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Degree RAW novel - Chapter 5
5화. 병 깨트리기
지금 신수곡 내에서 사용하는 거대한 물통 역시 그가 매일 떠다 놓은 것이었다. 한립은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너무나 느리게 흘러간다고 생각할 즈음, 장석철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립이 곧바로 뛰어가 방문을 열자 얇은 푸른색 무명적삼을 걸치고, 은은한 열기를 뿜으며 온몸에 땀범벅으로 뒤섞여 있는 장석철의 모습이 보았다.
그는 갑자기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한립을 보고 어리둥절해했다.
“장형, 이것 좀 도와줘. 이 병 마개를 열 수 있겠어?”
“이런 건 어디서 난 거야?”
장석철은 병을 받아 들고선 유심히 살펴보았다.
“어서 열어봐. 어서.”
한립이 재촉하자 장석철은 쓸데없는 말을 마치고 그것을 돌려보았다. 그러나 마개는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이고 다시 힘을 주어 열어 보았지만,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이거 정말 단단한데. 대체 뭐로 만들어 진거야? 나로써도 역부족이야. 다른 사형들을 찾아가서 열어달라고 해보는 게 어때?”
장석철은 미안한 듯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병을 돌려주었다.
“장형처럼 힘센 사람도 열지 못한 단 말야?”
한립은 실망한 듯 장석철의 방안을 왔다 갔다 했다.
“네 발은 어찌 된 거야?”
장석철이 그제야 한립의 걸음걸이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물었다.
“별거 아냐.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채였어.”
* * *
다른 사형들을 불러 도와달라고 하면, 아마 이것을 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립은 이 병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 이 병에 대해 아는 자가 나타나, 이 병을 다시 가져가려고 할지도 몰랐다.
이렇게 아름답고 흥미로운 물건을 한립은 절대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 이미 이 병에 매혹된 것이다.
그도 마음 한편에는 이 병이 그저 비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병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훨씬 더 흥미로울 것이라는 데 한번 승부를 걸어보고자 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한립의 마음은 근질근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만약 이 병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다면, 오늘 밤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강력한 힘을 이용해서 억지로 열어보기로 했다.
비록 특색 있고 아름다운 병을 온전하게 보전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속이 쓰렸지만, 지금으로써는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런 결정이 내려지자 한립은 잡다한 물건을 쌓아두는 방 안에 몰래 들어가, 비교적 묵직한 돌망치를 골라 방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온 한립은 평평한 곳을 골라 방 한쪽 구석에 버려두었던 벽돌 위에 병을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돌망치를 들어 올렸다. 돌망치의 머리 부분이 허공에서 잠시 멈칫했지만, 바로 병의 허리부분을 내리쳤다.
병은 멀쩡했다. 혹시 산산조각이 나면 어쩌나 걱정했던 한립은 조금은 안심했다. 조금 더 힘을 주어 내리쳐야 병이 깨질 것 같았다.
쾅! 쾅! 쾅!
돌망치가 떨어지는 속도가 갈수록 빨라졌다. 마지막에는 병의 반절이 벽돌을 뚫고 들어갈 정도였다. 그러나 깨져나가는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립은 놀라움에 넋을 잃고 여전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은 듯, 병의 표면을 쓰다듬어 보았다. 병은 처음과 변함없었다.
한립은 그제야 이 병이 절대 예사 물건이 아니며, 십중팔구 물건의 주인이 부주의하여 떨어트린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 이 병의 주인은 온 산을 뒤지며 이것을 찾고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돈 있는 출신 제자들이나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 떨어뜨린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두 종류의 인사들이 떨어뜨린 물건이라면, 한립은 더욱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골탕 먹도록 숨겨두고 싶었다. 왜냐하면 한립은 부유한 집안의 제자들이 평소 가난한 집안 출신의 제자들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항상 말을 비꼬며 그들을 모욕해 몇 번이나 충돌을 일으켰다. 한립도 그 다툼에 끼어들어 다친 적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무공이 강한 자들과 싸웠고, 얼굴에 멍이 들고 온 몸이 부어서 며칠 동안 문밖에 나설 수 없었다.
한립은 그저 땅에 떨어진 것을 주운 것뿐이라며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려면 이제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정리되자, 한립은 자신의 목에 걸린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이 가죽 주머니는 집에서 나올 때 어미가 특별히 동물 가죽을 이용해 만들어 준 것이다. 그곳에는 야생 멧돼지의 이빨로 만든 평안부(平安符)가 들어 있었다.
이 부적에는 병과 재난을 피하기를 바라는 어미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한립은 가죽 주머니에 평안부와 함께 병을 넣고 입구를 잘 여며 다시 목에 걸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그는 사방을 살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자신의 명치 부근에 살짝 솟은 주머니를 쓸어내리자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이제 아무도 이 병을 가져갈 수 없을 것이다. 한립은 주변을 정리하고 슬그머니 돌망치를 원래 있던 자리에 가져다 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으로 돌아왔다.
* * *
저녁을 다 먹은 한립은 창과 문을 단단히 잠그고 주머니에서 병을 꺼내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한립은 병을 만지작거리다 자기도 모르게 병을 손에 든 채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잠에 빠져 있던 한립은 순간 손에서 한줄기 차가운 기운을 감지했다.
이미 천근만근이 된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눈을 뜨자마자 눈앞에 벌어진 광경은 정말 놀라웠다. 잠은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하늘에서 흰 색의 광채가 지붕을 통해 쏟아지고 있었고, 그 빛줄기들은 모두 작은 병으로 모여들어, 쌀알 크기의 둥근 모양으로 변해 병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 빛은 굉장히 부드러워 눈이 부시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리고 한립이 느꼈던 차가운 기운은 바로 이 백색광(白色光)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한립은 망설이다가 병을 몇 번 건드려보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한립은 정신을 집중해 다시 병을 주시했다.
그는 이 병이 공중을 떠도는 흰색 광구를 투과시켜, 흡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니 흡수하고 있다기보다는 기를 쓰고 병 안에서 모이고자 하는 모양새에 가까웠다. 서로 앞 다투어 모여드는 것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다.
지붕을 통해 떨어져 내려온 빛줄기들은 멈출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한립은 지붕에 달려 있는 작은 창에 고개를 내밀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밖에는 벌레들의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병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움켜쥐고는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걷고 또 걸어서 사람이 찾지 않는 곳에 조용히 멈춰 섰다. 그리고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심스럽게 병을 내려놓았다.
사라졌던 흰빛줄기는 시간이 흐르자 방안에서 보다 훨씬 더 많이 모여들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모여들어 병 주변을 둘러싸며 거대한 빛의 무리를 만들어냈다.
“와!”
한립이 한 손을 높이 들어 올리며 신나서 소리를 질렀다. 그의 생각이 옳았다. 방안에 있는 작은 창은 빛줄기들을 모으는 데 방해만 될 뿐이었다.
사방이 뻥 뚫려 막힘이 없는 곳에서, 더 많은 빛줄기를 끌어들이고 더 거대한 빛 무리를 만들 수 있었다.
비록 이 빛들이 어디에서 오는 지, 어디에 쓰이는지 알지 못하지만, 이 병의 비밀을 밝혀내는 데 한걸음 더 다가섰다. 한립은 당장이라도 이 비밀을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아 들떴다.
밤이 지나가고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병 주변의 빛도 점차 사라져 갔고 본연의 평범한 모습을 되찾았다. 마개를 돌려보았지만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이후 며칠간 밤마다 일정한 시간이 되면 똑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셀 수 없이 많은 빛줄기들이 불나방이라도 된 듯 병을 향해 달려들었고, 병은 탐욕스럽게 그것들을 삼켜버렸다.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 지 8일째 되는 날, 또 다른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이번에도 후미진 공간에 들어서서 병을 꺼내놓았다. 그런데 이 빛을 흡수하는 현상이 겨우 일각(一刻)도 안 돼 멈춰버렸다.
이에 병 표면에 있던 흑녹색 꽃문양에서 돌연 눈부신 녹색 빛을 뿜어냈고, 이와 함께 병의 겉면에 황금색의 문자와 부호가 나타났다.
이 문자와 부호들은 잘 정렬돼 있었지만 글자의 생김새가 기이했다. 고대에서나 쓰일 법한 필획(筆劃)이었다. 그것들은 멈추지 않고 병의 표면에서 빛을 발하며 떠다녔다.
그리고 잠시 후 병은 다시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이전으로 돌아갔다.
한립은 신기한 현상들을 접하면서 이제 이상한 일이 생기더라도 크게 놀라워 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병을 들어 마개를 돌려보았다. 얼마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병의 마개가 너무나도 쉽게 열려 버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놀라서 손에 든 마개를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며칠 밤낮을 고민하던 문제가 드디어 풀린 것이다.
그는 병에 감춰진 비밀이 드러난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짜릿함을 느꼈다. 그의 시선은 병의 입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병 안에는 황두(黃豆) 크기의 옥청색 액체가 담겨 있었다. 액체는 병 안에서 천천히 굴러다니며 병 안을 녹색 빛으로 물들였다.
‘이게 뭐지? ’
한립은 실망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동안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 겨우 한 방울의 액체뿐이라니. 그는 낙담해서 병의 마개를 닫고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의 몸을 감싸던 짜릿한 흥분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병의 마개는 열렸지만, 그 결과물은 불만족스러웠다.
하지만 한립은 다시 이 녹색 액체에 대해 살펴보기로 했다. 혹시 모르지 않은가. 그에게 또 다시 다른 기쁨을 줄지도.
이제 그가 바라는 것은 돌아가서 한숨 푹 자는 것이었다. 요 며칠간 온전히 잠들지 못하여, 연공 효율이 떨어졌고, 머리도 멍해져 문 대인에게 약간의 추궁을 들어야 했다.
한립은 구결 수련에 만족하지 못하고 해야 할 이유를 잃어버린 채 방황했다. 이로 인해 문 대인이 그를 호되게 질책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련 시간만 되면 한립은 여전히 의욕이 없었으며, 풀이 죽어 한줄기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를 본 문 대인은 한립의 갈망을 읽어내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
그가 건넨 이 간단한 한 마디가 바로 한립이 최선을 다해 수련을 하게 만들었다.
“네가 이 구결을 수련하여 한 단계를 넘어설 때마다, 매월 받는 은자가 배가 될 것이다.”
한립은 더 많은 돈을 모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 수련에 임했다.
매일 이른 새벽부터 정오까지 하루 두 번씩 석실에 들어가 좌선을 하고 수련했다. 수련 이외의 것들은 그의 머리 밖으로 밀어두었다.
문대인 역시 그가 전심전력으로 수련에 전념하도록 신수곡 전체를 잠시 폐쇄하고, 환자를 진료하는 일조차 하지 않았다. 한립의 머릿속에선 병(甁)에 관한 일이 점차 희미해져 갔다.
* * *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고, 다시 봄이 오고 여름이 오기를 반복했다. 어느 덧 4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한립도 어엿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한립은 품위가 있어 보이는 쪽도 아니고 풍류가 있는 호방한 모양새도 아니었다.
겉으로는 시골에서 자란 소년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매일 석실에 앉아 있다가 거처와 석실을 왕래하며 문 대인에게 의술을 익히고, 여러 종류의 서책을 보았을 뿐이었다.
이렇게 이 산골의 생활이 그의 세계의 전부가 되었고, 그의 구결 수행도 물 흐르듯 진행되어 3번째 단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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