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29
그가 겨우 흥분을 가라앉히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뭐, 같이 연기해보면 아실 겁니다.”
[글쎄요. 기대해 보겠습니다.]감독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재밌는 상황이다.
자신 또한 그의 말에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보면 이 상황은 ‘대국의 거만함과 텃세에 맞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보이는 정몽주’라는 작중의 장면과 유사하지 않은가.
감독의 중재에 배우들 또한 더 따지지 못하고 일어섰다.
경국과 유명의 분한 눈빛을 보니, 내일 촬영은 어느 때보다도 타오를 것 같다.
손감독은 이 얘기가 윤한성에게도 전해지길 바랬다.
그리고 연기로, 뤄더룽을 닥치게 해주길.
그런데 다음날 새벽에 도착한 한성은,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
“형, 어디 아프세요?”
시꺼멓게 죽은 한성의 안색에 유명이 기겁하여 물었다.
한성을 보는 것은 약 일주일만이었다.
문경 세트장 촬영 막판에 손감독은 무슨 이유에선지 정몽주의 장면을 최대한 앞으로 몰았고, 그래서 마지막에는 정몽주가 빠진 장면들만 찍었었다.
무슨 중요한 스케줄이라도 있나 해서 한성에게 물었지만, 한성은 대답해주지 않았었다.
‘어디 아프셔서 말을 못해주신 건가…설마…큰 병?!’
유명이 하얗게 질려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걸 보고, 한성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럼요? 형 진짜 안색이 엉망이에요. 해외 로케를 가는 게 아니라 입원을 하셔야 할 것 같은데···”
“그게 아니고…배가 고파서 그래.”
“네??”
이게 무슨 말인가, 유명은 기함했다.
“며칠동안 먹은 게 없거든.”
“왜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니 어떻게 이렇게 될 때까지-”
“정몽주가 13일을 굶었으니까.”
한성이 꺼낸 말에 유명이 잠시 숨을 멈췄다.
거멓고 깊이 드리운 다크서클에도 눈만은 형형히 빛을 내며, 정몽주의 표정으로 한성이 말을 한다.
“촬영 일정 때문에 13일은 무리지만, 단식 6일째야. 잘 돼야 할텐데.”
유명이 그 눈빛을 보고 눈을 흠칫 떨었다.
뤄더룽의 말을 전할 필요도 없다.
이 배우는 그를 반드시 놀라게 할 테니까.
끝
ⓒ 글술술
다시 시간을 되돌려 5월 중순의 어느 날.
촬영 한 달 째, 이방원의 아역 시기를 지나 유명이 합류한 이후부터 한성은 많은 고민을 했다.
새롭게 몸에 익힌 연기방식은 순조롭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녀석이 보통이 아닌 게 문제.
마지막에 촬영할 다담 씬, 정몽주와 이방원의 긴장이 최대한으로 고조되는 그 때에, 유명에게 밀리지 않으려면 자신도 더욱 분발해야 한다.
그는 손감독을 찾아갔다.
“감독님.”
“여어, 윤 배우.”
“정몽주 씬들을 최대한 앞으로 당겨서 찍을 수 있을까요? 중국 촬영 전에 1주일 정도 제가 먼저 빠졌으면 하는데요.”
“정몽주가 대부분의 씬들에 걸쳐 있어서 빼기 힘든데…뭐 급한 스케줄이라도 생겼어요?”
한성이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답했다.
“1372년 명나라 씬, 정몽주가 난파당해 13일간 표류한 이후라 더 실감이 나려면 며칠 단식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렇게까지···”
손감독이 조금 감탄하면서도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다.
“열정은 참 좋은데, 체력도 떨어질거고, 그 뒷 씬 연결도 고려해야 하고…그냥 분장으로 커버해도 되지 않을까요?”
“이방원에게도 관객에게도 정몽주란 인물에 대한 첫인상이 심어지는 씬이라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뒷 씬은 그 촬영 후에 잘 먹고 분장으로 커버하면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다음 씬도 90일 걸릴 거리를 60일 걸려 밤낮을 달려간 이후니 초췌할 법도 하구요.”
흐음-
손감독이 생각에 잠겼다.
중국 로케에서 촬영할 씬은 총 세 가지.
1372년 정몽주의 사절단 방문. 귀국하던 중 배가 난파하고, 동료를 모두 잃고 13일간 표류하며 생사를 헤메던 정몽주가 구출되어 명 태조 주원장을 알현하는 장면이 하나.
1384년 정몽주의 성절사(*주원장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 방문. 주원장이 고려에 트집을 잡기 위해 무리하게 요구한 기한을 밤새 달려 맞추어 내고, 주원장의 인정을 받는 장면이 둘.
1388년 창왕 즉위를 승인받기 위한 이색과 이방원이 주원장을 알현하는 장면이 셋.
그 중 정몽주가 등장하는 두 씬.
생각해보니 한성의 말도 옳다.
한 씬은 13일간 거의 먹지 못하고 굶주린 상태, 한 씬은 90일이 걸리는 일정을 60일로 단축시키기 위해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온 상태. 한계 상황이긴 마찬가지다.
실제로 굶주림에 허덕이는 상태라면, 그럼에도 온 기백을 짜내어 주원장과 맞설 수 있다면…좀더 실감나는 그림들이 손감독의 머리 속에서 춤을 춘다.
하지만…
“괜찮겠어요? 지금도 잘 하고 있는데···”
손감독의 망설임에 한성이 설득한다.
“감독님. 유명이 연기 참 잘하지 않습니까?”
“어어 그럼요. 연기 자체도 좋지만 캐릭터에 대한 깊이있는 해석도,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 오는 근성도 대단하지요. 처음에 이방원에 안 어울릴 거라고 평가했던 게 영 낯이 뜨겁네, 허허.”
“지금도 지금이지만, 다담 씬, 26세가 된 이방원을 표현할 때면 그 녀석은 더 날아오를 겁니다.”
한성의 단정적인 말에, 손감독이 침음성을 흘린다.
“흐음···”
“그리고 극 초반에 나오는 젊은 시절 정몽주와, 극 후반에 나오는 전성기의 이방원은 데칼코마니처럼 비교되겠죠.”
손감독이 움찔했다.
“처음에, 26세 이방원의 박력에 견줄만한 정몽주를 보여야만이, 극의 초반과 후반이 훌륭한 상관을 이룰 겁니다.”
“……”
“체력 걱정이라면, 그 파트 촬영 직후부터 열심히 관리하겠습니다.”
한성의 깊이있는 분석과 고통을 자처하는 제안에 손감독은 결국 동의하고 말았다.
문경에서의 한성의 촬영은, 감독이 당겨줄 수 있는 한도인 5일 전에 마무리되었고, 그는 그 때부터 중국에 오는 당일까지, 물과 영양제만으로 버텨왔다.
그리고 오늘, 때는 1372년.
정몽주가 명나라 수군에 붙들려, 황성에 도착했다.
*
오늘은 관객의 입장이 된 유명은 촬영장이 잘 보이면서도 스탭들의 동선에 방해되지 않는 위치에 자리잡았다.
한성이 영 걱정되는지 불안한 표정이었다.
‘오늘 날씨도 엄청 더운데 괜찮으시겠지?’
{흠…저 배우 예전엔 그러려니 했는데 아우라가 좋넹.}
‘그래? 원래도 좋으시지 않았어? 나름 손에 꼽는 배우 중 한 분인데.’
{존재감은 좋은데…썩 재밌는 타입은 아니었는뎅, 뭔가 방아쇠가 됐는지 아우라가 지글지글하당.}
미호의 평가에 유명은 오늘 새벽에 보았던 한성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래 보이긴 했어.’
{이런 때, 보통 좋은 연기가 나오징. 오늘 저 배우가 한 단계 도약할지도 모르겠당.}
유명은 미호의 말에 조금 긴장하며 촬영이 시작되는 것에 시선을 고정했다.
넓디 넓은 황성.
뙤약볕이 내려쬐는 거대한 세트장을 가로질러, 피골이 상접하고 물에 폭삭 젖었다 말라 볼품없는 사신복을 입은 남자가 걸어간다. 명나라 군졸의 인도를 받아.
황제를 알현함에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갖춰야 함이 당연하겠지만,
주원장이 대전에서 기다리지 않고,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온다. 자신의 호기심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원장.
늘 배를 곯았던 떠돌이 소작농의 막내 아들.
가진 것은 몸뚱아리 하나 뿐이었던 최하층계급에서 시작해 중국 대륙의 지배자로 우뚝 섰다.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인물.
황위에 오르고 나서 그는 10만여 명을 숙청했다.
죽이는 방식도 다양하여 거죽을 벗겨내어 허수아비에 씌워서 전시하는 박피형, 사지를 찢어죽이는 거열형, 내장을 빼내어 죽이는 추장형 등 잔인한 형벌을 즐겼다는 인물.
그 잔인성으로 폭군이란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어찌됐건 맨손으로 황위를 제패했다는 것만 보아도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유명은 화려한 황제의 의상을 걸친 뤄더룽을 주시하였다.
온 얼굴에는 분장으로 만들어진 곰보 자국. 예리하고 잔인하게 빛나는 눈매는 분장의 성과만은 아니다. 중국에서 악역 조연으로 이름있는 연기파 배우의 카리스마는 화려한 의상과 뒤따르는 수십의 시종들을 당연한 그림으로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의 모습이 드러나자 모든 명나라 군사들과 정몽주는 함께 부복한다.
황제는 천천히 걸어 그의 코 앞까지 다가온다. 몸수색도 마치지 않은 외국의 사신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만류해야 함에도, 주변의 시종들은 꾹 참고 있다. 그의 심기에 거슬리면 어떻게 사라질 지 모르기 때문.
세 걸음,
두 걸음,
한 걸음,
정몽주의 바로 앞에 뤄더룽이 멈춰서자 유명은 침을 꿀꺽 삼켰다.
황제가 고개를 살짝 외로 꼬고 가만히 그를 내려다본다.
드러난 것은 진한 호기심.
황위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죽음을 보기도, 집행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을 고비를 맞으면 똥오줌을 지리며 목숨을 구걸했다.
그런데, 그를 구출한 수군장의 보고에 따르면, 13일간 굶주리고 비바람에 시달려 횡사 직전의 지경이었음에도, 그의 눈빛은 맑았고 한 점 비굴함이 없었다고 하지 않나.
그것이 과장인지 진실인지 그는 무척 궁금하였다.
[예를 갖추고, 일어서라.]준엄한 명령이 엎드린 정몽주의 뒤통수에 떨어졌다.
*
‘호오···’
툭-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은 사내는, 벌벌 떨리는 팔을 짚고 일어서면서도 얼굴만은 한 점 비굴함 없이 깨끗했다.
그 얼굴을 처음으로 마주하고, 뤄더룽은 살짝 감탄했다.
수 일을 굶고 촬영에 임했다고 하는데, 몸이 휘청거림에도 등은 꼿꼿하고, 눈빛은 그간 고생한 티 하나 없이 정갈하다.
[폐하.]그는 팔다리를 후들거리면서도 정도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품위있는 인사를 올렸다.
또한 한성이 입에 담은 대사는 유창한 중국어.
그 발음에 뤄더룽이 다시 한 번 흠칫했다. 거의 네이티브에 가까운 발음이었다. 중국어를 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사실 한성은 중국어를 할 줄 몰랐다.
당대의 걸출한 외교관이었던 인물이라면 중국어가 능숙했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한성은 중국어로 번역한 대사를 혀에 박힐 정도로 연습했던 것이다.
[네 이름이 무엇인가] [폐하의 서촉 평정을 축하하기 위해 본국에서 파견된 사절단의 서장관인 정몽주라고 하옵니다.] [그래, 나에 의해 네 목숨을 건졌으니, 너는 이제부터 나를 위해 일하겠느냐.]주원장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꺾이지 않은 그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그에게 상을 내렸다. 고려라는 작은 물에서 놀기보다는 당연히 명을 택하리라는 오만함에서 나온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정중히 삼배를 올리고 자신의 너덜너덜한 옷 속에서 무언가를 꺼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