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93
무사히 정문을 통과한 뒤, 충격에 잠겨 있던 이들이 태화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평소 가만히 있던 밀라마저 그의 동안 비결이 궁금하다며 질문을 건넸다.
「······나랑 10살 정도 차이 난다고 생각했는데 실례였군.」
브라이언도 당혹감을 감추며 태화를 바라봤다.
서른한 살인 그는 11학년의 청소년이나 대학생 역할도 무리 없이 소화할 정도로 할리우드에서 동안 배우로 유명했다.
그런 그가 생각했던 태화의 나이는 17살. 동양인임을 감안해서 21살이나 22살.
실제 나이와 한참이나 어긋난 추리였다.
소란이 가시고, 운 좋게 테이블을 잡은 일행은 테이블에 카운터에서 받아 온 각자의 술을 내려놨다.
‘밀라는 칵테일, 잭은 보드카 스트레이트, 글로리아는 온더락, 브라이언은 사이다(Cider)라······.’
술의 종류에 따라 성격이 드러나 있어, 태화는 흥미롭게 그들의 주문을 응시했다.
「그나저나 역시 브라이언과 글로리아는 인기가 많네.」
사적인 시간이기에 거부하고는 있으나, 둘은 거의 10분에 한 번 사인 요청을 들었다.
그들의 인지도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뭘! 태하도 영화 상영되면 알아보는 사람들 많아지고 따라다니는 파파라치도 많아질 거야! 쟤 보이지? 쟨 내 담당. 내가 맨날 사고만 치는 것도 아닌데 진짜 끈질겨.」
없을 때 자유를 만끽하라고 파파라치의 유무 따윈 신경 쓰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 말했다.
술을 쭉 들이켠 글로리아는 스테이지로 뛰쳐나갈 거란 일행들의 예상을 깬 채 자리에 머물렀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숙여 일행들에게 속삭였다.
「메이슨이랑 리처드가 없어서 묻는 건데, 천갈궁이 누구일 거 같아? 응? 밀라, 잭. 너흰 알지? 우리한테만 살-짝 말해 봐.」
그녀는 태화 앞에서 당당히 부정행위를 시도했다.
현재 천갈궁의 용의자에서 벗어난 이들은 딱 네 명이었다.
주인공을 맡은 브라이언.
첫 장면에서 천갈궁과 조우한 글로리아와 에드거.
그리고 여성인 스테파니.
천갈궁을 소거법으로 특정할 수 없던 건, 그가 하퍼가 단독 행동을 하거나 미스 포춘과 있을 때만 등장해서다.
분노했을 때조차 다른 이들은 얼려둔 채 주인공만 노릴 정도로 자신의 규칙에 엄격한 인물.
천갈궁은 ‘게임이 쉬우면 재미없습니다’란 표현에 알맞은 성격이었다.
「메이슨이 자긴 아니라고 하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키나 몸이 비슷했는걸! 변명 정도야 어떻게든 만들 수 있는 거잖아!」
‘게임 규칙’에 의해 ‘용의자’들은 천갈궁의 촬영이 있는 날 현장에 오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이 하는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기 힘들었다.
「친구를 믿어 주지 않는다니. 너, 나쁜 아이구나?」
「걘 내 게임보이 숨기고도 일주일이나 잡아뗐단 말이야! 아무튼 밀라, 진짜 알려 주면 안 돼? 응? 브라이언이랑 태하가 걸리면 내 귀에만 살짝.」
가냘프고 애처롭게 ‘Plz-!’를 외치는 글로리아를 보며 밀라는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일을 입 가벼운 글로리아에게 말한다니, 꿈에서도 안 할 행동이었다.
「근데 태화도 용의자 중 한 명 아닌가?」
「······태하도 용의자였어? 에이, 브라이언. 태하가 은근히 짓궂은 구석이 있긴 해도 그건 아니지.」
여전히 로키의 ‘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한 태화는 하루에 한 번씩 친해진 배우에게 가벼운 장난을 쳤다.
특히 지폐 찢기 마술을 많이 선보였는데, 100달러가 찢어지는 걸 본 글로리아는 멀쩡한 지폐를 돌려받기 전까지 태화에게 돈의 소중함에 대해 설교했다.
「태하, 오해하지 마. 널 무시하는 건 아니야. 네가 천갈궁을 못 봐서 납득이 안 가겠지만 그 사람은 좀 재수 없게 생겼었거든.」
글로리아는 태화가 천갈궁임을 모른 채 그의 면전에 ‘재수 없다’는 말을 뱉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잭과 밀라가 자연스럽게 잔에 입을 댔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모든 걸 아는 입장에서 웃음을 참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할 땐 아무리 봐도 메이슨이 범인이야. 다른 두 찌질이는 그렇게 재수 없을 수 없거든.」
현재 히어로 측 배우들 사이에서 용의자로 지목되는 배우는 크게 세 명이었다.
영국 출신의 리처드.
탄탄한 체격과 액션을 겸비한 메이슨.
그리고 영화 내에서 언제나 혼자 움직이는 ‘수상한’ 제임스.
SFD 측 남자 배우가 그들만 있는 것은 아니나, 태화의 정체를 모르는 배우들은 ‘어느 정도 비중 있는 2, 30대 백인 남자 배우’들 중에 천갈궁이 숨어 있을 거라 예상했다.
「찌질이라······. 난 오히려 리처드나 태화에게 가능성을 두고 싶은데?」
빈 사과주 병을 두드리던 브라이언이 불현듯 태화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범인을 알고 있는 마피아들은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그러나 겉으론 흥미를 가장한 채 브라이언을 바라봤다.
「······리처드는 발음 때문일 거고, 태화는 왜?」
「네 명 중 연기를 가장 잘해. 한국에서 톱급이라더니 확실히 완성도가 높아.」
밀라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브라이언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리고 브라이언다운 대답을 들었다.
그가 태화를 용의 선상에 올린 것은 정말 ‘연기력’, 단 한 가지 이유였다.
천갈궁은 대본에서 막 튀어나온 캐릭터처럼 완벽한 연기를 선보였다.
태화 또한 대본에 적혀 있는 제이 리의 설정을 충실하게 따르며 생생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단순해보여도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 공통점이었다.
‘캐릭터 상성이 잘 맞아서일 수도 있고, 다른 셋이 연기력을 숨기고 있는 걸 수도 있으니 확신은 불가능하지만······.’
용의자로 지목되고 있는 배우들은 비중이 나쁘진 않으나 캐릭터성은 희미한 축에 속했다.
활약하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라도 한두 번에 그칠 정도.
그러니 브라이언의 마음엔 안 들어도, 겉으로 보이는 역할을 대충하고 천갈궁에 온 힘을 쏟는 배우가 있을지 몰랐다.
‘그 배우가 그런 성격이면 조금 실망할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태화가 영어를 조금만 더 잘했다면 브라이언은 망설임 없이 태화를 골랐을 것이다.
그러나 브라이언이 보기에 태화는 단어와 문법은 잘 알아도 구어(口語)는 미숙했다.
브라이언은 그 점을 안타깝게 여겼다.
「대사 연습해 오는 걸 보면 일 년······. 짧으면 몇 개월 안에 나아질 것 같은데 좋은 선생 섭외해 줄까? 에이전시가 그런 쪽으로 유명한데.」
때문에 그는 태화에게 호의를 보였다.
좋은 배우가 언어란 장벽 때문에 할리우드를 떠나는 걸 원치 않아서다.
「앗! 치사해! 태하, 선생 필요하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미국 연예계는 에이전시와 매니지먼트의 업무가 엄격하게 구별돼 있다.
또한 에이전시의 경우 ‘얼마나 많은 배우와 업계 종사자를 보유하고 있느냐’로 급이 나뉘었다.
네트워크가 클수록 적은 수수료로 연결해 줄 수 있는 인맥이 다양해지기 때문.
그런 이유로 여기 있는 브라이언과 글로리아, 그리고 밀라는 미국 최대 에이전시인 BAA소속이었고, 잭은 두 번째로 큰 AoA(Artist of America)에 속해있었다.
「걱정 마. 이미 구했어.」
「근데 왜 영어가 그런 건데!」
「발음이란 게 쉽게 고쳐지는 건 아니지만······. 역할 중간에 발음이 바뀌고 연기에도 저해될까 봐 일단 미루고 있어.」
글로리아의 무례한 말에 태화는 일반론으로 거짓을 포장했다.
태화의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을 참기 힘들었던지, 가만히 있던 밀라가 한 잔 더 받으러 간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잭도 춤이나 추러 가야겠다며 슬쩍 자리를 떴다.
「나도 같이 가! 태하도 춤추러 갈래?」
「이것부터 마시고.」
「소다 마시면서 분위기 잡긴. 난 간다.」
태화의 탄산음료를 비웃은 글로리아는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도 날듯이 스테이지로 뛰어났다.
일행들이 사라지고 과묵한 남자 둘이 남자, 테이블 위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음 주 한국에 간다고?」
「음. 카메오로 출연한 영화가 개봉해서.」
「자막 영상은 영 고역이라, 볼 수 없는 게 안타깝군.」
브라이언도 흔한 미국 정서를 지닌 미국인 중 하나인지라 자막이 나오는 영화를 질색했다.
그나마 유럽 쪽 영화는 대충 알아들을 수 있어 참고용 자막이 그리 거슬리지 않았지만, 아시아계 영화의 경우 더빙이 아니면 보지 않았다.
「곧 찍은 영화 중 하나가 더빙판이 나오는데 나오는 대로 알려 줄게.」
아쉬워하는 그에게, 태화는 한 가지 희소식을 전했다.
2년 전 흥행에 성공한 ‘괴물’이 몇 번의 수정 편집 후 드디어 미국 심의를 통과해 수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출용 영상은 자막판과 더빙판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다른 국가에 수출할 때와 마찬가지로 오민재 역은 태화가 더빙을 맡을 예정이었다.
물론 그 속에 담긴 영어 발음을 들으면 자신의 거짓말을 알아차릴 터이니 미리 줄 수는 없었다.
‘판매 예정이 내년 여름이기도 하고.’
제작이 완료됐다 하여 바로 시장에 풀리는 것은 아니다. 유통을 위해선 또 다른 심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더빙에까지 참여한 배우인 만큼, 판매 전 영상을 받아 브라이언에게 선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태화는 그 부분을 너그러이 넘겼다.
「부탁하지.」
태화의 속마음을 모르는 브라이언이 가볍게 웃으며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그렇게 가장 근접한 추리를 한 히어로를 멀리 떨친 태화는 일주일 뒤,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끝
ⓒ 마늘소금
한국에 도착해 시사회를 다녀온 다음 날, 태화는 건네진 스케줄을 보고 당황했다.
영화 한 편 보고 쉬면 될 거란 예상과 달리 출국하기 전날까지 여러 일정들로 빡빡했기 때문이다.
‘다른 시사회 일정이 잡힌 건 아닌데······.’
카메오이긴 해도 일단 어느 정도 비중 있는 역으로 출연한 터라 태화는 영화의 첫 시사회엔 참석했다.
그러나 기사로 알려진 것과 달리 정말 신상아에 대한 의리로 참여했던 것도 아니라서, 참석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여겼다.
‘적당히 괜찮은 영화이긴 했지.’
시사회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던 태화는 스크린에 비친 신상아를 보며 ‘잘하면 여우주연도 가능하겠네’란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나쁘지 않았거니와 그녀의 연기력도 썩 괜찮았던 탓이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기승전결, 흥행 요소 등을 잘 배치해 깔끔하고 완성도 높은 영화이긴 해도 태화의 가슴을 울리는 무언가는 없었으니까.
조금 신랄하게 평가한다면 공식만 잘 맞추고 감독의 색이라는 걸 느끼기 힘든 정교하게 만들어진 모조품 같은 영화였다.
그렇게 스스로 생각했던 모든 일정을 마친 그에게 BGA와 현규는 당혹스러운 스케줄을 내밀었다.
방한한 외국 배우들이나 소화할 것 같은 빡빡하고 쉴 새 없는 일정이었다.
당황한 태화에게 현규는 그 이유를 설명했다.
“네 팬들이 이구동성 예능 좀 나와 달라고 해서······.”
마레드를 비롯한 팬들은 태화가 미국에서 촬영 중이라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자신들에게 알리지 않은 것을 ‘엄청나게’ 서운해했다.
그 때문일까, 태화가 한국에 돌아왔단 기사가 뜨고 그의 공식 계정이나 팬카페에는 ‘한국에 들어왔는데, 예능도 안 하고 가나?’, ‘우리 배우님 힘든 시절은 없었지만 조강지팬을 소홀히 하면 안 되는 건데’, ‘배우님 예능 하게 만들기 서명 (1/1,000,000,000)’ 같은 글과 댓글이 도배됐다.
“네가 이 스케줄을 무시해도 문제는 없지만 하나 정돈 받아들였으면 해. 너도 누군가가 봐주길 바라서 작품을 고를 때 흥행 정도를 따져보는 거잖아? 그렇다면 그 봐주는 상대의 기분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촬영 도중 잠시 숨을 돌리러 온 것이니 예정대로 거절하려 했던 태화는 현규의 말을 듣고 마음을 고쳤다.
그가 연극이 아닌 방송을 택하고, 예술보다 상업 영화를 선택한 건 돈 때문이 아니었다.
태화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연기를 보고 연기를 통해 작품 속에 빠져들기를 바랐다.
한 번 자신의 연기를 본 이들이 눈을 떼지 못하길 원했고, 더 많은 관객, 더 많은 시청자를 원했다.
‘예능으로 인지도를 올리는 건 별로지만······. 최근 팬 서비스를 너무 안 하긴 했지.’
팬 서비스는커녕 기본적인 활동 소식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역할의 보안을 위해서였다곤 하나 팬들로선 충분히 서운해할 만한 결정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태화는 잠시 자신의 손을 들여다봤다.
그는 작품 외 활동으로 인기를 얻고 그것이 흥행으로 연결되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회귀한 지 3년이 지난 지금, 태화의 인지도는 예능에 좌지우지될 수준을 넘어섰다.
“좋아요. 먼저 확인하고 골라 볼게요.”
“태화야! 정말 고마워!”
“형이 고마워할게 뭐 있어요. 한 시간 안에 결정해서 알려드릴게요.”
“응, 응!”
태화는 일정이 적힌 종이를 받아들었다.
항상 작품 홍보 차원에서만 예능 활동을 했던 그가 ‘처음으로’ 팬서비스 차원에서 예능을 받아들인 날이었다.
***
“한국 와서 쉬지도 못하고 돌아다니네. 괜찮니?”
밤늦게 피곤한 낯으로 돌아온 태화를 선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살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의 얼굴이 질려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