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73
〈 73화 〉 외전, 배교자(1)
* * *
엘프란 종족이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종족.’
세간에선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엘프들의 실상은 조금 다르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기보다는, 자연에게 축복받았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엘프들은 날 때부터 숲의 가호를 받는다.
세계수의 가호를 받음으로써 그들은 아주 예민한 감각과 초인적인 육체를 가지게 된다.
‘말이 안 되긴 해, 그 가호라는 게.’
가호를 받은 육체는 인간의 것과 다르다.
엘프는 보통 사람들보다 눈이 밝다. 다리가 빠르고, 움직임이 날렵하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엘프는 훌륭한 전사의 육체를 가지고 있다.
숲의 가호가 그를 가능케 한다.
타고난 육체가 강하다는 점은 큰 이점이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엘프들은 강한 전사가 되었다.
‘특히, 사수나 척후병 쪽은 엘프 레인저들이 꽉 붙잡고 있었지.’
레미아, 그년도 신궁이니 뭐니 불렸었고.
그 성격이 개차반인걸 둘째치고, 그 실력만 따지고 보면 꽤 출중했다.
엘프, 아무튼 간 엘프.
이야기가 좀 새긴 했는데.
내가 갑자기 왜 엘프들에 대해 이야기하냐면··· 문득 전장에서 엘프들에게 대접받았던 차가 떠오른 탓이었다.
‘엘프 연금술사들이 선물해 줬던 것.’
여러 약초를 배합해서 만들어 줬던 차.
“그걸 뭐라 부르더라.”
나는 중얼거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녹차라 했었나?”
연녹색 빛깔의 물.
녹차라 부르는 그 뜨뜻한 차는 맛이 꽤 괜찮았던 걸로 기억한다.
‘심신이 안정되는 느낌.’
미친년 둘이 날뛰는 것을 제압해두고, 녹차 한잔의 여유를 즐기는 건 썩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엘프들에게 부탁해서 종종 받아오기도 했었고.
“·····.”
그런 옛일을 떠올리며,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내린 시선의 끝에는 한잔의 차가 있다.
‘이게 녹차가 맞···나?’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일단 녹색이긴 하다. 녹색이긴 한데···.
그 빛깔이 어째 쫌 묘했다.
은은한 연녹색이 아니라, 꼭 포션 같은 찐득찐득한 느낌의 진한 녹색이다.
“으음···.”
맛은 다를까 싶어 마셔봤다.
예상한 그대로의 맛이다. 더럽게 맛없었다.
“에벱···.”
나는 차를 그대로 뱉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입안이 텁텁했다. 마른침을 삼키며 난 고개를 들었다.
“야.”
“왜 부르지.”
“너 진짜 엘프 맞아?”
“네 눈에는 이 귀가 안 보이나?”
“아니 씨팔, 엘프들은 차 잘 타지 않아?
자연 친화적인 종족이라며.
숲에서 나고 자랐다며.
게다가 연금술사이기까지 하면 차는 잘 끓여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의문 어린 시선으로 눈앞에 엘프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피식 웃었다.
“선입견이다, 라니엘.”
“아니 씹···.”
“나는 네가 녹차를 타달래서 타줬을 뿐이다. 불평하지 말도록. 더 마실건가?”
나는 말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찻잔을 테이블 한 편으로 밀어놓고선, 주변을 쓱 둘러봤다. 군데군데 먼지가 쌓여있다. 거미줄도 처져 있고, 낡았다는 느낌이 물씬 드는 가게다.
골목길 깊은 곳에 위치한 가게.
사람의 발길이 잘 들지 않는, 후미진 곳에 있는 이 가게까지 내가 찾아온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물어볼 게 있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눈앞의 엘프를 바라봤다.
은발의 엘프, 카르디.
짐승과 같은 누런빛의 눈동자를 가진 엘프.
아는 것 만큼이나 숨기는 것도 많은, 오래된 친구를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가면 네가 엘프는 맞는지 의심스럽다니까.”
“나만큼 엘프다운 엘프도 없을 텐데.”
“숲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 숲의 가호를 타고나 날렵한 전사. 그게 엘프 아냐?”
“편견이다.”
“아니 씹, 네가 엘프다운 엘프라며.”
“네가 말하는 엘프는 재앙 이후의 엘프들이겠지.”
카르디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처럼 수백 년 전의 엘프들은 딱히 숲과 친하지도 않았다. 천년도 채 살지 않은 애송이들을 예시로 들고 와 ‘엘프다움’을 논하자니, 나로서는 웃음만 나올 뿐이군.”
“어 그래···.”
한마디를 안 지는구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천년을 넘게 산 엘프라···.’
그러고 보면 이상하긴 했다.
장수 종인 엘프 중에서도 천 살이 넘어가는 엘프는 찾아보기 힘들었으니까.
‘하나 있었나?’
엘프들의 왕 오르벨이었나.
그 양반이 천살 좀 더 됐던 걸로 기억하는데.
“야, 카르디 너 오르벨 알아?”
“오르벨? 알다마다. 그 애송이가 왕 노릇을 하고 있다지? 시간이 참 많이도 흘렀어.”
···애송이? 그 양반이?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카르디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라니엘.”
툭툭, 그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어 번 두들겼다.
“이번에는 무슨 일로 찾아왔지? 약이 다 떨어지진 않았을 텐데.”
“친구 찾아오는데 이유가 뭐 필요하냐?”
“이유가 있을 때만 찾아오는 놈이 말이 많군.”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고.”
나는 턱을 괸 채 말을 이었다.
“그냥, 뭣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카르디가 말 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들어보도록 하지.”
“음··· 일단, 그때 지하수로에서 발견했던 거 있지? 그걸 깔아둔 놈을 때려잡고 왔거든?”
“스케발을 말하는 건가?”
“그래, 그 해골 바가지를 때려잡으면서 몇 가지를 좀 알게 됐는데···.”
나는 두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스케발이 내게 걸린 저주를 ‘그늘’이라고 불렀어. 그늘의 유충이라고 부르더라. 그리고 말야.”
짝, 하고 박수를 친다.
맞붙였던 손바닥을 천천히 때자, 손바닥과 손바닥 사이로 잿빛 마나가 꾸물거렸다.
저주의 마나.
마왕의 저주를 상대하기 위해 고안해낸 것.
나는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걸 보고, 죽음의 칼이 쓰는 거라더라. 그늘의 영지에 든 이들이 쓸 수 있는 거라고.”
그늘.
“도대체, 그늘이란 게 뭐냐? 맥락상으로는 저주를 가리키는 것 같긴 한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만은 아닌 것 같거든. 그리고, 너라면 왠지 알고 있을 것 같더라고.”
가늘게 뜬 눈으로 카르디를 바라봤다.
그가 한숨을 쉬며 답했다.
“···알고는 있지.”
“이번엔 알려 줄 거냐?”
“내가 알려주고 싶다 하여, 전부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별이 허락하는지를 보아야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다. 내게 걸린 제약이 한둘이 아니라서.”
카르디는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진열장에 늘어진 술병과 술잔을 꺼내 왔다.
“술, 좋아하나?”
“···갑자기 웬 술?”
“네가 물은 것에 답하기 전에, 나도 네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리고, 내 경험상 이런 이야기는 술과 함께하는 편이 좋더군.”
그가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흑룡 벨리알을 죽였다고 들었다.”
“죽였지. 뒤지게 안 죽어서 고생하긴 했지만.”
“흑룡 말고도 다른 재앙들을 만난 적이 있나?”
“야, 카르디.”
나는 쓰게 웃었다.
“최전선에서만 5년이야. 전부 만나봤지. 죽음의 칼은 두세 번밖에 못 만나 봤지만 말야.”
“용케도 살아남았군.”
“몇 번이고 죽을 뻔하긴 했지.”
카르디가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른다.
한 잔은 내게, 다른 한잔을 자신의 앞에 놓는다.
“그럼 말이다.”
카르디가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나?”
“못할 건 없지. 누구부터 말해줄까?”
“글레리아.”
“···뭐?”
“순교자, 글레리아 벨 아르미아스.”
“배교자, 글레투스를 말하는 거야?”
은발의 엘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를 흘겨봤다.
‘···순교자 라고?’
재앙을 상대하기 위해 그 기록을 전부 살펴봤지만··· 순교자, 글레리아란 이름은 오늘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궁금하긴 하지만···어차피 물어봐도 대답해주진 않겠지.’
나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래, 뭐. 배교자 글레투스.”
미친 연금술사.
악몽과도 같은 소환사.
그 미치광이와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려 본다.
“그 미친년하고 처음 만난 건, 아마 흑룡을 토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거야.”
검은 폭풍, 흑룡 벨리알을 토벌한 직후.
우리 파티의 명성이 한껏 드높아져 있을 때, 우리는 한 작전에 참여하게 됐다.
“로디멜 요새 탈환 작전.”
대실패로 마무리된 작전이다.
그 작전을 떠올리며, 나는 입을 열었다.
“그 요새에서, 우리는 배교자 글레투스를 만났어.”
2.
로디멜이란 이름이 붙은 요새가 있다.
옛 검의 초인의 이름을 따 만든 요새는 서부 전선의 검은 평야와 맞닿아 있다.
검은 평야, 마계의 초입.
그곳에서 진군을 시작하는 마왕군을 사전에 확인하고, 보고하는 것이 로디멜 요새의 역할이다.
최전선의 망루.
기사단의 눈.
그리 불리는 로디멜 요새는 전략적 요충지다. 그렇기에 로디멜 요새에는 수많은 기사가 주둔한다. 그들 하나하나가 숱한 전장을 넘어선 베테랑 중의 베테랑들이다.
그들이 지키는 로디멜 요새는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잘못 들었나.”
그렇기에.
“···로디멜이 함락당했다고?”
기사단장, 하인켈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 하룻밤 사이에 모든 전보가 끊겼습니다. 지금은··· 접근하는 것조차 힘든 상황입니다.”
하룻밤.
고작 하룻밤 만에 로디멜 요새가 함락당했다. 그 어떠한 전보도 받지 못했다. 전보를 칠 틈도 없이 함락당했단 소리다.
‘···그게 말이 되는가?’
하인켈은 이마를 짚었다.
두통이 몰려오는 느낌이다.
“아무런 전보도 없었다고?”
“···그것이, 딱 한 통 있었습니다.”
기사가 편지지를 꺼낸다.
편지와 편지를 잇는 마나가 끊어져 있다. 이건 그것이 끊어지려는 찰나 급하게 휘갈긴듯한 편지다.
침입자는 하나, 배교자 글···.
편지는 거기서 끊어졌다.
그리 많은 기사들이 주둔 중인 요새이거늘, 서신 하나 완성하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말이 되는군.’
우습게도, 그곳에 끊긴 이름을 보는 순간 하인켈은 이 상황을 이해하고 말았다.
“배교자, 글레투스.”
전선에 나타난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나, 나타날 때마다 막대한 피해를 입힌 재앙.
“그 소환사가, 로디멜 요새를 집어삼켰단 말이지.”
하인켈이 눈을 감는다.
로디멜 요새는 서부전선을 지키는 벽이다. 그 벽이 무너지게 두어선 안 된다.
‘이쪽이 부릴 수 있는 전력으로, 재앙을 상대할 수 있는가?’
평범한 기사들로는 안된다.
재앙은 상식을 벗어난 존재들이다.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 한들, 재앙을 상대할 수는 없다.
결국, 답은 정해져 있다.
“그들을 불러라.”
하인켈은 짧게 명령했다.
“재앙을 상대할 수 있는 건, 그들 뿐일 테니까.”
기사단이 가진 최고의 전력.
수백 년간 동부의 재앙으로 군림하던 흑룡의 목을 베어낸 그들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신궁, 레미아.
성녀, 사라.
현자, 라니엘 반 트리아스.
그리고.
용사, 카일 토벤.
“용사를 소집해라.”
상식에 벗어난 존재를 상대하기 위해선, 이쪽도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이들을 내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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