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437
탑과 탑을 거미줄처럼 잇는 백금색의 사슬 위에 라니엘이 올라섰다. 탑의 그림자는 별의 높이와 고도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저, 섭리에 구속받지 않는 별세상에 존재하기라도 하는 양 탑의 그림자는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
“죽음의 칼, 가니칼트.””
탑의 중심.”
37개의 그림자가 교차하는 곳.”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
그곳에 선 가니칼트를 내려다보며 라니엘은 입을 열었다.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가니칼트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녀와 자신 사이에 천칭이 떠오른 까닭이다.”
“나는 용사임과 동시에, 과거 당신들이 맺은 계약의 후인(後人)으로서 이 자리에 섰다.””
천칭에서 새어나오는 별빛이 비추는 것은 과거 맺어졌던 계약이다. 그러나 별빛은 가니칼트만을 비추지 않았다. 별빛은 라니엘 반 트리아스를 가리키고 있다.”
“계약이 가리키는 후인을 맞이하라.””
계약의 후인.”
그 말의 의미를 죽음의 칼이 모를 리가 없다. 반쯤 깨진 투구 사이로 새어나오는 것은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의 웃음소리다. 그가 흘린 웃음은 가벼웠지만, 가볍게 흩어지진 않았다.”
“그런가.””
오랜 용사가, 현재의 용사를 보았다.”
“벨리알, 글레리아, 다음은 나의 차례로군.””
재앙을 차례로 쓰러트리고 자신의 앞에 도달한 어느 마법사에게서, 가니칼트는 옛 동료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어느 잿빛의 엘프를 떠올리며 가니칼트가 서서히 검을 들어 올렸다.”
“···미안하게 됐어.””
가니칼트가 들어 올리던 검을 멈춰 섰다.”
라니엘의 말에 가니칼트가 검을 멈춘 채, 라니엘을 노려보았다. 방금 내뱉은 말의 진의가 무엇이냐는 듯이.”
“당신에게도, 당신이 바라는 최선의 결말을 마련해주고 싶었지만, 상황이 개의치 않아··· 그건 힘들어졌거든.””
본래였다면 이 자리에 서 있을 것은 라니엘 자신이 아닌, 라크였어야 했다. 가니칼트의 유일한 제자인 그레이스의 뜻을 이은 그 청년이자 검사여야만 했다.”
“아마도, 나는 당신이 원치 않은 방식으로 당신을 상대하게 될 거야.””
37채의 마탑.”
과거, 재의 여신이 여섯 채의 마탑을 앞세워 가니칼트를 궁지로 몰아넣었듯이 라니엘 또한 그녀와 비슷한 방식을 쓰게 되리라. 물론, 재의 여신이 지닌 마탑과 라니엘이 지닌 마탑은 형태도 크기도 다르기에 전략 역시 달라지겠지만···.”
“내가 검사가 아닌 게 이럴 때는 아쉽네.””
긍지 높은 검사를 상대하는 데 있어, 그리 떳떳한 방식은 아니게 될 것이다. 가니칼트가 바라던 검사와 검사 간의 정당한 대결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 사실을 알기에 라니엘은 쓰게 웃었다.”
“그러니, 나는 당신에게 사과해야만···.””
“상관없다.””
그녀의 말을 가니칼트는 끊어냈다.”
잠시 멈춰 세웠던 검을 그는 다시금 움직였다. 움직인 칼끝이 멈춰선 곳은 라니엘의 목이다.”
“나는 죽음의 칼, 가니칼트.””
용사가 아닌, 재앙.”
“인류를 위협하는 재앙이자, 너희가 넘어야 할 시련이다. 그런 재앙을 상대하는 데 수단의 옳고 그름 따위가 있을 리가.””
죽음의 칼, 가니칼트가 말했다.”
“쓸 수 있는 모든 걸 써도 좋다.””
그것은 언젠가 그가 입에 담았던 이야기다.”
“별빛을 써라. 마법을 써라. 동료의 도움을 받아라. 그 무엇이든 상관없다. 네가 지닌 모든 것을 이 자리에서 쏟아내라. 그리해라. 재앙이란, 무슨 수를 써서든 막아야 하는 존재이니.””
인간의 팔로 검을 움켜쥔 채, 그가 말했다.”
“그 모든 게 네 의지로 행하는 일이라면.””
최초의 용사가 단언했다.”
“그 모든 것은 옳다.””
“···당신 답네.””
더이상 오가는 말은 없다.”
라니엘은 웃음을 갈무리하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정말이지, 저 긍지 높은 검사가 할법한 이야기다. 그녀는 한 손으로는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다른 한 손은 쭉 뻗어 중지와 엄지를 맞댔다.”
점화(Ignite).”
딱, 하고 울려 퍼지는 소리.”
그녀가 손가락을 튕긴 순간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서 튀어 올라야 할 불꽃은 온데간데없다. 그 주문에 반응한 것은 전혀 다른 물체다.”
···점화, 불을 붙이는 주문.”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거대한 불길의 시발점을 만들어내는 주문. 그렇기에, 이 주문은 오랜 세월에 거쳐 마법사들에게 있어 ‘시동’ 혹은 ‘시작’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티디디디디디디디디디딕!”
불길이 타오르지 않음에도 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황야에 울려 퍼졌다. 울려 퍼지는 소리의 발원지는 황야에 우뚝 선 서른 일곱 개의 탑이다. 37개의 탑이 동시에 진동했다. 하나의 불길에 공명했다.”
키이이이이이잉!”
탑이 공명하며 세차게 점멸하기 시작한다. ”
탑에서 터져 나오는 빛에 황야에 드리웠던 그림자가 한순간에 걷혔다. 그리하여 만들어지는 것은, 오직 라니엘 반 트리아스만을 위한 공간이다.”
끼, 기기긱, 끼기기기긱.”
땅에 꽂힌 탑을 중심으로 공간이 비틀린다. 비틀린 공간과 공간이 공명한다. 그렇게 탑이 세워진 일대의 공간은 별빛도, 그늘도, 섭리조차 닿지 않는 완전한 별세상으로 뒤바뀐다. ”
마탑이 시동(始動)했다.”
마탑이 세차게 내뿜는 빛을 바라보며 칼트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틀린 뼈를 우득, 하고 맞추고 포션을 입에 털어 넣으며 칼트가 길게 숨을 뱉었다.”
“후우···.””
37개의 마탑이 드리운 저곳은, 완전히 유리된 공간이다. 일찍이 라니엘에게 저 탑의 정체를 들은 칼트이기에, 저 탑들이 늘어선 공간이 무엇인지 그는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 있었다.”
‘···마법사들의 공방, 그들의 터전, 요새.’”
하운드(Hound)의 교육서에도 적힌 이야기.”
마법사들의 공간에서 결코 그들을 상대하지 말라는 경고와, 자신만의 요새 안에서 그들이 얼마만큼 까다롭고 위험한 상대가 되는지 서술되어있던 페이지를 칼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지금 라니엘이 펼친 것은, 그 페이지에 적혀있던 마법사들의 ‘요새’ 개념을 아득히 초월하는··· 상위의 무언가다.”
오직 진리에 근접한 그녀만이 행할 수 있는 전략. 탑을 중심으로 일대의 공간을 비틀어, 그녀 자신만의 공간으로 만들어낸다. 그 이야기를 함께 듣던 잿빛 마탑주, 레스티는 분명 이렇게 말했었지.”
「신위에 닿았다는 게, 이런 뜻이었군요?」”
그녀는 말했다. 37개의 탑으로 현실에서 격리시킨 그 공간에서, 라니엘은 그야말로 신위에 범접한 마법사가 될 것이라고. 초인의 경지에 오른 레스티조차 그 규모를 상상할 수 없다는 듯 난색을 표했다.”
“하여간.””
칼트는 헛웃음을 흘리며 뚜둑, 하고 몸을 풀었다.”
“마탑 수십 채는 지을 재력이 있으시다는 거, 농담인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그거 진짜였습니까.”
하늘에 닿을 듯이 우뚝 선 37채의 탑을 바라보며 칼트가 혀를 내둘렀다. 그러니까, 여기서 살아남으면 저런 탑 중 하나가 내 것이란 말이지?”
‘반드시 살아남는다, 반드시.’”
간만에 일할 맛이 좀 난다.”
최고의 동기부여는 보상이라 하던가? 과연, 그 말대로다. 칼트가 웃음을 흘리며 땅을 박차고 탑들이 늘어선 공간으로 내달렸다. 챠르륵, 소리를 내며 탑의 바깥으로 튀어나온 사슬을 칼트가 붙잡는 순간 칼트의 몸이 확, 하고 공간의 내부로 빨려 들어갔다.”
* * *”
탑과 탑 사이를 잇는 수천, 수만 갈래의 사슬.”
거미줄처럼 펼쳐진 사슬을 타고 라니엘이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탁, 하는 가벼운 걸음이었지만 그것이 하나, 둘, 셋··· 숫자를 더해갈수록 그것은 걸음이 아닌 질주가 되었다.”
챠르르르륵!”
사슬이 출렁임과 동시에 라니엘의 신형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가속에 가속을 더한 그녀의 움직임은 초인이라 한들 육안으로 쫓기 어려우나···.”
스릉.”
가니칼트가 쥔 한 자루의 검(劍)은, 느릿한 속도로 정확하게 라니엘을 따라 움직였다. 라니엘이 움직일 방향에 가니칼트의 검은 미리 겨누어져 있었다. 크게 사슬이 출렁이며 라니엘이 팔을 휘두른 순간, 가니칼트의 검 또한 휘둘러졌다.”
그러나 언제처럼 울려 퍼졌던 서걱, 하는 고요한 절삭음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 소리를 대신하듯 울려 퍼지는 것은 카가가가캉! 하는 사슬이 끊어지는 소리.”
거미줄처럼 드리운 사슬은 그물이 되어 가니칼트의 검기를 붙들었다. 끊어지고 끊어지더라도 결코 검기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곤 기어코 검기의 방향을 비틀어 땅에 처박았다.”
챠아아아아아악!”
채찍처럼 땅을 할퀸 검기가 흙먼지를 일으키는 가운데, 흙먼지 속에서 빛이 번뜩였다. 빛과 함께 터져 나오는 것은 막대한 양의 마나.”
대격변(Cataclysm).”
재구축(Rebuild).”
중력장(Graviton).”
겹쳐진 상위주문이 지면을 내리쳤다. 땅이 움푹 파이고, 지형이 비틀리며 찍어누르는 중력에 땅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거대한 압력이 가니칼트를 집어삼키나, 가니칼트의 칼날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틱, 티디디디딕.”
칼날이 움직이는 속도가 곧 주문이 찢어지는 속도다. 가니칼트를 에워싼 중력장이 맥없이 사라지고, 요란스레 뒤흔들리던 땅에 칼끝이 닿은 순간 땅은 평평해진다. 뒤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가니칼트가 선 자리만큼은 고요함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 또한 오래가진 않는다.”
키이이이이잉!”
찢어졌다고 생각한 주문이 이어붙여 진다. ”
베여 사라졌을 주문들이 시간이 되감기듯 다시 발현된다. 몇 겹으로 겹쳐진 주문이 쉴새 없이 땅을 뒤흔든다. 쿠구구궁, 소리를 내며 치솟는 지면이 가니칼트의 균형을 무너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