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iger follows the wild flowers on the cliff RAW novel - Chapter 80
80. 가문의 저주
뇌성처럼 울리는 할매의 경고에 창은 눈앞이 아득하다.
생부의 이름만 알았어도 피할 수 있었던 인연.
‘휘문의 아들이었어. 청림의 이복형…….’
버려지기 전까지 유 진사를 아비라 믿었던 장호는 생부나 이복동생이 존재한다는 것 외엔 아는 것이 없었다.
“이미 죽어 버린 아들은 어쩔 수 없고, 나는 손자라도 되찾아야겠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천륜은 그리 끊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말은 안 들어도 네 말은 들을 것이니, 잘 다독여 데려오려무나.”
‘내가, 낭군을 잡을 미끼가 되리라 생각하는 건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린 창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그를 떠날 거라곤 생각 않으십니까.”
“너는 그를 떠나지 못한다.”
“…….”
“죽어서도 널 놓지 않을 테니까.”
손이 귀한 것은 저주가 아니다. 진짜 저주는 유씨 가문 사내들의 지독한 외사랑이다. 하나밖에 볼 줄 모르는 그 외눈박이들의 사랑이 3대, 4대, 5대를 거쳐 핏줄을 말려 가며 대물림되고 있었다.
“내 아들은 너의 어미를 놓지 못하여 죽은 것이다.”
유 진사가 쏟아 내는 진실은 창의 가슴에 파편처럼 박혀 들고, 하얀 거품을 입에 문 여인이 눈앞에 아른댔다.
‘어머니를 부르는 거였어. 죽은 남편이 부르던 그 이름을…….’
청림과 장호의 목소리가 섞여 들자, 창은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입을 주먹으로 막았다.
원수의 아들 형제 사이에 놓인 창은 그 기구한 운명 앞에 하늘이 무너진 듯 눈앞이 아득해졌다.
“도망치려 한다면 그는 네 주위의 모든 것을 부숴 버릴 게다. 휘문이 연희에게 한 것처럼.”
‘내가 아니면, 그 어떤 사내도 널 가질 수 없다.’
환청처럼 들려오는 청림의 협박에 창은 유 진사를 향해 두 눈을 부릅떴다.
‘낭군을 닮은 저 껍데기 속에 청림이 들었구나.’
“장호의 마음을 돌려놓으면, 나는 너를 용서하고 기꺼이 손자며느리로 인정할 것이다.”
유 진사는 하얗게 질려 가는 그녀를 쉬지 않고 압박했다.
“나는 아들을 죽인 너를 손자며느리로 들여 죗값을 치를 테니, 너는 원수의 아들과 살며 그 값을 치르거라.”
“죗값이요.”
‘흔들리지 마라. 네가 흔들리면 나는 길을 잃는다.’
기적처럼 들려온 장호의 목소리가 그녀의 전신을 감싸자 담갈색 눈동자로 노란빛이 스며들었다.
“흔들리지…… 않아.”
“너는 부모의 원수를 갚은 것뿐이라 생각하겠지만, 어찌 되었든 살인은 죄다.”
“용서는 당신의 몫이 아닙니다.”
“역적의 딸로 평생을 쫓기며 살려 하느냐. 유씨 가문의 안주인이 되어 들어앉으면 누가 널 알아보겠느냐. 안채의 담벼락은 네게 든든한 성채가 될 게다.”
“당신 그늘에 들어가느니 이 조선 땅을 떠나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반격에 유 진사가 숨을 들이켰다.
“장호가 사실을 알게 되면 서로에게 지옥이 될 게다.”
“역적의 딸에겐 삶 자체가 지옥이었습니다. 제가 두려워하리라 생각하셨습니까.”
흔들리기 시작한 유 진사의 눈동자를 쏘아보는 창의 가녀린 체구에 잔잔한 독기가 피어오른다.
“뜻대로 하시지요. 당신이 만든 새로운 지옥에서 서로의 등에 기대어 악귀들과 싸우며 돈독히 살겠습니다.”
“무어라?”
“우리에게 얽힌 은원은 나와 낭군이 짊어지고 가야 할 짐, 당신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이의 미래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
샛노란 눈동자가 새끼를 지키는 암범처럼 번뜩이자 유 진사는 저도 모르게 흠칫, 물러섰다.
“내가 아이의 아비를 선택했듯, 내 아이 또한 스스로의 길을 선택할 겁니다.”
첩실 자리를 권하는 유 진사에게 곱게 미소 짓던 연희였다. 궁핍한 서생의 딸년이 정실 자리 원하느냐 묻는 그에게 변함없이 미소 짓던 그녀는 꺾을 수 없는 꽃이었다.
‘절벽에 핀 들꽃이다. 들꽃이로다. 내 핏줄들이 벼랑 끝에 핀 들꽃을 움켜쥐었어!’
제 어미를 꼭 빼다 박은 창을 바라보던 유 진사는 목이 메어 왔다. 따지도 못하고 놓지도 못하는, 목이 메도록 절벽을 올려다보며 말라 죽을 아름다운 독초였다.
‘반복되는 악연을 두고 보아야 하는 것인가.’
“하실 말씀 더 없으시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느새 그를 향해 편전을 겨누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는 유 진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녕하십시오.”
“고, 맙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돌아서는 유 진사를 주시하며 천천히 물러서던 창이 시위를 당겼다.
쉭!
돌아서는 유 진사에게 날아간 아기살이 곁에 선 무사의 상투를 관통했다. 머리채가 끊어져 산발이 되자 야행복을 입은 사내들이 검을 빼 들며 유 진사를 둘러쌌다.
손을 들어 무사들을 물리는 그를 올려다보던 창이 편전을 내리며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다음에는 추적자의 목을 관통할 겁니다.”
“충분히 알아들었다.”
유 진사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창은 말갛게 차오르는 눈물을 훔치며 돌아섰다.
‘내가 선택한 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밀어내려 했던 장호였다. 그런 그에게 한없이 흐르던 마음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내 길이야.”
처연하게 어둠 속을 걷던 창은 멀찍이 산길을 오르는 장호의 그림자에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오, 라버니…….”
‘어찌하여 홀로 우느냐.’
조용히 다가선 장호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몸을 낮추어 등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이 오라비가 업어 주련?”
눈물을 보이기 싫었던 창이 말없이 등에 업히자 장호는 묵묵히 일어나 산길을 걸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범 같은 각시가 울보 누이가 되어 왔누.’
달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을 걷던 장호는 목덜미를 적시는 그녀의 눈물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뒷간에 갔는데 보이지 않아 찾으러 왔다.”
‘내가 오라버니의 아비를 죽였습니다.’
눈물을 삼키는 창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범이 물어 갈까 걱정하였다.”
‘범 걱정하시면서 쇠뇌도 없이 오셨습니까.’
쇠뇌를 잡을 새도 없이 달려왔을 마음을 알기에 창은 울컥이는 숨결마저 삼켜야 했다.
‘범보다 무서운 것을 보았습니다.’
“그곳에 널 데려가는 것이 아니었는데, 미안하구나.”
‘가서 담판을 짓자 조르지 말 걸 그랬습니다.’
“네 손에 피를 묻힐까 두려웠다.”
‘차라리……. 그 편이 나을 것을 그랬습니다.’
창의 침묵에도 장호는 파도처럼 일렁이는 그녀의 마음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아비를 선택하여 태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청림이 떠오른 창은 말없이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묻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도 장호는 반월당에서 그녀를 안고 나올 때처럼 마음이 일렁였다.
‘야밤에 편전까지 챙겨 들고 누구를 만나러 갔더냐.’
불안한 마음은 거친 파도처럼 들이치고, 바위 조각이 떨어져 내리듯 걸음걸음 가슴이 덜컥거렸다.
‘오라버니 잘못이 아님을 압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마음이 한없이 무너집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긴장하여 굳은 등에 이마를 댄 창 역시 가슴에 휘몰아치는 파풍을 부여잡으며 숨을 들이켰다.
“생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그는 단 한 번도 날 찾지 않았다.”
아비의 본처인 윤 씨가 봉화에 들어 임산부 흉내를 낼 정도로 철저히 비밀리에 계획되어 태어난 아이였다.
“흔히들 그리한다더구나. 조용히 낳아 기르다가……. 죽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하고.”
“원망스럽지 않으십니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데, 어디에 대고 원망을 할까?”
“이름은 어찌하여 묻지 않으셨습니까.”
“아비라 생각했다면 한 번쯤은 물어보았겠지.”
덤덤한 목소리에 그의 등에 뺨을 댄 창은 흐르는 눈물을 삼키기가 버거워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에 죽은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한데, 그들보다 당신이 더 가여운 나는…… 어찌하면 좋습니까.’
방문 앞에 내려선 창이 문고리를 당겼지만 덜컥거리기만 할 뿐 열리지 않았다.
“문에 숟가락을 걸어 두었나 보다.”
고개 숙인 채 문고리를 붙잡고 선 창을 바라보던 장호가 그녀를 안아 들고 뒷방으로 향했다.
헛간을 개조하여 만든 좁은 방에 들어선 그는 이불 위에 창을 앉혔다. 누울 생각을 않는 그녀를 바라보던 장호가 봇짐에서 초록색 비단 뭉치를 꺼내 조심스레 내밀었다.
“태화당에서 소당주의 선물을 전하려던 총총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소당주의 선물은 옥쌍엽 노리개뿐이다.’
선뜻 손대지 못하는 창 대신 장호가 보자기를 풀었다.
“그 노리개가 네게 덫이 될까 싶어 걱정하였다. 하여 나머지 두 개를 만들어 달라 비단장에게 청하였다.”
산호수와 불화 밀수를 부탁했는데, 소담화가 보낸 대삼작노리개는 옥쌍엽까지 온전하게 한 쌍을 이루고 있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창은 대삼작노리개 위로 곱게 접힌 쪽지를 들어 펼쳤다.
‘나를 위해 무엇을 얼마나 준비하신 겁니까.’
소담화의 쪽지를 움켜쥔 창은 가슴이 조여들었다.
“괜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 노리개는 제게 없습니다.”
“그래, 그랬구나.”
“소당주에게 던져 버려서 이제는 없습니다.”
말갛게 웃는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비단장 말로는 대례나 혼례 때 사용하고, 고이 간직하다가 딸이나 며느리에게 물려주는 패물이라 하더구나.”
“…….”
“처음에는 너의 모친께서 물려주신 것인가 생각하였고, 그다음에는. 그다음에는…… 너의 정혼자 집안에…….”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미소 짓는 그의 입술을 창의 손이 살포시 덮었다.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의 입술이 달싹이자 창은 장호를 와락 끌어안았다.
“복수는 끝났고, 원망과 미련은 명에 두고 왔습니다.”
가슴을 파고드는 간절함에 장호는 말없이 창의 등을 쓸어내렸다. 역적의 딸, 그 고백을 막으려 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보는 것 같다.
‘내가…… 널, 이리 만든 자의 아들일지도 모른다.’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내려다보던 장호가 그녀에게 입맞춤했다. 더없이 뜨거운 숨결을 삼키며 천륜을 넘어선 인연은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서로를 부둥켜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