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203)
내 말에 급발진을 멈추는 유지.
누가 라노벨 주인공 아니랄까 봐, 자꾸 감성이 이성을 앞서는 모습에 열불이 뻗친다.
말을 말지.
“좋은 말 할 때 비켜라. 리그의 졸개.”
유지가 정제된 분노가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말한다.
“눈물겨운 우정과 우애로군. 하지만 안타깝게도 네가 그토록 찾는 미스 무라마사가 여기를 지키고 있으라고 내게 명령해서 말이야, 너희 둘 다 못 보내주겠는데.”
맨헌터의 기형 대검에 고동색 마력이 응집된다.
그와 함께 놈의 등 뒤로 거구의 인간형 괴물 수십 마리가 등장한다.
괴인이다.
“염병······.”
아주 작정했네.
솔직히 말해서 돌파하자면 못 할 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무라마사의 노림수도 시간을 끌거나, 아니면 전력을 분산하거나.
둘 중 하나였겠지.
청와대 지하 벙커가 얼마나 버텨줄지, 무라마사가 언제 벙커를 찾아낼지 모르는 지금 상황에서 맨헌터랑 괴인 따위와 드잡이질할 시간은 없다.
그러니 맨헌터는 유지에게 맡기고, 나는 무라마사를 상대하러 가야 한다.
무라마사를 상대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문제는 여동생 이야기만 나오면 이성이 날아가는 주인공 놈을 어떻게 설득하는가인데.
벌써 눈앞이 막막하다.
일단 말이라도 꺼내 봐야겠다.
“야, 쿠로사와. 여기서 전력을 나눠야 할 것 같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네 동생을 구하기 어려워지니까······.”
“네가 하루를 찾으러 지하로 가겠다는 거지, 김?”
유지가 내 말허리를 자른다.
이럴 때는 왜 또 이렇게 수상하게 눈치가 빠르지?
나야 좋기는 한데 좀 불길하다.
그가 다가와 내 어깨를 두드린다.
아 왜 또 스킨십하고 난리야.
소름이 쫙 돋는다.
“김, 너라면 괜찮아.”
유지가 웃는다.
“진정한 영웅이자 친구인 너라면······. 내 동생을 믿고 맡길 수 있어. 그러니 여기는 내게 맡기고 먼저 지하로 내려가. 내려가서······.”
유지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인다.
“하루를 구해줘. 반드시.”
애니메이션에서 수없이 봤던, 주인공 유지의 진지한 눈빛.
설득할 필요 없어서 좋긴 한데, 내가 뭘 했다고 저렇게 날 믿는지 모르겠다.
이래서 호구가 문제야.
어쨌거나 쿠로사와 하루는 구해야 했기에,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루를 부탁할게.”
유지의 당부를 들으면서 나는 땅을 박차고 비행 모드를 펼쳐 날아올랐다.
이제 무라마사, 아니 쿠로사와 하루를 만날 시간이다.
*
“어딜 가려는 거지, 김덕성!”
유지와의 대화가 끝난 뒤, 전장을 이탈하는 김덕성을 보며 맨헌터가 날아오르려던 그때.
콰광!
맨헌터의 전신 장갑에 덧씌워진 마력장에 투명한 마력파가 날아와 폭발한다.
“큭?!”
맨헌터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김덕성과 쿠로사와 유지.
둘 모두를 잡아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였는데, 뜻하지 않은 견제를 통해 찬스를 놓쳤기 때문이었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아!”
“캬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맨헌터의 낭패한 심정을 대변하듯, 괴인들이 붉은 안광을 번쩍이며 괴성을 내지른다.
마력파를 날란 당사자, 유지가 차가운 얼굴로 맨헌터를 응시한다.
“어딜 보는 거지? 맨헌터. 네놈의 상대는 나다.”
뉴 월드 리그.
10년 전, 자신의 가족을 몰살시키고 여동생을 세뇌해서 이용하는 최악의 빌런 조직.
유지는 그들을 결코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건 눈앞의 남자, 맨헌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송이가 제 명을 재촉하는군.”
맨헌터가 으르렁댄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 모양의 장치 버튼을 꾸욱 누른다.
“얌전히 죽어라. 검성의 아들.”
맨헌터의 말이 끝난 순간.
“캬아아아아아아아아!!”
등 뒤에 도열한 괴인들의 눈에 서린 붉은 안광이 더 짙은 빛을 발한다.
괴인 신호기의 신호를 통해 광폭화된 괴인들이 폭력적인 마력을 휘감은 신체를 통해 그대로 유지에게 돌격한다.
근육질 인간형 괴생명체, 괴인 수십 마리가 흉포한 마력 파장을 흩뿌리며 돌격하는 모습에도 유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유지가 자신의 초상병기, 쿠사나기노츠루기를 치켜든다.
그의 마력로에서 피어오른 폭발적인 무색의 마력이 쿠사나기노츠루기의 칼날을 통해 사방으로 뻗쳐나간다.
두근, 두근.
유지의 마력로가 달아오른다.
그의 기프트인 마력 증폭이 발현된다.
“쿠로사와 신검류── 제6식.”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된 무색의 마력이 칼날을 감싼다.
파츠츠츠츠츠!
스파크가 튀어오른다.
“비검만파(飛劍萬波)!”
번쩍.
유지가 쿠사나기노츠루기를 휘두르자 섬광과 함께 충격파가 일어난다.
쿠-콰-콰-콰-콰!
무색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칼날의 파도가 공간을 빈틈없이 가득 메우면서 괴인들의 마력장을 뚫고 살점을 찢어발긴다.
“캬아아아아아아아!!”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고통 섞인 괴성이 반파된 청와대 부지를 가득 메운다.
다 타버린 잔디밭에 처참하게 찢긴 괴인의 살점과 피가 흩뿌려진다.
단 일격.
일검으로 괴인의 삼분지 일을 죽여버리고, 나머지를 전투 불능으로 만든 유지가 곧바로 땅을 박차고 튀어 오른다.
스륵.
유지가 자연스럽게 일본도를 납도한다.
“쿠로사와 신검류── 제2식!”
고오오오오오오오.
유지의 전신에서 무형의 마력이 뻗친다.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무한에 가까운 마력이 검집과 검에 응집된다.
유지의 시야에 맨헌터의 모습이 보인다.
상대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괴인들을 처리했기에 생긴 아주 잠깐의 빈틈.
유지의 기감은 상대의 사소한 빈틈도 놓치지 않았다.
“일도사일(一刀射日)!”
유지가 쿠사나기노츠루기를 발도한다.
번쩍!
검집에서 섬광이 폭발한다.
그와 함께 유지의 일본도가 폭발하는 마력 에너지를 통해 가속하며 전방으로 발사된다.
한번 쏘아지면 하늘의 해마저 떨어뜨린다는 쿠로사와 신검류의 발도술.
검성의 손에서 펼쳐져 무수히 많은 이계종과 빌런의 목숨을 거둔 비전 스킬이 그 아들의 손에서 재현된다.
콰-콰-콰-광!
폭음과 함께 한 줄기 빛살이 그대로 맨헌터에게 내리꽂힌다.
피할 수 없는 일격.
설령 상대가 S랭크 빌런이라 하더라도 이번 일격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할 것이다.
유지가 그렇게 확신하며 후속 공격을 준비하던 그때.
“검성의 아들, 고작 이 정도였나?”
우우우우우우웅!
그의 손에 들린 톱날 대검이 진동한다.
“트롤스베르그, 진명해방── 피 흘리는 거인의 대검.”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대검의 칼날에서 고동빛 마력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그 사이로 안광이 도깨비불처럼 번쩍인다.
유지의 발도가 도달하기 직전.
초 단위의 시간에서 맨헌터의 반사신경이 활성화된다.
맨헌터가 진명해방이 완료돼서 음산한 기운을 뿌리는 톱날 대검을 치켜든다.
깡!
트롤스베르그의 삐죽삐죽한 톱날에 쿠사나기노츠루기의 칼날이 걸린다.
콰앙!
무색과 고동색.
막대한 마력이 충돌하면서 일어난 충격파와 후폭풍이 주변을 휩쓴다.
아름답게 조성됐던 청와대 정원의 조경수가 부서지고 잔디밭이 갈기갈기 찢긴다.
대지의 맨살인 흙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끝이다. 검성의 아들.”
씨익.
파괴의 현장, 그 중심에서 맨헌터가 웃는다.
그의 치아에 장착된 그릴즈가 햇살을 받아 빛난다.
유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상대가 공격을 방어한 건 예상 밖의 일.
하지만 그뿐이다.
이 상태로 반격은······.
“무슨, 큭!”
그때.
유지의 입에서 신음이 터진다.
쿠사나기츠루기를 타고 들어온 정체불명의 마력이 그의 체내에 들어와 마력회로를 난도질한다.
“컥!”
내상을 입은 유지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속이 찢어지는 단장의 고통에 유지의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진다.
“네놈······.”
“이제 눈치챘나? 느리군. 검성의 아들. 느려.”
맨헌터가 느물거리는 웃음을 흘린다.
철컹.
대검의 칼날에 돋아난 톱니가 움직이며 쿠사나기노츠루기의 칼날을 조여서 구속한다.
“내 초상병기, 트롤스베르그의 진명해방 ‘피 흘리는 거인의 대검’의 능력은 칼을 맞댄 상대의 체내에 마력의 칼날을 침투시키는 것.”
우우우우웅!
맨헌터의 친절한 기술 설명에 맞춰 거인의 대검이 진동한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와 함께 유지의 체내에 침투한 마력 칼날이 그의 몸을 안에서 찢어발긴다.
유지의 입에서 끔찍한 고통 섞인 비명이 울려 퍼진다.
“즉, 너는 나와 칼을 맞댔을 때부터 이미 죽은 상태나 다름없었다는 거다. 그게 네 패인이다! 어리석기는! 검성의 아들! 햐햐햐햐햐햐햐햐햐햐!!”
맨헌터가 광소하면서 대검을 휘두른다.
부웅!
바람과 함께 일어난 충격파가 주변을 초토화한다.
철커덕.
쿠사나기노츠루기를 구속한 톱니가 풀리면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유지의 몸이 땅바닥을 향해 거칠게 내동댕이쳐진다.
“크윽!”
흙바닥에 부딪힌 유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온다.
“쿨럭, 쿨럭!”
유지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그의 시야가 피로 붉게 물든다.
현기증이 일어난다.
유지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아프다.
죽을 만큼 아프다.
더 싸워야 하지만, 내상을 입은 몸은 고장 난 것처럼 아무 말도 듣지 않는다.
유지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무기력하다.
“그 유명한 검성의 아들도 별거 없군. 햐, 내가 너무 긴장했었나? 퉤.”
맨헌터가 바닥에 침을 내뱉으며 다가온다.
그가 어깨에 걸친 대검에서 흉폭한 마력 충격파가 줄기줄기 뻗쳐 나온다.
“아무튼 좋아. 마스터께 네놈의 목숨을 바치겠다. 검성의 아들.”
맨헌터의 입가에 일그러진 호선이 그려진다.
쿠로사와 유지.
검성의 아들이자 무색의 마력 보유자.
메사이어의 대적자가 될 가능성을 보유한 그의 재능이 만개하기 전에 처단하는 것.
그것이 마스터의 목적이다.
그래서 자신이 쿠로사와 유지의 목숨을 거둔다면, 마스터께서 크게 치하할 것이다.
장밋빛 미래를 망상하는 맨헌터의 몸이 흥분으로 부르르 떨린다.
“이제 끝이다.”
바닥에 엎드린 유지의 귓가에 맨헌터의 목소리가 들린다.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한다.
간신히 뻗은 손이 겨우 쿠사나기노츠루기의 칼자루에 닿는다.
하지만 그뿐.
이 이상 움직일 수 없다.
체내를 휩쓸고 지나간 마력 칼날이 마력 회로를 난도질한 탓에, 제대로 마력을 운용할 수 없었다.
“쿨럭!”
유지의 시야가 흐려진다.
아득한 절망감이 느껴진다.
10년 전 그날의 끔찍한 기억이 떠오른다.
쿠로사와 저택이 불타고, 어머니가 죽고, 무적과도 같았던 아버지마저 자신을 살리기 위해 메사이어의 손에 죽었을 때.
그는 다짐했다.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그래서 힘을 숨기고 학원에 입학했고, 리그에 맞서기 위해 단련했다.
“여기서······. 끝인가······.”
하지만 그뿐.
지금의 자신은 검조차 제대로 잡을 수 없다.
뭐가 검성의 아들이고, 뭐가 복수라는 거냐.
꼴사납다.
어리석다.
아직 자신은 한참 부족하고 미숙하다.
그가 그토록 진정하라고 했는데도, 방금 또 감정적으로 행동할 정도로.
이건 미숙함의 대가다.
그래서 죽는 거다.
유지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온다.
그때.
[······그래서 이대로 전부 포기할 거예요?]유지의 머릿속에 환청 같은 목소리가 울린다.
──그건 더없이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였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
포기.
그 말을 들은 유지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온다.
‘하루는 쿠로사와 유지, 너랑 내가 함께 구한다.’
그의 머릿속에 김덕성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래.
약속했다.
함께 구하기로.
진정한 영웅이자, 세상에서 가장 멋진 그 남자의 앞에서 다짐했다.
여긴 내게 맡기라고.
그러니 포기할 수 없다.
아니, 포기 따위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포기는 가족의 복수라는 내 다짐에 대한 배신이며, 나를 믿어준 그 남자에 대한 배신이다.
신뢰를 배신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