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iger follows the wild flowers on the cliff RAW novel - Chapter 79
79. 담판
“처가 생겼다는 말은 들었다.”
창에게로 향하는 유 진사의 시선을 막아선 장호가 섬뜩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머리채를 잘라 보낸 것으로 부족하더이까.”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유 진사를 따라 방으로 들어선 장호는 절도 올리지 않고 그의 맞은편에 가부좌를 틀었다.
타닥. 탁. 탁.
좌탁을 두드리는 유 진사의 손가락을 응시하던 장호는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얽히고설킨 인연 그만 끊어 내고 싶습니다.”
“네 어미가 산통 중에 정신을 잃었다. 산모와 태아 둘 다 죽을 상황에 배를 갈라 널 꺼낼 수밖에 없었다.”
“제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생모는 죽지 않았겠지요.”
“나는 정당한 대가를 치렀다.”
“누구를 위한 대가란 말입니까.”
“네 어미의 선택이었다.”
“저는 구구절절한 변명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최대한 빨리 담판을 짓고 떠나리라.
“당신을 탓하러 온 것 또한 아닙니다. 세상에 없는 듯 살아갈 터이니 더 이상 찾지 마십시오.”
“아니다. 틀렸다. 내가 너를 얼마나 귀애했더냐. 정녕, 다 잊은 것이냐? 어찌 내가 널 해치려 했다 생각하느냐.”
“누군가 절 해치려 했다는 것을 알고 계셨나 봅니다.”
유 진사의 침묵에 장호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밖에 있던 그 여인은 누구입니까.”
“죽은 아범의 광주 본처다.”
본처란 말에 장호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절 해치려 하지 않았다는 말 믿겠습니다. 누가 손자를 독살하려 며느리를 보내겠습니까.”
“네 조모가 병석에 있어 신경 쓰지 못했다. 인정하마.”
“방관자의 또 다른 이름은 공모자입니다.”
“날 닮아 태어난 너를 버릴 생각이 없었다. 잠시 정암사에 맡겨 두었을 뿐이다.”
“6년은 결코 잠시라 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기다렸다면, 내 직접 널 데리러 갔을 게다.”
“기회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타닥. 탁. 탁.
좌탁을 두드리는 유 진사의 손동작이 묘하게 낯이 익은 장호는 불현듯 책상을 두드리던 청림이 떠올랐다.
“광주에서 태어난 적손, 지금 어디 있습니까.”
“오래전 유씨 가문과 연이 끊어진 아이다.”
“아우를…… 버리신 겁니까.”
“너와 달리 타고난 천성이 포악했다.”
이를 악문 장호의 미간으로 핏대가 곤두섰다.
“버리셨느냐고 묻지 않습니까.”
“5대 독자라 오냐오냐한 탓이지. 고생 좀 하면 나아질까. 역관을 딸려 명나라에 유학을 보냈더니, 장사치가 되었더구나.”
“상인이 되었다는 말입니까.”
“제 어미와 소식이 오가는가 본데, 더는 묻지 않았다.”
유 진사의 말에 장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조선의 역관 출신으로 태화당주의 양자가 된 청림의 나이 또한 이복동생과 같은 스물셋이었다.
‘생부의 죽음이 6년 전, 소당주의 부친이 피살당한 것도, 열여덟 살의 창이 복수를 끝낸 날도 6년 전이다.’
속수무책으로 밀려드는 생각들에 장호는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늪에 빠진 것처럼 숨이 막혔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그럴 리…… 없다.’
아무리 부정하며 떨쳐 내려 해도 불길한 생각들이 구렁이처럼 그의 전신을 휘어 감았다.
“대를 이으시려면 그 아이를 찾으셔야 할 겁니다. 씨받이의 핏줄 대신 진짜 적손을 찾으십시오.”
“네가 적손이다.”
팔순에 가까운 나이에도 서슬 퍼런 눈빛에 장호의 눈동자가 호안으로 변했다.
“제가…… 지금 사정하는 것으로 보이십니까.”
“아이가 태어나면 생각이 달라질 게다. 짐승처럼 살아갈 것이 아니라면 가문이 필요할 테니. 내가…….”
“내 아이는! 기왓장 바꾸듯 자손을 갈아 끼우는 이런 집안에서 자라지 않을 겁니다.”
돌아볼 줄 모르는 외골수 기질까지, 자신을 쏙 빼닮은 모습에 유 진사는 밀려드는 회한을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얼마나 더 살 거라 생각하느냐.”
“더 이상 욕심부리지 마시고 평안하게 사십시오.”
“욕심부리지 않으마. 사흘만 머물러 가거라. 그리하면, 다시는 널 찾지 않으마.”
“싫습니다.”
“장호야…….”
“추적자들은 더 이상 살려 보내지 않겠습니다.”
북풍한설처럼 일어선 장호가 방을 나서자 홀로 남은 유 진사의 손가락이 좌탁을 두드린다.
“내가…… 내 손으로 대를 끊어 놓았구나!”
“아버님! 제 어미 죽이고 태어난 살모사 같은 놈입니다. 저 악귀를 불러들이면 집안이 망할 겁니다. 우리 율이를 생각하세요. 명나라 태화당주가 되어 금의환향할 겁니다.”
방문을 울리는 절규에 유 진사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 봤자, 천하디천한 장사치가 아니던가.’
스무 살에 무과에 급제하고, 갑사 1년 만에 종4품 부호군에 오른 장호에게 비할 바 아니다.
“계집이 저리 악다구니를 치니 내 아들이……. 에잇!”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유 진사가 문을 열어젖히자 윤 씨가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아버님! 현혹되시면 안 됩니다. 그놈이 죽어야 이 집안의 독자가 삽니다.”
“네가 정녕 미친 것이냐. 뭣들 하느냐!”
벼락같은 유 진사의 고함 소리에 우르르 달려든 머슴들이 윤 씨를 떼어 냈다.
“아버님! 아버님! 제게 어찌 이러십니까. 저는 이 집안에 유일한 며느리입니다.”
“손자며느리가 없을 때 이야기지. 너도 보았지 않느냐. 이 집안에 6대손을 낳아 줄 새로운 안주인을.”
“그 아이가 누구인지 정녕 모르십니까. 아범을 죽인 계집입니다.”
“애초에 네가 아닌 연희를 며느리로 들였다면 그리 죽지도 않았겠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던 유 진사는 윤 씨를 붙잡은 머슴들을 향해 소리쳤다.
“별당에 처넣고 문짝이란 문짝은 모조리 막아 버려라!”
허망하게 끌려가는 윤 씨를 응시하던 유 진사의 시선이 조용히 다가서는 칠석에게 향했다.
“날이 어두워 멀리 가지 못했을 게다.”
“큰서방님은 한성에서 이름난 착호장입니다. 곱게 모셔 올 수 있을지.”
장호의 경고를 떠올린 유 진사는 칠석을 내려다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너 따위가 우리 부호군을 어찌 잡겠느냐.”
“하오면…….”
“가서 그 처에게 내가 만나잔다고 은밀히 전하거라.”
봉화현에서 멀지 않은 뱀바우골의 주막에 들어선 일행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저녁상을 내가던 주모의 속삭임에 창은 뒷방으로 향했지만, 수심 가득한 장호의 표정에 말없이 발길을 돌렸다.
귓가에 맴도는 여인의 악다구니에 잠이 오지 않았다.
“율이가, 내가 아는 그 율이 아니겠지.”
세상에 어디 5대 독자가 태화당 소당주 하나뿐일까.
‘만에 하나 청림의 어머니라 해도 날 어찌 알아보겠어. 한 번 마주친 적도 없는데…….’
사색이 되어 주저앉은 여인의 얼굴이 아른거리자 반월당에서 청림을 마주쳤던 날이 떠올랐다.
‘내가 청림에게서 휘문 숙부를 본 것처럼……. 내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본 거라면.’
입을 뻐끔거리던 그녀가 뱉어 내려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장호와 청림의 이야기가 섞여 들자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만 주무세요.”
“안 잤어?”
“형님, 한숨 소리에 이불까지 펄럭여요.”
총총의 뒤통수를 쳐다보던 창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네가 보기에 낭군님이랑 소당주랑 닮아 보이니?”
“아니요.”
“생각도 안 해 보고 아니래.”
“그냥 봐도 아닌걸요. 곰하고 여우만큼이나 종자가 다른데, 닮을 수가 없잖아요.”
“범과 여우지.”
“아무튼요. 안 닮았어요.”
“배다른 형제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배다른 형제 보신 적 있어요?”
“아니. 너는 본 적 있어?”
늘어지게 한숨을 내쉬던 총총이 창에게로 돌아누웠다.
“해남이요. 밖에서 낳아 왔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해동이랑 안 닮았구나.”
“그렇죠? 저도 그런 줄 알았어요.”
“아……니야? 닮은 데가 있어?”
“성질부릴 때 보면 완전 똑같아요. 씨도둑질은 못 한다더니.”
의미심장한 말에 창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내 낭군이랑 소당주는?”
“아니라니까 자꾸 물어보세요. 아까 보니까 할아버지 꼭 빼다 박았드만.”
“그래서 안 닮았다는 거지?”
무언가가 떠오른 듯 눈알을 굴리는 총총의 모습에 창이 불안하여 다그쳤다.
“왜? 뭐가? 어디가 닮았어?”
“두 분이 똑같이…… 형님 좋아하잖아요.”
멍하니 쳐다보던 창이 총총의 얼굴에 이불을 덮었다.
“먼 길 떠나야 하니 그만 자라.”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으려니 총총이 이불을 젖혔다.
“어디 가요?”
“잠시 나갔다 올 테니까. 낭군께서 찾으시면 뒷간 갔다고 해.”
총총에게 이불을 덮어 버린 창은 편전을 둘러메고 방문을 열었다. 다행히 장호가 머무는 뒷방이 그녀의 방 반대쪽이어서 은밀히 주막을 벗어날 수 있었다.
‘족히 십 리는 되는데, 다녀올 수 있을까?’
어두운 숲으로 걸음을 옮기던 창은 오른편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서슴없이 단도를 날렸다.
퍽!
‘맞았다.’
아기살을 통아에 끼워 넣은 창이 어둠을 겨냥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나오너라.”
얼굴을 가린 야행복 차림의 사내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중 하나는 어깨에 단도가 박혀 있다.
까마귀 속에 백로처럼 하얀 두루마기를 걸친 유 진사가 그 단도를 뽑아 들고 휘적휘적 걸어 나왔다.
“솜씨가 좋구나.”
“뭐 하자는 겁니까.”
“시할아버지를 보고 인사도 없느냐.”
“낭군에게 조부가 계신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잠시 나와 걷겠느냐.”
그의 손에 들린 단도를 낚아챈 창이 주위를 살폈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이 자리에서 하세요.”
빈틈을 보이지 않는 모습조차 부창부수라.
손자 내외가 반으로 쪼개 놓은 달과 같으니, 유 진사는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린 것인지 비로소 깨닫는다.
“낭군을 설득하여 봉화로 돌아오거라.”
“저와 하실 이야기가 아닌 듯합니다.”
미련 없이 돌아서는 그녀의 뒤로 유 진사의 목소리가 뱀처럼 감겨든다.
“내 너를 오랫동안 찾았다, 효옥아.”
돌처럼 굳어 버린 창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아 올랐다. 장호가 그녀의 이름을 말해 주었을 리 만무하건만.
“저를…… 아십니까.”
“내 아들 잡아먹은 연희의 딸을 내 어찌 몰라볼까.”
너무나도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유 진사의 말에 창은 입술을 깨물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할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