게 샘이나 부리는 반편이까지 되었지만, 손을 붙잡은 그들을 보니 속에서 부아가 치민다.
“토이모, 손 좀 놓고.”
“오라버니야? 낭군이야?”
악착같이 놓지 않는 토이모의 손을 밀어내던 창이 빠드득 이를 갈았다.
“설명하기가 좀 그래. 나중에 말해 줄게.”
“말해. 위험하면 내가 도와줄게.”
도토리 까먹는 다람쥐처럼 속닥거리는 둘에게로 다가선 장호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 손, 놓아라.”
쪽빛 눈동자로 푸른빛이 스며들자 창은 자신도 모르게 토이모의 손등을 토닥였다.
“토이모? 손부터 놓는 게 좋겠어.”
“나는 대답을 들어야 해. 정말 운장의 아내인 거야?”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한데.”
“나는, 나는 너를 첫 번째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
새된 비명을 참을 수 없었던 창이 주먹을 입에 물었다. 몸에서 기운이 쪽 빠져나가며 다리가 후들거리는 찰나, 장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두 발이 번쩍 들린 창은 그의 품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 라버니?”
허리로 감겨든 장호의 팔이 숨통을 조이고, 토이모에게 잡힌 손목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놓아라.”
“운장 먼저 놓으십시오.”
성난 범과 어린 늑대 사이에서 창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갔다.
“창, 나와 여진으로 가자.”
“손목이 잘려 돌아가고 싶은 것이냐.”
“여진의 만호와 전쟁이라도 벌이시렵니까.”
“너는 손목 없이 전쟁을 치르겠구나.”
구렁이처럼 조여드는 장호의 팔 힘에 신음을 토해 낸 창이 토이모의 손목을 감쌌다.
“나는 그와 조선으로 돌아갈 거야.”
“낭군은 아내를 아프게 하지 않아.”
창백한 그녀를 바라보는 토이모는 눈물이 차올랐다.
“난…… 널 아프게 하지 않아.”
토이모가 손을 놓는 순간 그녀를 품에 안은 장호가 청풍각으로 돌아섰다.
“언제든! 내게로 와.”
힘차게 소리치는 토이모의 뒤로 원형의 대리석 문에서 또 하나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스쳐 가는 외사랑이 요란도 하다.’
문에 기대어 섰던 청림은 혀를 차며 돌아섰다.
“탐욕보다 무서운 것이 미련이거늘. 쯧쯧.”
미련이란 바닥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 심해와 같은 구덩이 속으로 영원히 떨어지며 스스로를 잃어 가는 것이다.
‘내 것이 되지 못할 바엔 부숴 버리는 것이 낫다.’
한 여인에게 집착했던 아버지는 결국 미련의 발자취를 따라 해인사의 길목에서 참살당했다.
“사소한 욕심이 탐욕이 되고, 간절한 소망이 집착으로 이어져 미련의 다리를 놓게 되면, 그 끝은 파멸이다.”
세상의 이치를 꿰뚫는 청림이건만, 아버지의 족자가 무저갱으로 향하는 열쇠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족자를 펼치는 순간 죽은 정혼녀가 되살아나고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미련은 서서히 그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반월당으로 돌아온 청림은 또다시 족자를 펼쳤다.
“경국지색도 아니거늘……. 여인의 팔자는 제 어미 따라간다더니, 사내를 끌어들이는 기질 또한 대물림인가.”
새하얀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리는 대신 옥쌍엽 단작노리개를 만지작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