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00
〈 300화 〉 엇갈림(4)
* * *
코뼈가 부러져 피가 흐르는 지금, 카일은 문득 과거를 떠올린다. 그것은 제법 오래전의 과거요, 그다지 유쾌하다곤 말 못할 기억이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아마도 마왕과의 조우로부터 몇 달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일 것이다. 그때의 자신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아마도 눈 뜨고 볼 꼴은 아니었으리라.
그러니 녀석이 그랬을 테지.
「일어서.」
「일어서라고.」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워, 비가 내리던 천막 밖으로 끌고 나갔다. 진창에 카일을 내팽개치며 라니엘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장갑을 벗어 던졌다.
「한판 뜨자, 새끼야.」
그리곤 곧장 카일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때의 자신도 지금과 같았다. 적당히 맞아주면 알아서 지치겠지. 이걸로 더는 귀찮게 굴지 않는다면 몇 대든 맞아주리라. 아마도 그따위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카일의 생각보다 라니엘은 더 집요했고, 그 주먹이 상상 이상으로 매서웠다. 결국 코뼈가 부러지고,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흐르고 나서야 카일도 반격을 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치고받고 싸웠다.
적당히 맞아주다 끝내겠단 생각이 무색하게도, 카일은 라니엘의 팔을 부러트렸고 그 코뼈를 으스러트려 자신과 같은 꼴로 만들어줬다. 당연한 결과였다. 그때의 라니엘은 주문조차 쓰지 않았으니.
「제발.」
그런데도, 라니엘은 부러진 팔로 카일의 멱살을 붙잡은 채 그 얼굴에 연신 주먹을 갈겨댔다.
「좀 해보라고. 제발. 제발 새끼야. 제발!」
라니엘은 소리 질렀다.
「네가 여기서 검을 놔버리면, 포기해버리면, 너 살리겠다고 죽어버린 사람들이 다 뭐가 되는 거냐?」
수많은 기사들.
「쿤텔 아저씨는.」
스승.
「나는, 뭐가 되는 건데 새끼야.」
그리고, 자기 자신.
여기까지 온 이상 끝장을 봐야 한다고 라니엘은 소리쳤다. 카일은 그것이 아주 멀리서 누군가 소리 지르는 것으로 느껴졌다.
「글쎄.」
그래서 였을까.
「헛수고였군.」
그때의 자신은, 아마도 그런 식으로 대답했던 것 같다. 그때 라니엘이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그 또한 제대로 기억나진 않지만···.
“미친 새끼.”
아마도, 지금 눈앞의 소녀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카일은 제 멱살을 붙잡고 있는 소녀를 바라봤다. 이마가 까져 피가 흐르는 소녀.
“잘 들어, 씨발아. 두 번은 말 안 할 거니까.”
흘러내리는 잿빛 머리칼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드러난다. 녀석과는 다른, 그러나 녀석을 떠올리게끔 하는 푸른 눈동자다.
“내가 라니엘이야.”
“······.”
“내가 라니엘 반 트리아스라고.”
두번 말 안 한다더니, 기어코 두 번을 말하고만 라니아는 갑작스레 짜증이 치밀었는지 카일의 면상을 한 번 더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어휴, 시발···.”
이게 다뭐하는 짓이냐.
그리 중얼거리며 라니아가 일어섰다.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제 머리칼을 쓱 쓸어넘겼다. 엉망진창이다. 명예로운 결투라기보단 개싸움이었고, 중간부터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그래도 이걸로···.’
알아들었으면 됐다.
목적은 달성한 셈이니. 그리 생각하며 라니아가 사라를 보았다. 결계를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이자, 사라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었다.
그렇게 결계가 풀리려는 순간이다.
“아니.”
등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라니아가 뒤를 돌아봤다.
“너는 라니엘이 아니다.”
상반신만을 일으킨 채, 카일이 라니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는, 라니엘 일 수 없어.”
잠깐의 정적.
“와하.”
이윽고 라니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결계의 너머로 나가려다 말고, 그녀는 카일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첫걸음은 가볍지만, 두 번째부턴 아니다.
탁, 타닥.
아예 도움닫기를 하듯 전력으로 질주한 라니아가 카일의 코앞에서 발을 뒤로 들어 올렸다. 그리곤, 공을 차듯 앞으로 휙.
뻐억!
카일의 안면에 라니아의 구둣발이 꽂혔다.
2.
결투가 끝나고 의자 두 개를 끌고 온 사라의 앞에 두 사람은 나란히 걸터앉았다. 사라는 라니아의 턱을 붙잡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하네요, 진짜.”
“뭐.”
“뭘 그렇게 험하게 굴려요? 생긴 건 명문가 아가씨인데, 몸 쓰는 거 보면 무슨 광전사 수준이야.”
“내 몸 내가 쓰겠다는데··· 아아악!”
“조용히 해요.”
살갗이 까진 라니아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찹, 때리며 사라가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까진 살갗과 부러진 코뼈가 제 위치를 찾는다.
“손가락도 부러졌네. 얼마나 새게 쳤으면 이래? 이리 내요. 맞춰줄게.”
“나도 할 줄 알···.”
“됐고, 손 내라니까.”
손목을콱 잡은 채 뼈를 맞추기 시작한다. 라니아는 입술을 꾹 깨물고 버텼지만, 기어코 참지 못한 채 사라를 향해 소리 질렀다.
“진통 주문, 미친년아 진통!”
“옛날엔 손가락 꺾어가며 주문 외워댔던 사람이 무슨? 엄살 부리지 마요.”
“아아아아아아아악!”
그 비명은 결코 엄살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사라가 뼈를 맞추는 과정은 환자에 대한 배려가 눈곱만큼도 없었고, 눈에 불똥이 튀는 고통을 선사해 주곤 했다.
“갸아아아아아악!”
그렇게 라니아가 몸을 비틀어대는 와중, 카일은 말없이 자리서 일어섰다.
“카일 어디 가요?”
“나는 치료 같은 거 필요 없다.”
카일이 가볍게 허공을 움켜쥐었다.
별빛이 모여들고 백금색의 성검이 카일의 손아귀에 잡혔다. 그러자 상식을 벗어난 용사로서의 재생력이 카일의 몸에 다시금 깃든다.
입었던 부상이 전부 회복된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해봐야 삼 초 남짓이다.
“염병. 나만 개고생이야.”
그 모습을 보며 라니아가 쯧, 혀를 찼다.
더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라니아가 한숨을 내쉬는 가운데, 카일이 말없이 라니아를 내려다봤다.
“뭘 봐.”
“······.”
“말을 해, 새끼야.”
잠깐의 침묵 후 카일이 말했다.
“나는 네 말을 전부 믿진 않는다.”
또 그거인가?
질린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라니아가 카일을 마주 바라봤다. 욕이라도 한 바가지 쏟아부어야 하나, 그리 고민하던 라니아는 카일의 표정을 본 순간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자신을 보는 시선이 다르다.
카일이 제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전부 부정할 수도 없다. 나도 잘 모르겠군. 모르겠으니···.”
카일이 툭 내뱉었다.
“일단은 두고 보겠다. 확신이 설 때까지.”
그리 말하고선 카일이 자리를 떴다.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라니아가 고개를 돌려 사라를 바라봤다.
“쟤 뭐라는 거냐?”
“고민 좀 해보겠단 거 같은데요.”
“뭔 말을 저렇게 어렵게 해? 새끼, 못 보던 새에 겉멋만 엄청 들었네.”
“···당신만 할까요.”
“뭐?”
“반대쪽 손이나 이리 내요.”
갸아아아악, 하고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카일은 지금 이 순간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확신했던 것이 있으나, 그 확신마저 지금은 흔들린다. 그리하여 머리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카일은 늘 하던 일을 하기로 했다.
허공을 움켜쥐었다.
성검이 나타났고, 카일은 성검의 칼자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복잡했던 뇌리가 새하얀 물감을 들이부은 것처럼 깔끔해진다. 잡념이 사라진다.
“······.”
카일은 말없이 하늘을 바라봤다.
별이 빛나고 있다. 별께서 말씀하셨다.
【머지않았다.】
【대비하라.】
【계약의 이행을 준비하라.】
세 개의 문장.
세 개의 경고.
“아직이다.”
카일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직, 때가 아니다.”
별은 침묵한다.
카일은 성검을 쥔 채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것은 지난 수년간 몇 번이고 떠올렸던 풍경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검은 비, 바닥에 고인 구정물, 고여서 흐르고 흐르던 이계의 존재.
세상에서 존재해선 안 될 무언가.
섭리에서 벗어난 무언가.
바깥의 무언가.
만마의 주인, 마왕(?王).
그것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한낱 불완전한 신이 선택한 존재가 아니다.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선 가장 완벽한 존재만이 그것을 막을 수 있다.
완벽한 존재.
인간을 넘어선 존재.
진정한 의미의 초인을 카일은 그곳에서 보았다. 그 풍경을 카일은 몇 번이고 되새긴다. 새하얘진 머릿속에 자리 잡는 것은 그날 보았던 찬란한 빛이다.
너무나도 찬란하여서.
너무나도 눈부셔서.
자신은닿을 수 없는 찬란한 빛을 카일은 떠올린다. 그것을 질투하고, 시기하며 괴로워했던 시기가 있으나 지금은 아니다. 새하얘진 머릿속에 자리한 것은 동경과 같은 인간적인 감정이 아니다.
광적인 그것에 이름을 붙여보자면.
그것은 차라리 신앙(??)에 가까우리라
3.
예언이 가리킨 장소에 라니엘은 바로 섰다.
그곳은 드넓게 펼쳐진 설원이다.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정리하며, 라니엘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한 달 뒤, 이곳에 죽음의 칼이 온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한 달이란 시간이며, 이렇게나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재앙에 대비하는 것은 이걸로 두 번째였다. 대부분의 재앙은 갑작스레, 뜬금도 없이 나타나는 법이니.
“흑룡 잡을 때 생각나네.”
라니엘은 문득 그리 중얼거렸다.
그때도 이런 식으로 준비를 했었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준비한 상태로 흑룡을 마주했다. 그때 라니엘은 한 달에 걸쳐 회로를 협곡에 새겼었다.
한 달에 걸쳐 이루어진 소모전.
그 소모전에 결정타를 먹인 것은 카일의 성검이었으나··· 흑룡을 묶었던 것은 라니엘의 주문이었다. 그때, 자신이 얼마만큼의 주문을 새겼던가?
아마도 기억하길, 천 개가 조금 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몇 개의 회로를 그려야 하는가. 얼마만큼의 회로를 준비하고, 얼마만큼의 마나를 스톡(Stock)시켜야 죽음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알 수 없다.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죽음의 앞에 주문이 통하기나 할지부터가 미지수인 상황이다. 그러나, 라니엘이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라니엘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중얼거렸다.
“일단 다 때려 박아봐야지.”
제 전부를 건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애초에,마법사란 준비 기간이 길면 긴 만큼 까다로워지는 족속들이니···.’
자신도 한껏 까다로워져야 하리라.
라니엘은 주변을 쓱 둘러봤다.
새하얗게 펼쳐진 설원은 라니엘의 눈에는 도화지로 보일 뿐이다. 끝없이 펼쳐진 도화지에 자신은 지금부터 그림을 그려야 하리라. 장대한 그림을, 죽음마저 잠시 멈춰 세울 수 있을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
주어진 시간은 한 달.
막아야 할 것은 죽음.
기간과 목적이 분명하다.
그 두 가지가 정해졌다면 당장 작업에 나서야 하리라. 짧게 숨을 내뱉은 라니엘은 곧장 작업에 착수했다. 일단은, 그림을 그릴 도화지를 깔끔하게 닦아내야만 했다.
“재는 재로(Ashes to Ashes).”
첫날밤, 케넬 설원에서 설(雪)이 사라졌다.
* * *
“···이게 다 뭐에요?”
“뭐긴. 준비 중이잖아.”
사라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이 몰아치는 설원이나, 이곳에 만큼은 눈이 쌓이지 않는다. 켜켜이 쌓인 만년설이 전부 날아가 드러난 것은 얼어붙은 땅이다.
그 땅에 라니엘은 무언갈 새기고 있다.
평소에는 쓰지 않던 지팡이마저 쥔 채, 그녀는 땅에 문양을 그린다. 문양이 완성되면 그곳에 마나포션을 있는 대로 들이붓는다. 사라는 지금 라니엘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라니엘에게 마나 포션을 제공하러 이 자리에 찾아온 백색 마탑의 주인, 셀리 드벨라는 라니엘이 하고 있는 작업을 얼추 알아볼 수 있었다.
“···마탑이라도 지으려는 거에요?”
셀리 드벨라가 중얼거렸다.
하나의 마탑을 지을 때, 그 벽면에 회로를 새기고 새겨 그것을 하나의 요새로 만드는 작업을 거치곤 한다. 셀리가 보기에, 라니엘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십명의 고위 마법사가 달려들어 할 일.
회로와 회로를 잇고 또 이어서, 마탑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드는 일. 그 일을 지금 한 명의 마법사가 얼어붙은 땅을 도화지 삼아 해내고 있다.
“다릅니다.”
라니엘이 답했다.
“마탑에 새기는 건 지키기 위한 회로가 태반이잖습니까. 제가 지금 여기에 하고 있는 건 그거랑은 방향성이 좀 다릅니다.”
그녀가 탁탁, 발끝으로 회로를 건드렸다.
“수틀리면 싹 날려버리려고요.”
“···뭐를요?”
“뭐겠습니까?”
라니엘이 웃었다.
무척이나 섬뜩한 웃음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