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285
〈 285화 〉 용사, 갈라할(4)
* * *
차갑고도 가벼운 몸이다.
산자가 아닌 죽은 자의 몸이다.
수많은 이의 죽음을 봐온 라니엘이기에 확신한다. 갈라할은 죽는다. 성녀가 이 자리에 있다 한들 정해진 결말은 바꿀 수 없다.
꾸욱.
라니엘이 제 입술을 깨물었다.
깨문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온다.
라니엘의 머릿속에 수많은 회로가 떠오르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지금 이 순간, 갈라할을 살릴 방법을 라니엘은 찾고 있다.
당연하게도,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갈라할에게 주어진 시간은 끝났다.
섭리가 그의 죽음을 가리킨다. 세상을 이루는 진리가 갈라할의 죽음을 속삭이고 있다. 그것은 번복되지 않는 선고와도 같다.
라니엘이 한평생 익혀온 수백 개의 회로, 수천 가지의 마학지식, 수십, 수백만 권의 권의 서적. 그 모든 게 지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꽉 깨문 라니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살릴 수 없다.
불가능하다.
답이 있을 리가 없다.
지금 이 순간 라니엘이 느끼는 것은 무력함이다.
무력함 속에서도 무엇이라도 찾아내고자 라니엘은 발버둥친다. 그렇게 도착한 수단은 하나뿐이다.
‘해봤자, 소용은 없을 거다.’
머릿속으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라니엘은 기어코 입을 열어 신을 부른다. 기적을 일으켜준다면, 신을 믿지 않는 자신이라도 지금만큼은 기도하리라.
그렇게 라니엘이 입을 연 순간이다.
“천(Balan···.”
“라니엘.”
갈라할이 라니엘의 말을 끊었다.
“어지럽군요. 피가 쏠립니다.”
라니엘에게 기댄 채 갈라할이 쓰게 웃었다.
쏠릴 피가 남아있지 않음에도, 갈라할은 그리 농담하며 라니엘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나무에 기대어 앉으며, 갈라할이 라니엘을 보았다.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라니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입술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던 그녀가, 저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아시지 않습니까. 늦었다는 것쯤은.”
갈라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곧 죽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끝났으니.”
바닥에 피가 고인다.
한겨울의 바람은 서늘하기 짝이 없으나, 지금 갈라할은 그 바람마저 따뜻하다고 느낀다. 제 몸이 그보다 더 차가웠으므로.
“그거 압니까? 라니엘.”
그가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배교자를 이겼습니다. 그 대단한 재앙을, 제 동료를 죽였던 그 배교자를··· 제가 이겼습니다.”
가벼워진 목소리는 아이의 것과 같다.
부모에게 자신이 이룬 것을 자랑하듯, 갈라할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닿더군요. 닿을 수 있었습니다.”
“···응.”
“그 사실도 기쁘지만, 그보다 더 기쁜 것은···.”
갈라할이 시선을 옮겼다.
어느샌가 정신을 차린 클로에와 갈라할은 시선을 마주쳤다. 그녀가 제 입을 틀어막은 채 갈라할을 바라보고 있었다.
클로에를 바라보며 갈라할은 말했다.
“구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저 아이를 구해냈다.
수백년동안군림한 재앙의 심장을 꿰뚫었으며, 수천, 수만의 마수를 모조리 불태웠다. 그러나, 그런 것들 보다 구해냈단 사실 하나가 갈라할은 더 기쁘다.
“···, ·········.”
클로에는 눈물을 삼키며 무언가 말했다.
그 말이 갈라할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그 말의 뜻을 짐작할 수는 있다.
“괜찮습니다.”
갈라할은 말했다.
“당신이 살아있지 않습니까.”
그거면 됐다.
수많은 것을 보았고, 수많은 것을 경험해 왔지만 결국에 갈라할이 품은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사람을 구해라.」
「쓰러트리기 위해서가 아닌, 구하기 위해서 무기를 들어라. 그자야말로 영웅이다.」
구하기 위해서 싸워왔다.
영웅이 되기 위해서 살아왔다.
그 삶의 마지막이 이런 결말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리라. 갈라할이 숨을 뱉었다. 몸이 조금 더 가벼워졌다. 철퍽, 하고 바닥에 무언가 쏟아졌다.
쏟아낼수록 가벼워진다.
하나씩 하나씩, 이 땅에 자신을 붙잡고 있는 것들을 갈라할은 버려갔다. 죽음이 다가오거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다.
“라니엘.”
갈라할이 앞을 바라본다.
흐릿해진 시야, 들리지 않는 귀, 희미해지는 감각 속에서 갈라할은 제 친우를 본다.
라니엘 반 트리아스.
현자라 불리는 이 마법사는 동료이자 우상이었으며, 자신이 걸을 길을 인도해준 인물이다. 지금 이 순간 갈라할은 그녀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라니엘과 함께했던 시간이 갈라할에게 답을 주었다.
찾아 헤맸던 답을 얻었기에.
이루고자 하였던 것을 이루었기에.
스스로의 삶에 떳떳할 수 있기에.
죽음 앞에 갈라할은 초연할 수 있었다.
“저는.”
갈라할이 입을 열었다.
“저는 용사였습니까?”
그 물음에 라니엘은 답한다.
목소리는 닿지 않지만, 그 입술의 움직임으로 갈라할은 라니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보았다.
···그 누구보다.
내가 봐왔던 그 누구보다도 더.
용사다웠다. 그 말에 갈라할은 웃는다. 어느 때보다 편안하게, 그 어느 때보다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아하, 과연··· 그것참···.”
갈라할의 목소리가 가늘어지다 못해 희미해진다. 더이상 공기를 울리지 못해, 바람이 불면 흩어져버릴 것만 같은 목소리로 갈라할은 말했다.
“기쁜, 일이로군요.”
툭.
갈라할의 고개가 떨어졌다.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진작에 끝났다.
의지 하나로 끝나버린 시간을 붙들고 있던 인간이 쥐고 있던 것을 놓는다.
하나의 별이 진다.
2.
미약하게나마 들려오던 박동소리가 멎었다.
숨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그것은 한 인간의 죽음을 알린다.
클로에가 고개를 숙였다.
흐르는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클로에는 차마 갈라할의 시체를 바라보지 못한다.
왜, 어째서.
영웅의 피를 받아마시고 살아남은 소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가진 것에 회의감을 느낀다. 동경하던 이의 죽음이 그녀의 뇌리를 뒤흔들었다.
모든 죽음은 처참하다.
찬란한 죽음이란 있을 수 없다.
피를 쏟아내고, 만신창이가 된 시체를 보노라면 찬란하다는 생각은 결코 들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저 죽음을 숭고하다 여기고 싶어, 클로에는 기어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렇게 클로에가 고개 숙인 와중이다.
누군가의 숨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면, 그곳에는 라니아 반 트리아스가 있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갈라할에게 라니엘이라 이름 불렸지만, 그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클로에에겐 없다.
단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다.
갈라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가 가라앉아있다. 언제나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이 아니다. 그녀의 턱이 떨린다. 입술이 떨리고, 눈동자가 감겼다 뜨이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리하여 흐르는 것은 눈물이다.
그녀가 소리죽여 울었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이내 입을 벌려 무언갈 말하려다··· 기어코 입을 다시 다물고 만다. 갈무리 되지 않은 감정이 그녀의 몸짓을 통해 드러났다.
분함, 슬픔, 그리고 무력함.
너무나도 낯선 모습이다.
라니아를 바라보다가, 클로에는 눈물을 삼키며 기어코 고개를 들었다. 현실을 마주하기 위해서. 그렇게 클로에는 갈라할의 시체를 보았다. 역시나 그 시체는 끔찍하기 짝이 없다. 팔은 뜯어졌으며, 한쪽 남은 팔마저··· 어?
“···어?”
클로에가 눈물 흘리다 말고 소리 질렀다.
그녀가 손을 뻗어 갈라할의 시체를 가리켰다.
라니아 또한 고개를 든다.
한쪽 남은 갈라할의 팔.
그 팔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 * *
그는 걸어온 길의 끝에 도착한다.
길은 끊어졌다. 나아갈 수 없다.
그는 주변을 둘러본다.
주변을 둘러보면 수많은 길이 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나아가는 길. 그 길 위에는 길의 주인들이 서 있다. 그 모두의 모습이 다르다.
모두가 길을 걷고 있지는 않다.
멈춰버린 인간이 있으며, 고뇌하는 인간이 있다. 기어코 쓰러져버린 인간 또한 있다. 끊어져 버린 길도 있으며, 결국엔 아예 틀어져 다른 곳을 향하는 길 또한 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제 발밑을 바라본다.
자신의 길 또한 끊어졌다.
허나, 그는 그것을 끊어졌다 여기지는 않는다. 고개를 들어 그는 앞을 바라본다. 자신의 길을 함께했던 빛이 그곳에 있다.
찬란히 빛나는 빛.
그것은 이제 자신을 떠나려 한다.
자신을 떠나, 새로운 길에 깃들고자 한다.
그 길이 어떤 길일지 그는 알 수 없다. 빛 또한 알 수 없다. 방황하는 빛을 향해 그는 손을 뻗었다. 자신이 찾아낸 답을 알려주기 위해서.
손을 뻗어 그가 무언갈 가리킨다.
그가 가리킨 것은 또 하나의 길이다.
이제 막 시작된 길.
그것을 그가 가리키는 순간, 멀리 떨어져 있던 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걸어온 길의 끝이 또 다른 길의 시작점과 이어진다. 그리하여, 길은 끊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걸어온 길은 거름이 된다.
다른 누군가가 쌓아올릴 탑의 초석이 되리라.
그것은 곧 길의 이어짐을 뜻한다.
길은 이어진다.
다음으로, 다시 다음으로.
* * *
별이 지고, 반환이 시작된다.
별이 품었던 모든 것은 반환된다.
반환된 별빛은 어디로 가는가? 알 수 없다. 신의 뜻은 그 누구도 모르는 법이니. 그렇게 새로운 주인을 찾아 떠나려던 별빛이 한순간 멈춰 선다.
별빛은 제 주인의 마지막을 본다.
작은 빛을 끌고, 찬란한 업적을 이루어낸 인간의 최후를 바라본다. 숨은 멈췄고, 심장은 멎었다. 죽어버린 육체이나 그 육체가 갑작스레 움직인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별조차 헤아리지 못한 기적이 이 순간 일어난다.
인간이 천천히 팔을 들어 올린다.
부러진 손가락을 펼쳐, 무언갈 가리킨다. 그 손가락이 향하는 곳은 어린 소녀다. 이제야 막 빛나기 시작한 소녀를 인간은 가리키고 있다.
마치 저곳으로 가라는 것처럼.
별빛이 그 손끝을 보았다.
···별은 별빛을 부른다.
섭리에 맞지 않는 일을 별을 좌시하지 않는다. 이는 계약에 어긋난다. 자신의 일부를 별은 회수하려 하나, 별빛은 별의 부름을 거부한다.
별의 뜻이란 게 있다면, 그것은 곧 인간의 의지이자 바람이리라. 별빛은 제 주인이 품었던 뜻을 따른다. 찬란히 빛나는 별빛이 새로운 주인을 선택한다.
빛이 범람했다.
3.
라니엘은 멍하니 앞을 보았다.
죽은 갈라할의 육체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 손끝이 분명히 클로에를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그 움직임이 단순한 사후경직인지, 갈라할의 의지가 담긴 움직임인지 라니엘은 알 수 없다.
알 수 없었지만.
이윽고 범람하는 별빛이 라니엘에게 답을 주었다.
그것은 갈라할의 육신에 남은 별빛이 아니다. 그 몸에서는 이미 별빛이 떠났다. 그렇다면, 저 별빛은 무엇인가?
영혼에 남은 흔적이다.
그가 살아온 삶의 흔적이다.
바스라진 영혼에서 분리된 별빛은 하늘로 향하다 말고 멈춰 선다. 그리곤, 방향을 틀어 클로에를 향해 흘러들어 간다. 범람하는 별빛이 클로에의 몸에 깃든다. 그 빛은 아주 소량에 불과하나···.
그 무엇보다도 찬란히 빛난다.
라니엘은 공중에 떠오른 성녀의 팔을 보았다. 팔을 중심으로 공전하던 네 개의 별. 그 중 하나가 떨어지는가 싶더니, 제 옆을 돌던 별에게 스며든다.
네 개의 별이 아니다.
세 개의 별이다.
세 개의 별에 맞춰 별이 그리는 궤도가 바뀌기 시작한다. 수백 년간 지켜져 온 흐름이 변화한다. 그것은 곧 정체된 시곗바늘이 움직임을 뜻한다.
계약이 뒤바뀌었다.
라니엘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가 떠오르기 직전, 이제 막 찾아오는 여명 사이로 아직은 어둑한 밤하늘. 그곳에 떠있는 별자리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새로운 별자리가 떠올랐다.
그 누구도 보지 못한, 새로운 별자리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