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89
새까만 방이다.
한 쪽에 켜져 있는 등이 배우를 비스듬히 때리고, 반대쪽에서 그림자를 완화시키기 위한 보조등이 부드럽게 맞물리는 어두운 방으로 유명은 안내되었다.
[연기할 땐 네이티브라고 생각했는데…아니군요?] [넵. 이 오디션을 보기 위해서 건너왔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영어를 잘 하시긴 하지만, 그래도 외국인인 걸 알겠는데…연기할 땐 정말 모르겠더라구요. 그만큼 발음과 억양을 의식하며 연습하신 건가요? 대단해요!]수잔의 오해에 유명이 대답없이 싱긋 웃음만 지었다.
그녀는 바로 직전의 연기 얘기로 넘어간다.
[와- 방금 그 연기는…정말 대단했어요. 예전에 캐스팅 디렉터 하면서 배우들 오디션도 꽤 봤는데, 트루먼을 연기하시는 분은 처음 보네요.]시원한 이목구비의 여성은, 확연한 호의를 표하며 유명에게 의자를 권한다.
카메라는 이미 돌아가고 있다. 룸 안에 다른 스탭은 없다.
쉽게 경계심을 허물어뜨리는 얼굴의 여성과, 낮은 조도의 조명.
이건 어떤 의도가 있는 인터뷰일까.
[설마 즉흥 연기인가요? 도저히 그렇게 볼 수는 없었는데요.] [즉흥은 아니에요. 준비한 레파토리 중의 하나였죠.] [다른 레파토리도 궁금하네요. 그러면 준비한 것들 중에 왜 하필 트루먼 쇼를 고르신 건가요?]여기서 이야기를 잘 해야 했다.
07년 극초반인 현재, 아직 한국에서는 리얼리티 쇼가 생소하지만, 유명은 원생에서 수많은 리얼리티 쇼가 봇물같이 유행했다가 유행을 넘기고 사라져간 시기를 모두 겪어 보았다.
오디션 프로의 특징. 너무 심심한 참가자는 소리소문없이 묻혀서 사라지고, 너무 나대는 참가자는 빌런으로 찍혀 조리돌림을 당하지.
그래서 인터뷰 환경을 이렇게 조성했을 거다.
부드럽고 안온한 환경에서, 전혀 해칠 것 같지 않은 인상의 여성이, 순간적인 방심을 포착한다.
그것이 망언이건, 건방짐이건, 숨겨진 과거사이건, 주눅들어 빌빌대는 모습이건,
시청률을 견인할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울궈내기 위해 정교하게 세팅해 놓은 장치.
[딱 좋은 무대였으니까요.] [딱 좋은 무대요? 앞에서 인터뷰했던 배우들은 모두 우는 소리를 했거든요.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너무 산만한 환경이라 연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그런데 유명씨에게는 딱 좋은 무대였다는 거죠?]필요한 것은, 약간 건방진가 싶을 정도의 도발 멘트와,
그 멘트가 납득이 될 만한 설득력.
한국이 아닌 미국이기에 겸손보다는 자신감에 살짝 무게를 둬서.
[보통의 오디션에선 지원자들에게 모두 맞는 세트를 지어줄 수 없으니까 ‘무’의 환경을 만들잖아요. 장소는 회의실이 될 수도 있고, 스튜디오가 될 수도 있지만…빈 공간을 배우의 연기로 상상시킬 수 있도록 배경을 비워두죠.]수잔은 유명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차분히 귀에 꽂히는 목소리.
그 말에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가, 갑자기 아- 하고 탄식한다.
[그래서, 트루먼쇼였군요?] [네. 많은 사람들이 저를 구경하는 환경, 하필 그 모든 사람들이 배우들, 수많은 배우들 사이에서 오직 단 한 사람 ‘연기가 아닌 삶’을 사는 인간.]그녀는 털이 쭈삣 선다.
마치 지금도 훌륭한 연기를 보는 듯이, 기승전결이 있는 그의 이야기.
[그런 상황이 트루먼쇼와 많은 부분 일치했죠. 그래서 제가 더 몰입할 수 있었고, 보시는 분들도 즐겁게 볼 수 있으셨던 것 같아요.] [와…그 짧은 순간에 그런 판단을···그럼 다른 과제가 나왔을 경우도 생각해 두셨던 건가요?] [평상적인 환경에서 가장 잘 보여드릴 수 있는 연기와, 이런 특수 환경에서 보여드릴 수 있는 경우의 수 몇 가지를 준비했어요.] [며…몇 가지나요?] [제가 가정할 수 있었던 상황은 약 스물 두가지 정도였어요.]그의 말에 수잔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그녀가 다음 질문을 한참 잇지 못하는 동안에도, 카메라는 눈치없이 푸른 불을 껌뻑껌뻑이며 제 할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
3일 후.
“나사렛 예수요.”
“뭐라고?”
“골고다의 언덕,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요~”
와구와구-
숙소에서 유석이 직접 구워준 삼겹살을 마구 밀어넣으며, 효준이 얘기한 ‘배역’을 듣고 유석과 유명이 벙찐 얼굴을 마주본다.
“딱 좋잖아요. 적대적인 시선들이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는 가운데, 사랑으로 내 너희를 인도하리라- 캬 포스 쩔죠?”
“어…과제에서…예수님 연기를 했다고?”
“넹.”
유석이 당황한 가운데, 유명은 꽤나 놀랐다.
연기 경력도 얼마 안 되는 어린 친구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배경에 어울리는 연기를 한다는 발상.
대부분의 배우들이 준비해 온 연기를 어떻게 해내느냐에만 전전긍긍할 때, 이 친구도 넓은 시야로 상황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골고다 언덕의 예수라면…즉흥 연기였나 보네요?”
“네. 어렸을 때 성경은 열심히 읽었거든요. 아버지- 다가올 고통을 피하게 해 주십시오. 하지만…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이 대사 할 때 옆에 있던 사람들 울었어요, 헤헷.”
순발력.
넓은 시야.
그리고, 예수라는 성인을 대뜸 선택하는 대범함.
유명은 드디어 ‘천재에요’라고 단언하던 유석의 말을 납득했다.
뼈저린 고민도, 몸을 혹사하는 연습도 없었으면서도 저런 발상을 해내고, 그것을 겁없이 실행에 옮긴다. 그리고 결과는 합격.
저런 재능을 천재라고 하지 않으면 무엇을 천재라고 하겠는가.
그리고 마인드가 모자란 친구를 유석이 4년이나 놓지 못했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형, 저 잘했죠?”
“좋은 선택이었네요.”
“유명씨, 좋은 선택이라뇨! 종교적 인물을 건드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데, 효준이 너는 겁도 없이···”
“그 상황에서 그렇게 주목받을 만한 연기를 즉석에서 해내고, 합격이라는 성과를 얻어낸 건데 대단한 거죠.”
유명의 덤덤하지만 칭찬이 분명한 말에 효준의 입이 헤벌레해진다.
하지만 유석은 고개를 조금 갸웃한다.
역시, 효준을 대할 때의 유명은 조금 차갑다. 칭찬은 칭찬인데, 자신과 무관한 상대에게 내미는 감흥없는 칭찬이라는 느낌이 드는 건 왤까.
“그나저나 형네 조는 예선 2차 키워드 뭐뭐 받았어요?”
“음…소품은 인형, 감정은 기쁨, 슬픔, 공포였어요.”
전 날 합격자들에게 2차 과제가 통보되었다.
5일에 나누어서 치른다는 예선 2차. 심사위원 3인이 들어와서 심사하는 자유연기 과제였다.
단, 조별로 다른 과제들이 부여되었다.
유명의 조는 인형이라는 소품을 사용해 기쁨, 슬픔, 공포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과제를 받았다. 기존에 있는 대본이건 창작 대본이건 상관없다며.
그 말을 듣고 효준이 말했다.
“와- 키워드 엄청 좋다! 딱 들으니까 할 수 있는 연기가 바로 떠오르는데요?”
“효준아-”
유석의 만류를 무시하고, 신이 난 효준이 얘기를 잇는다.
“대부분은 사탄의 인형 대본 연기하겠다! 설마 형도 시시하게 그런 쉬운 걸 하려는 건 아닐 거고, 뭘로 할 거에요? 아직 못 정했으면 방금 생각난 아이디어가 있는데-”
“효준씨.”
“네?”
유명이 그의 말을 끊는다.
“우리 이제 경쟁하는 사이잖아요? 이런 의견 교환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에이 형도, 융통성 없네요. 같은 기획사인데 본선에선 겨룬다 해도, 예선에선 도와도-”
“저는 도와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굳이 돕겠다는 건, 도움이 아니라 참견 아닌가요?”
표정도 굳히지 않았다.
칭찬의 말을 할 때만큼이나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지만, 명백히 선을 긋는 내용.
효준은 입을 삐죽대다가, 결국 제 방으로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다시 한 번 미묘한 느낌을 받은 유석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유명에게 묻는다.
“유명씨 혹시, 효준이 싫어해요?”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딱히 호의가 있는 것도 아니구요. 일부러 친해지려고 노력할 생각은 없는 직장 동료 정도일까요.”
“으음…싫어하는 것 같은데… 방금 효준이가 실수하긴 했지만, 그 전부터도 유명씨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혹시 효준이가 연기에 진지하지 않아서에요?”
가감없이 치고 들어오는 유석의 말에, 유명이 말한다.
“노력하지 않는 배우를 싫어할 거면, 정말 많은 사람을 싫어해야 할 걸요. 별다른 열정 없이 그냥 주어진 역을 주어진 대로 소화하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모두 다른데,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다 연기에 목숨 걸고 덤비라고 할 수 있겠어요.”
“……”
“다만 최선을 다하는 배우, 목숨 걸고 덤비는 배우를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같이 연기하고 싶고, 뭐라도 돕고 싶은 마음이 들기는 하죠.”
서류신, 설수연, 윤한성, 이선하, 차하린.
여태 유명이 호의를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유석은 그의 냉정한 표정은 볼 일이 드물었다.
“그렇지 않은 배우는 싫어하지도 않지만,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좋아함’과 ‘좋아하지 않음’의 경계라고 말한다.
그렇게 정확하게 선을 긋는 유명의 모습을 보고, 유석은 생각했다.
그 선 밖으로 절대 내보내지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선 밖에 위치하며 그와 경쟁할 효준에게, ‘한 번 당해봐라’라는 심정을 살짝 담아, 작은 애도를 표했다.
*
2차 지역 예선이 열리는 날 유명은 지난번의 거대한 홀이 아닌, TW방송사 내부에 위치한 스튜디오로 향했다.
[유명씨!] [안녕하세요, 팀장님.]인터뷰 이후로 부쩍 더 친근함을 표시하는 수잔이 유명을 먼저 알아보고 반긴다.
수잔과 인사를 나누며 들여다본 스튜디오 안에는 좌석이 많지 않아 보인다. 유명의 시선을 보고 수잔이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캘리포니아 2차 예선 1조에요. 40명이죠.] [아…1차에서 얼마나 탈락한 거예요?] [캘리포니아 지구의 지원자가 약 5천 명이었잖아요? 그 중 1차 통과자는 198명이었어요. 25:1의 경쟁률이죠. 그 198명을 다시 약 40명씩 5조로 쪼개어서 5일간 심사하는 거에요.] [아…그렇구나.]1차 예선을 통과하고 받은 과제를 1인당 10분에 걸쳐 심사한다고 볼 때, 40명이면 400분이 걸린다. 추가적인 시간 손실을 감안하면, 40명만 해도 거의 하루 종일 심사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스튜디오 안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걸 보니, 같은 날 심사받는 사람들끼리는 연기를 볼 수 있나 봐요?] [맞아요. 경쟁자들끼리 반응도 따야 하니까요. 어차피 합격자 발표도 오늘 할 거에요.]아, 당일 심사 결과는 당일 발표해 버리는 모양이다.
어쨌든 잘 됐다는 생각으로 유명은 눈을 반짝였다. 같은 과제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연기해 내는지 보는 것은 꽤나 공부가 된다.
[다른 스튜디오에서 마치고 나오는 인원들 인터뷰 따야 해서, 연기하는 거 라이브로 못 보는 게 아쉽네요. 잘해요, 화이팅!] [네, 감사합니다!]씩씩하게 문을 열고 들어간 유명은, 아직 몇 자리 차지 않은 지원자석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아내서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오늘의 과제를 머리 속에 복기해 보던 유명은,
자신의 옆자리의 주인이 다가오길래, 얼른 다리를 당겨 길을 내어준다.
그리고 무심결에 옆자리를 쳐다보았다가,
‘으…으엇!!’
화들짝, 놀랐다.
7년 후 방영될 미드 . 초유의 히트를 치고 시즌5까지 제작되었던 드라마의 주인공 카이 누넨.
그가, 아직 소년같은 얼굴을 하고 옆자리에 앉아 있다.
‘카이가 캐스팅보트에 나왔었구나···’
대히트를 친 연기오디션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이 시기에 한국에 정식 수입되지는 못했다. 불법공유된 파일들이나 부분적인 짤들만 인터넷에서 떠돌았을 뿐이다.
그래서 유명은 카이 누넨이 캐스팅 보트에 출연했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저…아…안녕하세요?]두근두근, 팬심을 감추고 유명은 인사를 건넨다.
정말 그다.
카이와 자신의 나이차는 네 살.
그렇다면 지금 그는 한국 나이 스물셋이다. 이쪽 나이로는 스물 하나, 혹은 둘일 것이다.
그런데도 어쩌면 이렇게 맑은 눈빛을 가지고 있는지.
유명은 검은 피부의 천사같이 아름다운 이목구비, 빨려들 것 같은 맑고 푸른 눈을 보고 살짝 감동에 젖었다.
‘와…여기 오기 잘했다.’
나탈리 카센을 만났을 때도 신기했지만,
좋아하던 미드의 남주와 같은 자격으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이 기분은, 정말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자신도 ‘진짜 배우’구나, 라는 실감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2차 예선이 시작되었다.
149 오디션, 혹은 연기수업
2차 예선의 심사위원단.
TW의 드라마 PD인 앤드류 페일턴과 워크브로더스 소속 시나리오 작가인 키스턴 휴.
그리고…나탈리 카센.
한 명씩 호명되어 인사를 할 때마다, 지원자들은 바짝 얼은 표정으로 박수를 짝짝 쳤다.
심사위원들은 모두 다 연기지망생이라면 알고 있을 법한 업계의 중요인물들이며, 그 중에서도 나탈리 카센의 이름은 단연독보적이다.
리얼리티 쇼 같은 곳에 나올 것 같지 않은 스타.
모두들 TW가 무엇으로 그녀를 꼬셔냈는지 궁금해했지만, 그것을 물을만큼 배짱있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여러분 TW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 기억하시죠? 캘리포니아 1차 예선부터 여러분의 친절한 안내자 역을 맡고 있는 제리~~하이!]와아아아–
진행을 시작하던 제리 하이가 비밀이야기를 해준다는 듯이, 몸을 앞으로 기울여 속삭인다.
[2차 예선은 5일에 나누어져 치르는데, 날짜마다 심사위원은 무작위로 3분씩 배정되거든요. 그런데 저기 계신 저 여신님···]그는 나탈리를 슬쩍 턱짓하며 짓궂은 표정을 짓는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지역 심사위원단 중 최고 셀럽은 역시 저 분 아닙니까. 그런데 저 분이 원래 오늘 배정이 아니었는데, 오늘로 옮겨 달라고 떼를 쓰셨다 이거에요. 이유가 뭘까아? 어쨌든 여러분들은 여신의 간택을 받으신 행운아라 이거죠~] [제리. 내 사생활은 보호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변호사한테 전화 좀 걸어야겠는데요?] [아니, 제리. 우리 앞에서 콕 찝어서 나탈리만 셀럽이라고 하깁니까? 나 찍은 피딘데, 나 정도면 나탈리와 같은 급 아니에요?] [에이, 나탈리가 지금 앤드류 힐끔 보는 거 보셨어요? 끕도 안 되는 게 개기네- 이런 표정인데요?]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멘트를 마구 흘리며 분위기를 능숙하게 완화시키는 제리 하이와 일부러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항의하는 심사위원들.
그 광경을 보고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긴장을 늦추고 실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몇 몇 눈치빠른 사람들은 그 대화 속의 함의를 추측해냈다.
‘행운은 개뿔…1차 때 나탈리 카센이 심사한 조에서 탈락자가 제일 많이 나왔단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오늘도 죽어나겠네.’
‘일부러 오늘로 배정을 옮겼다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안에 나탈리 카센이 주목하는 지원자가 있다는 뜻일까?’
그렇게 긴장과 이완이 교차되는 사이,
제리가 오디션의 시작을 알렸다.
[2차 예선의 과제는 ‘주제가 있는 자유연기’입니다.여러분은 1주일 전에 활용해야 하는 소품, 표현해야 하는 감정을 메일로 전달받으셨을 겁니다.]
그가 손을 휘젓자 스튜디오 한 켠의 커다란 화면에 글자가 떠오른다.
[조별로 주제는 다르지만, 오늘 이 자리에 모인 1조 분들은 모두 같은 주제를 가지고 연기하시게 됩니다. 기존에 있던 대본이나 배역을 가져다 쓰셔도 상관없고, 창작 대본도 상관없습니다만, ‘소품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과 ‘주어진 감정을 충분히 연기해내는 것’은 합격의 필수 조건이 됩니다.]시원하게 터지는 음성으로, 고저장단을 가지고 놀며 진행하는 그의 솜씨에, 모두들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모두를 긴장하게 하는 마지막 멘트가 터진다.
[오늘의 합격자는…네 명.]화면이 가득 차게 4라는 숫자가 껌뻑거린다.
[1차 때는 각 심사위원들이 제한 인원 없이, 자신의 기준을 넘어서는 배우라면 모두 뽑았죠. 경쟁률이 높았긴 하지만, 그건 워낙 허수가 많았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여러 분은, 천 명중에 선택된 40명의 배우입니다. 즉, 내 옆자리의 누구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 이겁니다.]그의 말에 지원자들이 잽싸게 주변을 훑어본다.
[이 중에 네 명. 아무리 잘하는 사람이 많아도, 단 네 명만이 본선에 진출합니다. 열 명 중 한 명은 웃고, 아홉 명은 대성통곡을 해야 하는 상황이에요.]제리가 눈을 찡긋하며 경고했다.
[전쟁입니다. 지금이라도 옆자리 배우가 준비해온 대본을 슬쩍하는 편이, 내 합격률을 조금이라도 높일지도 모른다구요?]옆자리 배우들은 동료가 아닌 적이라고.
그리고 이제 ‘전쟁’이 시작된다고.
*
군대에 가서 고참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가.
‘차라리 전쟁 중 만나는 적군이 더 인간적이겠다.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
그 상황이 이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분명 서로 적군인 배우들은 함께 뭉쳐 벌벌 떨고 있고,
앞에 있는 심사위원, 혹은 업계 선배, 혹은 고참이라고 할 만한 인간들은 총도 들지 않고 입에 총알을 재어 심장을 난사해 댄다.
그 중 가장 명사수는, 나탈리 카센이었다.
[엄마! 이거 너무 갖고 싶었던 인형이었어요. 신나! 너무 기뻐! 와아아아-] [내 인형…내 인형···! 데이빗이 훔쳐가서 머리와 목을 분리해버렸어. 죽었어, 죽어버렸어…흐엉.] [헉!! 이…인형이 말을 해…뭐라고? 두 달 전에 죽은 나의 사촌…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