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by Tyrant RAW novel - Chapter 307
43화. 아기 천사가 찾아왔어요
에스테반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데니아 저택에 출석했다.
처음에는 황제의 행차에 사람들은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대귀족인 가데니아 후작과 독대해 정치적 논의를 하기 위해 방문하는 것이라 여겼으므로.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 일주일이 넘도록 저택을 드나들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즈음, 과거에 가데니아 후작의 외동딸과 황제가 함께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는 제보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연분홍 머리 색의 아주 사랑스러운 분 맞죠? 확실히 본 적 있어요.”
“황제 폐하를 닮은 남자와 함께 있기에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황제 폐하셨을 줄이야…….”
혹시나 제 정체를 들킬까 봐 인적이 드문 곳에서 데이트를 즐겼던 에스테반이지만,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었다.
특종의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득달같이 몰려들어 제보를 받았다. 황제와 후작 영애의 목격담이 변질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더군다나 전 황후와의 이혼으로 세간의 이목이 주목될 시기지 않은가.
그런 폭발적인 관심도 잠시 불미스러운 소문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당연히 소문이 불식된 배후에는 누군가 존재했다.
구스타프는 신문사 목록이 적혀 있는 서류를 덮으며 에스테반에게 간략하게 보고했다.
“폐하. 명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수고했다, 구스타프.”
에스테반은 보좌관에게 공을 치하하며 외출 준비를 했다. 구스타프가 예의상 질문했다.
“오늘도 가십니까?”
“가야지. 오늘도.”
피곤한 낯의 에스테반이 제 얼굴을 쓸었다.
구스타프는 과중한 업무에도 꼭 시간을 내어 가데니아 저택에 들르는 황제의 발걸음이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가데니아 후작의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결코 혼사를 허락해 줄 것 같지 않은데 차라리 황명을 내리-.”
구스타프는 좀 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했지만, 에스테반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그의 이름을 불렀다.
“구스타프?”
“예?”
“네 눈앞의 존재가 누구라고 생각하지?”
“황제 폐하십니다……?”
“그래. 그리고 짐의 고집도 만만치 않고.”
그렇게 덧붙인 에스테반이 구스타프를 지나쳐 문가로 걸어갔다.
구스타프는 그 뒤를 따르며 에스테반의 뒤통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역시 엄청난 자신감이시군.’
황명이 아니라도 가데니아 후작과의 이 전쟁에서 기필코 승리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가데니아 저택으로 향하는 에스테반의 발걸음은 비교적 가벼웠다.
후작의 방해로 시아나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 건물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아졌으니까.
‘내 목숨을 곁에 두기 위한 노력인데, 포기할 수 있을 리가.’
내 목숨. 시아나.
오로지 시아나와 함께 하는 미래를 위해서 에스테반은 오늘도 거절당할 게 뻔한 구혼을 하기 위해 나섰다.
***
밖이 황제의 새로운 스캔들에 대해서 떠들썩한 사이, 시아나는 완고한 아버지를 설득하려 노력했다.
“한 번만이라도 폐하를 뵙게 해 주세요.”
“안 된다. 침실 밖으로 절대 나오지 말거라.”
“어째서요?”
“몰라서 묻느냐? 황제 폐하는 절대 안 돼.”
“아버지……!”
가데니아 후작은 결코 에스테반과 시아나가 만나지 못하도록 삼엄하게 감시했다. 벌써 몇 번이나 에스테반이 왔다 갔지만 시아나는 단 한 번도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소문으로 누군가를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시잖아요.”
“그래서 사실만 보고 판단하지 않았느냐. 황제 폐하께서 전황후 폐하를 내치신 일은 네가 잘 알고 있겠지.”
“그건…….”
에스테반과 파시피카 사이의 계약을 발설하면 곤란할 것이다. 시아나가 입을 다물자 그 반응을 수긍으로 받아들인 가데니아 후작의 입매가 더욱 완고하게 다물렸다.
잠깐의 침묵 후 후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시아나. 네가 황제 폐하의 어떤 모습에 빠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아비는 그보다 더 오래 황제 폐하를 뵈었다.”
“무슨 말을 하시고 싶으신 건가요?”
“어릴 때는 오만방자하였고, 젊을 때는 날뛰는 혈기를 억누르지 못해 선황께서 전쟁터로 보내버리셨지. 나기를 유일무이한 차기 황제로 자라난 분이다.”
가데니아 후작 또한 자신이 황제와 같은 족속이라 생각하기에 더욱 시아나의 마음을 허락할 수 없었다.
불행할 것이 뻔한 불구덩이에 제 자식이 뛰어드는 것을 눈 뜨고 볼 부모는 없으므로.
“설령 아버지께서 폐하의 그런 모습을 보았다고 해도, 그건 과거의 모습이잖아요.”
“사람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
“변해요, 분명.”
그녀가 변화를 목격한 증인이었다.
다소 오만하던 사내는 타인의 마음 한 자락 얻기 위해 애걸하며 눈물을 흘렸다.
황제라는 체면도 버리고, 오로지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로서.
“피곤하구나. 이 아비는 이만 쉬어야겠다.”
그러나 가데니아 후작은 그런 시아나의 말을 사랑에 빠진 딸의 줏대 없는 말로 여겼다.
몇 날 며칠 동안 반목이 이어졌다. 아버지와 대립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동안 시아나는 옛날 생각을 했다.
“유모. 아버지는 언제 오셔?”
“주인님께서는, 음……. 백 밤 주무시면 오실 거예요.”
“백 밤?”
유모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아직 어린 시아나에게 가장 큰 숫자가 바로 백이었다는 것을.
시아나가 영지 성 밖을 나가는 것을 금지한 탓에 아이는 성 안의 세계에서 오로지 아버지가 오는 것만을 기다렸다.
하염없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백 밤을 세면서…….
가데니아 후작은 주로 수도에 머물렀고, 시아나가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날은 아주 짧았다.
그 짧은 시간에도 가데니아 후작은 딸을 귀애한다는 명목하에 언제나 시아나를 제 의지대로 통제하려 했다.
어렸을 때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포장했지만, 이제는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기나긴 반목에 시아나는 지쳤다. 또한 결심했다.
이른 아침, 가데니아 후작을 찾아간 시아나는 선언했다.
“이 저택을 떠날게요.”
보호라는 명목의 이 새장에서 훨훨 날아가겠다고.
당연히 가데니아 후작은 딸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랑에 눈먼 치기라고 여기며 길길이 날뛰었다.
“정신 차리거라, 시아나 가데니아!”
“저는 지극히 제정신이에요, 아버지.”
“네 안위를 걱정하는 아비의 마음을 이리도 몰라?!”
“그러는 아버지는, 제 마음을 알려고 하신 적 있으세요? 단 한 번이라도!”
“……뭐?”
예상치 못한 시아나의 외침에 가데니아 후작은 순간 멍해졌다.
“늘 그랬어요. 짧은 외출조차 아버지의 허락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게 제 처지였죠.”
“네가 다칠까 봐, 상처 입을까 봐 걱정되어 그랬다!”
“저는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이 아니에요.”
“……시아나!”
시아나는 아버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동안 꽁꽁 숨겨왔던 본심을 털어놓았지만 여전히 그는 노기를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체념하며 문가로 걸음을 옮겼다.
잔뜩 붉어진 눈으로, 가데니아 후작이 씨근덕거리며 경고했다.
“이대로 떠난다면, 이 아비는 너를 다신 보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독선적이시네요.”
시아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문고리에 손을 올린 그녀는 마지막 인사를 남긴 채 떠났다.
“언제나 건강하세요.”
……사랑하는 아버지.
***
“아가씨, 아가씨!”
“주인님께서 걱정하실 겁니다!”
만류하는 사용인들을 물리치고, 시아나는 저택을 빠져나왔다. 챙겨나온 거라곤 단출한 짐가방 하나.
‘우선 호텔에라도 가야겠다.’
애써 씩씩하게 계획을 세우며 길을 걷고 있을 때,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마차가 그녀 옆에 멈춰 섰다.
이윽고 놀란 얼굴의 누군가가 마차에서 황급히 내렸다.
“시아나?!”
마침 가데니아 저택으로 향하던 에스테반이었다.
왜일까.
괜찮았는데. 울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었는데. 에스테반의 얼굴을 보니 둑이 허물어지듯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무슨 일이야. 왜 그대 홀로 있어.”
“에반…….”
에스테반이 엄지로 시아나의 눈가를 쓸었다.
몇 주 만에 겨우 재회한 연인을 길거리에서 만난 것도 황당한데, 심지어 자신을 만나자마자 눈물까지 터트리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는 사람을 달래본 적이 있어야지.’
에스테반은 주로 울리는 쪽이었다.
시아나는 그의 손길에 얼굴을 맡기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집을 나왔어요.”
눈이 마주쳤다. 순간 에스테반은 호박색 눈동자에 어린 결연한 감정을 엿보았다.
‘그래. 그대는…… 아버지를 저버린 건가.’
가데니아 후작이 쉬이 딸을 보내주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마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하면서도 그 벽을 깨부수고 나온 시아나를 보고 있으니 가슴이 뻐근한 것만 같았다.
시아나에게는 안된 사실이지만 에스테반은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를 곁에 둘 수 있다면 나약해진 틈을 얼마든지 파고들 수 있었다.
에스테반은 커다란 손으로 시아나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시아나.”
“네.”
“……짐이 언제나 그대를 아껴 줄게.”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시아나, 그대가 절대 외롭지 않도록.”
에스테반의 말에 시아나는 외로웠던 과거를 떠올렸다.
언젠가 에스테반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빈자리와, 언제나 수도에 머물러 영지에 자주 들르지 못한 아버지.
이름뿐인 보호가 아닌 혼자가 아니기를 바랐던 어린 날.
에스테반의 말은 외로웠던 어린 시아나에게 건네는 위로였다.
“에반.”
“그래.”
“……안아 주세요.”
그녀는 알고 있을까. 시아나가 그에게 무언가를 바란 적은 처음이었다.
에스테반은 말없이 시아나를 제 품에 안았다. 시아나는 연인의 체향을 맡으며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로 외롭지 않아.’
이 사람 곁에 있으면 정말로 괜찮을 것만 같았다.
***
머지않아 황제는 제국 전역에 국혼을 발표했다.
정말로 가데니아 후작 영애와 황제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제국이 발칵 뒤집혔으나 낯선 황성 생활을 시작한 시아나에게까지 그 여파가 미치지는 않았다.
소란스러운 외부 상황과 달리 현재 시아나는 한껏 긴장한 상태였다.
“울면 어떡하죠?”
그녀가 침실 바깥에서 머뭇거리자 에스테반이 시아나의 어깨를 감싸며 격려했다.
“착한 아이니까 괜찮을 거야.”
“정말 괜찮겠죠?”
쭈뼛거리며 고민하던 시아나는 용기를 내어 침실 안에 발을 들였다.
어둑한 내부 안. 요람에 가까이 다가가자 말간 아기의 얼굴이 보였다.
“오스카…….”
에스테반과 파시피카의 아이.
시아나가 에스테반을 밀어냈던 이유는 파시피카였고, 그를 받아들인 이유 또한 파시피카였다.
그녀는 파시피카에게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이 있었다.
그래서 그 마음의 빚을 그녀의 아이를 돌보면서 갚자고 홀로 다짐했는데.
“꺄아!”
오스카가 조그마한 손을 꼼지락거리며 미소 짓는 순간 그런 잡다한 상념들은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죄책감이고, 빚이고, 그런 것보다는 그저 그녀를 올려다보며 까르르 웃는 아기가 사랑스러웠다.
에스테반이 나직하게 웃었다.
“오스카가 그대를 좋아하는군.”
아기가 방싯방싯 웃으며 짧고 통통한 두 팔을 그녀에게 힘껏 뻗었다.
“어, 어-.”
시아나가 당황하자 에스테반이 아이를 들어 시아나의 품에 안겨 주었다.
“안아 달라고 하잖아.”
“저, 아기 처음 안아 봐요…….”
“괜찮아. 까다로운 아이가 아니니까.”
시아나가 서툴게 안든 말든 오스카는 뭐가 그리 좋은지 해맑은 웃음소리를 내며 시아나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파시피카와 같은 녹색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시아나는 옅게 웃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오스카.”
“꺄!”
오스카가 작은 손으로 시아나의 손등 위를 덮었다.
그게 마치 ‘나도 잘 부탁한다’는 의미인 것 같아 시아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이 이어졌다. 오스카는 흔한 잔병치레도 없이 무럭무럭 자라 황성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하비에르 가문의 엔리케 하비에르와 함께 숨바꼭질하며 너무 꼭꼭 숨어버리는 바람에 황성이 발칵 뒤집히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끔 데블린 제국과 맞닿은 북쪽 국경에서 국지전이 벌어지곤 했으나 수도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에스테반이 약속했던 것처럼 시아나는 전혀 외롭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다정했으며 세상에 어떤 보물보다 시아나를 귀하게 대했다.
그는 집무 틈틈이 빠져나와 시아나를 만나러 갔다.
“에반. 바쁜 거 아니었어요?”
“당신 만날 시간은 충분해.”
시아나를 끌어안으며 행복한 한숨을 내쉬는 에스테반 뒤에서 구스타프가 발을 동동 굴렀다.
“아이참. 회의 중에 뛰쳐나오시면 어떡합니까!”
그런 구스타프 다리 사이로 은색 머리통이 뽀르르 지나갔다. 구스타프가 기겁하며 펄쩍 뛰어올랐다.
“황자 전하. 왜 제 다리 사이로 지나다니십니까!”
“다리 노리!”(다리 놀이!)
“다리 놀이는 또 뭡니까…….”
구스타프가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리자 오스카가 에스테반의 다리에 착 붙어 고자질했다.
“아빠! 구수따푸가 시꺼!”(아빠! 구스타프가 시끄러워!)
“구스타프. 우리 아들이 시끄럽다는군.”
“제가 뭘 했다고…….”
억울해진 구스타프가 불퉁한 얼굴로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네요, 폐하. 구스타프가 곤란해하잖아요.”
“황후 폐하……!”
그런 보좌관을 위로해 주는 건 황후인 시아나밖에 없었다. 에스테반은 불만스러웠지만 시아나의 채근에 어쩔 수 없이 회의실로 발길을 옮겼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적인 나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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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축하드립니다, 폐하. 회임하셨습니다!”
“……회임?”
시아나에게 아기 천사가 찾아왔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