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and actress RAW novel - Chapter 126
126. 한 작품 더
빌은 입구부터 시작된 극진한 의전에 상당히 만족했다.
대접받는 기분이 들어서라기보다는.
회사가 최소한의 체계를 갖추고 있는 모습에 상당히 만족한 것이다.
사실 베테랑 프로듀서인 빌이 열 시간이 넘도록 비행기를 타고 한국까지 왔는데 ‘고작’ 배우 한 명만 데리고 갈 리 없다.
온 김에.
지플릭스에서도 상당히 관심을 보이는 한국 시장을 직접 눈으로 살피러 온 것.
그러다 괜찮은 회사가 하나 있으면 돌아가는 대로 알아봐서 투자도 제안해 보고, 남아도는 돈을 어떻게 써 볼까 고심하고 있던 차.
그런 의미에서 안 그래도 도윤이 소속되어 눈여겨보고 있는 이엔 엔터는 빌이 보기엔 나쁘지 않은 회사였다.
일단, 겉으로 본다면 말이다.
“이쪽으로 오시죠.”
유창한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좋다.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느낄 수 있는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듣던 것과 달리.
“어서 오십시오, 테일러 씨.”
한국의 CEO가 권위적인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이렇듯, 동민처럼 손님을 직접 맞으러 오는 CEO도 있다.
“반갑습니다, 킴.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환대는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참, 호텔은 편안하셨습니까?”
“덕분에 아주 편안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도 편히 쉬었고요.”
참고로 빌이 타고 온 비행기와 짐을 푼 호텔 모두 이엔 엔터 측에서 제공한 것이다.
처음에는 비서에게 부탁했지만.
일정이 조율되자마자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비행기와 호텔을 예약하겠다며 추가로 메일을 보낸 것.
그 환대부터였다.
빌이 잔뜩 기대하기 시작한 건.
단순히 튕기는 걸로만 알았는데.
일단 오겠다고 하니 제대로 나서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고 해야 할까.
“오늘 미팅 결과와 관계없이 한국에 머무르시는 동안은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의외로 유창한 동민의 영어도 마음에 든다.
그냥.
다 마음에 든다.
하지만.
도윤을 직접 봐야 그 마음이 비로소 완벽해질 것 같았다.
“아, 배우는 안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만나시면 깜짝 놀랄 겁니다.”
“깜짝 놀라요?”
빌은 동민을 한 번 바라보고 이든을 한 번 바라보며 눈을 멀뚱거렸지만.
바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대신.
약 3분 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최도윤이라고 합니다, 테일러 씨.”
“오, 영어를 잘하시는군요?”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도윤의 영어가 유창한 편이었고.
빌은 더더욱 흥분했다.
정말 당연한 말이지만, 아시아 쪽 배우들이 할리우드에 와서 겪는 첫 번째 문제이자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언어다.
대사를 영어로 해야 하는 건 둘째치고, 다른 배우들은 물론 스태프들과도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것.
물론 통역이라는 수단이 있지만, 배우는 연기를 하는 직업이고 때로는 오롯이 자신의 진심을 담아낼 줄 알아야 한다.
관객이 보는 건.
통역사의 입이 아니라 배우의 입이니까.
그래서 아예 영어권 국가에서 태어난 아시아계 미국인을 쓰거나 대사를 안 주는 식으로 해결했는데…….
‘이건 최고다!’
세상에.
이미 준비된 배우라니.
심지어.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외모도 마음에 든다.
흔히들 보는 깡마른 느낌이 아니라 근육에 균형도 잡혀 있고, 날카롭고도 차가운 인상이 시선을 잡아끈다.
여기에 연기력만 더해진다면.
지금까지 동양인이 넘지 못했던 벽을 부수지 말란 법도 없어 보인다.
‘어쩌면 정말로…….’
때문에 느낌이 좋다.
그것도 아주.
“원더풀.”
그래서 빌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야 말았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말이다.
물론.
그건 모두에게 극찬으로 받아들여졌다.
때문에 시작은 아주 좋아 보였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 * *
빌은 쓸데없는 이야기로 간을 보거나 협상을 질질 끌면서 상대를 파악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전 열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왔고, 다시 네 시간 동안 호텔에 머물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굳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군요.”
동민은 빌의 직진에 당황했지만 이내 맞는 말이라 여겼다.
그리고, 도윤 한 명을 보기 위해 미국에서 한국으로 날아온 사람 앞에서 시간을 끄는 것도 할 만한 짓은 아니라 여겼다.
“좋습니다. 저희도 바라던 바입니다.”
“말이 통해서 좋군요.”
그렇게 빌이 건넨 세 가지였다.
하나.
“저희 쪽에서 제작을 진행하는 드라마의 주인공 중 한 명으로 캐스팅하고 싶습니다. 만약 성사된다면 배우가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발생하는 비용 일체를 저희 측에서 지불하겠습니다. 물 한 병, 담배 한 갑도요.”
둘.
“출연료는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10부 기준 회당 15만 달러(한화 약 1억 6천만 원)를 보장해 드립니다.”
마지막 셋.
“이건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혹시라도 배우에게 할 수 있는 차별에 대한 것들입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셀럽들이 떠드는 것과 달리 미국에는 인종차별이 존재합니다. 백인뿐만이 아니라 흑인, 히스패닉. 모두가 서로를 차별합니다. 그걸 최소화하겠습니다. 완벽히 막을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해보겠습니다.”
세 가지 모두.
너무 좋은 나머지 의심하게 만들 정도다.
심지어.
“캐스팅은 전적으로 제 권한입니다. 드라마 감독도 관여하긴 하지만, 적어도 주연 한 명 정도는 제가 정할 수 있죠. 그리고 저는 그 자리에 여기, 이 배우를 넣고 싶습니다. 아니, 넣을 겁니다. 무조건.”
빌은 각오까지 불태우며 동민과 경후를 당황시켜 버렸다.
아무리 도윤이 국내 최고의 배우라지만…….
무려 할리우드의 베테랑 프로듀서가 저럴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빌이 독특한 걸까?
“음. 일단 이 부분을 물어보고 싶습니다. 테일러 씨는 지금까지 대부분 영화 제작 쪽에만 관여한 것으로 아는데, 저희 쪽 배우를 드라마에 넣는 이유가 있습니까?”
“지플릭스 측에서 드라마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쪽에서 말하는 프로듀서는 조금 의미가 다릅니다. 특히, 드라마 쪽은 프로듀서가 외적인 제작을 담당하죠.”
쉽게 말해.
빌이 지금 드라마를 만든다고 가정할 경우.
작품 내 대본이나 캐릭터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외적인 캐스팅, 제작비 등에 관여한다는 것.
업무가 확실하게 나뉘어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그건 잘 생각해 보면.
‘캐스팅까지는 도와줄 테니…… 나머지는 알아서 해보란 뜻이겠지.’
이런 의미가 될 수도 있다.
무섭지만.
이게 바로 협상의 숨은 의미를 파악해야 하는 이유다.
지금 빌이 도윤을 데려가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해 보여도.
천천히 생각해 보면.
모든 걸 책임지겠다는 말 이면에는, 도윤이 그만한 능력을 보인다는 전제가 존재하겠지.
프로듀서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지-
아시아에서 온 배우를 분 단위로 케어하는 보모가 아니니까.
뭐.
또 모른다.
‘도윤이가 잘하면 분 단위가 아니라 초 단위로 케어하겠지.’
할리우드의 스타들이 받는 온갖 대우들을 생각해 보면, 사실 한국의 몇몇 배우들이 대우 문제로 갑질한다는 게 애교로 보일 정도.
뭐였더라.
가는 곳마다 카펫을 깔고.
도착하는 곳의 공기 성분까지 조절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물론 도윤이 그런 걸 원할 배우는 아니지만.
생각해 보면 스타들이 그런 대우를 요구하는 건, 정말 결벽증이 있다거나 그런 대우를 받아야만 숨을 쉴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게 바로 ‘영향력의 척도’가 되어서겠지.
봐라.
나는 이런 요구를 할 수 있다.
이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가운데 동민이 물었다.
“그럼 데뷔까지는 보장을 시키겠다, 이 말이군요.”
“곡해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할리우드에서는 데뷔하는 것조차도 어마어마한 일이니까요.”
빌은 손바닥을 내보이며 웃었지만.
동민은 안다.
수많은 아시아 배우들이 할리우드에 도전했다가 망한 사실을.
심지어 주연까지 차지하고도 처참하게 망하는 바람에 한동안 한국에서 얼굴도 못 든 배우도 있었다.
모양새가 좋지 않았으니까.
기다리던 팬들을 버리고 할리우드로 갔다가 실패하니, 한동안 국내에 복귀할 명분이 사라지는 셈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이 바닥은 늘 그렇듯, 누군가 한 명이 활동을 접는다고 해서 큰 위기가 닥치는 곳이 아니다.
언제나 대체재를 찾아내고.
도윤도.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렇죠. 하지만 데뷔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건 거기서 살아남는 일입니다.”
동민의 말에.
빌은 그가 만만찮은 사람임을 느꼈다.
그리고 도윤은-
말을 아끼고 있었다.
‘자신은 있지만.’
이건 비즈니스니까.
배우 본인이 자신 있다는 이유로 이 자리에서 조건은 상관없다며 선을 그어 버리면.
동민의 입장이 곤란해지는 셈.
그리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협상을 잘 마치고 보험을 들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때문에 빌은 분명히 영어가 유창한 게 확인되었는데도 입을 닫고 있는 도윤을 보며 답답함을 느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래서 물었지만-
“협상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할 말이 없습니다.”
간단한 답만 돌아왔다.
역시나.
빌은 잠시 고민했다.
차라리 여기서 협상을 끝낼까.
하지만-
빌은 로스엔젤레스에서 여기까지 왔다.
그렇다는 건.
점찍은 배우를 반드시 데려가겠다는 것.
‘내가 너무 성급하게 결정했나.’
때문에 종종 그의 주변 사람들은 빌더러 너무 저자세로 나가는 거 아니냐며, 할리우드의 프로듀서는 그래선 안 된다고 타이르곤 했지만…….
‘아니지.’
빌은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지금껏 실패한 적이 없었으니까.
“좋습니다.”
때문에 빌은 결정했다.
“한 작품 더 보장하죠.”
어지간해서는 건네지 않을 조건을 제시하기로.
“설령 이번 작품에서 큰 성과를 못 거둬도, 그다음 작품 역시 제 이름을 걸고 보장하겠습니다. 물론 문서화도 해드리죠.”
그러자 동민이 오히려 당황해버렸고.
경후의 심장은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둘을 바라보며 빌이 말을 이었다.
“누구에게나 두 번째 기회는 있어야죠(I believe in second chances).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이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제안.
동민과 경후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
“좋습니다.”
제안을 수락했고.
도윤도 그제야 입을 열었는데.
“두 번째 기회는 없어도 됩니다.”
그 대답이 걸작이었다.
그리고 빌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도윤을 보며 씩 웃더니 물었다.
“이제 우리는 한 배를 탔군요. 그런 의미에서 이제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 중인데…… ‘윤’은 어떻습니까?”
윤.
나쁘지 않다.
한국인을 연상시키는 느낌에.
발음도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
하지만 도윤은 고개를 젓더니.
“제 이름 그대로를 불러주십시오. ‘도윤’말입니다.”
지금까지 생각한 타협안을 제시했다.
빌은 마음에 든다는 듯.
‘도윤’을 몇 번이고 발음해 보곤 마침내 손을 내밀었다.
“‘도윤’…… 오케이. 앞으로 그렇게 하죠. 도윤.”
도윤은 빌의 손을 잡아 악수했고.
그것으로.
도윤의 할리우드 진출이 성사되었다.
‘일단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