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269
〈 269화 〉 현실과 이상(6)
* * *
드넓게 펼쳐진 들판.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푸른 들판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것은 풀뿐만이 아니다. 갈라할의 새하얀 옷깃이 바람에 펄럭였다.
“······.”
갈라할은 클로에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나의 질문을 던진 뒤 갈라할은 줄곧 침묵하고 있다. 답을 하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든지 기다려주겠다는 듯이.
혹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답을 들어야만 놓아주겠다는 듯이.
그 시선을 클로에는 마주했다.
제 눈앞에 서 있는 청년이 누구인가. 가장 용사다운 용사라 불리는 갈라할이다. 가장 용사다운 용사가, 용사에 대해 물었다.
『당신은, 어떤 용사가 되고 싶습니까?』
자신이 되고 싶은 용사는 무엇인가.
클로에는 그 질문을 곱씹었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제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클로에는 그리했다.
그녀는 18년의 삶을 회고했다.
2.
버려지고 버려진 것들이 모여드는 슬럼가에서 클로에의 삶은 시작됐다.
철이 들었을 때 부모는 이미 없었으며, 어린 소녀는 자신이 버려졌단 사실을 이해했다. 소녀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고작해야 자신의 이름이 ‘클로에’라는 것뿐이었다.
더러운 것들 사이에 버려졌다.
버려진 채 바닥을 기며 살아갔다.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에 겁에 질려 도망쳤고, 누군가 버린 것들을 주워 먹으며 살아갔다.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기억조차 온전치 않다.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슬럼가의 깊디깊은 곳, 벽과 벽 사이의 좁은 틈새가 소녀의 집이었다. 그곳에는 쓰레기 사이를 뒤져 주워온 더러운 책이나 신문지 따위가 가득했다.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소녀는 주워온 책들을 읽었다. 동화책을 보았고, 전장의 소식을 알리는 신문지를 하염없이 들여다보곤 했다.
동화속 세상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세상에는 멋진 영웅이 존재했다.
동화 속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신문지에는 현실을 살아가는 영웅들의 이야기도 실려있었다. 소녀는 그것을 읽고 또 읽었다. 그것을 읽다 보면 제 삶을 한순간이라도 잊을 수 있었으니까.
더럽기에, 가장 낮은 곳에 있기에.
인간은 빛나는 것을 선망한다.
높은 곳에 가 닿기를 소망한다.
어린 소녀 또한 다를 것은 없다. 소녀는 책을 읽으며 꿈을 꿨다. 좁디좁은 틈새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바라곤 했다. 자신 또한 빛날 수 있기를.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필연이었을까.
【바라는가?】
어느날, 누군가 소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은 누구냐는 소녀의 물음에 목소리는 답했다.
【기원에 답하는 존재.】
존재가 소녀에게 소원을 물었다.
소녀는 물음에 답했다. 자신 또한 빛나고 싶다고, 찬란한 삶을 살고 싶다고. 그 간절한 바람에 누군가는 답을 들려주었다.
【바란다면 그리되리라.】
백금색의 따스한 빛이 소녀를 감쌌다.
탁해졌던 소녀의 백발은 본래의 새하얀 색을 되찾는다. 녹빛을 띄던 소녀의 눈동자에 백금색의 빛 고리가 나타났다.
소녀는 그날 선택받았다.
그것은 신의 단순한 변덕이요, 우연과 우연이 겹쳐 일어난 필연이다. 선택받은 소녀는 훗날 자신이 받은 힘의 근원을 알게 된다.
근원을 알게 된 소녀는 이해하고 만다.
강제로 선택받은 이들과 자신은 다르다.
자신은 찬란히 빛나기를 소망했고, 기원했기에 용사가 된 것이다. 철없는 시절에 빌었던 소원이라며 도망치는 게 허락될 리가 없다.
책임도 의무도 있다.
그것을 소녀는 외면하지 않는다.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소녀는 스스로에게 묻고 답했다.
‘언제나 빛나는 인물.’
동화 속 영웅 같은 삶을 바랐으므로.
언제나 빛나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찬란한 삶을 바랐으므로··· 자신은 그리되어야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소녀는 고민한다.
정말 자신이 그리될 수 있을까, 하고.
시간은 흐르고 흘렀다.
의무와 책임을 짊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코앞까지 다가온 시간 아래, 소녀의 고민은 커져만 간다. 소녀는 보고 말았으니까.
제 힘으로 가장 더러운 곳에서 살아남아, 기어코 빛 아래 서게 된 소년을 보았다.
자신보다 더, 자신의 재능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마법사를 보았다.
별에게 사랑받았으나, 제 발로 땅을 디디고 앞으로 나아가는 당당한 왕녀를 보았다.
그리고.
현실에 지쳤으나, 포기하지 못한 채 헤매는 용사를 보았다. 현실에 맞서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용사를 가까이서 보게 되었다.
그들 모두가 찬란히 빛나는 이들이다.
너무나도 빛나서, 그들의 앞에선 자신이 초라해질 따름이다. 그들을 보며 소녀는 생각한다.
‘내가.’
그들 처럼 될 수 있을까?
내가 이 별을 받으면 안됐던 게 아닐까?
이 힘은 내가 아닌, 그들에게 가야 하는 게 아닐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고민이다.
그것을 소녀는 입에 담는다.
“저는.”
소녀는.
“동화 속 영웅처럼 되고 싶었어요. 그들처럼 빛나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들을 동경했어요. 그들처럼 되고 싶었어요.”
동경하여서, 바라서, 기원하여서.
“그 바람에 별이 답했어요. 별은, 제 소원에 답해서··· 제게 힘을 주었어요.”
그끝에 용사가 되어버린 클로에는.
“하지만.”
하지만,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건 제게 있어선 안 되는 게 아닐까요?”
어디에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들은 갈라할이 한순간 숨을 삼켰다. 바라서 용사가 되었다. 그 대목이 갈라할에게 숨을 삼키게 하진 않았다.
기원에 별이 답했다.
별이 힘을 주어 용사가 되었다.
그 사례가 몹시 드물지만,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까. 갈라할이 당황한 것은 그다음에 온 문장이었다. 그러니까, 이 힘이 자신에게 있어선 안 되는게 아닐까 하는 의문.
“···아하.”
갈라할이 쓴웃음을 흘렸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갈라할 자신 또한 품었던 의문이었으므로. 또한, 여전히 답을 찾고 있는 의문이었으므로.
“이해합니다.”
갈라할이 입을 열었다.
“그 고민도, 클로에 당신이 품은 흔들림도··· 이해합니다. 이해하고 말고요.”
천천히 팔을 들어 올린 갈라할이 저 자신을 가리켰다. 자신을 가리킨 채 갈라할이 멋쩍게 웃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으니까요.”
“···네?”
“클로에, 당신도 알다시피 제게는 재능이 없습니다. 별을 다루는 것도, 무재도, 그 어느 것도 타고나지 못했습니다.”
갈라할이 짧게 숨을 토했다.
“제 1 왕자께선 저를 비웃었고, 드라카 님께선 제게 ‘재능이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네게는 재능이 없다.
남들보다 수십 배는 노력해야, 남들과 같은 성과를 올릴 수 있을 거다. 잔인한 이야기지만, 네게는 무(?)의 재능이 없다.
드라카는 갈라할에게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여전히 저는 재앙에게 저항할 수 없으니까요. 재앙 앞에 동료 하나 지키지 못하는 나약한 용사니 말입니다.”
갈라할이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 저보다 빛나는 이들이 많습니다.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들을 보며 저는 생각하곤 했습니다. 왜 저들이 아닌 제게 별빛이 주어졌는지.”
왜, 자신에게.
재능이 없는 자신에게 이런 과분한 힘이 주어졌는지 갈라할은 고민했다.
“왜 라니엘 반 트리아스에게.”
“왜, 쿤텔 경에게.”
“켈르할름 님께, 드라카 님께, 그리고 또···.”
“왜, 왜, 왜···.”
그처럼 빛나는 이들에게 별이 내려지지 않았는가.
그들에게 가야 할 별이 왜 자신에게 왔는가.
실패 속에서 갈라할은 끊임없이 고민했다.
고민은 깊어졌고, 갈라할은 끝끝내 답을 찾지 못했다. 별이 어째서 자신에게 힘을 내렸는지, 그 이유를 갈라할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갈라할이 짧게 숨을 토했다.
“그렇게 멈춰서 있을 수만은 없더군요. 고민하고, 고뇌하면서도··· 나아가야 하는 법이니. 그리한다면, 이 고뇌도 의미가 있을 테니.”
“의미가··· 있다.”
“예, 그리고 말입니다.”
갈라할이 클로에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나아가다 보면 무언가 있지 않겠습니까.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저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하나쯤은 있겠지요.”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아가고 나아가다 보면, 포기하지 않고 걷다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삶이란, 그 답을 찾아 헤매는 과정일 테니.”
언젠가 록스에게도 들려주었던 말이다.
그 말을 다시 한 번 입에 담으며, 갈라할은 클로에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겼다.
“고뇌하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그에 매몰되어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말아 주십시오.”
중요한 것.
“클로에, 당신이 바라는 용사가 뭐라고 하였습니까?”
“동화 속 용사처럼, 완벽한 용사···.”
“그것을 부디 잊지 말아 주십시오.”
동경을 잊지 마라.
바라고 바랐던 자신을 망각하지 마라.
갈라할은 그렇게 말했다.
“때로는 도망칠 수도 있습니다. 좌절할 수도 있고, 멈춰 설 수도 있습니다. 분명 그럴 때가 올 겁니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는 존재니.”
그래도 괜찮다.
그것이 인간이니까.
“그때마다 떠올리십시오. 자신이 되고 싶었던 존재를. 처음으로 품었던 꿈을.”
그렇다면, 하고 갈라할이 말했다.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자신 또한 그러했으니.
답을 찾아 헤매고 있으니까.
확신에 가까운 말에 클로에는 마른침을 삼켰다. 클로에는 갈라할의 두 눈동자를 마주한 채 말했다.
“제가.”
아직은 나약할 뿐인 제가.
“제가, 정말로 그런 용사가 될 수 있을까요?”
당신과도 같은 용사가 될 수 있을까요.
“예, 물론입니다.”
클로에의 물음에 갈라할은 답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강한 확신을 담아서.
“바라는 한, 그리될 수 있을 겁니다.”
3.
동부 제 3전선, 하프리온.
베르타 협곡 섬멸전이 끝난 이후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지난 며칠 동안 갈라할은 클로에의 교육에 힘썼고, 클로에는 나날이 성장해갔다.
심경의 변화가 있는 듯싶었다.
평소보다 회로를 그리는 손가락에 힘이 덜 들어갔고, 그렇게 편하게 그려낸 회로는 이전의 것보다 더욱 매끄럽게 마나를 머금었다.
좋은 변화였다.
“그래서, 클로에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들려줬길래 그래?”
“경험담이지요. 라니아, 당신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가장 좋은 조언은 경험에 빗댄 조언이라고.”
갈라할은 구체적인 답변은 피하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나는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면서도 갈라할과 함께 어딘가로 향했다.
아무리 마경(??)이라 한들, 찾다 보면 쉴만한 곳이 한두 군데는 존재하는 법이다. 전장에 있을 때는 명당이라며 지도에 표기해둔 곳이었는데··· 지금 가는 곳은 그중 하나였다.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
그래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
그곳은 푸르른 들판이 펼쳐진 곳이었고, 우리는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옛날에도 온 적이 있는 곳이었기에 딱히 낯설지는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내가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칼을 정리하고 있자니, 갈라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데스텔과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더군요.”
“나누긴 했지.”
“데스텔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 바뀐 것 같고.”
“생각하던 것과는 달랐으니까.”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인정할 건 해야 했다.
“···내가 착각하고 있기도 했고.”
“뭘 말씀이십니까?”
“다 알면서 묻냐?”
“입으로 말해야 의미가 있는 것도 있지 않겠습니까.”
은근히 능글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갈라할에게 쯧, 하고 혀를 차며 내가 입을 열었다.
“완전히 포기했다고 생각했어. 포기했으니까, 그따위로 버림 말을 쓰고··· 그런 말이나 뱉고 다닌다고 생각했지.”
“데스텔, 그 친구가 말을 조금 이상하게 하긴 합니다.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어쨌든.”
내가 짧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옆에서 보니까 알겠더라.”
작전의 흐름을 전부 보았다.
데스텔이 어떤 곳에서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를 보았다. 보고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버림말을 쓰는 건 맞아. 버린다는 말을 쉽게 입에 담는 것도 맞아. 하지만··· 나름대로 책임을 지려 하고 있으니까, 그걸 뭐라 할 생각은 없어.”
데스텔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다.
지금과 같은 힘이 없다는 가정하에, 나를 데스텔의 위치에 세워보면 답은 금방 나왔다.
“네가 말했잖아.”
내가 갈라할을 보았다.
“사람에겐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다고. 그냥, 그렇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렇습니까?”
“신기하단 눈치다?”
“제가 기억하는 당신은, 고작 말 몇 마디로 변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내가 쓰게 웃었다.
“그때야 그럴 여유가 없었으니까.”
바쁘게 살았고, 깊게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남들의 앞에 서야 한다는 강박에 잡혀 살아갔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언제나 앞만 보고 달려가기에 급급했으니까.
“지금은 다릅니까?”
“크게 다르진 않지.”
하지만, 하고 내가 말했다.
“조금은 여유가 생겼으니까.”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시원했다.
숨을 크게 들이키고 나서, 내가 손가락을 들어 갈라할을 가리켰다.
“갈라할.”
“예, 라니엘.”
라니아가 아닌 라니엘.
“나한테 상담할 게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보나 마나, 수명에 관한 것이고.”
갈라할은 침묵함으로써 긍정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몇 년 남았냐?”
“음···.”
갈라할이 잠시 머뭇거렸다.
머뭇거림은 길지 않았다.
결심을 다진 듯, 갈라할이 입을 열었다.
“삼 년입니다.”
삼 년.
그것이 갈라할에게 남은 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