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iger follows the wild flowers on the cliff RAW novel - Chapter 89
89. 필연
봉화를 떠나며 이랑대는 자취를 감추고, 그들의 빈자리는 개성 출신의 무사들로 채워졌다. 등짐을 메고 줄지어 걷는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상단의 행렬이다.
나귀의 짐수레에 얹혀 가던 창은 한성을 관통하며 사행로가 연결되자 다시 가마로 갈아탔다.
늦은 밤, 파주 인근 허름한 주막에 도착한 일행은 각자의 자리를 찾아 잠을 청했다.
‘밤이 늦었는데 어디 가려는 거지?’
조용히 싸리문을 나서는 청림을 바라보던 창은 멀찍이 떨어져 뒤를 밟았다.
‘스승님, 이 또한 필연인 걸까요.’
까마득한 절벽 끝에 선 그의 모습에 창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임진강을 내려다보는 청림은 더없이 위태로워 보였다.
‘너에게도 힘겨운 시간이었던 거야?’
윤 씨 부인의 죽음은 청림의 삶 역시 버려진 장호 못지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나도 닮지 않은 줄 알았더니…….”
형제에게 배어나는 짙은 외로움이 너무나 닮아서 가슴이 저릿하다. 반쪽이어도 핏줄로 이어진 형제인 것을.
“서로를 모른 채 스쳐 가길 바라는 마음도 결국, 내 욕심 아니던가.”
스승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던 창은 망설임을 뒤로하고 청림에게 다가섰다. 열두 살 나이에 홍류의 절벽에 서야 했던 낭군을 떠올리며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너에게 밀려 떨어질 만큼 허술하지 않다.”
돌아서던 청림은 도포 자락을 붙잡은 창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몸을 뒤로 빼자 붙잡힌 옷자락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날 걱정한 건가?’
손가락 마디가 하얘지도록 버티던 창이 입술을 깨물자 청림의 오른쪽 눈썹이 동그랗게 산을 그린다.
“그 작은 손으로 내 무게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널 붙잡으려 했던 마음만큼은 기억하겠지.”
흔들리는 눈동자를 응시하던 창은 조심스레 그의 옷자락을 감아 당겼다.
“너…… 어떻게 살았니.”
따귀라도 얻어맞은 양 청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너밖에 남지 않았다 해서 그리 묻는 건가?”
‘혼자가 아니야. 벼랑 끝으로 밀려나도, 너만큼은 다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그런 형이 있어.’
창이 고개를 젓자 청림이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아니면, 내가 가여웠더냐.”
“역적의 딸이 누굴 가여워해.”
창의 손을 잡아 비튼 청림이 옷자락을 떼어 냈다.
“자알 살았다.”
“어떻게…….”
“어떻게? 어려서는 아비에게 인정받으려 발버둥 쳤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미련 없이 떠났다. 명에 와서는 그림이나 그리며 유유자적 살았다.”
“힘들지 않았어?”
“힘든 적 없다.”
산비탈에 자리 잡은 주막을 향해 걷던 청림이 조용히 뒤따르는 그녀의 기척에 고개를 틀었다.
“어째서 그리 묻는 거지?”
“위태로워 보여서.”
노마님의 기억이 밀려들자 청림은 저도 모르게 눈썹 위의 상처를 문질러 댔다.
날카로운 청림의 반문에 그녀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우연처럼, 운명처럼 나루터의 정자에 찾아든 태화당 노마님은 큰돈을 주고 청림의 풍경화를 사 갔다. 매번 같은 시간에 찾아드는 그녀는 봉화의 조모를 떠올리게 했다.
청림의 그림을 끔찍하게 싫어했던 아버지와 조부였지만 조모만큼은 잘한다, 좋다 늘 칭찬해 주었다.
낯선 타국에서 그리운 조모를 닮은 노마님을 따라간 청림은 태화당의 양자가 되었다.
‘나를 방패로 삼지만 않았어도…….’
동갑이었던 유천과도 형제처럼 잘 지낼 수 있었다. 병약했던 그와 어울리며 누구보다 살뜰하게 챙겼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것을 먹으며 청림은 거울처럼 유천을 닮아 가고 있었다. 화원으로 찾아든 자객은 같은 옷을 입은 그들을 구분하지 못했다. 찰나의 망설임으로 목숨을 잃은 자객을 내려다보는 노마님의 흡족한 미소에 청림은 자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형제처럼 모든 것을 나누라는 말이…… 유천과 똑같이 되어 대신 죽으라는 말이었구나.’
노마님의 배신에 청림은 유천을 제거하고 배신과 배신을 계단처럼 밟아 가며, 거대한 태화당을 삼켰다.
피로 얼룩진 기억들을 밀어낸 청림은 아무 일도 없었던 양 고개를 저었다.
“부족한 것 없이 유복했다. 태화당 자체가 명나라의 축소판이니, 생각할 것도, 처리할 것도 많아 분주했다.”
모든 것이 지루해질 즘, 담벼락을 달리던 아름다운 범이 그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월담하는 계집을 처음 보아 충격이었다.”
“낭군은 계집인 거 알고 충격받았었는데.”
“딱 봐도 계집인 걸 모를 수가 있겠느냐.”
“오라버니 소리만 안 했어도!”
주먹까지 움켜쥐고 부들거리는 창의 모습에 청림은 조선에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부터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나 보구나.”
“궁금하지?”
지난 이야기 좀 하다가 둘이 형제라고 말해 줘야겠다 싶어 떡밥을 풀던 창이 씩 웃자 청림이 정색을 했다.
“전혀 궁금하지 않다.”
“너한테 노리개 던진 건 일도 아니었는데, 낭군한테는 아기살 날리려고 대기 중이었거든.”
‘나만 죽이려 했던 것이 아니었더냐?’
노리개에 맞은 상처를 만지작거리던 청림은 어느새 앞서 걷는 그녀에게로 슬그머니 다가섰다.
“운장은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죽이려 했느냐?”
‘자객이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섬광처럼 번뜩이는 칼날을 걷어 낸 장호의 손도끼가 자객의 허리로 파고들었다.
대동강의 지류인 무진천 자락, 자객들을 마주한 일행은 개성부를 벗어난 지 하루 만에 또다시 혈투가 벌어졌다.
검은 옷을 입은 자객들의 형체를 분간할 수가 없는 가운데 칼날 부딪히는 소리가 난무했다.
채쟁. 챙!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토이모와 푸린이 장호에게 등을 맞대고 어둠을 가르는 칼날을 막아 냈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칼날을 맞받아치며 번뜩이는 섬광을 따라 장호의 손도끼도 춤추듯 회전했다.
쉭!
날카로운 바람이 그의 귓가를 스치며 장호의 앞에 선 그림자가 고꾸라졌다.
“활잡이가 있다!”
“궁수부터 잡아라!”
나무에 올라앉은 총총을 찾는 자객들의 외침에 장호 일행을 에워쌌던 그림자의 진형이 순식간에 깨졌다.
“흩어지는 것이 좋겠습니다, 운장.”
“총총이 노출되기 전에 끝내야 한다.”
서로 등을 맞대고 있던 장호가 옷고름을 뜯어 회색 승복을 입은 토이모와 푸린에게 건넸다.
“머리에 묶으면 자객들과 구분될 게다.”
의주로의 길목마다 자객을 마주했던 장호 일행은 먹이를 쫓는 범과 늑대처럼 소나무 숲으로 들어섰다.
불과 반 시진 만에 동녘 하늘이 붉게 물들자 하나둘 모여든 장호와 일행들은 늘 그렇듯 사상자를 파악했다.
“형부. 도망친 놈 빼면, 열둘이에요.”
적으면 예닐곱, 많게는 이십여 명 무리 지어 습격하는 자객은 밤낮없이 달리는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서둘러 자리를 뜬 일행은 붉은빛으로 일렁이는 대동강 나루터에서 배에 올랐다.
“이랑대가 나타날 때가 된 것 같은데.”
“덩치들이 나타나면 멀리서도 딱 보여.”
“나와 푸린처럼 위장하고 있을 거야.”
토이모의 근엄한 목소리에 총총이 콧방귀를 꼈다.
“늑대가 토끼 가죽 뒤집어썼다고 못 알아보니? 너희들 승복 입어도 하나도 스님 안 같아. 해인사 스님들이 불쌍해서 거둬 준 거지. 고려인은 개뿔. 딱 봐도 야인인데.”
그들의 입씨름에도 장호는 넘실거리는 대동강 너머로 장엄하게 솟은 성벽을 응시했다.
한성과 의주의 중간 지점인 평양성을 눈앞에 둔 그는 동선이 노출된 의주로를 벗어나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한성을 떠난 지 엿새, 자객들에게 발목을 잡혔다 한들, 한 번쯤은 만났어야 할 시간이다.’
의주로를 고집하여 자객들과의 소모전을 지속한다면 후에 마주할 이랑대와의 싸움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능선을 넘어 의주로 직행해야 하는가.’
앞만 보고 달렸던 그는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봇짐을 멘 장사치들과 수레가 모여드는 나루터에 붉은 치맛자락이 눈에 띄었다.
‘창…….’
“뒷모습이 꼭 내 낭군 같네.”
멀어져 가는 돛단배를 바라보던 창은 강바람에 펄럭이는 붉은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장호와 헤어진 지 열흘이 넘어서자 길가에 바위도 낭군처럼 보였다.
‘납치된 줄도 모를 텐데 어떻게 쫓아오겠어.’
그럼에도 자꾸만 두리번거리는 마음은 강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같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이냐.’
창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청림은 타실의 보고에 미간을 찌푸렸다.
「무진천의 자객들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답니다. 운장과 근접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백 리 넘는 길에 아직도 처리 못 했단 말이냐.」
「곽산부터는 이랑대가 대기 중입니다. 의주에 이르지 못할 겁니다.」
「너의 예측 따위 필요 없다. 확답을 가져오너라.」
「제가 직접 가서 처리하겠습니다.」
「내가 운장을 마주하는 날엔, 너부터 벨 것이다.」
타실을 뒤로하고 걸음을 뗀 청림은 도포를 벗어 창의 어깨를 감쌌다.
“강바람이 차구나. 배는 오후에나 타야겠다.”
‘나야 늦으면 늦을수록 좋지.’
강 건너 평양성을 쳐다보던 창은 두말 않고 돌아섰다.
나루터에 늘어선 주막들 사이로 청림을 따라 걷던 창은 오늘도 어제처럼 그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나와 낭군이 서로의 아픔을 공명했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서로의 마음이 닿을 만큼 깊은 울림이 생긴다면, 어쩌면 화해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뒤통수가 따가웠던지 앞서 걷던 청림이 휙 돌아섰다.
“어제부터 말이 없구나.”
“닥치라며.”
“전처의 복수를 하러 가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따라 국경을 넘었다는데 더 들어 무엇 할까?”
“그때는 좋아하는 줄 몰랐다니까.”
“그만해라. 사내들은 내 계집이 다른 사내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닥쳐라. 쑥떡이 듣는다.”
“걱정 말거라. 날 아비로 알고 자랄 터이니.”
‘옘병하고 예쁘게 봐 주려야 봐 줄 수가 없다니까!’
일격을 날리는 창의 손을 낚아챈 청림이 미소 지었다.
“그리 굼떠서야 파리라도 잡겠느냐?”
“한 치 앞을 모르는 것이 인생이거든?”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창의 왼손 역시 잡혀 버렸다.
박치기를 시도하려는 그녀의 움직임에 청림이 붙잡고 있던 양쪽 손목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나 또한 배부른 아내를 얻게 되리라 예상 못 했으나,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롱대롱 매달린 그녀를 종처럼 흔들어 대던 청림이 일곱 살의 율처럼 말갛게 웃었다.
“운장은 너와 나의 인연을 잇는 다리였을 뿐이며, 그 역할 또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